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도 내리는 비 [13]

2012. 1. 25. 오후 11:09:53

글자

13.

1966년 2월 28일은 육사 졸업식 및 소위로 임관하는 날이었다.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가 나란히 참석
하여 육군소위로 임관하는 180명의 동기생과 일일이 악수를 하셨다. 졸업을 학수고대하던 동기생들도 막상
졸업하니까 허전한 모양이었다. 말이 졸업이지 이는 또 다른 고된 훈련으로 이어지는 통과의례에 불과했다.
 

불과 1주일의 졸업휴가가 끝나기 무섭게 전남 광주에 있는 병과학교에 내려가 5개월간 전술교육과 1개월의
유격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래도 갖나온 소위들은 '졸업을 했으니 이제는 지긋지긋한 내무반 생활이 아니라
하숙생활을 하면서 어느 정도 자유를 누리게 될 것'이라고 기대했다.
 

웬지 하숙생활에는 낭만이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런 꿈들은 상무대 입교 첫날에 산산조각이 났다. 첫날부터
또 다른 야전 내무반 생활이 시작됐다. 사관학교 내무반이 호텔이라면 포병학교 내무반은 3류여관방이라 할
수 있었다. 내무생활을 지도 감독하는 간부들은 통상 육사 선배였다. 이들은 육사 18기 중위들로 소위들을
인격체로 보지 않고 새카만 후배로만 취급했다. 소위들은
 

"우리를 언제까지 영내생활로 붙들어 맬 작정인가? 우리도 이제 장교인데 왜 자유를 구속하려고만 하는가?"
 

선배들에게 항의했지만 그들도 장군들 명령을 수행하는 사람들에 불과했다. 그래도 소위들은 자신들 요구를 
반영해 주지 못하는 선배들을 원망했다. 선후배간에 불신과 불화가 싹튼 것이다. 이런 현상은 병과학교에만
있는 게 아니었다. 동기생들이 모여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전후방을 막론하고 선배들은 후배들을 인격체로 
보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후배들의 눈에 비친 육사 선배들은 많은 경우에 마음이 그다지 너그럽지 못하고, 편협하고, 융통성도 없고,
베풀 줄도 모르는 사람들로 비치는 경우가 참으로 많았다. "저 애는 내 후배다." 실무부대에서도 육사생활이
계속되는 것이다. 선배는 선후배 개념만 가지고 후배들을 지휘했다. 그래서 후배들은 선배들과 대화를 기피
하면서 불신을 쌓는 경우가 많았다.
 

"너는 기껏해야 후배에 불과해. 네가 알면 얼마나 알고 잘나면 얼마나 잘났느냐? 육사를 나오면 다 거기서
거기 아니냐? 너라고 해서 용빼는 재주가 있느냐?"
 

후배가 아무리 훌륭하고 능력이 있어도 후배는 어디까지나 후배에 불과했다. 이는 나이가 들어도 한 결 같이
고치기 힘든 육사인들의 고질병인 것 같다. 일반 사회인들에게 인정받고 존경받는 후배들이 있어도, 선배들은
후배가 잘나면 얼마나 잘났겠느냐는 표현들을 한다. 물론 내가 본 것은 빙산의 일각일 것이다.
 

나는 선후배간 불화에 대한 이야기를 참으로 많이 들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전방, 월남, 합참, 육군본부 등에 
근무하면서 사관학교 선배들을 직속상관으로 모시지 않는 것을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한 적이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 역시 국방부에서 처음으로 육사출신 선배를 과장으로 모시게 됐다.
 

그리고 나는 10년 선배인 그 과장을 지금까지도 좋아하지 않는다. 내가 접했던 수많은 일반장교들은 나를
키워주었지만 나와 부딪친 몇 몇 선배들은 나를 질투하고 시기했다. 물론 나의 접촉 범위가 좁기는 하지만
내가 존경하는 선배들은 소수에 지나지 않는다. "너는 내 후배야." 아마도 이것이 육사인들의 단결을 해치는
가장 큰 요소가 아닌가 싶다.
 

