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공석 신부님 발제문 / 우리시대의 신앙 다시 읽기-1

2012. 3. 26. 오후 12:32:24

글자
 
신앙언어, 오늘의 문제
[서공석 신부 발제문] 우리시대의 신앙 다시 읽기-1
 
2011년 06월 27일 (월) 10:41:10 서공석 .
 

   
▲ 서공석 신부(사진/한상봉 기자)
신앙은 하느님과의 연대성(連帶性)을 살겠다는 사람의 의식(意識)과 실천(實踐)을 총칭하는 단어이다. 그것을 표현하여 전하고 각성시키는 언어는 인간의 것이기에 그것을 발생시킨 인간이 처한 역사적, 문화적 여건을 벗어나지 못한다. 따라서 신앙언어도 시대적 성격을 지니며, 시대적 제한을 받는다는 말이다. 그리스도의 복음도 그것이 발생한 시대의 언어로 선포되었다. 하나의 종교가 지닌 경전(經典), 의례(儀禮) 및 공동체의 제도와 법 등이 모두 신앙언어이다.

종교적 언어를 포함하여 인간의 모든 언어가 문화와 밀접한 관계 안에 있기에, 과거의 문화권에서 통용되던 신앙언어에는 하늘과 지옥이 있고, 하느님이 창조하여 하느님 안에서 끝나는 우주가 있었다. 그런 표상(表象)들은 과거 사회에서는 당연한 것이었지만, 오늘 현대인에게는 다분히 신화(神話)적인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과거에 발생한 신앙언어를 해석하여 오늘의 언어로 다시 태어나게 하지 않고, 그 언어를 반복만 하면, 문화적 차이로 말미암아 그 언어가 지닌 원초의 의미를 전달하지 못한다. 요한복음서(14,12)는 예수의 입을 빌려 말한다. “나를 믿는 사람은 내가 하는 일들을 그도 또한 하게 될 뿐 아니라 그보다 더 큰 일들을 하게 될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기 때문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 언어가 민족과 문화의 차이를 넘어 많은 이들에게 전달될 것이라는 뜻으로 들린다.

성서 경전은 하느님이 하신 말씀, 혹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경전들은 그 말씀과 행적을 녹음 혹은 녹화하여 전달하듯이, 일어난 사실 그대로를 전하는 문서가 아니다. 하느님에 대한 어떤 체험, 혹은 예수에 대한 어떤 체험이 사람들에게 있었고, 그것을 그 시대의 신앙공동체가 그들의 언어 양식으로 표현하여 기록으로 남겨 우리에게 전달된 것들이다. 사람은 자기가 체험한 바를 해석하면서 언어로 표현한다. 체험한 바를 자기가 속하는 문화가 제공하는 언어 체계를 참조하여 표현한다는 말이다. 해석되어 언어화된 체험만이 사람들에게 전달된다. 그 언어는 문자로 기록될 때, 한 번 더 해석된다.

따라서 해석되어 언어화된 체험들은 문화적으로 채색되어 있다. 구약성서는 이스라엘이 오랜 역사 안에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살면서 체험한 바를 그 시대의 문화적 체계(體系)와 제약(制約) 안에서 여러 가지 문학유형(文學類型), 곧 역사 양식, 예언 양식, 시(詩) 양식, 지혜를 전달하는 양식, 미래를 알려주는 계시록 양식 등으로 기록한 것이다. 하나의 언어 체계 안에서 해석되어 표현되었다는 것은 어떤 제약을 받고 있다는 뜻이다. 신약성서도 예수가 돌아가시고 초기교회 공동체가 예수로 말미암아 체험한 바를 다양한 형태의 문서로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 따라서 신약성서도 예수에 대해 또 예수가 믿던 하느님에 대해 그 시대 신앙공동체가 해석한 바를 기록하여 남긴 것이다.

