복 음 : 요한 10, 31-42 언제부터인가 우리 사회 일각에서 벌어지는 재미난 일 중에 하나가 바로 '원조논쟁' 이라고 하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예를 들어서, 경남 충무나 통영은 여러분들도 잘 아시다시피 '충무김밥'으로 유명한 곳입니다. 저 개인적으로는 충무김밥을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꼬마김밥과 어우러진 무김치와 오징어무침의 조화 속에 많은 사람들이 식사대용으로 즐겨찾는 음식으로 알고 있습니다. 지금도 부산극장 근처에 있었던 유명한 충무김밥집이 아직도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데 요사이 들어서, 충무에 가면 길가에 늘어 선 모든 충무김밥집의 간판에 '원조'(元祖)라는 수식어가 들어가 있답니다. 그러니 잠깐 그곳을 지나가다 식사를 하려는 사람은 어느 집이 진짜 원조집인지를 알 수가 없다는 웃기지도 않는 방송기사를 본 적이 있습니다. 그러니 요즘은 원조니 뭐니 특별한 수식어가 덧붙여져 있는 간판을 보면 오히려 그 식당에 들어가기가 망설여집니다.
오늘 유다인들이 예수님께서 한낱 사람에 불과하면서도 하느님 행세를 했다는 이유(요한 10,33)로 돌을 집어 던지려고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좋은 일들을 많이 보여주셨음(요한 10,32)에도 불구하고 말입니다. 여기에서 좋은 일이란 '기적'이라는 말마디로도 바꿀 수 있겠습니다. 소위 '원조기적들'을 많이 보여주셨는데도 그들은 그것을 하느님을 모독한 것으로 알아들었습니다.
왜 이런 일이 벌어져야만 했을까요? 그것은 유다인들이 기적만을 보고 그 기적을 이루신 분이 누구 신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다는 데서 이유를 찾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들은 눈이 있어도 보지를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제 눈에 안경이라고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사람에게 실체나 실상은 늘상 감추어지게 마련인가 봅니다.
저희 웅상성당 위에는 커다란 예수성심상이 있습니다. 물론 브라질의 리오 데 자네이로에 있는 엄청난 크기는 아닙니다만, 두 팔을 펼치셔서 사람들을 품에 안으시려는 모습의 그 상을 여러분들도 잘 아실 겁니다. 제가 부임한 지 얼마 안되서 사람들이 저에게 청한 것이 있습니다. 그 청이 무엇인고 하니 예수성심상에 불을 켤 수 있게 만들어졌으니 먼발치에서도 볼 수 있도록 전기세가 좀 들더라도 매일 불을 켰으면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불을 켜놓게 지시를 내렸습니다. 그리고 오래 지나지 않아서, 외출을 하고 돌아오는 길에 마을 초입에서부터 그 예수성심상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성당으로 걸어들어 왔습니다. 그 때 불현 듯 뇌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진짜 저 상이 주는 의미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예수께서 저렇게 팔을 펼쳐서 우리를 초대하시는 그 의미가 어떤 것인지나 알고 불을 켜라고 한 것일까? 저에게 청을 한 분들은 예수님께서 마시고자 하시는 잔을 함께 마실 준비가 되어 있다는 말일까? 아니면 어떤 제자의 어머니처럼 아들 하나는 예수님의 왼 편에, 또 다른 하나는 예수님의 오늘 편에 앉히려고 하는 것일까?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요한 10,37). 과연 아버지의 일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자신을 불살라 사람들을 살리는 것이 아닙니까? 가짜 원조들은 많으나, 진짜 원조는 언제나 하나라는 단순한 논리와 그 원조는 자신을 원조라 주장하지 않아도 원조임을 알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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