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성체성사의 영성 (“Spirituality of the Eucharist”) Source: “Spiritual Life, Winter 2001” By: Dominick D. Hankle 성체성사라는 주제를 정당하게 다루기 위해서는 어떻게 시작하여야 하는가? 성체성사에 대해서 많은 책이 쓰여졌으며, 우리는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수 없이 듣는다. 많이 이야기가 되었지만, 아직 결코 충분하지 않다. 하지만, 우리가 더 이상 할 이야기가 없기 때문에, 같은 이야기를 반복한다. 미사에서 성직자가 각 성인의 이름을 부른후에 “우리를 위하여 빌으소서”를 반복하는 것 같이, 성체를 설명하려는 사람들은 같은 철학과 생각으로 시작한다. 이 짧은 글에서, 나는 성체성사를 영성적인 관점에서 설명하기를 원한다. 이 방법은 성체를 설명함에 있어 어떤 특정한 테마를 깊이 파지 않고, 성체성사에 관련되 것들은 폭넓게 보게 될 것이다. *** 다섯 가지 테마 나는 다섯가지 테마를 다룰 것인데, 각 테마에서 고유의 영성을 도출 해낼 것이지만, 그 어느것이 다른 것보다 보다 나은 것은 아니다. 그 다섯가지는 신비로 보여지는 성체성사, 과학으로 보여지는 성체성사, 시로 보여지는 성체성사, 선교에로의 부르심으로 보여지는 성체성사, 그리고 마지막로 신비로 재 발견되는 성체성사이다. 이것은 결코 성체의 공식적인 분류가 아니며, 단지 파악하기 힘든 테마를 다루기 쉬운 구조로 만드는 방법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성체의 의미를 관상함에서 얻어진 것들은 너무 깊게 너무 가볍게도 다룰 수 없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너무 쉽게 단지 빵과 보도주만을, 또는 너무 학문적으로 예수님의 현존을 논하게 된다. 물론 두 면을 다 포함하지만, 성체성사는 영혼이 체험하는 그 어떤 것 이기도 하다. 어떤 사람은 성체성사의 신비를, 부활절 아침에 회색 안개속에서 두여인이 자신들이 사랑했던 사람의 무덤에 접근하듯이 접근하기도 한다. 처음에, 그는 거기에 없다. 하지만, 그들이 신앙의 눈으로 좀더 깊인 볼 때, 그들은 자신들의 이름을 부르는 힌옷입은 사람을 본다. 우리가 성체성사에서 그리스도를 찾으면, 발견을 할 수 없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것은 우리가 너무 찾는 데에만 초점을 맞추기 때문이다. 우리가 너무나 놀라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상황에서 모든 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상태가 될 때, 우리는 빵과 포도주에 있는 그리스도를 볼 수 있는 것이다. 이 글은 복음에 있는 그 두 여인과 같이 되려는 시도이다. 이 두여인은 그리스도가 당연히 있어야 할 곳이지만, 종종 발견되지 못하는 곳에서 그리스도를 찾고 있는 사도들인 것이다. *** 신비로써의 성체성사 우리는 종종 신비를 풀어야 할 것으로 본다. 성체성사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신비가 항상 풀려야 되는 것은 아니다. 초대 교회에서 이 성체성사에 대해 많은 논의가 있었다는 것을 우리는 알 수 있으나, 이 매주 거행되는 영성체때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 지에 대한, 어떤 정형된 신학이라고 간주되는 지는 것은 없다. 초대 그리스도 인들은 영성체 때에 그들 앞에서 심오한 사건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 신비를 풀기보다는 그 체험에 초점을 맞추기로 했었다. 게리 메이시는 “향연의 지혜”라는 저서에서, 이 영성체에 임하는 그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묘사하면서, 이 점을 지적하였다. “성체성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워진 공동체에서 그리스도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을 같이 체험하는 가장 최초의 그리고 가장 중요한 전례상의 만찬이다. 