교회의 의례(儀禮) 혹은 전례(典禮)도 신앙 공동체가 만들었다. 따라서 그것도 발생할 당시의 문화적 체계와 제약이라는 조건이 붙어 있다. 오늘에 비하여 단순하고 한가하며, 볼거리가 없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맹이었던 시대의 문화를 배경으로 발생한 전례들이다. 오늘 현대인은 과거와 같이 한가하지도 않고, 통신매체의 발달로 볼거리가 많으며, 각자가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혹은 넘치게 받아 취사선택하여 자기 개발을 최대한 실현하며 살고 있다. 오늘 교회의 전례가 신앙의 핵심적인 것을 신선하게 전달하여 신앙인 각자에게 깊이 있는 신앙 체험을 유발하지 못하고, 과거의 관행을 형식적으로 반복하는 것이면, 오늘 현대인에게는 무의미한 허례허식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언어에 익숙하지 못한 사람들이 많이 참석하는 혼배(婚配)와 장례(葬禮) 전례는 과거의 형식에 얽매이지 말고, 결혼 혹은 죽음에 대한 그리스도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간결한 의례로 거듭 나야 할 것이다.

1. 신앙 언어의 두 가지 원천

신앙언어는 두 개의 원천으로부터 비롯한다. 계시(啓示)에서 비롯되었다는 과거의 신앙언어 전승(傳承)이 그 하나이고, 다른 하나는 각 시대의 인간 체험(體驗)이다. 그 두 개를 연결하는 것이 각 시대가 해야 하는 해석, 곧 “더 큰 일들”(요한 14,12)이다. 해석에는 입으로 표현하는 언어도 있고, 몸으로 하는 언어인 실천(實踐)도 있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끊임없이 체험하고 배우면서 산다. 그 체험들은 사람 각자에게 고유한 ‘인식의 망(網)’을 형성해 준다. 그 망은 물론 그 시대의 문화적 특성으로 채색되어 있다. 인간은 체험한 것을 자기에게 고유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해석하면서 인식하고, 인식한 것을 언어화한다. 13세기 토마스 아퀴나스로부터 비롯된 금언(金言)이 있다. ‘인간은 무엇이든 수용할 때 자기 방식대로 수용한다.’ 인간은 각자가 지닌 인식의 망을 통해서 무엇이든 수용한다는 뜻이다.

현대인에게도 그들에게 고유한 ‘인식의 망’이 있다. 신앙공동체가 전달하는 과거의 신앙언어는 현대인이 공유(共有)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것은 창조적 노력이며 또한 역사 안에 주님으로 살아계신 하느님과의 연대성에 충실한 신앙 행위이기도 하다. 문화권 혹은 ‘인식의 망’이 다른데도, 새롭게 해석하지 않고, 과거의 언어를 반복만 하면, 사람들의 체험과 이해를 외면한, 독단적이고 권위주의적 독백(獨白)이 되고 말 것이다.

신앙의 원초에도 어떤 체험이 있었고, 그것에 대한 해석이 있었다. 그리고 그 해석이 언어로 정착하였다. 이스라엘 신앙의 초기에 모세는 자기가 한 체험을 그 시대가 지닌 ‘인식의 망’을 통해 해석하여 표현하였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는 분이었다. “내가 너와 함께 있겠다.”(탈출 3, 12). 그리고 그 함께 계심이 확인되는 장소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돌보아주고 가엾이 여기는 선한 실천”을 하는 사람들이다(탈출 33, 18-23 참조).

예수도 그 시대가 제공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신앙의 언어를 발생시켰다. 그리고 그리스도 신앙 공동체는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신앙언어들을 자기들이 지닌 ‘인식의 망’을 통해서 해석하고, 실천하면서 새롭게 체험하고, 그 체험한 바를 새롭게 해석하여 자기들에게 고유한 새로운 언어로 정착시켰다. 복음서들 간에 차이가 있는 것도 그것을 기록으로 남긴 공동체가 가진 인식의 망에 차이가 있기 때문이다. 예수가 하느님을 아버지로 표현한 것은 하느님은 우리 삶의 기원이고, 우리를 사랑하고 용서하는 분이며, 우리가 그분의 사랑과 용서를 배우고 살아서 비로소 주어진 생명의 의미를 실현하며 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뜻이다. 가부장(家父長)적 사회에서 아버지라는 단어에는 어머니가 자녀들을 위해 하는 역할도 당연히 포함되어 있다.