1980년대에 나는 국방연구원에서 8년간 매우 활발하게 군의 문제점을 파헤쳤다. 정호근 대장, 신치구 차관을
비롯한 비육사 장군들은 나를 국보라고 칭찬해 주었다. 윤성민 국방장관은 나의 연구 결과를  채택하여 5년간
예산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참모회의에서 공언했다.
 

"강 박사가 장관을 보고자 할 때는 3일 이내에 만나게 하라. 하루에 8시간을 계획해도 좋다."
 

나는 육,해,공군 전군을 순회하며 내가 제안했던 예산개혁 내용을 강연했다. 하지만 당시의 많은 육사 선배
장군들은 나를 질시했다. 11기 이기백 장관, 12기 황인수 차관, 12기 황인영 기획관리실장은 나를 트러블메이
커라고 불렀다. 결국 그 세 사람의 압력에 의해 나는 1987년 2월 28일 대령으로 옷을 벗고 연구원을 떠나
미국으로 갔다.
 

그런데 이는 나에게 엄청난 전화위복이 되었다.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연봉 53,000달러를 받으며 미국방성에
3년간 근무하는 기회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미국 정부의 정책 성향과 사고방식에 매우 익숙하게 
되었다. 물론 모든 선배가 다 그런 건 아니다. 하지만 나와 같은 불유쾌한 경험을 가진 육사인들은 나 외에도
꽤 많을 것이다.
 

육사인들은 그야말로 군의 대들보 역할을 하라고 국민 혈세로 비싸게 키운 엘리트 자원들이다. 그래서 육사인
들 상호간의 불신 현상은 국가안보는 물론 육사인들의 이미지를 위해서도 바람직스럽지 않다. 이는 육사인들이
교정해 나가야 할 큰 과제라고 생각한다.


드디어 지겹던 포병학교 기초전술과정도 8월 말에 끝났다. 소위들은 4년 반이라는 단체생활을 청산하고 각각
전방부대로 흩어졌다. 마치 병아리들이 어미 품을 떠나 흩어지듯이! 매일같이 얼굴을 볼 수 있는 동기생은 
이제 더 이상 없게 됐다. 1966년, 양평에 있던 백마부대가 맹호부대 뒤를 이어 월남으로 파병됐다.
 

"달려라 백마!"
 

콧날을 시큰하게 하는 인기 군가가 방방곡곡에 울렸다. 백마사단이 떠난 공백을 메우기 위해 조치원에 있던
제32향토사단이 정규사단으로 증편되어 양평으로 이동했다. 수천 명의 병사들이 이 부대 저 부대에서 차출돼 
왔다. 각 부대에서는 틀림없이 이쁜 녀석들은 남기고 덜 이쁜 녀석들만 골라 보냈을 것이다.
 

나는 제32사단 제298포병대대 작전과 보좌관으로 보직됐다. 지역도 낯설고 사람들도 낯설었다. 황야에 버려진
외로운 송아지라는 생각이 들 만큼 불안하고 허전했다. 이제까지는 누군가에 의해 피동적으로 움직여졌지만
이때부터는 혼자서 선택하고 혼자서 책임을 져야 했다.
 

직속상관인 작전과장은 고참 대위로 대대장과 부대대장에 이어 세 번째로 높았다. 작달막한 키에 통통한 체구,
성질이 급하고 변덕이 많아 동작이 어디로 튈지 모를 불안한 사람이었다. 작전과에는 ROTC 소위가 또 한 명
있었다. 그 소위는 작전과장의 성질을 잘 맞추면서 작전과장이 기르는 토끼, 닭, 강아지 같은 동물들을 보살펴
주기도 하고 새 동물을 사다가 재산(?)을 늘려 주기도 했다.
 

일반대학을 다닌 그 소위와 딱딱한 육사를 나온 나와의 차이였다. 포병대대에서 작전과장의 위치와 역할은
대단했다. 그런데 그 작전과장이 행패가 심했다. 병사들의 원성과 불만이 높았지만 마음씨 좋은 대대장은 차마
그를 제지하지 못했다. 그럴수록 그의 행패는 날로 더 심해졌다.
 

