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성인 8월 27일

2006. 11. 29. 오후 5:40: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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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늘의 성인 8월 27일 ♬ *




1. 모니카(Monica)

모니카는 '외로운'이란 뜻이다.

성녀 모니카의 평소 환경은 잔소리가 심한 아내, 모진 며느리, 절망적인 부모로 만들 수도 있었지만 그녀는 이 같은 유혹에 굴복하지 않았다. 그녀의 부모들은 그리스도이었던 그녀를 북아프리카 타가스테에 있는 그녀 집에서 함께 살던 이교도인 파트리치오와 결혼을 시켰다.

파트리치오는 격렬한 성격에 방탕하기까지 했으나 자신을 반성할 줄 아는 사람었다. 그는 아내의 자비심과 동정심을 비난했으나 항상 그녀를 존경했다. 모니카는 심술 궂은 시어머니와 함께 살았는데, 모니카의 기도와 모범은 마침내 그녀의 남편과 시어머니를 그리스도교에 귀의시켰다. 그녀의 남편은 영세한 지 1년 후인 371년에 세상을 떠났다. 그때 모니카에게는 유년기를 넘긴 세 자녀가 있었다. 그 중 맏이인 아우구스티누스가 가장 유명하다.

파트리치오가 운명한 당시 아우구스티누스는 17세였으며, 카르타고의 수사학 학생이었다. 모니카는 자기 아들이 마니교도가 되어 비도덕적인 생활을 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매우 슬퍼했다. 얼마 동안 아들이 집에서 먹고 잠자는 것까지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밤 그녀는 아들이 신앙을 되찾는 확실한 환상을 보았다. 그때부터 그녀는 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단식하면서 아들 가까이에 머물렀다. 사실 그녀는 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단식하면서 아들 가까이에 머물렀다. 사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원하는 것보다 휠씬 가까이에 머물렀다. 아우구스티누스는 29세에 로마로 수사학을 공부하려 가기로 결심했다. 그녀도 함께 가기로 했다. 어느 날 밤, 그는 어머니에게 친구와 작별 인사를 하러 선창에 간다고 말했다. 그러고는 로마로 가는 배를 탔다. 모니카는 아우구스티누스의 계교를 알았을 때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그녀가 로마에 도칙했을 때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미 밀라노를 향해 떠났음을 알았다. 비록 여행하는 데 어려움이 많았지만 모니카는 그를 만나기 위해 밀라노로 갔다. 밀라노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모니카의 영적 지도자였던 성암브로시오 주교의 영향을 받았다.

그녀는 모든 일에 있어 그의 충고를 따랐고 그녀의 제2 본성이 되어 있던 몇 가지 행동을 포기하는 겸손을 가졌다.

모니카는 타가스테에 있었을 때와 같이 밀라노에서 신심 깊은 부인들의 지도자가 되엇다. 그녀는 아우구스티누스가 교육을 받고 있는 동안 끊임없이 아우구티누스를 위해 기도했다. 387년 부활절에 성암브로시오는 아우구티누스와 그의 친구 몇 사람에게 세례를 주었다 얼마 후 아우구티누스와 모니카는 아프리카로 떠났다.

비록 아무도 눈치채지 못했으나 모니카는 자신의 삶이 곧 끝날 것임을 알았다. 그녀는 아우구티누스에게 "얘야, 이 세상에서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나는 지금 내게 남겨진 일이 무엇이며, 왜 내가 아직도 이 지상에 있는지 모르겠구나. 이 세상에서 나의 모든 희망이 다 이루어졌다." 고 말하였다. 그녀는 곧 병이 들었고, 죽기 전 9일 동안은 심하게 고통을 받았다. 우리가 모니카에 관해 알고 있는 거의 모든 것은 아우구티누스가 쓴 고백록에 있는 것이다.

2.마르가리타(Margaret)

그녀는 안코나의 산 세베리노에서 태어났는데, 집안은 매우 구차하였다.

15세 때에 결혼하였으나 남편은 그녀를 학대하기를 일삼았다. 그녀는 신발도 없이 돌아다녔기 때문에, 주민들은 그녀를 맨발의 성녀라는 별명을 붙여줄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는 남편과 사별할 때까지 놀라운 인내심으로 이 모든 학대를 이겨내었다. 그녀는 일생 동안 고통 중에 살았으나 기도와 고행을 잊지 않았기에, 그녀가 운명하자 주민들은 그곳의 도미니코 수도원 성당에 안장하고 성녀로 공경하는 것이다.


