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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해의 강론을 그대로 옮겼습니다.) 예수님의 치유 기적 이야기들을 관계적 측면에서 바라본다면 모두가 예수님과 치유 받을 병자 혹은 병자를 대신하여 예수님을 만나러 온 사람과 개인적인 만남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제 복음에서 본 시리아 페니키아 여인의 경우가 여인이 자신의 마귀 들린 딸의 치유를 부탁하기 위해 예수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가졌다면, 오늘 복음에서는 귀먹고 말더듬는 병자가 예수님과 개인적인 만남을 갖고 있습니다.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만나는 방식입니다. 그분은 우리 각자와 개별적 만남을 통해 한 사람 한 사람, 우리 각자에게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살펴보시어 그 필요성에 따라 당신을 내어주십니다. 오늘 복음에서는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병자를 치유하는 장면이 나타나는데, 여기에서 예수님은 그를 개인적으로 만나는 것뿐만 아니라 그를 사람들 틈 속에서 데리고 나와 더욱 특별한 만남을 만들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의 병이 사람들 틈 속에서 말을 듣지 못하는 것이었고, 사람들 틈 속에서 말을 하지 못하는 것이었으니까요. 사람들 틈에 있으면서도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때는 언제일까요? 여기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는 고집 세고 자기중심적이어서 자기 말만 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기에, 다른 사람들 역시 그가 어떤 말을 해도 듣는 둥 마는 둥함으로써 그가 말하는 것이 아무 소용이 없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그는 사람들 틈에 섞여 있다 해도 마음의 교류가 이루지지 않기에 사람들은 그를 멀리하고 그와 대화하기 싫어하게 됩니다. 그는 그래서 귀멀고 말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사람들로부터 소외당합니다. 다른 하나는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그저 다른 사람들의 말만 듣고 따라가기에 그가 말하는 것도 결국 그의 마음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말을 반복하는 경우입니다. 이런 경우 그는 사람들 틈 속에 있을 때나 홀로 있을 때나 늘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알지 못하기에 자기 생각도 없고, 자기 주장도 없어서 사람들이 하라는 대로 이리 휩쓸리고 저리 휩쓸립니다. 그는 자신의 내면에 대해 귀멀어서 자신의 영혼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맙니다. 아마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이 군중 속에서 따로 데려 내오는 병자는 두 번째 경우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그 어떤 경우라도 주님의 치유 방식은 놀랍습니다. 그분은 귀멀고 말못하는 병자를 사람들 틈 속에서 데려 내와 따로 세우십니다. 왜냐하면 병자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자신의 내면을 올바로 바라보는 것이기 때문이죠. 사람들 틈에서 자기 말만 늘어놓거나 남의 말만 따라 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먼저 그에게 자기 자신이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알게 하십니다. 귀를 막고 듣지도 않으며, 입을 닫고 무관심하게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은 우리에게 당신을 만나는 방법과 다른 사람을 만나는 방법에 대해 보여주십니다. 그것은 상대에게 다가가 마음으로 이야기하며 마음으로 듣는 것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우리를 개별적으로 만나시며 당신의 소중한 한 사람으로 만나주시듯 우리도 다른 이를 그렇게 귀하고 소중하게 만나야함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또한 주님은 마음을 나누는 만남을 통해 이루어가고자 하는 것이 개인적 안락이나 위안이 아니라 사랑의 나눔이어야 한다고 가르치십니다. 즉, 우리의 입을 열어 당신의 침을 발라 주시는 것처럼 말속에 담긴 따스한 사랑의 마음이 또한 그렇게 전달되어야 함을 보여주십니다. 예수님은 그처럼 우리를 소중한 하나의 존재로서 만나십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당신이 우리에게 보내신 사람들을 당신처럼 소중하게 만나길 원하십니다. 그럴 때 우리는 비로소 하느님을 향해 영혼이 열릴 것입니다. “주님, 제 마음을 열어주시어, 가까운 제 형제자매에게 당신의 사랑을 말하게 하소서. 아멘.” |
그를 따로 데리고 나가셔서 - 이회진 신부님 /2007.02.09
2007. 2. 10. 오전 11:29: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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