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신 있는 삶을 위하여
오늘 성경 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왜 단식하지 않느냐’는 질문에, 혼인잔치의 손님은 신랑과 함께 있는 동안에는 단식할 수 없다고 대답하십니다. 그리고 곧 이어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한다는 말씀을 들려주십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요즘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 참 안타까울 때가 많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자신의 생각과 소신대로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세상의 흐름에 휩쓸려 간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한 가지 예를 들면, 옷이나 신발은 몸에 잘 맞아야 하는데 얼마 전까지 우리 중고등학생들이 입고 다니던 옷과 신발은 상식적으로는 너무 받아들이기 어려웠습니다. 지나치게 크고 긴 옷을 입고 그것이 더 멋있다고 유행에 잘 따르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참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또 신발은 어떤 것을 주로 신었습니까? 자기 발보다 한참 큰 사이즈를 신어서 걸음걸이마저 이상하게 변형되는 경우를 많이 보았습니다.
그러면 우리 사회의 이런 현상들이 학생들이나 젊은이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입니까? 줏대가 없기는 어른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옷이 유행이다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유행을 따라 갑니다. 자신의 체형이나 나이에 어울리는지는 생각하지도 않고 그저 따라갑니다. 좀 심하게 이야기하면 우리가 사는 집도, 유행을 따라 옮겨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그런 분들이 정말로 행복할까 하는 의구심이 생깁니다. 새로운 아파트 단지가 형성되면 그곳으로 몰려가는 우리의 행태가 과연 소신 있는 삶의 방편인지에 대해 깊이 생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들이 심해지면서 우리 사회는 외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인생의 진로에 있어서도 기이한 현상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공무원이 인기가 있다고 방송과 매체에서 이야기하면 자신의 적성과 재능은 무시하고 많은 젊은이들이 공무원이 되기 위해 준비합니다. 심지어 대학의 여러 학과에 다니는 학생들 중에도 많은 수가 학교 공부는 하지 않고, 공무원 임용고시를 준비한다는 것이 얼마나 낭비가 심한 일입니까?
그래서 저는 오늘 이렇게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좀 뚜렷한 주관을 가지고 소신 있는 삶을 살아갔으면 합니다. 소신을 가자고 산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매사에 무엇이 옳고 그른지를 생각하고 판단하는 것입니다. 그것도 세상의 흐름이 아니라 자기의 주관적인 생각과 여건을 고려해서 살았으면 합니다. 우리가 이런 삶을 살아가려고 노력할 때 오늘 예수님께서 새 술은 새 부대에 부어야 한다는 말씀을 좀 더 잘 알아들을 수 있다고 봅니다.
왜하는지도 모르면서 남들이 하니까 그냥 따라하거나, 남들도 다 하는 일이라 자기만 안하면 괜히 뭔가 뒤처지는 듯한 느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하는 일도 적지 않습니다. 시류나 유행을 타지 않고 소신껏 산다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려면 자신의 판단에 대한 확고한 신념이 있어야 하고, 남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간에 그 신념이 흔들려서는 안 될 테니까요. 작은 일을 하더라도 그 일을 왜 하는지 목적과 명분을 분명히 알고 행하는 것이 소신 있는 행동일 것입니다. 예수님은 분명히 그런 소신을 갖고 계셨던 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요한의 제자들과 바리사이들이 단식을 하고 있는 것을 보고 예수님에게 와서는 다짜고짜 당신은 왜 단식을 하지 않느냐고 따집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단식은 속죄와 참회의 표시로서, 진정한 마음과 행위가 뒤따르지 않으면 위선에 지나지 않음을 알고 계셨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교회가 하라고 하니까, 또는 다른 신자들이 그렇게 하니까 등 다른 사람의 시선 때문에 행하는 단식이나 참회를 반기실 리 없습니다. 아주 작은 기도나 선행이라도 마음에서 우러나와 소신껏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또 다른 한편으로 오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자신의 생각에 집착하지 않기를 바라십니다. 어떤 사람이 높은 언덕길에서 무거운 수레를 힘차게 끌고, 한 꼬마가 뒤에서 열심히 밀고 있었습니다. 마침내 언덕을 다 오른 두 사람은 다정히 앉아 서로 땀을 닦아 주고 있었습니다. 이 모습이 하도 정겨워서 지나가던 사람이 앞에서 수레를 끌었던 어른에게 “저 아이가 당신 아들입니까?”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 저놈이 바로 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인데 이렇게 고생을 시키고 있어서 너무 미안한 마음이 든답니다.”하고 눈물을 글썽였습니다. 행인은“저분이 네 아버지로구나. 아버지를 도와주는 네가 무척 대견스럽구나!”하고 아이를 칭찬했습니다. 그러자 아이가 “예? 저분은 제 아버지가 아닌데요!”하고 대답했습니다. 과연 이 두 사람은 어떤 관계이겠습니까? 두 사람은 어머니와 아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새로운 가르침이 낡은 사고방식을 가진 유다인들에게, 특히 고정된 가치관에 얽매인 지도층에게 받아들여질 수 없었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지금 여기에서 주님께서 우리에게 어떤 지혜의 말씀을 들려주시는지를 잘 알아들으려면 자신의 생각과 마음속에 깃든 낡은 것을 모두 비워야 할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데 내가 비워야 할 것들은 무엇인지 깊이 생각해 봅시다. 첫째는 선과 악, 성과 속, 정신과 물질이라는 이원론적 세계관입니다. 둘째는 천국의 복락만을 좇는 개인적 구원관입니다. 셋째는 원죄만을 강조해 인간의 창조적 가능성을 부정하거나 숙명론에 빠지는 일입니다. 넷째는 율법주의, 교리주의, 광신주의입니다.
우리는 이러한 낡은 것들을 비워내고 지성, 덕성, 감성이 조화를 이루는 성숙한 신앙으로 나 자신과 공동체의 쇄신을 위해 노력해야 하겠습니다. 새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자기 나름대로의 소신과 현대적 의미의 자기 비움을 통한 새로움을 지향해 나가야 하겠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