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을 춤추게 하는 회개

2005. 1. 3. 오후 11:19:04

글자

(배경음악 : 어머니 - 신상옥작사/작곡)

<가톨릭다이제스트 12월 - 허영만 신부>

 

  가끔 내 자신에게 질문을 던진다.  "욕심이란 놈은 언제 없어지는 것일까?" 무덤에 들어가야만 끝나는 것은 아닐까.

 

  사막의 한복판에 꽤 커다란 나무 하나가 서있었고 그 나무 아래에는 샘물이 솟았다.  불볕 사막을 횡단하는 사람들에게 이 샘물은 생명과 같이 소중했다.

  그런데 그 샘에는 주인이 있었다.  주인은 샘을 관리하며 물을 팔았다.  어느날 저녁 주인은 '저 나무는 샘물을 많이 빨아 먹을 거야, 베어버리면 더 많은 샘물을 팔 수 있을 거야'라고 생각하며 그 나무를 베어버렸다.  그러나 땡볕을 가려주고 모래와 바람을 막아주던 나무가 없어지자 샘은 마르기 시작했고, 모래바람에 덮혀 결국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그곳을 찾는 여행객은 없어졌다.

  나무를 베어 샘물을 더 많이 팔으려다 패가망신한 샘물 주인은 누구인까.  이기적인 삶을 사는 사람들, 욕심이 하늘높은 줄 모르는 사람들, 남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의 부와 편의를 위해 사는 속좁은 인간들, 내가 이만큼 봉사했는데 이 정도는 대가를 받아도 괜찮다고 착각하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들의 그룹에 여러분은 포함되지 않는지....

 

  선의든 악의든 자신과 자신이 속한 집단을 위해 옥심부리고, 대우받기를 원하다가 결국 자신에게도, 모두에게도 피해를 주는 그런 인간이 되어서는 안된다.  그런 의미에서 회개는 지금 나의 모습으로부터 도망치는 비겁한 삶이 아니라 삶의 자리에서 매순간 나의 가장 좋은 것을 드러냄으로써 참된 자기 자신을 찾아 가는 것이다.

우리는 하느님 앞에서 폼잡을 수 없다.  주제를 모르는 인강은 회개할 것이 없다고 큰 소리를 치기도 한다.  하지만 지금 여기에서 우리가 살아가는 회개의 삶, 증거적 삶은 하느님을 기쁘게 더덩실 춤추시게 만들 것이다.  그런 하느님의 기쁨과 평화가 혼탁한 세상 속에서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곧게 지켜주시리라 믿는다.

 

  우리의 기쁨은 우월감과 성취감에서 생겨나는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회개라는 쓰디 쓴 뼈를 깎는 고통과 회개의 증거인 자선을 통해서 현재화될 것이다.

  자선이란 그저 불쌍한 사람에게 동전 한닢 던져주는 행위를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다.  곤궁한 상태에 있는 사람이나 그런 시설에 그리도교적 사랑으로 물질적 경제적 원조를 하는 것이다.

  즉 춥고 배고픈 사람에게 "하느님께서 돌봐주실 겁니다.  기도하겠습니다"라고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굶주린 자에게 먹을 것을 주고, 헐벗은 자에게 입을 것을 주며, 집 없는 자에게 머무를 곳을 제공하는 행위가 자선이다.

  가톨릭교회는 자선행위를 허물과 죄스러움을 뉘우치는 사랑의 표현으로, 또 단식에 버금가는 회개의 형식으로 널리 권하고 있다.

  "자선을 청하는 사람은 한번 얼굴을 볽히고 자선을 거절한 사람은 두번 얼굴을 붉힌다"라는 말처럼 지금 자선을 행하지 못하면 우리 인생에 자선을 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이 없다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지금 시작하자.

댓글 1

  • 2005년 1월 4일 오전 1:13

    때로는 자기도 모르게 욕심을 낼때가 많답니다. 그러나 곧 깨닫고 반성 한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