이 것은 행하는 것이며, 말해 지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최후의 만찬에 대해 더 이상 중요한 언급은 없다. 영성체는 축하연이며, 삶의 방법이며, 삶의 방법을 축하하는 향연이다.” 메이시는 더 나아가 성체성사라는 특정테마에 관해 쓰여진 책이 9세기가 될 때가지 나타나지 않았다고 언급한다. 초대교회는 신비를 삶으로 살았다. 초대교회는 항구하게 성체성사의 신비가 스스로 풀어지도록 놔두었으며, 너무 많은 말로써 설명할 필요을 느끼지 않았다. 신비로써의 성체성사는 후기 교회에서 잃어 버린, 다양성이 존재하도록 허용했다. 성체성사를 신비로 인정함으로서 우리는 창조적인 영성을 갖게 되며, 이 영성은 우리를 하느님에게 점점 가까이 이끄는 것이다. 이런 형태의 영성은 우리 바로 앞에 있는 것을 넘어서 보다 깊은 성체성사의 체험으로 이끈다. 우리가 아무리 자주 영성체을 하더라도 항상 새롭고 신선하게 느껴지는 것은 바로 이 영성때문이다. 또한 성체성사를 우상이 아닌 초상으로 만드는 것도 이 영성이다. 데레사 샌더스는 “하느님의 다른면과 다른사람들의 몸”이라는 글에서 신학자 장-룩 매리온의 말을 인용하였는데, 매리온은 우상과 초상의 차이를 다음과 같인 설명한다. “우상과 초상의 차이는 사람이 그 것을 어떻게 응시하느냐에 달려있다. 이 응시는 하느님에게 집중하려고 노력한다. 그 응시가 현 상태를 넘어서 더 멀리 가려 하지 않고 머물곳을 발견하면, 우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우리가 성체성사에 대한 이런 이해에 도달하려면, 성체성사에 존재하는 신비를 인정해야 한다. 몰입할 수 있는 신비가 존재한다는 것을 인지하는 것은 우리를 어떤 정적이 요소에 초점을 맞추지 않게 하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도록 앞으로 밀어 준다. 이 것이 성체 변환이 항상 살아있고 우리의 삶에서 활동할 수 있도록 유지시켜주는 성체성사의 한 면이다. 리지외의 데레사는 성체성사에 연관된 신비를 이해하였다. 그녀가 쓴 책인 ‘영혼의 이야기’에서 그녀는 첫영성체에 관해 이야기 하기 시작한다. 어느 한 부분에서 그녀는 묘사하기를 멈추기로 한다. 그녀는 성체성사로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리고 어떻게 지도를 받았는지 등등을 아주 상세하게 설명하다가는 그냥 멈추어 버린다. 그녀가 이렇게 설명을 중단하는 이유가 바로 성체성사를 신비로 받아들인다는 생각을 전적으로 나타내준다. 리지외의 데레사가 성체 체험을 묘사함에 있어서 말을 사용하기를 중단한 이유를 다음과 같이 이야기한다. “나는 일일이 상세하게 이야기 하지 않을 것이다. 어떤 것은 공기중에 노출이 되면 그 향기를 잃어버리고, 영혼의 감동을 말로 옮긴다면 그 미묘함을 상실하게 된다.” “소화 데레사”라고 불리는 이 여인은 성체를 신비로 체험하는 것의 의미를 아주 단순하게 포착한다. 어떤 말로도 그 의미는 포착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묘사하게 위하여 언어를 사용하자 마자, 우리는 성체성사의 아름다움을 자동적으로 포기하게된다. 우리의 응시가 그 행위자체에 초점이 맞추어 지면, 그 행위는, 우리를 하느님에게 연결시켜주는 초상이 아니고, 단지 경배를 위해 만들어진 우상으로 화하는 것이다. *** 과학으로써의 성체성사 성체의 신비적인 면에 너무 깊이 사랑에 빠지지 않기 위하여, 우리는 성체성사에 과학적인 풍미가 있다는 것을 잊지 말자. 오로지 성체성사에 관한 신비에만 안주하다 보면, 성사를 지나치게 영성화하는 함정에 빠지게 된다. 성체성사가 물론 신비적인 면이 있지만, 우리가 직접 참여해서 먹고 마시는 물리적인 일이라는 것을 잊을 수 없다. 성체의 물리적인 면을 간과한다면, 우리는 즈빙글리가 주창한 신학를 결국은 만나게 된다. 그는 종교개혁자로서 성체성사에서 그 물리적인 요소는 결코 변하지 않는 오로지 영적인 교류만을 보았다. 