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리는 비 [19]

2012. 2. 2. 오후 9:41:40

글자

19.

넓은 평야에 해발 20m 높이의 분묘 모양의 독립 고지가 있었다. 2개 소대 병력이 간신히 진을 칠 만큼 작은
언덕이었고, 나무 한 그루 없는 빨간 점토 흙으로 된 고지였다. 그 산 북쪽에는 모래 반 물 반인 강이 100m
정도의 넓은 폭으로 S자 형으로 흐르고 있었고, 그 뒤로는 검푸른 정글 산이 끝없이 펼쳐졌다.
 

고지 남쪽에는 넓고 큰 논들이 광활한 평야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평야에는 잘 정리된 농수로들이 바둑판
처럼 그어져 있었고, 그 농수로에는 뿌연 색의 물이 풍부하게 흘렀다. 중대장이 2개 소대 병력을 인솔하여,
이 외로운 고지에서 3일 밤을 지내게 되었다.
 

굵은 물방울을 순시간에 쏟아 붓는 열대성 소나기가 막 지나간 후라, 발을 옮길 때마다 군화에는 붉은 진흙이
찰떡같이 달라붙었다. 병사들마다 고양이가 뒷발질하듯이 발을 털어 보지만, 그렇게 해서 떨어질 흙이 아니다.
그런 진흙 속에 개인호를 파고 그 위에 카키색 개인용 텐트를 쳤다.
 

이렇게 쳐진 텐트 속에서 열대의 살인적인 더위를 견딘다는 것은 엄청난 고역이었다. 견딜 수 없이 무더운
대낮이었지만 잠은 마구 쏟아졌다. 호 속에서 낮잠을 자고 있는 중에도 살인적인 더위에 의해 온 몸이 땀에
젖었다. 젖은 런닝셔츠와 팬티를 그대로 입고 있으면, 땀이 나오자마자 저절로 마르면서 소금가루가 조금씩
쌓였다. 그리고 병사들은 그 소금가루를 자주 먹었다.
 

나는 낮잠에서 깨어나 머리맡에 접어놓은 바지를 툭툭 털어 입었다. 그런데 갑자기 정강이를 면돗날로 긋는
것 같은 매우 이상한 느낌이 왔다. 반사적으로 바지가랑이를 다리에서 뜨게 한 후 흔들었더니, 새카만 연탄색
전갈 한 마리가 떨어져 나왔다.
 

순간 온 몸이 오싹했다. 이것에 쏘이면 독사에 물린 것 이상으로 생명이 위독해진다. 독성이 매우 빨리 퍼져,
헬기로 실어가도 생명을 구하기 어려울 수 있다. 전갈은 무료해 하던 병사들의 구경거리가 되었다. 병사들이
몰려와 나뭇가지로 이리저리 놀리니까, 다리를 쳐들고 대들었다.
 

그에 화가 난 병사들이 발화성이 강한 모기약을 뿌리고 성냥을 그었다. 기염을 토하던 전갈은 검게 타 재로
변했다. 전갈이 스쳐간 내 정강이에는 그 후 몇 년간 검은 줄이 길게 그어져 있었다. 바로 그 때였다.
 

"야! 저것 좀 봐!"
 

모든 병사들이 산 밑에 있는 커다란 연못을 바라보며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용같이 생긴 괴물이 상체를
1m 이상 물위에 꼿꼿이 세우고 물살을 가르며 달리고 있었다. 뱀인지, 용인지, 아님 다른 괴물인지 분간하기
어려웠다. 연못에 굵은 파랑을 일으키며 달리는 괴물의 모습은, 그야말로 일생일대의 장관이었다.
 

무서움과 신비함이 교차하는 마음으로 한 사람씩 연못가로 내려갔다. 발길은 연못가로 향하지만, 눈은 괴물이
연출해내는 장관에 고착돼 있었다. 연못가에 가서 보니 뱀의 길이는 10m, 몸통 굵기는 20cm 이상 돼보였다.
갑자기 많은 병사들이 모여들자 뱀은 호수 가운데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몇 명의 병사가 발을 구르며 우ㅡ 우ㅡ 하고 소리를 지르며 돌을 던졌지만, 거대한 뱀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몇몇 병사들이 연못 속으로 들어가면서 뱀과 눈을 맞췄다. 주위에 있던 작은 막대기를 흔들어 뱀을 위협했다.
물이 가슴까지 차오르자 뱀이 갑자기 물 속으로 잠수했다.
 

물 속 깊이 들어간 병사들 얼굴이 갑자기 굳어지면서 공포감으로 눈이 커졌다. 뱀이 물 속에서 공격해 올 수
있기 때문이다. 막대기로 자기 앞을 부지런히 좌우로 저으며 뒷걸음으로 연못을 나왔다. 뒷걸음치다 넘어진 
병사도 있었는데, 그의 얼굴은 말 그대로 사색이었다. 
 

그러나 그 뱀을 어찌해 볼 도리가 없었다. 나는 급히 야전 전화선을 길게 잘라서 커다란 올가미를 만들었다.
그리고 뱀에게 던져 목에 걸라고 했다. 몇 번의 실패 끝에 괴물의 목이 커다란 올가미에 들어왔다. 올가미를 
잡아 당기자 뱀의 목이 올가미에 조여졌다. 그런데 뱀이 육지로 끌려 나오자 뱀의 속도가 빨라졌다.
 

낚시대 처럼 막대기보다 전화선 길이가 더 길어 막대기는 뱀의 접근을 제지할 수 없었다. 높은 논둑 사이로
희뿌연 흙탕물이 흘렀다. 한 병사가 뱀을 끌고 논둑을 힘껏 달렸지만, 그는 곧 더 빠른 뱀에게 쫒기는 신세가
되었다. 반대편 논둑에는 다른 병사들이 나란히 달리고 있었다.
 