3.성 가브리엘 마리아, 원장(1463~1532)

원래 이름은 길버트 니콜라스인데 클레르몽의 리옹에서 태어나 16세 때에 프란치스꼬회를 지원하였으나 몸이 허약해 보인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그 후 재차 입회를 청하여 라 로쎌에서 입회하였는데, 원장은 그의 용기를 가상히 여겨 허가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수련장은 그의 됨됨이를 알아보고 "모범적인 프란츠스칸"이 되리라고 예언하였다.

과연 그는 뛰어난 철학자임과 동시에 신학자가 되었으며, 프랑스의 프란치스칸으로서 큰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는 후일 발로와의 성녀 요안나의 고해신부로도 활약하였고, 프란치스꼬회의 총시찰자가 되었으며, 성모 영보의 신비에 대한 그의 높은 신심으로 교황 레오 10세를 감동시켰다. 이리하여 교황은 그에게 가브리엘 마리아란 이름을 주셨던 것이다. 그는 프란치스꼬회의 회칙을 개정하였고, 프랑스와 네델란드에 수도원을 여섯 곳이나 세웠다.

그의 마리아 신심은 놀라울 정도였으며, 임종하는 순간에도 마니피캇을 노래하였다고 전해온다.


4.성 안젤로 (ANGELO)

안젤로는 '천사, 사신'이란 뜻이다.

또레와 비뇰레의 백작인 베르나르도의 아들로 태어난 성 안젤로는 20세 때에 체세나 교외 보뜨리올로에서 아우구스띠노회원이 되었다. 1248년, 그는 고향 땅으로 파견되어 그곳의 수도원을 세웠고, 그후 20여 년 동안은 폴리뇨 수도원에서 은둔자처럼 생활하여 높은 경지에 오를 수 있었다.

그는 또 성 니꼴라오 똘렌띠노와 절친한 친구였고, 그의 사후부터 즉시 공경을 받은 덕있는 수도자였다.


5.체사리오(Caesarius)

훌륭한 갈로-로마가(家)의 출신인 그는 부르군디의 샬롱에서 태어났다.

그는 교회의 경력을 쌓기로 결심하고, 18세 때 레렝의 수도원에 들어가서 수도원의 주방에서 일하는 동안 수도자들 간의 묘한 감정 등을 경험하였다.그러나 뜻하지 않은 병 때문에 그곳을 떠나, 아를르에서 정양하는 동안 그곳의 주교인 아저씨 에오누스의 주의를 끌게 되었으며, 마침내 그에게 사제품을 주었다.

근교에 있던 수도원에서 3년을 생활한 뒤, 그는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503년에 아를르의 주교로 승품되었다. 이 때부터 체사리오는 수많은 개혁운동을 전개하여 실효를 거두었고, 아리안 이단과 싸웠으며, 아를르의 성당에서는 매일 성무일도를 노래로 기도할 것을 명하였다. 그는 자신의 동생인 체사리아와 함께 수도원을 세우고, 수녀들을 위한 규칙을 썼으며, 국제적인 몇 차례의 시노드를 주재하였다. 505년, 아리우스파의 비시고트와 오스트로고트들에 의하여 그의 주교직이 정치적으로 종교적으로 심한 위기에 직면하였으나, 그 후 안정되었다.

체사리오는 부르군디 왕에 의하여 아를르가 공격을 당했을 때 수많은 희생자들을 돌보았다. 그러나 테오도릭과 오스트로고트가 아를르를 점령했을 때 그는 재차 체포되어, 그의 모든 직책은 면직되었다. 그 후 그는 로마로 갔다. 여기서 그는 골 지방의 교황 사절로 임명되었고, 교황 심마쿠스로부터 빨리움을 받았다. 이것은 서방 유럽 주교에게 허용된 첫번째 경우이다. 536년, 프랑크족들이 아를르를 점령한 후, 체사리오는 성 요한 수도원에서 거의 모든 생활을 하다가 8월 27일에 운명하였다. 그가 운명할 때까지, 그는 자신의 교구를 40년 간 지도하였고, 골에서 가장 유명한 주교였으며, 그의 성덕과 사랑 그리고 능력은 당대를 초월하는 것이었다.

그는 529년의 오랑쥬 공의회에서 반-뻴라지우스파의 단죄에 앞장 섰으며, 로마법을 응용하여 테오도시안 법전의 주요 골격이 되는 브레비아리움 알라라치(Breviarium Alarici)를 간행하였는데, 이것이 골 시민법이 된 것이다. 그의 설교집도 여러 권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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