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밀가루 반죽을 두 손으로 늘려놓은 것 같이 남북으로 길게 늘어진 베트남 국토, 동해안을 따라서 1번도로가
나 있었고, 이 도로 주위에는 광활한 농토가 전개되어 있었다. 그리고 미군이 설치한 송유관이 끝없이 이어
졌다. 한국군은 바로 이 1번도로 주변에서 월남 주민들과 친구가 되기 위한 선무작전을 펴면서 배트공 지배
지역을 하나씩 평정해 나갔고, 미군은 국경지대에서 월맹 정규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맹호사단은 퀴논시를 중심으로 한 북부 지역을, 백마부대는 나트랑과 뚜이호아시를 잇는 남부 지역에 배치돼
있었다. 백마사단 중에서 제28연대는 북쪽 뚜이호아 지역에, 제29연대는 사단사령부와 함께 닌호아라는 중간
지역에, 그리고 제30연대는 맨 남쪽인 나트랑 지역을 맡고 있었다.
제28연대 지역은 베트공과 월맹군의 소굴로 육군소위가 가면 '죽지 않으면 병신' 이 된다고 전해지는 지역인
반면, 남쪽 제30연대 지역은 소위가 가도 1년 내내 베트공 구경 한번 못하는 그야말로 안전지대였다. 피월
새내기들은 땅거미가 내려앉을 무렵에야 사단사령부 보충대에 도착했다.
숙소로 지정된 우중충한 텐트가, 낮에 받은 고열과 특유의 천막 냄새를 마구 뿜어내고 있었다. 해가 지면서
모기가 달라붙기 시작했다. 월남 모기! 어찌나 극성맞던지 촘촘하게 짜인 작업복까지 뚫고 들어오기 때문에
월남의 밤은 모기약 없이는 견딜 수 없었다.
보충대 중대장은 이런 사실을 아주 잘 알고 있을 텐데도 그 흔해 빠진 모기약 하나 지급하지 않아 월남에서
보내는 첫날밤을 모기에게 뜯기며 지새게 했다.
군함에서는 멀미를 핑계로 청소조차 하지 않고 침대에 누워 있었던 친구들이 보충대에 오고 나서는 감자기
초롱초롱 눈빛을 반짝이며 여기저기에 전화를 걸면서 분주하게 움직였다. 일하는 데에는 꾀를 부리던 그들이
살아남는 데에는 재주가 참으로 뛰어나구나 싶었다.
이틑날이었다. 맹활약?을 벌이던 친구들은 사령부에 남게 됐다며 즐거워 했고, 나 같이 배경 없는 30여 명의
장교들은 시누크(CHㅡ47)라는 육중한 헬기를 탔다. '따따따.......' 시누크 지붕에서 맞물려 돌아가는 두 개의
프로펠러가 내는 굉음이었다.
밖은 볼 수 없고 소리만 요란하게 고막을 울렸다. 어둠컴컴한 기체 내에 갇혀버린 새내기들은 약 40분 동안
입을 굳게 다물고 있었고, 조용한 눈망울들에는 모두 공포의 빛이 역력했다. 나는 보병 제28연대의 파트너인
제30포병대대에 배치됐다.
보병 연대본부와 포병대대 본부는 해안가 넓은 백사장을 낀 광활한 대지에 함께 위치해 있었다. 군수부대와
병원, 간호장교 숙소, 보병 제1대대 본부, 한국군 PX, 헌병대, 보안대도 같이 있었다. 기지 주변에는 윤형 철조망
이 5중으로 설치돼 있었고, 밤에는 기지 밖에서 기어 들어올지 모를 베트공을 감시하기 위해 전등불이 촘촘히
밝혀져 있었다.
위치가 적라라하게 노출돼 있기 때문에 1년에 몇 차례씩은 베트공에게 극심한 박격포 공격을 받았다고 한다.
한 때는 십여 명의 특공조가 철조망을 뚫고 들어오다가 우리 초병들의 집중사격을 받아 사살된 적도 있었다.
언제나 적에게 노출돼 있는 기지를 방어하기 위해서는 적극적인 공격수단을 강구해야만 했다.