밤이 되면 야외훈련으로 고생하는 포대들을 찾아다니며 하사관들로부터 술대접을 받기도 했고, 훈련에 열중
하고 있는 하사관에게 트집을 잡아 조인트를 까고 뺨을 때리기도 했다. 선물을 바치지 않는 것이 이유였다고
한다. 어느 날 나는 책상에 앉아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작전과장이 들어와 내게 말을 걸었다. 나는 책상에 정자세로 앉아 묻는 말에 공손히 대답했다. 그런데 이 웬
일인가? 그가 갑자기 뛰어 오더니 다짜고짜 나의 뺨을 후려치지 않는가.
 

"이 개새끼, 네가 임마 그렇게 거만하냐? 야, 임마, 과장이 물으면 벌떡 일어서서 대답을 해야지, 그래 임마
뻣뻣하게 앉아서 대답을 해? 이 개새끼 같으니."
 

맞는 순간에는 온통 사병들 얼굴만 떠올랐다. 부하들 앞에서 따귀를 맞다니! 쥐 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나는 그 길로 자취하고 있는 집으로 돌아가 이불을 뒤집어 쓰고 누워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대대장님이 내
숙소에까지 찾아와 나를 달랬다.
 

"강 소위, 내가 작전과장을 혼내 주었으니 내일부터 출근하게. 우선 포대장 자리가 비어 있는 B포대로 내려가
포대장 직무대리를 하게, 대위가 지휘하던 부대를 소위가 지휘하는 것은 바로 강 소위가 대위로 진급한 거나
같은 것 아닌가?"
 

제2포대, 즉 B포대에 가서 나는 누구의 간섭도 받지 않고 포대장 대리로 재미있게 근무했다. 포대에는 ROTC
출신 소위가 두 명 있었다. 나와 같은 연도에 임관한 ROTC 4기들이었다. 백 소위는 토요일에 외박을 나가면
수요일에야 돌아왔다. 주의를 주면 알았다 해놓고는 또 그랬다. 그래서 장교들은 그를 함흥차사라로 불렀다.
 

전주 출신 유 소위는 툭하면 병사들에게 욕하고 난롯가에 있는 장작을 무자비하게 집어던졌다. 그의 잔인성은 
순전히 습관이었다. 병사들은 그런 그를 무서워하면서도 속으로는 불만을 쌓고 있었다. 한번은 덩치 큰 하사가
술을 먹고 내무반에서 그를 향해 총기를 난사하기도 했다.
 

퇴근시간만 되면 예외 없이 대대장이 지휘관들과 참모들을 불렀다. 지시사항이 떨어지면 대부분의 장교들은
얼굴을 찡그렸다. 퇴근이 늦어지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들처럼 대대장 앞에서 얼굴을 찡그리고 싶지 않았다.
어차피 해야 하는 일인데, 구태어 대대장을 기분나쁘게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나는 회의에서 항상 밝은
표정으로 시원시원하게 대답했다.
 

"네, 알겠습니다." 또는 "문제 없습니다."
 

하지만 시원시원하게 대답은 하면서도 속으로는 난감했다. 그러나 포대에 내려와 분대장 이상의 간부들과
의논하면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쉽게 풀렸다.
 

그때만 해도 미8군의 지휘검열이 있다고 하면 지휘관들이 아주 긴장을 했다. 추운 겨울 날 저녁, 대대장으로
부터 숨 가쁜 지시가 떨어졌다.
 

"내일 새벽 6시에 8군 출동태세 점검이 있으니 만전을 기하라."
 

나는 처음 당하는 일이라 공포감마져 들었다. 경험이 많은 고참 대위들은 포대로 돌아가 간부들에게 엄하게
지시를 내렸다.
 

"내일 새벽 미8군  출동태세 지휘검열이 있을 예정이다. 각자는 적재카드를 찾아놓고 준비에 만전을 기하라.
잘못하면 대가를 지불하게 될 것이다. 알겠나?"
 