모세로 말미암아 발생한 언어가 기원이 되어, 이스라엘의 오랜 역사 안에 발생한 언어들을 모아서 구약성경이라는 경전(經典)을 만들었다.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체험들이 비교적 짧은 기간에 언어로 정착하여 편집된 문서가 신약성경이다. 경전은 공동체 신앙의 잣대가 되는 문서들을 일컫는 단어이다. 역사 안에서 경전을 읽는 신앙인도 자기가 지닌 문화적 ‘인식의 망’을 통해 그것을 새롭게 해석하여 실천하면서 신앙인으로 산다. 따라서 신앙의 전승(傳承)은 시대적 해석의 전승이라고 말할 수 있다. 신앙인은 다른 사람들이 체험하고, 체험한 바를 해석하며 발생시킨 언어를 다시 해석하면서 새로운 체험을 하는 사람이다.

신앙은 과거의 경전이 전하는 언어만을 반복하는 데에 있지 않다. 신앙인은 자기 자신과 세상에 대해 이미 체험한 바를 전승된 신앙언어에 비추어 새롭게 체험한다. 원초에 하나의 교리(敎理)가 있었던 것이 아니다. 하나의 정확한 체험이 있었고, 그 체험으로 말미암은 사고와 실천을 동반하는 언어가 있었다. 그 언어는 다른 문화권을 만나면서 다른 언어들을 발생시킨다. 신앙언어가 전승된다는 것은 새로운 역사 안에서 새로운 체험들과 새로운 삶들을 발생시킨다는 말이다. 믿음은 전승된 신앙언어로 말미암아 사람이 자기 자신과 동료 인간에 대해 또 세상에 대해 새로운 체험을 하면서 체험들의 전승, 곧 신앙의 역사 안으로 편입되어 들어가는 행위이다.

신약성서의 기원에 예수와 제자들의 만남이 있었다. 예수로 말미암아 제자들은 구원에 대해 새롭게 체험하였다. 그들은 그 체험을 그들이 지닌 ‘인식의 망’, 곧 구약성서 언어와 그 시대 사람들이 공유하던 문화적 언어로 해석하며 문자로 정착시켰다. 신약성서가 담고 있는 것은 초기 신앙인들이 예수로 말미암아 체험한 바를 그들의 언어로 해석한 것이다. 그것은 메시지 형태로 기록되어 있고, 그것을 듣는 사람은 인간의 삶과 세상에 대해 새롭게 인식하고 구원을 체험한다. *“예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이적도 [당신] 제자들 앞에서 행 하셨다. 이런 일들을 기록한 것은 여러분이 예수는 그리스도요 하느님의 아들이심을 믿고, 또한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20, 30-31)


2. 신앙 언어의 위기

오늘 그리스도 신앙언어가 위기를 겪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신앙언어는 현대인에게 그리스도적 기쁜 소식을 전하지 못하고 있다. 2000년 동안 하나의 종교 집단으로서 교회가 여러 문화와 풍상(風霜)을 겪으면서 습득한 언어와 삶의 방식들이 있다. 특히 유럽 중세 사회에서 교회는 그 사회의 기득권 집단이었다. 학문적으로, 사회적으로 또 정치적으로 교회는 유럽 중세 10세기 동안 경쟁 상대 없이 유럽대륙을 사상적으로 지배하였다. 오늘도 바티칸 방송이 상징 음악으로 사용하는, ‘그리스도 승리하고, 그리스도 다스리고, 그리스도 명령한다.’(*Christus vincit, Christus regnat, Christus imperat.)는 노래의 가사가 그 시대 교회가 누렸던 영화(榮華)의 흔적과 그것에 대한 향수를 나타낸다. 교회의 언어에는 지금도 그 시대의 유적(遺跡)과 유품(遺品)들이 청산되지 않고 남아 있다. 교회 봉사 직무자들의 위계(位階)질서와 신분(身分) 개념을 비롯하여 그들에 대한 중세적 존칭들(*몬시뇰 Monsignor, 각하 Excellentia, 전하 Eminentia, 성하 Sanctitas 등)과 그들의 복장이 그 유적으로 남아 있다.