때로는 대규모 작전을 수행하기도 했고, 작전이 없는 날에는 매일 같이 베트공이 다니는 길목에 나가서 매복
했다. 배트공은 야간에 활동하기 때문에 그들이 다닐 만한 길목에 소대 단위로 매복해 있다가 그 길을 따라
오가는 베트공을 잡는 작전이었다.
이렇게 공격작전을 하는 이유는 마을을 베트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베트공을 항상 공격
하지 않으면 반대로 한국군이 공격을 당하기 때문이었다.
연대기지로부터 3km 떨어진 서남쪽 지역에는 삼각산보다 더 우람한 바위산이 우뚝 서서 한국군 기지를 내려
다보고 있었다. 집채보다 더 큰 바위들, 더러는 25층 아파트보다 더 큰 바위들로 뒤엉켜 이루어진 산이었다.
정상에는 높이 150m나 되는 깎아 세운 듯한 쌍 바위가 하늘을 찌를 듯이 우뚝 솟아 있었고, 그 밑에는 천길
만길의 깊고 푸른 바닷물이 호수처럼 잔잔했다.
월남에서도 유명한 봉로만이다. 동그란 봉로만 저 편에는 눈이 부실 만큼 하얀 백사장이 둥글게 띠를 만들고
있었다. 그 띠에 갇혀 있는 깊은 바다는 태양의 위치에 따라서 다양한 색깔을 연출했다. 때로는 검은 색으로
어느 때는 에메랄드 색, 또 투명한 가을 하늘 색으로 변했다.
아침부터 저녁에 이르기까지 바라볼 때마다 색깔이 다르고 느낌도 달랐다. 평화 시라면 가히 환상적인 풍경
이었을 것이다.
정상적이었다면 나는 도착하자마자 포병대대본부로 가서 대대장과 포대장에게 신고해야 했다. 그러나 도착한
그 날이 그 유명한 한 달간의 '홍길동 작전' 이 시작되기 하루 전이었다. 그 때문에 대대장과 포대장의 얼굴도
보지 못하고 곧바로 보병 제3중대로 직송됐다. 포병 관측장교로 파견된 것이다.
보병 제3중대는 기동타격중대였다. 급한 상황이 전개되거나 다른 부대에 작전지원을 나갈 때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5분대기조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3중대는, 연대에 소속돼 있는 14개 중대 중에서 가장 많은
전과를 기록했다.
백마사단 전과의 90%는 제28연대가, 28연대 전과의 50%는 제3중대가 올렸다. 보병 제1대대는 연대기지 내에
위치해 있었고, 제2대대와 제3대대는 북쪽과 서쪽으로 각각 30~40분 정도의 차량거리에 멀리 떨어져 있었다.
모든 보병부대들은 베트공의 활동을 감시할 수 있는 여러 개의 거점을 선정해서 중대 또는 소대 단위로 벙커
진지를 운영하고 있었다. 이를 홈베이스라고 불렀다. 마치 옛날 일본의 성처럼 중요한 거점지역에 성을 구축
하여 거점과 거점 사이에 산재해 있는 베트공들이 발을 붙이지 못하게 통제하는 개념이었다.
나는 바로 이런 통제형 거점 방어 개념이 우리 한국 방어에도 적용돼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이는 복잡한 이야
기니까 여기선 생략한다. 월남전은 게릴라전이다. 게릴라들이 민간 복장을 하고 다녀 마을에서 만나는 사람이
민간인인지 베트공인지 누구도 알 수 없었다.
게릴라들이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자산은 주민들이다. 주민들 도움 없이는 작전을 할 수 없는 것이 게릴라
전술의 핵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오쩌둥은 "게릴라는 물고기요, 주민은 물"이라고 가르쳤던 것이다. 간첩
을 신고하는 사람도 주민이고, 적군의 움직임 등에 대한 정보를 주는 사람도 주민이고, 배고픈 군인에게 밥을
지어주는 사람도 주민이다. 주민들 도움 없이는 작전에서 성공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한국군은 게릴라전의 전문가인 채명신 장군을 초대 주월군사령관으로 보냈다. 그는 주민과 게릴라를
분리하기 위해 대민활동을 강조했다.
"100명의 베트공을 놓치는 한이 있어도 한 사람의 양민을 보호하라."
"병사 한 사람 한 사람은 모두가 외교관이다."
"예의를 가지고 주민을 대하라."
