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는 마리아
무던히도 착했던 동생이었습니다.
시집 식구에 대한 불평도 없었던 동생이었습니다.
바람을 피우고, 가정을 온전하게 돌보지 않았어도
남편에 대한 불평을 한 적이 없었습니다.
물론 속으로는 애간장이 다 녹아 버렸겠지만
동생 입을 통해 불평을 들어 본적이 없었습니다.
제 몸과 마음이 찌들고 고달팠어도
불만을 터트려 본 적이 없는 동생이었습니다.
우리 오남매 중 막내로 올해 나이 49세!
아홉수를 잘 넘기면 더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지만...
김수환 추기경님 장례식 하시는 날 금요일 새벽 02시14분에
아홉수를 넘기지 못한 동생이 임종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몹시 추웠던 수요일 새벽
명동 성당 입구에서 덜덜 떨면서 한 시간 이상을 줄서서 기다리다가
6시에 입장하여 추기경님께 연도 바쳐드렸습니다.
다음날 목요일 여성병원에 들어가 간단한 수술을 받은 저는
병원 침상의 누워 마취가 풀리지 않아
조금도 움직일 수 없었던 상태에서
동생의 임종 소식을 듣고 생각해 보았습니다.
추기경님으로 인하여 천국 문 열려있을 때
추기경님 품에 안기어 하늘나라 들어가려고
편안하게 자다가 이때다 싶어 아주 눈을 감아버린 동생!
살아있을 때 힘들었던 흘러간 시간들이었지만,
임종의 복이라도 타고 났으니 다행입니다.
동생은 그럴 자격이 있다고 봅니다.
한없이 착했으니까요.
오래전에 세례를 받아 마리아라는 본명을 받았지만
어려운 살림에 몸도 성치 않아 성당을 제대로 다니지 못했습니다.
마리아는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당의 수치는 물론
혈압도 아주 많이 높고 뇌경색도 있어 눈도 안보이도록
건강이 아주 쇠퇴 해 버렸습니다.
자그마한 체구에 뼈에 가죽만 씌워 놓은 모습이었습니다.
위험한 고비를 여러 번 당했었지만
복지 병원의 도움을 받아 병세도 점점 호전되고
한쪽 눈 수술도 받아서 생활하는데 한결 좋아졌습니다.
얼마 전 11월 달엔 친정엄마 생신에도 보기 좋은 모습으로 참석했고
올 구정에는 제천에 있는 저희시댁에 가서 좋아하는 고스톱도 치고
우리 집에 와서 친정엄마께 세배도 했습니다.
눈도 보이고 건강도 좋아지니 걸음도 편해져서
희망 속에 살고 있는 마리아를 보고는
아주 보기가 좋아졌다고들 합니다.
그런데 사실 좋아 졌다는 마리아의 얼굴은
살이 붙은 것이 아니라 부은 것이었습니다.
안타깝게도 오래 가지 못하리라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보편적으로 환자들이 갑자기 좋아져서 희망을 갖고 살다가
어느 날 홀연히 가는 일을 많이 보았기 때문입니다.
얼마 전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제 견진 친구도 그랬으니까요.
마리아도 그럴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20일 금요일 새벽 두시 넘어 마리아의 임종 소식을 들었을 땐
마음이 섬뜻하면서 놀랐습니다.
“나 잔다”하면서 홀연히 임종을 맞이한 걸 보면
추기경님 따라 가려고 그날을 기다렸나 봅니다.
희망 속에 좀 더 행복하게 살다가 가기를 바랬지만
잠시나마 본인은 물론 보는 이에게 희망을 주고 떠났습니다.
그래서인지 동생의 대한 아쉬움이 더 많습니다.
분명 마리아는 행복하게 추기경님 따라 갔을 겁니다.
추기경님이 천국 들어가실 때
마리아를 데리고 들어갔을 것이라 생각이 듭니다.
루가복음 16장에 보면
‘가난하고 불쌍한 라자로가 죽어서
아브라함 품에 안기어 위로를 받고 있듯이‘
생전에 마리아도 라자로 만큼이나 불행을 겪었기에
추기경님 품에 안겨 위로를 받고 있을 거라 믿고 싶습니다.