16세기 개신교가 분리된 이후, 가톨릭교회는 개신교가 주장하는 바를 거슬려 말하였다. 소위 반종교개혁이라는 것이다. 그 반개신교적 언어가 교회의 전통적 신앙언어로 자리 잡은 것들도 있다. 초기 개신교회는 그리스도와 마리아를 대립시켜놓고, 마리아를 버리고 그리스도를 택하였고, 말씀과 전통을 대립시켜놓고, 전통을 버리고 말씀을 택하였으며, 믿음과 공로를 대립시켜놓고, 공로를 버리고 믿음을 택하였다. 그러자 가톨릭교회는 마리아에 대한 신심을 강조하고, 전통의 중요성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말씀을 소홀히 하였고, 성사(聖事) 위주의 신앙생활이 되게 하였다.

성사의 사효성(*事效性, 사효성은 인효성(人效性)에 대립되는 단어이다. 성사(聖事)는 그것을 집행하는 사람에 따라 효과가 다르지 않고, 집행하는 사람의 영적 수준과는 무관하게 성사집행 그 자체로 실효(實效)를 낸다는 뜻이다.)에 대한 가톨릭교회의 가르침이 신자들로 하여금 말씀을 외면하고, 성사가 열어주는 상징성을 외면하고 성사의 효과 혹은 공로에 집착하게 만들었다. 과거의 신앙언어에 길들여진 소수의 사람들을 제외하고, 오늘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그리스도 신앙언어가 기쁜 소식도 아니고, 해방적 체험을 주지도 않는다. 양식과 판단력을 가진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불편을 느끼는 신앙언어가 되어버렸다.

경직된 유럽 중세적 조직과 제도를 고수하는 교회는 새로운 시대를 위해 창조적 노력을 하지 못하는 비효율적인 집단이 되었다. 위계질서에 대한 교회의 집착은 교회공동체 구성원들 간의, 자유로운 토의라는 현대적 의사결정 방식을 차단하여 비효율적 결정들이 나타나게 하고 있다. 정보가 부족하여 현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결정권자들이 비효율적인 신앙공동체를 만들고 있다. 위계질서의 하부 구조에 속한 사람들은 순종이 강요된 나머지, 무기력하고 창의력이 없으며, 공동체의 일을 방관하는 실효성 없는 무리가 되어가고 있다. *성당들 안에 흔히 붙어 있는 구호 “모이면 기도하고 나가서는 선교하자.”는 말은 모이면 말하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고 나가서는 앵벌이 하라는 말로 들린다.

아직도 교회공동체의 하부 구조인 본당들이 건재하고, 신축되는 성당들이 있으며, 새롭게 세례를 받는 사람들이 있고, 교무금과 헌금이 들어온다고 위기의식을 전혀 갖지 못한다면, 황폐화된 오늘 유럽 교회들의 현실을 타산지석(他山之石)으로 삼지 못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교회들이 오늘 사용하는 신앙언어가 기복(祈福)적이고, 사람들을 어떤 신비와 권위로써 안정시키는 역할을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기원으로 한 신앙언어로서는 그 핵심이 훼손된 것이다. 인류가 지닌 종교적 염원, 곧 소원성취(所願成就)의 욕구를 충족시켜 주는 언어로 전락한 것이다. 그런 언어는 먼저 현대의 지성인들과 젊은이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서 그 실태와 원인에 대해 간단히 짚어 본다.

3. 시대적 산물인 언어

과학적 객관성에 익숙한 현대인은 과거 신앙언어가 사용한 이원론(二元論)적 형이상학의 언어를 수용하지 못한다. 플라톤으로부터 시작하여 20세기 초엽까지 인류 역사를 지배해온 형이상학적 사고방식은 이제 사라져가고 있다. 자연과 초자연, 현세와 내세, 육신과 영혼, 우연(偶然)과 실체(實體), 물질과 관념(觀念)을 대립시켜 이해하던 시대는 지나갔다. 하느님은 순수한 관념 혹은 정신이고, 제1원인이며, 지고(至高)하신 분이라는 플라톤 혹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에 기반을 둔 교리언어는 현대인에게 신(神)에 대한 체험을 일으키지 못한다. 이런 형이상학적 교리언어는 2세기 플라톤 사상에 익숙한 교부(敎父)들이 그것을 수용한 후부터 그리스도 교리언어로 교회 안에 정착하였다. 그러나 20세기에 들어오면서 그 언어는 과거 한 시대의 사고방식, 곧 그리스 철학에서 유래한 것으로 판명되었다.