이것은 우리가 천주교 신자로서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성체성사에는 확실한 변화가 있으며, 우리가 단지 빵과 포도주를 먹고 마시는 것이 아니다. 성체의 과학적인 면에 관해 논의 할 때는, 어느 시점에는 토마스 아퀴나스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 “성변화”라는 말을 주었다. 이 시대가 바로 사람들이 교회의 신비를 파악하기 위하여 지성을 사용하기 시작 했을 때이다. 성체에 관한 질문은 “어떤 일이 일어나는가”와 그 일어난 일이 어떻게 우리를 과학적인 방법으로 성사에 접근하게 하는가 가 된다. 이것은 나쁜 방법이 아니지만,성체성사를 이해하는 한 요소일 뿐이다. 이 생각의 가장 큰 공헌은 우리를 영성체를 단지 정신적인 또는 영적인 사건으로 보게 하지 않고, 영성체 중에 정말로 무엇인가 일어난다는 물리적인 현실에 우리를 머무르게하게 하는 것이다. 앞에서 언급한 트리사 샌더스의 글에서, 우리는 그녀가 하느님의 다른면과 그것과 연관된 예수님의몸의 다름을 주장하기 위하여 과학적인 접근방법을 사용함을 발견하게 된다. 사실상, 그녀는 이 글에서, 왜 성변환이 하느님과 인간성의 절대적인 차이를 보존시키는 가장 적절한 방법인가에 관한 장-룩 매리온의 매우 과학 적인 설명을 훓어 나간다. 그녀는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해체신학”이라고 부르는 현대신학을 사용할 것이라고 말하기를 굳이 피하지 않는다. 그녀는 이렇게 쓴다; “내가 이 글에서 하고자 희망하는 것은, 포스트모던 신학의 통찰력을 사용하여 이 통찰이 “천주교 성체성사 신학”에 효과적으로 접목시킬 수 있는가를 탐사하는 것이다.” 내가 이 부분에서 보여주고자 하는 것은, 성체성사를 이해하고자 하는 역사를 살펴볼 때 그 것을 과학 적인 면이 있다고 볼 수 도 있다는 것이다. 과학이, 보다 적절하게 말한다면 형이상학이 성체성사를 이해하는 데에 한 몫을 한다는 것은 우리에게 성체성사가 가지 물리적인 현실을 상기시켜준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같은 신학자들은 단순히 그 들의 관점을 보강하기 위한 목적으로 해답을 억지로 끄집어 내지 않았다. 종종 그들의 동기는 사랑이었다. 하느님에 대한 사랑이 그들로 하여금, 그들이 사랑하는 것을 받아들이기 위하여, 이성이나 때로는 그 당시의 과학적인 방법을 사용하였다. 오늘날도 많은 신학자들이 같은 이유로 이런한 일을 한다. *** 시로써의 성체성사 시는 인간의 언어를 취해서 다른 영상들을 도출해 내는 특별한 힘이 있다. 시는 영상을 우리에 머리에 넣어 저자의 영혼을 깊이 이해하도록 이끌기 위하여 은유와 운율같은 문학적인 도구를 사용한다. 성체성사도 이런 면에서 같다. 많은 신학자들이 성체성사가 무엇이며, 우리를 무엇을 하도록 부르는가를 이해함을 돕기 위하여, 성체성사의 시적인 요소를 받아들였다. 당신들이 생각하기에 성체성사의 시적인 요소를 발견할 수 없을 것 같은 곳에서 부터 나는 시작하려고 한다. 그 곳은 트렌트 공의회이다. 트렌트 공의회는 성체성사의 시적인 성격을 십자가와 그리스도의 희생이라는 관점에서 표현하였다. 트렌트 공의회는 전례 그 자체와 시간을 초월하는 전례로 우리를 이끌면서, 천국의 영역으로 우리를 데려간다. 모든 말들과 화려한 묘사는 우리에게 십자가의 희생을 확실하게 상기시키도록 되어있다. 아주 잘 쓰여진 시같이, 기도와 행동 그리고 성직에 관한 강조조차도 무엇인가를 의미하고 있다. 그 전례는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 그 이상을 보게 하고 최후의 만찬과 십자가의 재현을 보도록 만든다. 트렌트 공의회는 희생이라는 관점을 매우 강하게 강조하면서, 마치 하나의 시에 쓰여진 말들같이, 전례와 교리를 통하여, 춤을 출 수 있는 율동을 만들었다. 당신이 트렌트 공의회가 해야 했던 말들을 좋아하던 좋아하지 않던, 공의회는 실제로 성체성사를 아주 지나칠 정도로 한 방향으로 이끌고 가서는 십자가상의 그리스도의 희생을 묘사하는 매우 강한 은유가 되도록 획실시 했다. 