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해 연중 제 4 주간 월요일.
2007. 1. 29.
토평동.
히브 11, 32-40.
마르 5, 1-20.
오늘의 말씀은 짧게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습니다. 그래서 더러운 영이 들린 한 사람을 바라봅니다. 더러운 영이라 표현했지만, 그 한 사람으로 본다면 그 인생에 쓰여진 것 때문에 얼마나 심한 고통을 받았을까요? 사람들은 그를 이해하기보다 그를 묶어둘 생각 쪽으로 몰라갔겠죠. 아니 노력을 했겠지만, 그의 근본적인 아픔을 나눌 생각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를 바라봅니다. 그리고 그 안에 있는 더러운 영, 즉 그를 괴롭히는 세력을 봅니다. 그리고 그 근본적인 문제와 대결하며 그것을 없애 주십니다. 이것은 진정 그를 사랑하는 마음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 사람을 사랑하고, 그 안에 든 문제와는 싸우는 그분의 사랑. 우리는 내 안에서 나를 괴롭히는 그 문제들을 주님 앞에 내놓을 수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과 함께 싸워야 합니다.
이 사람의 병, 이 사람을 괴롭히던 더러운 영의 공격은 어둠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것이었습니다. 자기 자신을 찢는 것이었고, 자신에 대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습니다. 일종의 자폐증으로 자신을 몰아가는 모습. 그것이 바로 더러운 영의 계략이었습니다.(마르 5, 5) 그리고 사람들은 자신에게도 그런 일이 닥칠까봐 두렵습니다. 그래서 분리를 택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를 치유한 예수님을 보고서도 예수님을 자신들에게서 분리시키려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철저히 사람을 살리고자 하십니다. 사람은 당신께로 모아들여야 하는 존재입니다. 더러운 영은 몰아내고 당신의 모상인 사람은 모아들여야 하는 것이 당신의 사명입니다. 그것이 당신의 사랑입니다. 그리고 몰아내십니다. 예수님은 지금도 저희에게 말씀하시는 듯합니다. 아픈 자여! 오라. 절망하지 말고, 속으로 움츠려들지 말고 나에게 오라.
“아프지 않으면 하지 못할 기도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믿지 못할 기적이 있다. 아프지 않으면 접근하지 못할 성소가 있다. 아프지 않으면 우러러보지 못할 성안이 있다. 아, 아프지 않으면 나는 인간일 수도 없다.”
폐결핵과 척추 카리에스의 발병으로 오랜 시간 투병생활을 해야 했던 소설 「빙점」의 작가 미우라 아야꼬의 말입니다. 병을 앓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기도로 희망하며, 주 예수그리스도를 전하기 위해 애썼던 그는 고통 속에서도 희망할 줄 아는 진정 그리스도인이었습니다. “절망이라는 죄는 신이 용서하지 않는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인의 사전에는 절망이란 단어가 없습니다. 그것을 알고 있는 미우라 아야꼬는 희망 속에 오히려 다른 이들을 전도하려 애썼습니다. 그 안에 있는 예수께서는 이미 그를 치유했던 것입니다.
“소설 쓰는 것을 통해 전도하고 싶다. 입선되지 않아도 심사하는 선생님들은 읽어 주실 것이니, 그 선생님들에게 만이라도 전도가 된다고 생각했다.”
미우라 아야꼬가 소설 「빙점」으로 1964년 일본 아사히신문 창립 85주년 기념 1천만 엔 소설 공모에서 응모작 731편 중 쟁쟁한 문인들의 작품을 물리치고 1등으로 당선된 후 밝힌 당선 소감입니다.
“집으로 가족에게 돌아가, 주님께서 너에게 해 주신 일과 자비를 베풀어주신 일을 모두 알려라.”(마르 5, 19)
사람들은 외적으로 나은 것만 보겠지만, 진정 예수께 치유를 받은 이는 그의 영적 건강함으로 통해 주님의 권능을 전할 것입니다. 그 누구라도 그리스도를 알릴 수 있다면, 자신의 삶을 바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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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분들의 묵상을 위해 작년에 했던 강론도 덧붙입니다.
주님을 따르는 영성의 삶을 살면서도 주님을 제대로 따르지 못하는 나를 발견합니다. 그러면서 이러지 말아야지 하는데, 막상 눈은 그분을 보고 있어도 삶은 그렇지 않은 때가 있습니다. 지금의 삶이 너무나 익숙해서 지금처럼 사는 것이 주님의 뜻이기를 바랄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면 ‘바로 내 안에서 성령(거룩한 영)과 더러운 영의 싸움이 일어나고 있구나’라고 여기면 됩니다. 그런데 과연 나는 누구의 편을 들어주고 있을까?
오늘 복음에서 더러운 영이 말합니다.
“지극히 높으신 하느님의 아들 예수님, 당신이 저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하느님의 이름으로 말합니다.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마르 5, 7)
애초에 더러운 영은 주님과 싸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극한의 40일 단식 기간 동안 예수와의 기싸움에서 안 된다는 것을 체험한 더러운 영은 정면 돌파를 삼가는데, 그 다음 방법으로 선택한 것이 바로 오늘의 방법입니다. 예수님 앞에서는 게임이 되지 않기에 돼지 속에 들어가 물에 빠질 수밖에 없지만, 오늘날 여전히 더러운 영은 이 방법을 쓰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이름으로! 자신의 처지를 잘 알고 있는 더러운 영은 절망 속에서 예수님과 타협합니다. 하느님의 권능을 인정하니 제발 나를 가만히 있게 해달라고! 이게 무슨 말입니까? 당신을 알고 믿음을 고백하니 지금처럼 살게 해달라는 것이죠. 앞의 고백을 생각하면 그럴싸한 고백이지만, 결국 안다는 것으로 그치고, 큰 소리로 고백하는 것으로 그치는 삶을 산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께서는 그 더러운 영에게 명령하십니다.
“더러운 영아,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5, 8)
그럴싸한 속임수에 넘어가지 않는 모습을 보여주셨는데, 우리 역시 그 믿음 속에 머물러야 합니다.
‘괜찮아, 주일 미사만 참례하면 돼. 그리고 너 살고 싶은 대로 살아.’ ‘내 뜻이 아버지의 뜻이 되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 ‘당신은 지극히 높으신 분이십니다. 그러나 저와는 상관이 없습니다. 저는 세상을 살아가는데 적응하기도 힘듭니다. 그러니 저를 괴롭히지 말아 주십시오.’
이런 갖가지 더러운 영의 속삭임에서 빠져 나와야 합니다. 예수님처럼 나에게서 나가라고 명령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들의 수효는 너무 많기에 우리가 당해낼 수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수효가 아무리 많다 해도 예수님만은 이길 수 없습니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 이름으로 명령해야 합니다. 예수 이름만이 승리의 이름입니다.
더러운 영보다 부지런해야 합니다. 게을러서는 주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 복음을 보십시오. 그들은 이미 멀리서 예수님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달려옵니다. 어기적거리는 것이 아니라 잽싸게 행동합니다.(마르 5, 6) 그리고 그분 앞에 엎드립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다른 길을 걷는 분이고 자신들의 길을 방해하는 분이시지만, 그분의 권능을 인정하고 엎드릴 줄 아는 것입니다. 더러운 영은 그분을 볼 줄 아는데, 마을 사람들은 그분을 몰라보고 떠나달라는 것이 대비됩니다. 아이러니죠. 늘 우리보다 한 발 앞서는 더러운 영을 이기려면 그분을 만나는 데에 좀더 부지런해야 하고, 더 좋은 일은 그분에게서 아예 떠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승리합니다. 아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