마취가 풀리면서 억지로 퇴원하여 영안실로 갔습니다.
몸이 잘 움직여지질 않습니다. 갑작스런 일이라 눈물도 안 납니다.
이렇게 빨리 가리라는 생각은 안했습니다.
금요일 임종 첫날밤은
만신창이가 된 제 몸도 쉴 겸 집에 와서 잠을 잤습니다.
토요일 새벽 잠결에 어렴풋이 우는 소리가 났습니다.
텔레비전 연속극인가보다 하고 다시 잠이 들었습니다.
자다가 또다시 울음소리에 깨어나 귀를 기우렸더니만
글쎄, 친정 엄마의 오열이었습니다.
자식들이 들을 새라 큰소리도 못 내시고
부엌 한 모퉁이에서 쪼그리고 앉아 울고 계셨던 겁니다.
어떤 위로의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토요일 아침 10시에 입관을 할 때는
저도 너무나 가슴 아프게 울었습니다.
동생의 왜소한 체구가 보는 이들을 더 슬프게 했습니다.
살아 있을 때 좀 더 잘해 주지 못한 죄의식에 사로잡혀
가슴이 몹시 아프도록 울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다시는 아프지 않게 하겠다고
성모님 앞에 편지를 써서 봉헌한 그대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고자 노력했습니다.
돈 걱정 안 하도록 제 친구의 도움으로 수녀님들이 운영하는
복지병원에 입원시켜 치료받게 했습니다.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습니다.
좋아졌다는 소식은 계속 듣고 있었지만
애정을 가지고 사랑하는 마음으로 돌보거나
어떻게 지내는지 살펴보지는 않았습니다.
이렇게 빨리 세상을 떠날 줄 알았으면 잘 했을 텐데...
그래야 나 자신 후회 하지 않는 삶이 되었을 것을...
입관 하는 내내 동생의 죽음이 내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마지막 옷을 입히는 동생모습에 숨이 막히도록 울었습니다.
옆에서 동생의 남편이 소리 내어 울고 있습니다.
꼴도 보기 싫고 목소리도 듣기 싫은 제부였습니다.
동생을 이렇게 일찍 죽게 만들었고
우리 가족들의 속을 썩힌 사람이기에 정말 싫었습니다.
제부 우는 소리에 순간 패주고 싶은 충동을 받았습니다.
막 때려주고 싶었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가는 동생이 슬퍼 할까봐서 참았습니다.
온 몸을 감싸고 마지막 조그만 얼굴까지 감싸드니
동생을 관에 넣어 뚜껑 덮고 예쁜 천으로 씌워서
다시 캄캄한 냉동실 속으로 들여보냈습니다.
동생의 그 모습이 마지막이었습니다.
‘내가 너한테 잘한 것이 무엇이었니?’
‘살아 있을 때 잘 할 것을... 미안 하구나’
후회 한들 이미 늦어 버렸습니다.
허탈한 마음으로 오열을 하고 있는 제 어깨를
제 아들이 감싸 안고 나왔습니다.
동생 영정사진 앞에서 서성이다가
식당에 앉아 울고 있는 제부를 찾았습니다.
쫒아 들어가 등짝을 때리며 퍼 부었습니다.
“그동안 뭐 잘해 준 게 있었냐?
지금까지 고생만 시키고 마음 아프게만 하고
그 애 행복한 거 한 번도 본적 없어.
층층시하 시동생 시누이 홀시어머니 모시고 살면서 고생만 하고
바람이나 피우면서 마음 편하게 해준 적 있어?
집에나 제대로 들어오길 하냐? 돈을 많이 줘 봤냐?
맘 편하게 살집을 마련해 줘봤냐?
아파도 병원 한번 제대로 못가보고
병원비가 없어 퇴원 못해 결국 나한테 전화 오게 하고...
그래도 그 앤 불평 안하고 지 남편 감싸기만 하고
내가 그 애한테 소리 지르면서 얼마나 모질게 했는지 알아?
이날까지 도대체 뭐 해준 게 있어___?”
