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03.14 /[묵상] 새벽 두 시의 술고문 [김영진 신부님]

2007. 3. 15. 오전 11:37:44

글자

 

 

술고문을 당해 본 신부가 어찌 나 하나뿐이겠는가.

 

''

''의 대명사를 남긴 물고문 같은 살인고문이 아니라...

 

"신부님, 안 드시면 말 안 할라요!" 하는

 

어린애 같은 애교의 고문쯤을 당해 보지 않은 신부가 어디 있을까?

 

. . 병반으로 나뉘어 3교대를 하는 탄광촌인지라

새벽녘에 찾아와 한 잔 하자고 졸라대는 것은

아무리 술을 좋아하는 사람이라도 술고문이라는 생각을

안할 수가 없다.

 

부임하고 며칠 안 된 어느 날이다.

강아지가 요란하게 짖어 대고 초인종이 쉴새 없이 울리면서

 

"신부님! 신부님!"

 

하는 고함소리에 곤한 잠을 깼다.

일어나 보니 새벽 2시였다.

 

웬일일까?

병자성사를 급히 원하나?

몸을 비틀며 일어나 나가 보니...

 

비를 흠뻑 맞은 작업복을 입고 아주 기분이 좋아 보이는 젊은이가

손에는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리는 커다란 소주병을 들고 연신 허리를

굽신거린다.

 

"신부님, 죄송합니다.

 신부님하고 이야기 좀 하고 싶어 왔습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나 싶었다.

 

"여보세요, 지금 도대체 몇 시인데 그러세요?

 그것도 별써 술에 취해서요?

 신부는 잠도 안 자고 사는 줄 아십니까!"

 

"신부님, 저는 지금 퇴근하고 빨리 오느라고 왔습니다."

 

그 순간,

 

'아하, 이사람은 오후 2시에 출근해서 새벽 1시경에 퇴근하는

'' 근무자로구나!' 라는 생각이 퍼뜩 떠올랐다.

 

산소가 부족한 지하 수천 미터 갱 속에서 힘든 노동을 하고 나오면

피곤도 풀 겸 '오늘도 살았구나!' 하는 안도감에서

습관적으로 한 잔씩 하고 귀가하는 광부들.

 

내일 지구의 멸망이 오더라도 나는 오늘 한 잔의 술을 마시겠노라

하며 호탕하고 걸직한 막걸리 웃음을 지닌 낭만을 아는 사나이들!

 

그 사나이 중에 하나가 퇴근 후 지금 내 앞에 와 있다.

그를 내치지 말아야 한다.

우는 이와 함께 울고,

웃는 이와 함께 웃을 수 있는 것이...

얄팍하나마 사제의 양심이 아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느님!

 오늘도 지하 수천 미터 굴 속에서 자신의 폐를 팔아

 생존을 위한 전쟁을 하는 저 광부들을 지켜주시여 보호 하시며...’

 

그날, 날이 새도록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 통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가 나를 흔들어 깨우기에 눈을 떠보니 날이 밝아 있었다.

술잔을 주거니 받거니 하다가 둘 다 잠이 들어버렸다는 것만

어렴풋이 기억이 날 뿐이었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또 내가 무슨 말을 해 주었는지 모르지만, 그가 떠나면서

 

"신부님, 감사합니다. 미안합니다."

 

중얼거리던 기억밖엔 없다.

새벽부터 술에 취해 한나절을 자고 일어나 생각을 해도

잘한 일인지 잘못한 일인지 판단을 못내리면서도...

 

다만 이것이 탄광촌 신부가 된 죄(?)로 받아야 할 술고문이라면,

오늘밤도 돌려보내지 않겠노라는 오기와 자존심이...

 

그 숱한 밤에

나를 지탱해 주고 있음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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