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달석(방지거)님의 사연

2014. 10. 7. 오후 5:1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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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음동성당 설립 70주년과 나

- 정달석 방지거 -


 길음동성당 설립 70주년을 축하합니다.


 저는 금년 81세입니다.


 저는 혜화동성당에서 프랑스출신 성재덕 신부님으로부터 태종교우로 유아세례를 받고 부모님을 따라 성당을 다녔습니다.


 혜화동성당에서 복사를 하면서 신부님들의 사목하시는 것을 지켜보았으며, 그당시 신부님과 봉성체를 해주시기 위해서 뚝섬과 그 근처까지 가는 등 어린시절을 보냈습니다.


 그후 길음동 공소가 시작되었는데, 그당시는 미사봉헌이 지금 9구역상가 경기마트자리에 노기남 주교님 형님집 건너방에서 처음미사가 봉헌되었는데 미사참례인원은 약 20-30명정도가 되었고, 다른 곳은 그근처 수련원입구(9단지) 우측 서회장님 집에서 임시로 손님신부님이 가끔 오셔서 주일미사가 봉헌되었습니다.


 그리고, 유치원같은 조그만 건물에서 주일미사는 30-50명정도 신자들이 미사에 참여했고, 평일미사는 10여명정도 참여하는 초대교회로 시작하는 모습을 지켜 보았습니다.


 그때는 6.25전쟁 후라서 신자들에게 옥수수와 강냉이죽을 나누어 주던 시절이었고 가정형편은 말할 수 없이 어려운 시절이었습니다.


 그때 연령회장의 자녀가 관면혼배를 받지 않고 결혼생활을 한다며 그것은 부모가 잘못했다고 하시며 그들을 6개월 동안이나 성당 밖에서 미사를 드리게 하는등 신부님께서는 완고하셨던 기억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그때 외국 신부님은 외모도 무섭게 생기시고 키가 워낙 크셔서 신부님과 신자가 걸어가면 황새와 뱁새가 걸어가는 것처럼 비교되는 등 특이한 상황이 자주 생기곤 했습니다.


 그리고 전교수녀님이 한분 계셨는데 외부에 전교하러 가셨다가 다른 외부사람들에게 피해를 끼치지 않게 하신다며 식사는 꼭 본원에 오셔서 식사를 하시는 등 돌아가실때까지 그런 청빈한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 당시 성당주변은 정릉 개울이 있어 비가 오면 장화 없이는 살 수 없을 정도였고, 성당근처에는 화장터와 삼화페인트가 있었고, 주변에는 묘지가 많은 산골이었으며, 미아리고개와 아리랑고개쪽으로는 호박골이라 불렸으며, 삼양동쪽으로는 중국 사람들이 많이 살았던 동네였습니다.


 길음동성당 신축을 돌로 지으면서 신자들은 시간이 날때마다 사역으로 봉사하면서 많은 신자들이 성당신축에 동참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길음동성당이 완공되었던 것입니다.


 달동네였던 지금의 16구역부근으로 기억되는데 사는 것이 어렵고 힘들었던 지역에서 신부님께서 가정미사를 봉헌하시고 지역 사목활동을 하시며 후원을 받아 성당 교육관과 부속건물을 신축하는데 일조를 하였고, 그당시 신자는 약 100명정도 였습니다.


 그후로 성당을 현재의 성당으로 신축되는 등 신자들의 고생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으며 세월이 흘러 현재의 모습으로 많은 변모를 해왔습니다.


(원문은 첨부파일 참고)

정달석(방지거)님의 사연.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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