이러한 명령적 구호에 따라 한국군은 마을 주민에게 쌀을 주고, 교량과 건물을 지어주고, 태권도를 가르쳐
주고, 잔치를 열어주고, 치료를 해주었다. 월남에서 '따이한' 은 친절의 대명사였다. 같은 물자라도 미군이
주면 거부하지만 한국군이 주면 고마워했다.
낮에는 민간 마을에 따이한의 이미지를 심어 주민의 마음을 한국군 편으로 만들고, 밤에는 이런 민간인들이
베트공에게 보복을 받지 않도록 마을을 지켜 주었다.
이 지역에는 '피의 계곡' 이라 불리는 베트공의 요새가 있었다. 집채 만한 바위들로 구성된 계곡이라 항공기
들이 아무리 많은 폭격을 퍼부어도 끄떡없었다. 지하 2층, 3층 심지어 5층까지 동굴이 형성돼 있어 난공불락
의 요새였다. '피의 계곡' 은 용감한 청룡부대가 이 요새를 공격하다 수많은 희생자를 냈다 해서 붙여졌다.
청룡부대는 '앞으로 전진' 하는 식으로 공격하다가 숨어서 쏘는 베트공 공격에 속수무책으로 당한 것이다.
제3중대장은 육사 16기생으로 깡마르고 작은 키지만 생도 때는 럭비선수였다고 한다. 월남전에서 많은 훈장
을 탔지만 훗날 2성 장군으로 예편했다. 관측장교인 나는 언제나 그 중대장과 한 팀으로 행군하면서 3중대에
포병화력을 지원하는 임무를 수행했다.
나에게 그 관측장교 자리를 인계한 장교는 육사 1년 선배였다. 그동안 별로 친하게 지낸 일 없는 선배였는데
나를 보자마자 너무나 반가워했다. "야, 육사 선배라는 게 이렇게 좋은 거구나!" 작전 전날, 그는 하루종일 싱글
벙글 했다고 한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나의 도착이 하루만 늦었어도 한 달간 작전에 투입될 뻔 했던 것이다.
많은 장병들이 귀국을 불과 며칠 앞두고 전사했는데. 이는 모든 장별들에게 징크스로 작용했다. 그는 그래서
귀국을 하루 앞둔 싯점에서 나를 보자마자 그토록 기뻐했고 인간적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생각하면
전쟁 터에서 매일 삶과 죽음을 넘나드는 처지인 만큼 전장심리의 하나이기도 했다.
새 주인을 만난 나의 당변병과 무전병이 와서 첫인사를 하고는 내가 짊어지고 갈 군장을 꾸려 왔다. 그리고
4개의 수통에 물을 담아 갖고 와서 말했다.
"소대장님, 물을 아껴 드십시오. 물 만큼은 남에게 주지도 말고 달라고 해도 안 됩니다. 산 속에 있는 물은
베트공이 독을 넣는다고 합니다. 시장에서 파는 수박에도 독을 넣는다고 합니다. 반드시 수통의 물만 드셔야
합니다."
이틑날 검은 새벽, 각자는 무거운 표정에 완전군장을 하고 헬기장으로 행군했다. 마치 밤 도깨비 행렬처럼
보였다. 정원 5명의 헬기가 지상에 닿는 둥 마는 둥 기우뚱 거리며 병사들을 태웠다. 헬기가 날아가는 동안
모두가 말이 없었다. 생전 처음 타보는 헬리콥터! 옆문을 닫지 않은 상태로 옆으로 누워 날아갔다.
안전밸트를 멨지만 금방이라도 쏟아져 내릴 것만 같아서 있는 힘을 다해 앞 의자를 움켜쥐었다. 그러나 후에
알고 보니 그렇게 움켜쥘 필요가 없었다. 낮게 날아가는 헬기를 정글 속에서 총을 쏘면 어떻게 하나, 마음을
졸였다.
밑에는 뽀송뽀송하게 보이는 푸른 벼가 융단처럼 깔려 있었고, 그 사이로 간간이 나타나는 시냇물에 희뿌연
흙탕물이 희미한 여명을 받아 반짝 반짝 빛을 냈다. 정글로 뒤덮인 산이 끝도 없이 전개되었다. 검푸른 솜을
뭉글뭉글 깔아놓은 것처럼 보드랍고 아름답게 보였다.