존 키간으 그의 “그리스도 안에서 – 성체성사와 고난”이라는 글에서, 성체성사를 공부함에 있어서, 또 다른 시적인 요소를 표현하였다. 이 글은 우리가 성체성사에 고통받는 사람을 치유하는 도구라는 선물을 볼수 있도록 도와주고, 이 전례의식에서 고통받는 사람이 무엇을 발견할 수 있는가를 매우 시적으로 묘사해주고 있다. 의사는 환자에게 병에 관하여, 어떻게 병이 결렸는지, 그 병이 몸에 어떤 영향을 주는지, 어떻게 환자를 고치려 하는지 상세하게 설명하면서 수시간을 보낼 수 있다. 아무리 의사가 동정어린 목소리로 설명을 하더라도, 학문적이고 치유과정에 관한 용어들은 환자를 질리게 할 것이다. 치유를 하려는 사람과 치유가 필요한 사람사이에 거리감을 줄 것이다. 성체성사도 그 어느 것도 메꿀 수 없는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차이를 메꿀 수 있는 시적이 요소를 우리에게 상기 시키기 위하여 말과, 상징과 여러가지 도구를 사용할 수 있다. 키간은 자신의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렇지만, 전례의식은 치유를 일으킨다. 영성체 의식은 환자의 치유에 관한 어떠한 지성적인 합리화를 제공하지 않는다. 상처가 너무 깊고, 악한 면이 너무 많이 돌출될 수 있기 때문이다. 전례의식이 하는 것은 보다 더 강한 것이다. 성체성사를 집행하는 성직자는 확실히 선언한다: ‘이것은 하느님이 양이다…’ 이 선언은 고통으로 부터 하느님을 멀리 쫒아내는 방법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속에 내재하는 하느님의 현존을 헤아리려고 시도하는 방법을 주는 것이다” 위의 글은 성체성사가 시와 흡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아주 좋은 예라 할 것이다. 사용되어지는 말에 따라, 우리는 각자 다른 사고 방식으로 이끌려 지는 길을 발견하게 된다. 희망과 용기의 영상을 우리의 마음에 심어주는 시를 읽을 때와 같이, 이 성체성사는 특정한 말들을 사용함으로써, 고통받는자와 같이 고통받고, 그들과 매우 같은 존재인 하느님의 이미지를 고통받는자의 마음에 불어 넣어준다. 그들은 이 치유자에서 어떤 괴리감도 거리감도 느끼지 않으며, 오히려 “내가 여기 있다, 내를 너를 도와 주리라.”하고 말하는 현존을 발견하게 된다. 의사는 온갖 지적인 주제들로 가득찬 말을 쓰면서 환자와 거리를 유지할 수 있다. 그런 말들에는 아마도 시적이 요소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성체성사는 지성과 이성은 제쳐놓고, 성직자가 쓰는 말들은 환자를 하느님의 현존으로 데리고 오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 좋은 시같이, 말을 초월하여 영혼을 어루만지는 것이다. 엄격한 의미에서는, 성체성사는 어떤 특정한 시가 아니다. 하지만, 시를 읽음으로써 우리의 영혼이 감동을 받듯이, 성체성사도 그러한 것이다. 여기서는 하지만, 성체성사의 저자는 그리스도이며, 영혼은 성령이다. *** 선교로써의 성체성사 성체를 받으며, 영성체에 참여한다는 것은 성체성사에 잠재되어 있는 약속을 반영하는 삶을 살기를 공약하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부서지면서 나누어지고 서로에게 밥이 되는 것을 의미한다. 또한 우리자신을 하느님과 공동체에 바치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고 또한 성체성사적인 선교의 삶을 사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는 영성체에 참여하는 것이 단지 어떤 사건을 구경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잊어 버렸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행동을 촉구하는 부르심이다. 그리스도 자체인 빵을 먹고 포도주를 마실때, 우리는 조금 더 그리스도를 닮아 변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닮아는 가는 것은 그리스도의 선교사업를 우리의 것으로 삼아 참여 하는 것을 의미한다. 