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2006. 5. 1. 오전 1:58:56

글자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

 

                                          정호승 시

 

서울에 푸짐하게 첫눈이 내린 날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고요히 기도만 하고 있을 수 없어

 

추기경 몰래 명동성당을 빠져나와

 

서울역 시계탑 아래에 눈사람 하나 세워놓고

 

노숙자들과 한바탕 눈싸움을 하다가

 

무료급식소에 들러 밥과 국을 퍼주다가

 

늙은 환경미화원과 같이 눈길을 쓸다가

 

부지런히 종각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껌 파는 할머니의 껌통을 들고 서 있다가

 

전동차가 들어오는 순간 선로로 뛰어내린

 

한 젊은 여자를 껴안아주고 있다가

 

인사동 길바닥에 앉아 있는 아기부처님 곁에 앉아

 

돌아가신 엄마 얘기를 도란도란 나누다가

 

엄마의 시신을 몇개월이나 안방에 둔

 

중학생 소년의 두려운 눈물을 닦아주다가

 

경기도 어느 모텔의 좌변기에 버려진

 

한 갓난아기를 건져내고 엉엉 울다가

 

김수환 추기경의 기도하는 손은

 

부지런히 다시 서울역으로 돌아와

 

소주를 들이켜고

 

눈 위에 라면박스를 깔고 웅크린

 

노숙자들의 잠을 일일이 쓰다듬은 뒤

 

서울역 청동빛 돔 위로 올라가

 

내려오지 않는다

 

비둘기처럼

 

<정호승 시집-이 짧은 시간 동안>에서

 

P/S: 살벌한 경쟁으로 점점 각박해지는 세속생활에서 패배하고 소외된 이를 보듬는 게

교회의 사명중 하나이기를 바라는 시인의 소망이 느껴지는 시입니다. -유스티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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