양쪽의 두 논둑이 갑자기 단거리 육상경기장 코스로 변했다.
 

"야, 김 병장 안 되겠다. 그 막대기 이 쪽으로 던져."
 

그러나 김 병장은 손에 쥔 막대기를 던질 수 없었다. 막대기를 던지면 뱀이 더 자유로워져, 자기에게 달려들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키가 작고 통통한 중대장이, 왕년의 기록을 믿은 때문인지 막대기를 받아 쥐고 달렸다.
그의 고개가 좌우로 뱀과 논둑을 보며 바쁘게 돌아갔지만, 그도 뱀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눈이 점점 더 커지고 짙은 눈썹이 위로 치솟았다. 나는 그에게 막대기를 던지고 오른쪽 둑으로 건너 뛰라고
소리쳤다. 그가 막대기를 던지자 올가미가 뱀의 목에서 벗겨졌다. 뱀은 계속 목에 올가미가 걸린 줄 아는지
폭 1.5m의 수로를 가로질러 따라왔다.
 

병사들은 뱀이 사람을 공격하려고 따라 오는 줄 알고 제각기 흩어져 도망갔다. 병사들이 멀리 흩어지자, 뱀은 
성황당 돌무덤 같이 쌓아올린 구멍 속으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꼬리 부분만 남게 되자 갑자기 서운한 생각이
들었다. 나는 두터운 정글 가죽장갑을 끼고 있는 병사에게 꼬리를 잡아 당기라고 했다.
 

"소용없습니다. 소대장님, 뱀은 절대 뒤로는 나오지 않습니다."

"야, 그래도 한 번 힘껏 당겨 봐."
 

여러 명이 달려 들었다. "하나, 둘, 셋." 힘을 한 순간으로 집중했더니 뱀이 조금씩 끌려나왔다. 그렇게 여러
차례 당기자 뱀은 허리까지 끌려 나왔다. 그런데 또 다시 큰 일이 생겼다. 뱀이 완전히 끌려 나오면 아무리
꼬리와 몸통을 잡고 있어도 상체를 움직여 공격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야, 꼬리서부터 굴 입구까지 노출된 뱀의 온 몸을 빈틈없이 발로 눌러. 내가 하나, 둘, 셋 하면 발을 조금만
풀었다가 다시 밟아야 해. 발을 푸는 동안에 당기는 사람들은 한 번에 아주 조금씩만 당기는 거야. 한 번에
왕창 많이 당겼다가 머리가 확 나오면 물리니까 조심 해."
 

드디어 목 부분이 보였다. 힘이 센 병사가 정글 장갑을 끼고 목의 잘록한 부분을 힘껏 조였다. 뱀의 입이 쩍
벌어졌다. 평소 색시 같던 의무병이 핀셋을 가져와 이빨을 모두 뺐다. 병사들은 안심하고 뱀을 나란히 팔에
걸치고 사진을 찍었다.
 

뱀의 머리에서 꼬리까지 15명의 병사가 나란히 서서 들어 올렸다. 연대에서 헬기가 날아와 그 뱀을 가져갔다.
순진한 마음에 모두는 그 뱀이 창경원에 갈 줄로 알았다. 하지만 나중에 들리는 소문으로는, 부연대장님 등의
어른들이 보신용으로 삶아 드셨다고 했다. 이빨이 없어 오래 살지 못한다는 것이다.
 

몇 년이 지난 후 나는 그때를 희상하면서 후회했다. 아무런 목적의식 없이 하나의 생명을 죽였기 때문이다.
베트공의 목숨도 바로 이런 것이었다. 소위 때, 베트공이 많이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수색 작전을 나갔다.
불과 200m 거리에 있는 숲에 도착하니, 검은 옷을 입은 베트공?들이 날아다니듯 이리저리 도망쳤다.
 

이를 지켜본 중대원들은 모두 그들을 베트공으로 단정했다. 산 속에서 검은 옷을 입고 뛰어다니는 사람들을
순수한 양민으로 볼 수는 없었다. 그래서 그들에게 105m 포탄을 퍼부도록 유도했다. 내가 유도한 포탄이지만
그 위력은 참으로 가공스러울 만큼 무서웠다.
 

나에게까지 파편이 날아올 정도로 무자비하게 때렸다. 이를 지켜보는 보병들은 입을 벌린 채, 나뭇가지들이 
잘려지고 쪼개져 내리는 장관을 한동안 지켜보고 있었다. 쏠 만큼 충분히 쏘았는지 사격이 멈추자, 병사들은
독 안에 든 쥐를 잡는다는 부푼 꿈으로 포탄 세례를 받은 숲을 수색했다.
 

그런데 그 꿈은 곧 물거품이 되고 말았다. 숲 속을 샅샅이 뒤졌지만 핏방울 하나, 하다못해 나뭇가지에 걸린
찢어진 옷자락 하나 발견할 수 없었다. 아마도 그곳에는 지하 아지트가 건설돼 있는 듯 했다. 그렇지 않으면
조금 전까지 이리저리 뛰어 다니던 여러 명의 검은 옷들이 사라질 방법이 없었다.
 

핏방울조차 발견할 수 없었던 당시의 허망한 기분, 그 당시에는 너무나 서운했지만, 이 글을 쓰는 지금 다시
생각해 보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들은 살았어야 했다. 40년 전의 진실은 지금의 진실이 아니
었다. 현재의 잣대로 과거를 단죄해서는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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