성체성사는 우리의 행동을 촉구하는 부르심이 되어야한다. 모니카 헬위그는 그녀의 저서 “성체성사와 세상를 향한 열망”에서 다음과 같이 쓴다. “성체성사는 사람들이 존중과 희망, 감사 그리고 회개의 마음을 가지고 보러오는 멋있는 광경이었다. 하지만, 그들은 행동을 하지 않으며 단지 보기만 하였다. 전례 개혁의 목적은 정확히 우리를 구경꾼에서 참여자로 바꿔주는 것이었다.” 그녀는 전에 보다 더 오늘날은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운동경기를 하거나 노래를 하거나 또는 삶을 사는 것을 구경하는 사람들이 아니며, 성체를 모시는 사람으로서 살도록 부르심을 받았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전례에서 보는 것들은 우리가 친밀한 참여자라는 것을 상기시킨다. “친밀하다”라는 말은 우리와 삶을 공유하는 사람을 특별하고 고유하게 알고 있다는 의미이다. 우리는 그 사람과 다른 사람과는 공유하지 않는 삶의 한 부분을 공유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와 삶을 공유하는 사람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이러한 친밀함은 친밀한 관계를 가진 사람을 기쁘게 하도록 우리를 부른다. 예수님과 친밀함은 우리가 서로 사랑하고 봉사함으로써 예수님을 사랑하고 그에게 봉사함을 의미한다. 이것이 바로 선교에의 부르심인 것이다. 헬위그는,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고 싶으면, 우리 자신을 성체성사로 보아야 한다고 확실하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영성체에 참여 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선교사업에 빠져들어야한다. 그녀는 이렇게 쓴다.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새 삶을 받아들여서, 자신의 존재를 완성시키는 것은, 다른 사람들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는 것을 발견하면, 예수님을 그 사람들에게 생명의 양식이 된다. 창조적인 사랑에 관한 열망이 진정으로 충족되려면, 이런 돌파구를 거쳐야 한다. 그리스도의 선교사업에 참여하는 데서 오는 아름다운 부작용중의 하나는, 우리가 다른사람의 고통 (헬위그의 의하면, 영적인 갈망)을 덜어 줄 뿐만 아니고, 우리자신이 영적 양식을 먹게 되며, 기쁜을 느끼며, 갈망이 덜어지게 된다. 성체성사는 선교에의 부르심이다. 우리가 이 테마를 보지 못한다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빵”을 나누어 먹는 데 실패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느님이 주시는 빵을 나누어 먹지 못하면, 다른 사람에게 봉사함으로써 하느님에게 봉사하도록 우리를 받쳐주는 이 “만나”는 썩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면, 우리가 성체성사적인 선교의 표현으로써 우리가 손을 뻗치지 못한 사람들같이, 우리도 갈망이 해소되지 않고 남아 있을 것이다. *** 신비의 재발견 우리는 성체성사의 요소들이 어떻게 그리고 언제 예수님이 되는 가를 살펴보면서. 신비로 시작해서 다른 요소들을 찾아 보았다. 이제는 다시 신비로 돌아간다. 우리가 앞에서 읽은 바와 같이, 성체성사를 보는 참신한 시각과 함께, 전례의 개혁은 우리를 다시 신비의 요소로 돌아가게 한다. 데이빗 파우어는 그가 쓴 책 “우리가 바치는 희생”에서, 그가 일어나야 된다고 믿는 몇몇가지 일에 관하여 설명하였다. 이것은 오늘날의 천주교에서, 우리가 성체성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수 있도록 함이었다. 그는 다음의 실용적인 조언을 통하여 우리가 성체성사를 새로운 시각으로 볼 필요성을 상기시킨다. “교회는 그 자신의 전례와 교리의 전통을 비판적이면서 또한 건설적으로 다시 실펴볼 필요가 있다. 