악을 쓰며 제부의 등짝을 막 때렸습니다.
울고 있는 제부의 꼴이 정말 싫었습니다.
밖에서 듣고 깜짝 놀란 제 아들과 남동생이 저를 데리고 나갑니다.
이 모습에 마리아의 마음이 또 아팠을 겁니다.
저는 마리아의 마음을 많이 아프게 하고 있습니다.
마리아의 마음을 아프게 한 것이
나 자신을 애타게 만들면서 슬프게 합니다.
그래서 더 울게 됩니다.
마리아가 못됐거나 성깔이 있었다면 미안 할 것도 없겠지요.
무던히도 착하고 순한 동생이기에 제부로 인해 동생에게
모질게 한 것이 이토록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제부의 말은 보고 싶을 때 찾아보겠다며
한탄강이나 한탄강 옆 나무숲에 뿌리겠답니다.
흘러가는 한탄강 물에 뿌리면__
한탄강 나무숲에 뿌리면___
보고 싶을 때 찾아 봐 지겠습니까?
그들은 마지막 떠나는 날까지
동생을 위해 해주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답답하여 한숨만 나왔습니다.
벽제 화장터에서 한줌의 재로 나왔습니다.
그나마 동생의 흔적이 없어지면
생각날 때나 보고 싶을 때 우리는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흔적이 없어 질까봐 제가 우겨서
한줌의 재를 나무통에 담아서
친정아버지 산소 옆에 땅을 파고 그대로 묻었습니다.
그래야만 동생의 아픈 마음을 조금이라도 속죄를 할 것 같았습니다.
장례 치르고 남은 돈이 얼마간 있었다는데
저희들 살 궁리에 바쁩니다.
같이 살면 닮아간다는데 이런 무리 속에서 살았던 제 동생도
무디도록 똑같은 삶을 살 수 밖에 없었다고 생각합니다.
마리아는 제 자식들에게 제사지내달라는 얘기를 했답니다.
이런 식구들에게 제사 밥이나 얻어먹을 수 있을 런지요.
제부가 말합니다. “처형, 나중에 산소를 마련하면 찾아 갈께요”
‘제발 찾아 가기를 바란다. 제발 그렇게 해줘라. 인간아’
장례식 전날 누군가 제게 말했습니다.
“그 동안 동생 때문에 속상해서 마음 아팠다면서
왜 죽어서까지 곁에 두려고 합니까?”
“제 동생이니까요. 가족들 산소 찾아다닐 때
흔적 없는 동생 생각나면 후회 할 것 같아서요.
한탄강에 흘려보내는 것 보다는
흔적이라도 남아 있는 것이 나을 것 같으니까요...”
삼우제 때 다시 가 보았습니다.
그래도 흔적이 없어지지 않도록
아버지 곁에 묻기를 잘 한 것 같습니다.
동생에 대한 미안함이 조금은 가시기를 바라면서...
아버지가 막내딸을 잘 돌보실 것 같아 마음이 한결 편해졌습니다.
제 속은 터지지만 역시 잘 한 것 같습니다.
일주일이 지난 지금도 답답한 마음 사그라지지 않습니다.
숨이 막힐 것 같습니다.
결국 죽어서도 제 옆에서 제 마음을 아프게 합니다.
이 답답한 마음을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제 가슴 쥐어뜯으며 울고 싶습니다.
제 마음 이러 할진데
친정 엄마의 마음은 오죽할까? 헤아려 집니다.
엄마와 저는 서로가 울고 싶어도 울지를 못합니다.
서로의 마음을 아프고 힘들게 할까봐 조심합니다.
시원스럽게 소리라도 지르고 싶습니다.
가슴이 탁 트이도록 소리 지르고 싶습니다.
아~~아~~아~~~~
이럴 때 내 화풀이를 받아 줄 남편이 곁에 있었다면 좋을 텐데...
아주 오래토록 머얼리 출장 가 있는 남편이기에 유감이지요.
어려서 엄마 곁을 졸졸 따라다닌 막내인지라
남편은 동생을 비서‘실장’이라 불렀습니다.
동생 마리아를 위해 기도해 주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2009년 2월28일 토요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