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바오로의 고백[류해욱신부님]

2007. 1. 28. 오전 9:08:58

글자

바오로의 고백


  오늘은 성 바오로 사도의 개종 축일입니다. 저에게는 개종이라고 하니까 조금 생소하게 들립니다. 유대교에서 그리스도교로 개종했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였겠습니다마는 일반적으로 ‘바오로의 회심’이라고 표현하지요. 우리는 바오로가 극적인 회심을 한 대표적인 인물로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가 회심을 통해서 초대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이 된 것은 사실이지요. 바울로가 없는 초대 교회는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그가 없었다면 그리스도교는 꽤 오랫동안 유대인들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못했을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절반 이상의 내용이 사도 바오로의 행적에 대한 기록이지요. 또한, 그의 아름다운 서간문들을 읽다보면 그의 놀라운 신앙과 열정에 매료되고 그의 인간미에 빠져들게 됩니다.

  그런데, 사도 바오로는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오늘 우리가 제 1 독서로 듣는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서의 바울로의 회심은 너무나 유명한 이야기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바오로는 그 회심 이후에 즉시 완전히 그리스도의 열렬한 사도요, 놀라운 서간문을 남긴 성인이 된 것으로 착각하기 쉽습니다. 성서 묵상 시리즈를 펴낸 유명한 예수회원 추기경 마르티니는 그의 저서 [바오로의 고백]에서 진정한 회심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며 한 번의 회심으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라 회심이 요구하는 고통과 시련의 시간이 있기 마련이며 바오로도 회심 이후에 끊임없이 정화되어야 했다는 것을 아주 잘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간략하게 마르티니 추기경의 해설을 요약하면서 묵상 안에서 바오로가 들려주는 체험이 담긴 고백을 들어보라는 추기경의 초대에 응답하고 싶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야기는 제가 수도자와 사제로 살아온 바로 제 이야기이며 또한 일반적으로 신앙인으로서 모두가 겪어야 하는 우리들의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잘 알다시피 사울은 원래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사람이었지요. 그런데 그가 바로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러 다마스쿠스로 가는 길에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갑자기 하늘에서 큰 빛이 번쩍이며 자기의 둘레를 비추자 땅에 엎드립니다. 그리고 소리를 듣습니다.

  “사울아, 사울아, 왜 나를 박해하느냐?”

  사울이 ‘주님, 주님은 누구십니까?’ 라고 묻자, 그분이 대답하십니다.

  “나는 네가 박해하는 나자렛 사람 예수다.”

  사울이 박해한 사람이 예수였습니까? 아니지요. 그리스도인들이었지요.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왜 나를 박해하느냐고 묻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박해를 받는 그리스도인들과 자신을 완전히 동일시하셨습니다. 나중에 바오로가 표현한대로 그리스도인들이 바로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한 몸이니 서로 분리할 수 없는 완전히 하나이지요.

  하나니아스에 의해 멀었던 눈을 뜨게 된 사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사도인 바오로가 되어 그리스도를 열렬히 증언하며 자기의 혼신의 힘을 다 쏟아 전교를 합니다. 다마스쿠스에서 전교하다가 유다인들이 죽이려 하자 사람들이 바구니에 담아 성문 밖으로 달아 내려보내 목숨을 구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예루살렘에 올라와 신도들의 모임에 끼어보려고 했지만 신도들이 사울이 개종한 것을 믿지 않고 무서워하며 상대해 주지 않습니다. 원로의 한 사람이었던 바르나바의 중재로 겨우 사도들에게 받아들여진 후에야 전교활동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곧 말썽이 생기고 결국 고향인 다르소로 가게 됩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사울을 다르소로 보내고 교회가 안정을 얻게 되었다는 내용이 있습니다.  바울로는 회심 이후에 여러 곳을 다니며 열정적으로 그리스도를 전하였지요. 그런데, 가는 곳마다 그 열정이 오히려 문제를 일으키지요. 초대 교회 공동체의 원로들은 바르나바의 중재로 바오로를 받아들였지만 바오로의 존재가 못내 불편했고 더 큰 문제를 일으킬지도 모르는 불안감 때문에 결국 좋은 말로 그 동안 고생 많았고 이제 좀 쉬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겠다며 고향으로 보낸 것입니다. 사도행전의 내용은 말썽과 문제를 일으키던 인물을 쫓아버렸기 때문에 교회가 안정을 얻게 되었다는 의미이지요.