3. 1. 교리(敎理)언어

계시가 있다는 것은 어떤 교리가 주어졌다는 뜻이 아니다. 우리가 계시라는 단어를 사용할 때는 여러 가지 역사적 사실들 안에 당신 스스로를 전달하는 하느님의 자유로운 개입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느님이 개입한 사실들은 사람들에게 구원을 체험하게 하였고, 그 체험들은 해석되어 메시지 형태의 언어로 기록되었다. 이집트 탈출과 같은 사건의 구원도 있고, 자비, 나눔, 용서의 실천과 같은 구원도 있다. 그 메시지에는 어떤 가르침, 곧 교리가 내포되어 있지만, 교리가 일차적 요소도 목적도 아니다. 메시지의 일차적 요소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발생하는 은혜로운 인간 구원의 체험이다. 교리는 기원에 있었던 체험들이 언어로 정착한 다음, 그 내용을 인간이 반성하고 숙고하여, 그 시대의 합리적 언어로 정리하여 다시 표현한 것이다.

그리스도 신앙 체험의 역사가 지속되기 위해서는 그것을 전달하는 언어가 그 시대 사람들에게 이해 가능한 것이라야 한다. 성경, 교리 및 전례가 모두 전달하는 메시지를 지녔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의 사람들이 그들에게 고유한 ‘인식의 망’을 통해서 은혜로운 구원의 언어, 곧 복음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새롭게 해석되어야 한다. 신앙은 이해할 수 없는 과거의 언어를 신비라고 무조건 믿는 데에 있지 않다. 처녀가 아이를 낳았고, 세 분인데 한 분인 하느님이고, 마리아는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이해되지 않는 언어를 신비라고 무조건 수용하고, 같은 언어만 반복하는 데에 신앙이 있지 않다. 그런 언어들은 그것이 발생한 문화적 배경을 이해하고, 오늘의 언어로 다시 해석할 때, 의미를 지닌다. 그 언어가 발생할 당시에 그것이 전달하고자 한 의미가 있었다. 교리 언어는 시대가 달라지면, 새로운 ‘인식의 망’에서 새롭게 해석될 때, 구원적인 것이 될 것이다.

3. 2. 교리 언어의 새로운 해석

앞에서 언급한 세 개의 교리 언어가 오늘의 ‘인식의 망’에서 어떻게 해석되는 지를 보자.

동정녀 잉태

루가복음서는 예수의 탄생 예고(1, 26-38)에서 구약성서에 있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들이 수태한 이야기들을 참고하여 이야기를 전개 하고 있다. 가브리엘 천사가 마리아에게 하는 인사, “은총을 입은 이여”라는 말은 사제 엘리가 사무엘의 어머니 한나에게 사무엘을 잉태 할 것이라고 말하면서 한 인사이다(1사무 1, 17-18).

마리아가 잉태할 것이라는 천사의 말에 마리아는 이의를 제기한다. “저는 남자를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그런 일이 있을 수 있겠습니까?”(34). 천사는 수태하지 못하던 여인으로 알려진 엘리사벳이 잉태하였다고 말하면서, “하느님에게는 불가능한 일이 없다.”(37)고 말한다. 이 말은 수태치 못하던 여인인 아브라함의 아내 사라가 잉태할 것이라고 알리면서 천사가 한 말이다(창세 18, 14). 한나와 사라는 구약성경에 나타나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었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수태하여 구원역사에 중요한 인물을 낳았고, 엘리사벳은 신약성경에 나타나는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다.