교회는 이 전통이 어떻게 교회의 삶에 받아들여 질 수 있는지 질문을 제시 하면서, 전통이 주는 근본적인 계시와 함께 그것의 한계를 인정하면서, 어떤 면이 도전을 받아들여야 하는지 살펴보아야 한다.” 파우어가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성체성사와 같은 살아있고 유기적인 성사를 정의 함에 있어서, 너무 제한을 가하거나 질식하게 하는 말들을 사용하도록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이렇게 한다면, 우리는 전례를 더이상 신비가 내재하지 않고, 단지 형식적인 의식규정으로 정의하는 유혹을 받게 된다. 로저 마호니 추기경은 전례 개혁의 실행방안에 관한 그의 글 “우리는 믿음하에 같이 모인다.”에서, 이 신비의 영을 포착하는 살아있고 의미있는 전례의 기초를 마련하였다. 이 문헌의 한 줄의글이 오늘날 전국의 교회를 위한 성체성사의 신비를 재발견하기 위한 출발점을 묘사한다. 이 한 줄은 이렇다; “우리는 성체성사를 기념하고 그것에 의하여 변화되는 모임이라는 것을 믿기 시작한다. 우리는 그것을 믿고 그렇게 행동하기 시작한다.” 우리가 침잠할 수 있는 신비가 있다고 믿기 시작하면, 우리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길 것이다. 우리가 이 신비속에서 할 역할이 있다면, 우리는 그렇게 살 것이다. 전례의 개혁과 교부시대의 저서들을 다시금 사랑하는 것은, 성체성사에 우리가 포기할 수 없는 신비를 재 발견하는 것을 도와 주고 있다. 우리가 신비를 포기한다면, 이천년 동안 흘러내려온 바로 그 삶 자체인 그리스도의 피를 포기하는 것이다. *** 결론 우리는 성체성사가 내가 여기서 설명한 다성가지 테마로 제한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나는 그렇지 않기를 바란다. 만일 그렇다면, 내가 피하고 싶었던 문제를 야기하게 된다. 내가 여기서 다섯가지 테마를 사용한 이유는 성체성사에 관한 나의 묵상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성체성사는 전 세계에서 행해지고 있기 때문에, 테마도 아이디어도 그 만큼 많을 것이다. 그러나, 성체성사를 분류함으로써, 나는 성체성사는 결코 어떤 제한적이나 한계적인 정의로 묶어 놓을 수 없다는 것으 보여주었기를 희망한다. 교회역사를 통하여 전해오는 진리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어떤 규정이 있다는 나는 믿고 있지만, 나는 성체신학자가 어떤 특정한 역사시기에만 초점을 맞추기를 원하지 않는다. 성령은 한상 움직이고 숨쉬는 존재를 보여지고 있으며, 나는 성령이 모든 믿는사람들에게 성체성사와 이 성사가 주는 각자의 삶에서의 역할을 이야기하고 있다고 믿고있다. 내가 쓰려고 택한 각 테마는 나 자신의 영성에 바탕을 둔 묵상에서 나온 것이다. 이 영성은 종종 보기도, 느끼기도, 냄새맡기도, 만지기도 힘든 하느님에게 가까이 가면서 아직도 자라고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작은 마을의 이 작은 교회에, 어떻게던 하느님은 찾아오시어, 한 어린아이(나)를 들어 들어올리셔서 앞으로 나아가게 하시고, 선교사업을 담당하게 하시는 길을찾아내신다. 어떻게 이런 초월적이 존재가 나같은 약하고 부족한 피조물에게 자신을 보이시는가? 단순한 방법의 하나는 소박한 빵과 포도주의 식사를 통해서이다. 이 성체성사에는 신비와 시와, 과학과 선교가 있으며, 이런 것들은 또 다시금 발견되기를 거듭하는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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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성사의 영성
2008. 8. 4. 오후 8:5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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