이렇게 말하고 그들도 퇴근했다. 오랜 경험에 비춰 볼 때 그렇게만 하면 잘될 거라고 믿었을 것이다. 그러나
출동준비가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차 모르는  풋내기 소위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나는 간부들을 모아놓은 후
대대장 명령의 취지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하사관들은 별 일 아니라는 듯이 말했다.
 

"소대장님, 이런 일, 한두 번 해봅니까? 아무 걱정 마시고 퇴근하십시오."
 

하지만 나는 그렇게 할 수 없었다.
 

"1개 분대만이라도 간단히 예행연습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
 

나이 든 하사관들이 반갑지 않은 눈치였다. 얼큰한 돼지 찌개와 소주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나는 내무반 마루에 분필로 트럭적재함 크기의 네모를 그리게 했다.
 

"지금 비상이 걸렸다고 가정하고 이 박스 안에 전투 장비를 실어봅시다."
 

포병에는 장비와 물자가 많다. 출동하려면 차량마다 많은 것을 실어야 한다. 빠짐없이 싣고, 찾고 싶은 것을
쉽게 찾아내기 위해서는 어느 물자가 어느 차량 어느 위치에 실려 있는지 알 수 있게 하는 수단이 필요하다.
그것이 바로 손바닥 크기의 "적재카드"였다.
 

어떤 주부는 냉장고의 각 위치에 무엇이 저장되었는지를 그림으로 그려 냉장고 문에 부착한다고 한다. 적재
카드란 이런 것이었다. 나는 적재카드 하나를 꺼내보라고 했다. 그 카드에 따라 장비를 하나하나 실어 봤다.
문제 없다던 적재카드에 문제가 많았다. 적재 위치와 적재 순서가 비현실적인 경우가 많았다.
 

실어야 할 장비가 어느 창고에 보관돼 있는지도 몰랐다. 찾는 장비가 무거운 물건들 속에 감춰져 있어 꺼내는
데에도 시간이 걸렸다. 자주 꺼내야 하는 물자가 맨 밑에 실리도록 작성돼 있었다. 이동 중에 물자들이 이리
저리 요동을 치도록 작성돼 있기도 했다.
 

내가 문제들을 지적하자 모두들 동감을 했는지 간부들과 병사들은 시키지도 않은 토의를 했다. 스스로 문제를
찾아내고 스스로 풀시 시작했다. 문제를 발굴해 내는데에도 병사가 최고였고, 대책을 내놓는 데에도 병사들이
최고였다. 새벽 2시가 돼서야 모든 문제가 정리됐고 새로운 적재카드도 만들어졌다.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병사들은 다음날 아침에 무엇을 해야 할 지 딱 부러지게 외웠기 때문에 마음이 편했다.
공기마져 팽팽하게 얼어붙은 새벽 6시, 서슬 퍼런 비상이 걸렸다. 내가 지휘하던 제2포대는 10분도 안돼서
질서정연하게 "출동준비완료"를 우렁차게 보고했다.
 

대대장 이하 모두가 놀랐다. 그러나 대위들이 이끄는 포대들은 2시간이 지나도 끝날 줄 몰랐다. 화가 머리 끝 
까지 난 대위들이 병사들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막대기를 던지고 소총을 휘둘렀다. 병사들은 성난 장교들을
피해 바쁘게 뛰어다녔지만 뛰는 양에 비추어 성과는 저조했다.
 

경험이라는 것은 조직적인 사고력 앞에 아무 것도 아니었다. 아무 비판 없이 쌓아온 경험은 두뇌만 퇴화시켰다.
 "엄명"은 부질없는 존재였다. 나는 군대생활 전체를 통해 엄명을 내린 적이 없다. 협박을 한 것은 더더욱 없다. 
"자네들만 믿네. 잘 들 해주게. 잘 끝내고 우리 회식 한 번 하지" 이렇게 말한 일도 없었다. 간부들과 토의를 하면
안 될 것이 없다는 생각은 이때부터 굳어지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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