마리아를 처녀라고 말하면서 루가복음서는 이런 수태치 못하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암시하여 ‘처녀’라는 단어를 어떻게 알아들어야 하는지를 알려 준다. 마리아도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라는 뜻이다. 수태치 못하는 여인들이 수태하여 구원역사의 중요한 인물들을 출생시켰다는 말은 구원이 인간의 생산력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주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마리아는 처녀(*처녀라는 단어는 이사야서를 그리스어로 번역하는 과정에 신앙 언어에 들어왔다. 70인역 성서는 히브리어의 ‘젊은 여인’을 ‘처녀’로 번역하였다(이사 7, 14). 그리고 초기 신앙공동체는 이 그리스어 번역본을 참조하였다.), 곧 수태치 못하는 여인이지만, 하느님의 특별한 배려로 예수라는 인물을 낳았다는 것이다. 예수로 말미암아 주어진 구원은 하느님을 그 기원(起源)으로 한다는 뜻이다. 성경에서 우리가 읽어야 하는 것은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인류역사 안에 발생한 신앙언어이지, 한 여인에 대한 생리학적 정보가 아니다.

삼위일체
(*서공석, 새로워져야 합니다. 분도출판사, 1999. 135-142, “삼위일체” 참조.)

‘삼위일체’라는 단어는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수수께끼 같은 하느님을 지칭하지 않는다. 그것은 예수와 성령도 모두 하느님을 알리는 이름들이라는 뜻으로 과거 4세기부터 교부(敎父)들이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단어이다. 우리는 예수 안에 하느님의 생명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듣고, 그 하느님을 믿는다. 예수의 삶에서 하느님에 대해 배우고, 우리가 그 가르침을 실천할 때, 하느님의 숨결, 곧 생명이 우리 안에 살아 계신다. 예수를 통해서 하느님을 참으로 알 수 있고, 우리의 삶 안에 살아 계신 성령은 참으로 하느님의 숨결이라는 사실을 말하기 위해 초기 교부들이 만들어 사용하기 시작한 ‘삼위일체’라는 단어이다. 하느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또 성령, 곧 그분의 숨결 안에서 우리와 밀접한 관계를 지닌다는 것을 말하는 단어이다. 하느님은 세 분인데 한 분이라는 모순된 사실을 믿으라는 단어가 아니다.

하느님의 어머니 마리아

예수가 마리아에게서 태어날 때는 순수한 사람이었는데, 그분 생애의 어느 시점에 하느님의 아들로 입양(入養) 되었다는 5세기 네스토리우스(Nestorius)의 주장을 반박하기 위해 에페소 공의회(431년)가 사용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단어이다. 그 시대를 지배하던 중기(中期)플라톤 사상으로는 출생 때부터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 아니면, 우리는 그분 안에서 참다운 하느님을 알지 못한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래서 예수는 태어날 때부터 하느님의 아들이었다는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한 ‘하느님의 어머니’라는 언어이다. 그 언어가 지닌 뜻은 예수 안에 우리가 만나는 하느님은 참다운 하느님이라는 것이다. 예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을 볼 수 없다고 해석할 수 있는 네스토리우스의 주장 앞에, 예수 안에 참다운 하느님을 인식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천명하기 위해 발생한 언어이다. 마리아의 품위를 알리는 것이 아니라,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가 인식하는 하느님은 참다운 하느님이라는 사실을 밝히는 명제(命題)이다. 네스토리우스와 같은 주장을 하는 사람이 없는 오늘, 우리가 지닌 인식의 망에서 그 명제를 새롭게 해석하지 않고, 그대로 반복 사용하면, 하느님에게 어머니가 있다는 엉뚱하고 무의미한 뜻이 전달될 것이다.

3. 3. 교회의 조직과 제도

교회의 교리언어가 과거 그리스의 형이상학적 표상으로 장식되어 있듯이, 현재 교회의 조직과 제도도 과거 유럽의 제국(帝國)주의와 봉건(封建)주의 사회에서 발생하여 정착한 것이다. 교회 봉사직무자의 선택 방식이 수직적이고, 직무를 신분 혹은 품위와 관련시켜 생각하는 것이 제국주의적이거나 봉건주의적 유산이다. 그리고 임기가 없는 직무 개념도 직무와 신분을 하나로 보던, 과거의 수직적 사회의 문화유산이다. 직무에 임하는 사람의 실효성보다는 신분을 더 소중히 생각하던 과거의 제도와 관행이다. 오늘의 교회가 과거의 제도와 관행을 고수하면서 대다수 교회 구성원들의 참여는 차단되었다. 오늘과 같은 다원(多元)사회 안에서는 수직적 관계를 절대시하는 집단의 실효성은 저하될 수밖에 없다.

