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남자와 여자만 있었다고 한다.
그것이 자연의 섭리이고, 당위적인 진리라고 믿어왔다.
분명히 우리들은 남자아니면 여자이고, 여자아니면 남자다.
적어도 생물학적 분류에 의하면 그렇다.
진보적으로 말하자면, 적어도 19세기후반부터 여태 우리가 말해오고 생각해왔던 그 분류법은 조금씩 의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넓게는 20세기중반까지 사회가 진보할수록 또는 사회구조가 복잡해질수록 생물학적 분류는 더욱 확고한 입지를 가지게 되었다. 생물학적인 분류는 사회의 진화에 따라서 점차 사회학적인 분류 혹은 제한으로 심화되었는데, 그에 따라서 사회적인 책임이나 역할 분할에서 남자와 여자는 따로 생각되었다. 왜냐하면 생물학적 차이에서 오는 관점을 사회적인 역할에 그대로 대입했기 때문이다.
물론 원시 채집경제 시대에서부터 내려져오던 ’힘이 곧 정의다’라는 것은 이러한 생물학적 차이에서 여자를 열등하게 볼 수 밖에 없는 당위적인 결과를 낳았는데, 이는 생명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고착화될 수 있었다.
생명의 보존이라는 측면에서 역할의 분담이 이루어졌다는 것은 극히 일부분적인 성차별의 근원이기는 하지만, 기본적인 이유중의 하나임은 분명하다.
어쨌거나, 이러한 사회적 차별에 의해 ’여자는 태어나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는 것이다.’라고 외치는 사람들이 있는 것을 보면 원시시대를 벗어난 우리가 아직도 규정지어진 성의 차이에 대해 많은 오해를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렇게 사회적으로 차별지워진 여성의 의미를 ’ The 3rd sex ’ 라고 부른단다.
우리사회가, 우리인류가 진정으로 진보하기 위해서 넘어야 할 산이 인종차별, 경제적 차별 그리고 성차별이라고 한다면 성차별이야말로 가장 오래된 악습인 것이다. (인종이나 경제적 차별은 국지적, 지역적인 면모가 더욱 강하고, 성차별은 전자에 비해 통시적이다. 태초에 하느님께서도 인정하신 성차별은 성경에 의하면 인류의 시작과 그 역사를 같이 한다.)
차별이란 없어져야 한다. 우열관계가 아닌 이상, 성급한 수치 비교가 아닌 이상 아니, 그보다 더한 것이더라도 차별은 참 나쁜 것이다.
우리가 아니면 적이라는 발상 그 자체는 폐쇄적인 집단을 만들 수 밖에 없고 결국은 그 집단의 도태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그 집단이 다수라는 것이라면, 주도권을 가지고 있다면, 기득권의 유지라는 측면에서 보면 그러한 사고방식은 교육되어지고, 세뇌가 되어 세습된다는 점에서 더욱 무서운 것이다.
고인 물은 썩기 마련이고, 쓰지 않는 기계는 녹슬기 마련이다. 그래서 맑스는 그 결과야 어떻든 경제적인 세습을 바꾸려했고, 킹목사는 인종적인 울타리를 뛰어 넘으려 했다.
시몬 베유라는 여자가 있었다.
그녀의 삶은 고난과 투쟁으로 점철된 삶이었다.
여성의 사회적 지위 향상이라는 보이지 않는 성과를 위해 살다가 불꽃처럼 사라진 사람이다. 그녀의 일생에서 화장이라는 것을 한 것은 딱 한번이었다고 한다. 공사장의 여급으로 위장취업하기 위해 입술에 연지를 발랐던 것이다. 그런 제2, 제3의 시몬 베유들의 투쟁이 있어서일까. 여성들의 지위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설사 여성들은 불만이 계속 쌓여 가더라도 말이다.
지금부터 내가 하려는 이야기는 조금은 다른 얘기이다.
학계에는 있지도 않은 ’제 4 의 성’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하는 것이다.
얼마전 대머리 스타일을 고수하며 연기를 하던 한 연예인이 자신의 성취향에 대해 고백을 했다.
남자는 여자를, 여자는 남자를 찾아야 한다는 자연의 섭리를 거스르는 충격적인 내용의 발언이었다. 게다가 아직은 보수적인 사고방식이 사회를 움직이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그의 발언은 스스로 사회적인 생명을 끊는 하나의 자살행위와도 같다.
그런데 곰곰히 생각해 보면, 그의 성기호도 우리는 차별을 두어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문득 했다.
남성과 여성이라느 성차별안에 또다른 성차별이 존재할 수도 있다는 것이 내 생각이다. 그를 이해하라거나,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자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런 성적 기호에 대해 우리 사회가 그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 딴지를 걸지는 말자는 것이다. 그가 방송인이기 때문에 우리사회에 끼칠지 모르는 해악이라는 것이 존재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런 해악보다 더 큰 해악은 계속해서 ’너와 난 다르다. 그러니 접근을 불허하며, 내 앞에 보이지 말아 달라.’라고 하는 차별이 가져올 우리 사회의 폐쇄성이다.
로마의 옥타비아누스가 어린 남자와 관계를 빈번히 맺고, 여자테니스의 살아있는 전설인 나브로틸로바가 여성과 사랑을 나눈다고 해서 지구가 온난화가 되거나, 위성이 궤도를 이탈하지는 않는다. 그리고 이런 것은 누가 보고 배우거나, 흉내낼 수 있는 일이 절대 아닌 것이다.
나는 내가 피자를 좋아하지만, 상대방이 부침개를 좋아한다고 해서 화를 내거나, 상대하지 않으려고 하지는 않는다는 멍청한 비유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종족보존을 위해 근친상간을 하는 오지의 원주민들을 보듯, 개인의 행복을 위해 성의 기호가 다른 자들을 볼 수 있는 우리 개개인의, 사회의 깊은 아량이 있었으면 좋겠다.
다양성이 사라진 사회는 죽은 사회인 것이며, 개인의 기호를 타인들이 규정지어 줄 수는 없는 것이다. 그것이 범죄가 아니라면...
내용이 좀 그런가요...........?
운영진 판단하에 삭제하셔도 무관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