  바오로는 바르나바가 찾아가서 다시 불러 줄 때까지 거의 7-8년의 세월을 고향 다르소에서 묻혀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은 실제로 바오로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라는 물음을 던지며 이렇게 말합니다.

  “다마스쿠스 와 예루살렘을 떠나 고향으로 돌아온 바오로는 깊은 고독과 번민의 때를 가져야 했을 것이다.”

  다마스쿠스 사건 이후의 바오로의 10년을 이렇게 표현할 수 있다고 합니다. 다마스쿠스에서의 불안, 예루살렘의 몰이해, 그리고 다르소에서의 심한 고독과 번민의 시간들이었다고. 그리고 물음을 던집니다.

  “이 기간 동안 바오로가 겪어야 했던 오해와 반대, 누구 하나 변호해 주는 이 없이 소외되고 인정받을 수 없었던 일들이 모두 주위의 탓이었을까?”

  세상의 일들이 대개 그러하듯이 여기에도 양쪽의 잘못이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가 바오로와 같은 열정적인 사람이 행하는 행동을 받아들이지 못한 점이 잇을 것이지만, 한편 바오로에게도 책임이 있었을 것이라고 합니다.

  사람들은 변화를 체험하는 순간, 모든 것이 순수한 빛 속에서 새롭게 빛나는 것을 느낍니다. 그러나 아무리 완전한 회심을 체험하고 자신이 변화되었다고 느낀다고 하더라도 그 사람이 지니고 있는 타고 난 성격이나 기질마저 하루 아침에 바뀌는 것은 아니지요. 열렬한 박해자였던 사울이 이제는 온 열정을 쏟으며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그런데 실은 바오로가 한 것은 자신의 정열을 이제는 장소와 목적만을 바꾼 사명에 다 쏟으며 자신이 모든 것을 다 해내는 듯한 착각에 빠진 것입니다. 열정을 지녔을 뿐만 아니라 당대의 대석학이었던 가므리엘 선생에게서 배운 뛰어난 언변과 학식을 지닌 바오로는 자기가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전혀 달랐습니다.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사도들이 자기를 알아주기는커녕 쫓아냈습니다.

  그런데, 바오로에게 이 고향으로의 유배에서의 고독과 번민을 겪어야 했던 어둠의 시간이야말로 바로 주님께서 마련하신 카이로스, 은총의 시기였습니다. 그에게 깊은 고독과 번민을 통해 첫 회심을 깊이고 정화시키는 은총의 시기가 필요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바울로에게 첫 회심 이후의 10년은 지나친 과시와 열정이 넘치는 선교 활동 때문에 쫓겨나서 고독과 침묵과 소외 속에서 철저하게 자기 자신이 깨어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긴 회심의 시간이었습니다.

  마르티니 추기경이 물음을 던집니다. 바울로가 오랜만에 돌아온 고향 다르소에서 해가 저무는 강가를 홀로 거닐면서 다마스쿠스의 사건을 사기할 때 어떤 느낌을 지녔을까? 공동체에서 소외당한 고독의 시련을 겪으면서 자기에게 일어났던 사건들을 회고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마르티니 추기경은 바울로에게 자신의 체험을 이야기하게 한다면 우선은 분노를 터뜨릴 것이라고 합니다. 자기의 넘치는 열정과 헌신을 악한 소행으로 보답한 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자기를 골칫거리로 여겼던 교회 공동체와 형제라는 이름뿐이었던 그들에게 내가 왜 힘과 정열을 쏟아 부었던가 하는 울분이라고 합니다. 마음속에 맺힌 원한은 하느님에게까지 의문의 화살을 돌렸을 것이라고요. 나를 부르신 그리스도는 왜 아무 전망도 보이지 않는 다르소의 초라한 일터에서 파묻혀 지내도록 내버려두시는가? 나에 대한 그리스도의 말씀은 다 헛된 꿈이었는가? 

