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사] 오늘느낌 - 출발

2000. 12. 26. 오전 8:43:44

글자

 

 

내가 사용하는 성서의 안쪽 첫 번째 페이지에 그림엽서 하나가 붙어 있다. 어느 어머니가 아기를 안고 있는 그림이 있다. 배경이 그리 밝지도 않고 침침하기까지 한 유화 그림이다. 그러한 칙칙하고 어두운 가운데에 곤히 잠들고 있는 아기의 얼굴은 평화롭기만 하다. 그래서 수련자 때 붙여 놓은 그 그림을 여전히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그와는 반대로 화려한 금빛 장식으로 치장한 말구유, 부모님(요셉 성인과 성모님)보다도 덩치가 큰 갓 태어난 아기 예수님 인형이 어색하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내 미적 감각이 낮은 탓이기도 하겠지.

 

 

 

성탄을 준비하는 3일 피정을 했다. 하느님의 어전에 서 있는 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나 딱딱한 모습으로 서 있는 내 모습을 본다. 내 주장을 굽힐 줄 모르는 내 모습, 다른 이에게 낮게 비춰질까바 오히려 자신을 뽐내는 내 모습, 비난받음에 두려워하는 내 모습, 불편함보다는 나의 편안함을 추구하는 내 모습...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답답함이 먼저 밀려왔다. 그리고는 마음속에서 작은 울림이 느껴졌다.

 

 

 

"가난하고, 모욕을 당하며, 업신여김을 받는 이가 바로 나다."

 

 

 

그 울림은 나의 부족함을 책망하는 목소리도 아니고 심판하는 목소리는 더더욱 아니었다. 아주 아주 조용하게 울려왔다. 마치 혼잣말처럼. 그래서 그런지 내 마음 안에 평온함이 차 올랐다. 마치 어려운 수학 문제를 갖고 오랜 시간 끙끙거리다 해답을 찾은 것처럼. 그래서 가난, 모욕, 업신여김의 모습으로 사람되어 오신 예수님께서 내 안에 머무시길 더욱더 청하고 싶어졌다. 비록 내 안에서 그러한 가난, 모욕, 업신여김이 현실적으로 거부감이 든다 해도 계속 그러한 바람을 갖고 청하길 초대하는 사부 성 이냐시오의 사랑 어린 말씀(SPEX #157)은 나에게 큰 위로가 되었다.

 

 

 

우리는 흔히 사회 속에서 버림받은 이들을 동정 어린 눈길로 바라보며 무엇인가를 인심쓰듯 던져 주기도 한다. 하지만 갈수록 내게 느껴지는 것은 그 반대이다. 왜냐면 사회 속에서 가난과 모욕과 업신여김을 받고 있는 이들 안에서 오히려 예수님의 참모습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베풀러 가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들을 닮으러 찾아가야 한다. 그러한 예수님 앞에서 쫌팽이 처럼 움츠리지 말자. 청량감마저 느끼게 하는 차가운 겨울을 깊게 들여 마시고 힘차게 달려가서 예수님을 단숨에 안아 보자!

 

 

http://www.sogang.ac.kr/~inyo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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