이내 넓고 평평한 고산지대가 펼쳐졌다. 산 정상은 뾰족한 봉우리가 아니라 넓게 전개된 또 다른 평야였다.
사람 키를 훨씬 넘는 갈대밭이 전개됐다. 하지만 위에서 보기에는 아름다운 잔디밭이었다.처음 보는 이국의
경치, 신기하고 아름답기만 했다.
사람 키를 넘는 갈대밭 위에 헬기가 공중 부양된 상태에서 정지했다. 뒤뚱거리는 동안 병사들이 2m정도 높이
에서 뛰어내리자마자 쏜살같이 사방으로 뛰어 엎드렸다. 몸에 밴 동작이었다. 중대마다 내리는 곳이 달랐다.
광활한 정글의 산에 2개 사단 병력이 이런 식으로 바둑판처럼 깔렸다. 월남전 역사에 가장 길었다는 홍길동
작전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정글 속에서 행군은 언제나 일렬종대였다. 1996년 9월 18일, 강릉 해안에 북 잠수함이 좌초했다. 잠수함에는
승무원을 포함해 26명의 무장간첩이 타고 있었고, 이들은 잠수함이 좌초하자 산으로 달아났는데, 11명은 산
속에서 스스로 자살했고, 13명은 사살되고 1명은 생포되고 1명은 북으로 달아났다.
이런 결과를 얻기까지 국군은 1996년 9월 18일부터 11월 7일까지 51일 동안 매일 평균 7만 명의 병력을 산에
투입했다. 그 당시 합참의장은 병사들이 일렬횡대로 늘어서서 산을 샅샅이 뒤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무가 우거진 산 속의 수색은 절대로 횡대로 하면 안 된다.
길을 따라 일렬종대로 이동하기에도 벅찬 것이 산악작전이다. 그래서 중요한 길목을 잡는 지혜가 필요하다.
지휘관의 전략적 판단이 절대적으로 중요한 것이다. 베트공은 이렇게 이동하는 한국군을 잡기 위해 길목을
지키며 기다렸다. 부비트랩을 놓기도 했고, 웅덩이를 파고 독침을 꽂아 놓은 후 위장을 해 놓기도 했다.
강릉 잠수함 좌초 사건을 지휘한 4성 장군은 이런 기본적인 상식조차 없이 태백산 일대에 병사들을 저인망
식으로 배치하여 포위망을 좁히는 작전으로 불필요한 피해를 야기시켰다. 대령 1명과 대위 2명, 하사관 1명,
사병이 4명 전사했고, 17명이 부상을 당했다. 민간인도 여러 명 사망했다.
당시 합참의장이 월남전을 제대로 이해한 지휘관이었다면 이런 무모하고 무식한 작전을 펴지 않았을 것이다.
정글 속에는 집채만 한 바위들로 뒤엉켜 있는 곳이 많았다. 그런 곳들에는 베트공이 활동할 수 있는 동굴이
마련돼 있다. 나무 밑에는 만년 열대림에서 떨어진 잎들이 수백년 지나는 동안 검은 흙으로 변해 있었다.
아름드리 나무들이 촘촘히 들어서 있는 곳들은 행군하기에 편했다. 걸을 때는 땀이 한 없이 흘렀지만 몇 분
쉬고 있으면 한가기 돌 만큼 추웠다. 그러다가도 가시나무 관목 숲이 나타나면 사정이 달랐다. 두꺼운 가죽
장갑을 낀 병사가 행군대열의 맨 앞에 서서 장수의 칼처럼 생긴 정글도로 통로를 개척했다.
그렇다 보니 한 시간에 불과 몇 십미터밖에 전진할 수 없었다. 햇볕은 여과 없이 내려 쬐고, 얼글은 까맣게
익고, 몸과 얼굴 여기 저기에는 상채기가 났다. 오후 2가 되자 수통의 물이 동이났다. 작업복이 소금가루로
하얗게 뒤 덮였다. 땀이 말라 소금이 된 것이다. 입이 타 들어갔다. 침조차 말랐다.