수직적 조직에서는 명령과 복종이 그 조직을 움직인다. 현대 사회에서는 다양한 정보들이 수평적으로 흐르고 있다. 오늘은 유연성을 지닌 조직이 실효성을 발휘한다. 조직의 구성원들이 다양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그 조직의 목적을 달성하고 구성원들의 실효성도 높인다. 오늘의 기업들은 수직적으로 경직된 조직을 지양하고, 유연한 조직으로 다양한 정보의 수평적 흐름을 원활히 하여 그 실효성을 높이고 있다. 그 구성원들 모두가 자기의 전문 분야의 필요한 정보를 효과적으로 받고, 각자가 창의력을 발휘하여 참여하며, 기여하도록 조직되어 있다. 기업들은 구성원 모두가 충분히 기여함으로써 보람을 느끼게 할 뿐 아니라, 생산품의 소비자까지 만족시켜 그들이 기업을 위해 기여하도록 한다. 이제는 제품 판매만이 아니라, 소비자를 만족시키는 마케팅이 중요한 시대이다. 소비자가 제공하는 정보도 외면하지 않는 기업들의 풍토이다.

신앙공동체도 교회 직무에 임하는 사람들로부터 신자들에게로 일방적으로 흐르는 신앙언어를 고수하지 말고, 공동체 구성원들이 각자가 지닌 능력과 전문성으로써 공동체를 위해 기여하고, 보람을 느낄 수 있도록 조직되어야 한다. (*현대 사회는 그 조직의 실효성을 높이기 위해 task force를 가동한다. 현안으로 주어진 문제와 관련있는 사람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토의하여 해결책을 찾는 방식이다.) 가톨릭교회의 신자들은 ‘순종하고 돈 내고 기도만 하면’ 된다는 말인가? 그런 공동체는 오늘의 사회에서 실효성이 떨어지고, 그 구성원들의 수준도 저하될 것이다. 그것은 창의력을 지닌 자유로운 인간의 집단이 아니다. 지각 있는 현대인이 교회 공동체 안에서는 창의력과 자발성을 상실하고 무기력하게 되는 이유이다.

사람들이 현대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가지는 사회적 공감대와 교회의 구성원으로서 교회 안에서 가지는 공감대 사이에 큰 괴리(乖離)가 있다. 교회가 아직도 고수하는 유럽 중세적 의사소통 방식과 조직의 구조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교회는 현대 사회 안에서 그리스도 신앙언어의 보존과 전파라는 본연의 사명을 다 하지 못할 것이다. 교회가 신자들에게 요구하는 실천들은 과거 어느 한 시기에 실효성 있었던 것들이었다. 주일미사 의무, 금육일과 금식일의 관행, 고해성사 의무, 하객들 혹은 문상객들을 외면하고 일방적으로 길게 거행되는 혼배와 장례 전례, 쉬고 있는 신자들에 대한 냉담자 처리와 그들에 대한 대책, 혼배조당의 문제 등을 들 수 있다. 이런 것은 그 지역 주민 모두가 그리스도 신앙인이고, 그들이 받은 교육 수준이 낮아서, 삶에 대한 정보가 보잘것없던 유럽 중세 사회에서 통용되던 관행들이었다. 과거 그리스도 문화권에서 발생한 이런 언어와 실천들은 새로워져야 한다. 과거 교회의 언어와 관행을 모두 하느님이 주신 것으로 봉인(封印)하여, 어느 시대에나 유효하다고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교도권(敎導權)
(*새로워져야 합니다, 분도출판사 1999년, 261-280 참조)