  그런데, 처음에 울분을 터트렸던 바울로는 시련의 시기를 겪으면서 자기의 잘못을 인정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열렬한 박해자였던 사울이 온 정열을 쏟아 그리스도를 전했지요. 말씀드린 대로 바오로는 자신의 열정을 이제는 유대교 대신 그리스도교라는 장소와 목적만을 바꾼 사명에 다 쏟으며 자신이 모든 일을 다 해내는 듯한 착각에 빠졌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바오로에게 주님은 꼭 필요한 정화의 시련을 허락하신 것이지요. 참된 회심은 하느님께서 자신을 새롭게 창조해 주시고 모든 것을 주님을 통해서 보도록 해 주셨음을 깨닫는 것이지요. 이 깨달음을 자신 안에 깊이 받아들이고 통합하기 위해서는 서서히 정화되는 고독과 번민의 시간이 필요한 것이지요.

  바울로는 이 어려운 때를 지내야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련의 시기야말로 모든 성인들이 겪어야 했던 여정이라고 합니다. 어떤 사도도 어떤 성인도 이 내적 고뇌의 체험에서 벗어날 수는 없는 것이라고 합니다. 놀랍게도 그것이 하느님의 은총입니다. 사람들은 고독과 번민으로 속속들이 젖어들어 마음의 아픔을 겪으면서 깊은 숙고의 때를 갖게 된다고 합니다. 이 숙고 가운데서 사람들은 절망의 검은 장막 틈새를 비집고 비쳐오는 가냘픈 빛줄기를 발견하게 되지요.

  성서를 수없이 읽고 묵상했을 바울로는 욥처럼 위안과 해방과 평화를 가져다주시는 하느님의 말씀으로 치유되었음에 틀림없습니다. 바울로는 마음 깊이에서 우러나오는 하느님의 음성에 귀를 기울이고 비추임 받아 다마스쿠스의 만남에서 체험했던 그 밝은 계시의 빛 속으로 다시 한번 들어가면서 새롭게 변모되어 갔던 것입니다. 바오로는 자기가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대로 일이 되어가고 자기가 그 일을 한다고 생각했지만 실은 온전히 주도권을 지니고 계신 분은 주님이시라는 체험을 처절하게 한 것입니다.

  후에 바오로는 이렇게 말하지요.

  “아폴로나 나나 다같이 여러분을 믿음으로 인도한 일꾼에 불과하며 주님께서 우리에게 각각 맡겨 주신 일을 했을 따름입니다. 나는 씨를 심었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자라게 하시는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고통스러운 체험을 통해 바오로는 비로소 하느님이 주인이시고 자기는 다만 주인이 쓰시는 도구일 따름이라는 것을 인식하면서 참으로 위대한 일을 하게 될 사도로 성장합니다. 


  여러분, 바울로의 긴 고독과 번민의 여정을 들으며 어떤 느낌이 드십니까? 위로가 되십니까? 저에게는 참으로 커다란 위로가 됩니다. 저로서는 열정과 연민으로 헌신했던 사도직에서 결과로 돌아온 것은 사람들에게서의 배신과 공동체로부터의 몰이해였고 결국 자신을 다 쏟아 부어서 몰두했던 그것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던 사람이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되지요. 마르티니 추기경은 우리는 아무도 상처 입지 않는 사람이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자비로운 계획에 눈을 떠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에 시련을 겪게 하신다는 말씀은 전적으로 맞습니다.

  고독과 번민의 때, 시련과 어려움의 시기를 보내시고 있는 분이 있다면 지금이 은총의 시간임을 잊지 않으시기 바랍니다. 우리에게는 일회적인 회심이 아니라 끊임없는 정화의 시간이 필요한 것입니다. 쨍하고 해뜰 날 돌아오듯이 어두움의 틈새를 비집고 빛이 비쳐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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