처음 당해 보는 목마른 고통, 참으로 가혹한 것이었다. 바로 그때, 50m 쯤 앞으로 간 선발대로부터 날카롭게
째지는 듯한 총성이 들렸다. 모두가 반사적으로 바위틈에 몸을 숨기고 숨을 죽였다. 순간, 부산항에 나왔던
얼굴들이 주마등처럼 떠올랐다. 이 순간을 다시 무를 수만 있다면! 갑자기 세상 끝에 서있는 기분이었다.
초등학교 1학년 때 늦가을, 추수한 논둑을 넘으며 국방군이 마을로 진격해 들어왔다. 시냇물을 사이에 두고
마을과 논둑이 마주 보고 있었다. 마을에서 하루를 묵은 2명의 인민군 패잔병들이 갑자기 이웃집으로 들어가
따발총을 들고 나오더니 냇물을 향해 "쏘리? 쏘리?" 하고 소리를 질렀다. 냇물을 건너 논두렁에는 국방군이
길게 늘어서서 마을 쪽을 보고 있었다.
"그래, 쏴라."
서울에서 피난 온 누나가 있었다.
"누나, 저쪽에 늘어선 군인들은 누구야?"
"응, 국방군이야, 이제 곧 싸울거야."
"야, 신난다. 우리 구경하자."
"그래, 그러자."
그러나 누나는 대문 밖으로 나가려다가, 갑자기 정신이 들었는지 나를 잡아챘다.
"야, 총 쏘면 우리 죽어, 얼른 느네 집 방공호로 가서 숨어야 해."
대문을 들어서기 무섭게 총소리들이 요란했다. 그러더니 한동안 조용했다. 나는 누나 손을 끌며 구경 가자고
졸랐다. 벽에 바짝 붙어 살금살금 나왔다. 대문을 조금 열고 내다보았다. 국방군 아저씨가 잽싸게 옆집 지붕
위로 올라갔다. 누나 말로는 국방군 소위라고 했다.
인민군과 서부 활극이 벌어진 것이다. 마당 한 가운데에는 두레박으로 물을 퍼 올리는 깊은 우물이 있었는데
그 우물 입구는 둥근 시멘트 노깡이었다. 그 노깡에 인민군이 몸을 숨기고 지붕을 쳐다 보려고 했을 때 소위
가 먼저 보고 쏘았다고 했다. 곧 우물가에 피가 낭자했다. 이것이 내 머리 속에 있는 전투모습이었고, 그때
엎드려 있는 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정글을 뚫으며 앞서 가던 선발대 쪽에서 총소리가 멈추고 잠시 적막이 흘렀다. 나는 좌우 주위와 빽빽하게
둘러서 있는 나무가지 위까지 바쁘게 살폈다. 베트공이 나무 뒤와 위 또 바위틈에 숨어서 총을 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곧 선발대에게서 상황보고가 무전을 통해 들어왔다.
총소리는 검은 옷을 입은 베트공 소년이 유발시켰다. 한 그루의 나무 뒤에서 다른 나무 뒤로 날아다니 듯이
잽싸게 움직이는 소년을 향해 사격을 가한 것이었다. 중대본부가 사격 현장에 도착했다. 조금 전의 긴박했던
분위기와 달리 현장은 평화롭기까지 했다.
검은 옷을 입은 맨발의 미동을 잡아 놓고 몇 명 병사가 말을 걸고 있었다. 얼마나 예쁘게 생겼던지 병사들이
저마다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하지만 그 미동은 어린이가 아니었다. 발바닥이 군화창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었고 발가락 사이는 넓게 벌어져 있었다.
얼굴은 매우 예쁘고 어려 보이지만 오랫동안 산에서 활동한 배트공이 틀림없어 보였다. 놓아 주면 한국군의
위치를 베트공 본부에 알려 줄 수 있는 상황이었다. 한 병사가 몇 마디 주워 들은 뤌남어로 소년에게 물었다.
"브이씨, 어 더우?"
"콩비억."
베트공이 어디 있느냐는 물음에 모른다는 대답이었다. 한국의 소년들과 비교하며 무섭다는 생각이 들면서도
한편으로는 측은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Cㅡ레이션 캔을 따주고 과자와 초콜릿을 주니까 매우 맛있게 먹었다.
장난기 있는 한 병사가 어쩌나 보려고 담배를 주었더니 눈을 지그시 감고 담배 맛을 음미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그 소년이 바로 베트공이었고, 그 일대가 베트공이 장악하여 활동하고 있는 소굴이었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