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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제1주간 토요일> 사람이 동물과 다른 이유
제 1독서 : 히브 4,12-16 (확신을 가지고 은총의 어좌로 나아갑시다.) 복 음 : 마르 2,13-17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사람은 짐승과 큰 차이가 있습니다. 본능을 뛰어넘으며 끊임없이 인류 문명을 발전시켜 가는 사람들에 비해 짐승들은 매번 본능적인 생활만을 반복하며 성장 없는 삶을 삽니다. 인간과 짐승의 이 근본적인 차이는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요? 물론 지능 자체에 큰 차이가 있지만 근본적으로는 문자의 발명과 인쇄의 발달, 즉 ‘책’에서 기인한다고 생각됩니다. 인류의 문화유산이 글을 통해서 책으로 전달되고 교육되기 때문입니다. 끊임없이 발전해 가는 인간과 그렇지 못한 동물과의 차이를 벌려가는 바탕은 책과 또 그것을 가르치는 교육에 있습니다. 책은 인류 문화유산이 자자손손 이어지는 바탕이지요. 책을 많이 읽는 사람들은 많은 문화유산을 받아들이기 때문에 어떤 이야기를 해도, 또 어떤 상황에서도 그 성숙함과 지혜가 남다릅니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한 일입니다. 책을 읽는 사람과 읽지 않는 사람과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이나 크고 그 결실 또한 뚜렷합니다.
우리 그리스도교는 이천 년의 역사를 이루며 내적으로나 양적으로 끊임없이 성장하고 있습니다. 인류 역사 몇 천 년의 세월 동안 끊임없이 유지되고 성장 발전되는 가치나 제도는 별로 없습니다. 대부분 바뀌고 쇠퇴하는 부침의 역사를 되풀이할 뿐이지요. 그러나 그리스도교는 이천 년 동안 한결같이 지속되어왔고 또 세상 끝 날까지 지속되리라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일까요? 이천 년을 끊임없이 이어 내려왔고 앞으로도 지속될 힘은 ‘성경’에 있습니다. 하느님의 말씀인 성경이 있기 때문이지요. 만약 성경이 전해 내려오지 못했다면 그리스도교는 지금처럼 이천 년의 역사를 지탱해 올 수 없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일대기를 적은 마태오 복음에서부터 요한 묵시록에 이르기까지 27권의 신약성경이 그 역할을 했고, 특히 마태오 복음으로 시작되는 4복음서가 근간이 되었습니다. 복음서 저자들은 역사에 길이 남을 위대한 인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신약성경의 첫 번째 권인 마태오 복음서의 저자는 마태오입니다. 참으로 대단한 사람이지요. 마태오라는 사람은 과연 어떤 인물이었을까요? 그는 처음부터 복음서를 쓰기 위해 준비되어 있던 인물이 아니었습니다. 마태오라는 인물이 예수님께 뽑히는 장면이 오늘 복음에 나옵니다.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마르2,14) 같은 내용이 마태오 복음과 루카 복음에도 다루어지는데 마르코 복음이나 루카 복음과는 달리 마태오 복음에는 알패오의 아들이라는 표현 대신 마태오라는 이름이 구체적으로 언급됩니다. 복음서에 이름이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그의 직업이 세리였기 때문입니다. 당시에 세리는 그 직업 자체가 비난의 대상이었습니다. 세리는 말 그대로 세금을 거두는 사람인데 사람들에게 매우 좋지 못한 평을 받고 있었습니다.
초대교회 때 유다인들에게는 크게 두 종류의 세금, 즉 유다민족에게 내는 세금과 로마인들에게 내는 세금이 있었습니다. 자기들 민족에게 내는 세금은 종교세로써 성전세와 십일조가 있었고, 로마인들에게 내는 세금으로는 거주세와 인두세, 재산세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간접세로 관세를 물었지요. 일반적으로 세금 징수는 로마인들의 몫이었습니다. 가끔은 유다인들이 담당하기도 하였는데 이 세리라는 직업을 유다인들이 얻기는 무척 힘들었습니다. 많은 돈을 써야 했고 뒤를 봐줄 만한 권력가와 친분이 있어야 얻을 수 있는 직업이었지요. 또 한 번 얻으면 큰 돈을 벌 수 있었습니다. 많은 재산을 모을 수 있었지요. 그러나 동족인 유다인들에게는 민족의 반역자요 매국노로 취급당하며 죄인중의 죄인으로 내몰렸습니다.
오늘 복음에도 세리를 죄인으로 취급하는 율법 학자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바리사이들과 율법 학자들은 세리들과 상종하는 것조차 싫어하였지요. 그들은 예수님께서 세리와 한자리에서 음식을 나누시는 것을 보고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묻습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르2,16) 로마의 지배에 빌붙어 부정한 방법으로 부를 쌓고 있던 세리들이 그들에게는 악인이었고 그런 악인과 함께 음식을 먹는다는 것은 부정 타는 일로서 있을 수가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들이 악인이라고 부르는 세리와 함께 음식을 드시며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르2,17)
오늘 예수님께서는 죄인으로 따돌림 받던 세리 마태오를 제자로 부르시고 그에게 새로운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역사에 길이 남을 복음서를 쓰게 되는 영광과 사명을 주신 것이지요. 사람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이 얼마나 다릅니까? 우리는 세상을 살아가면서 스스로 판단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떤 부르심이나 일이 주어졌을 때 먼저 하느님의 뜻을 헤아려 따르기보다는 ‘내가 이 일을 할 수 있을까, 없을까?’를 저울질하고 계산하지요. 그것은 잘못된 삶입니다. 인간의 생각과 하느님의 뜻은 결코 같은 차원의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의 부르심에 “예”하고 응답하고 기꺼이 자신을 도구로 내 놓을 때 하느님께서 더 크게 열매 맺어 주신다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오늘 예수님께서는 사람들로부터 비난받고 손가락질 받던 세리를 제자로 부르심으로써 그리스도교 이천 년 역사의 바탕이 되는 복음서를 쓰는 계기를 마련해 주셨습니다. 우리 인간의 뜻이 아니라 하느님의 섭리에 맡기는 삶을 살아야 함을 다시 한 번 되새겨 보는 하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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