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 신부님 인줄 몰랐습니다!
난 화물차를 몰고 다닌다.
화물차 기사가 아니라, 내 차가 사람도 6명 태울 수 있는 더블 캡 4륜구동 1톤 화물차이다.
내가 화물차를 몰고 여기저기 다니면 사람들이 먼저 묻고는 한다.
"이 차가 신부님 차 입니까." "예",
"그게 아니라요. 신부님이 돈 주고 직접 사신 차냐고요?" "예, 왜요"
화물차는 신부가 된 다음해부터 본당에 고물상을 차려놓고, 폐지와 공병을 수집하여
우리보다 더 못한 사람들을 돕는데 쓰기 위해 구입한 것이다.
물론 나의 승용차 역할도 훌륭하게 수행을 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일 때문에 곳곳에서
본의 아니게 신자들에게 마치 암행감찰, 요새 말로는 몰래카메라 같은 역할을 할 때가 있다.
내 차에 걸 맞는 품위(?)를 안고 사는지라, 나를 모르는 신자들이 신부인 것을 모른 채 나를
대하는 모습을 보면, 평상시 그 신자들이 사람대하는 모습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최소한 화물차를 몰고 다니는 익명의 어떤 사람을 어떻게 대하는지 말이다.
이 글을 쓰기 하루 전 일이다.
타 본당 신자 분들이 우리 본당에 볼일이 있어 들르신다는 소식을 수녀님으로부터 들었다.
그때도 역시 난 본당의 한 신자분과 함께 폐지와 공병을 분리하는 중이었고, 열심히 작업하는
도중에 그 신자 분들이 마당으로 들어오셨다.
차에서 내리는 그분들을 보며 난 "어떻게 오셨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러나 묵묵부답. 못 들었나
싶어 더 큰소리로 "저기요 어떻게 오셨습니까." 역시 대답은커녕 묻는 쪽으로 고개도 안 돌린다.
순간 발끈한 나 "사람이 묻는데 왜 대답을 안 합니까?" 그때 수녀님이 나타나셔서
"본당 신부님이세요."하니 "어머 신부님! 신부님이신 줄 몰랐습니다."
신부인줄 당연히 몰랐겠지. 내 면상에 신부라고 쓰여 있는 것도 아니고, ‘나 신부’ 라고 명찰 달고
일하는 것도 아니려니와 풍기는 이미지도 영 신부와 어울리지 않으니 그러나 내가 발끈하고
화가 나는 이유는, 아니 이런 일들이 허다하지만 영 너그러워지지 않는 이유는 따로 있다.
내가 신부인데 감히 신자가 신부도 못 알아보느냐가 아니라. 신부이면 만난 적이 없어도
들어서 잘 안다는 둥, 인사라도 한번 나눈 적이 있으면 굉장히 친한 척, 아는 척 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면서 몰골이 좀 변변치 못한 사람들에게는 자기 본당에 들어오는 사람이건,
남의 본당에서 만난 사람이건 모두가 안면몰수이니 천주교 신자들은 정말 ’야박’하고
’폐쇄적’ 이란 생각이 들곤 한다.
주임신부님 만나러 왔다고 말씀드려도 화물차는 절대 성당에 주차가 안 된다는 서울의 어느 본당. 후배신부 만나러 기분 좋게 찾아간 전주의 어느 본당에서의 문전박대. 무엇보다도 같은 교구 행사나 본당 곳곳에서 느끼는 신자들의 불친절과 교양 없는 언행…그러다 신부인 것을 알고나면 어쩔 줄 몰라 하며 내뱉는 말.
"신부님 인줄 몰랐습니다."
신부에게는 또는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에게는 안 되는 것도 되고,
소위 변변치 못하게 보이는 사람을 대할 때에는 쳐다보지도 않고, 무심하고 야박하게 구는
모습들은 신부가 되기 전부터 내가 안타깝게 느낀 천주교 신자들의 모습이다.
한마디로 세속의 얄팍한 사람들과 다를 것 하나 없는 모습이다. 바르티매오라는 앞을
보지 못하는 거지는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이 나타나자 예수님께 간곡하게 자비를 청한다.
사람들은 그 앞 못 보는 거지에게 조용히 하라고 꾸짖는다. (마르코10.46-48)
만약 자비를 청하는 사람이 거지가 아니라, 고관이나 기득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과 무엇이 다르던가? 몸은 예수님을 따르는 행렬에 속해 있지만,
이미 마음은 그 행렬을 떠나 있음을, 그 행렬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음을 뜻한다.
예수님은 그것과 상관없이 그 거지의 눈을 뜨게 해주신다.
나도 거지가 될 수 있다. 나도 변변치 못한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나도 지금 변변치 못한 사람이다.
하느님의 모습은 누구에게나 담겨저있다.
-춘천교구 권오준/베네딕토 루치아노 신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