신약성서를 비롯해서 초기 교회가 교회 안의 직무를 지칭하기 위해 즐겨 사용한 것은 ‘봉사직무’(ministerium)라는 단어였다. 그러나 16세기 개신교의 분열이 있으면서 교회는 ‘교도권’(magisterium)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봉사직무’가 섬기는 작은 자(mini)의 직무를 의미하는 반면, 교도권은 가르치는 권한을 가진 큰 인물(magis)의 직무를 뜻한다. 현재 신앙언어가 위기를 겪는 것은 바로 이 교도권이 일방적으로 가르치고, 사목지침을 내리려 하는 데에도 그 책임이 있다. 제도교회가 사람들을 가르치고, 사목하기 위해서는, 현대 사회에서 인간 실존의 여건이 어떤 것인지를 알아야 한다. 그 여건에서 발생한 현대인의 ‘인식의 망’이다. 교회는 그 ‘인식의 망’에서 이해되는 언어와 실천을 제시해야 한다. 역사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로 구성된 교회이다. 따라서 교회의 사목은 시대적 감수성(感受性)과 염원을 읽어내어 과거의 신앙언어들을 해석해서 새로운 언어를 발생시켜야 한다.

교회 안의 기득권자들은 신앙언어가 시대의 사회적, 문화적 여건과는 무관하다고 흔히 생각한다. 신앙은 시간과 공간에 대해 보편성(普遍性)을 지니지만, 한 시대의 교회가 만들어서 사용한 언어들, 곧 교리, 교회의 조직, 및 실천들 그 자체를 보편적인 것이라 주장하며 강요하는 것은 인간 언어의 역사성을 모르기 때문이다. 영원한 신앙이지만 신앙언어는 인간의 것이기에 시대에 따라 다른 언어로 표현된다. 바로 이 언어의 역사성에 대한 몰이해(沒理解)가 오늘 교회 기득권자들의 말을 여러 차원에서 독백(獨白)으로 만들고 있다. 시대를 착각한 이런 확신이 오늘의 신앙언어가 겪는 위기의 원인이다. 교회가 사용하는 언어 안에 나타나는 논리(論理), 표상(表象), 신화(神話), 개념(槪念) 등은 모두 과거 어느 한 시대 사회에서 통용되던 것들이다. 그런 언어들과 그리스도 신앙을 혼동하여 그 언어들만이 그리스도 신앙이라고 확신하는 사람들이 있다. 시대를 착각하여 신앙언어를 사용하면, 그리스도 신앙의 고유함은 사라지고, 사람들은 인류 역사 안에 항상 있는 종교적 욕구를 성취하는 수단으로 착각할 것이다. 결국 신앙은 내세(來世)와 현세를 위한 소원성취를 찾는 길이 되고, 교회는 하느님을 후광으로 삼은 권력 집단이 되고 말 것이다.

고해성사
(*새로워져야 합니다, 분도출판사 1999년, 143-172 참조)


개인 고백을 수반하는 현행 고해성사는 1215년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규정한 것이다. 모든 신자는 자기 본당 신부에게 1년에 한 번은 의무적으로 죄를 고백하고, 하느님의 용서를 선포 받으라는 것이었다. 이 규정은 당시 필요하였던 실천들을 규정하는 71개 항목들 가운데 하나이다. 그 71개 항목들 중 다른 모든 항목은 오늘 필요 없는 것이 되었지만, 고해성사에 관한 규정만은 오늘까지 실천되고 있는 유일한 항목이다.

16세기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가톨릭교회가 그 여파를 수습하는 과정에 개최한 트렌토 공의회(1545-63)는 제4차 라테란 공의회가 규정한 고해성사를 예수님이 세우신 일곱 성사 중 하나라고 선포하였다. 이제 개인고백을 수반하는 고해성사는 예수님이 마련해 주신 성사가 되어버렸다. 트렌토 공의회는 이 문제에 대한 신학적 반성을 전혀 하지 않았고, 역사비평적 감수성도 없는 시대였다. 예수가 세운 성사라는 말은 예수의 복음 선포가 기원이 되어 발생한 성사라는 뜻이다. 개신교회들이 성사들을 폐기하자, 공의회 교부들은 성사들의 기원이 예수 안에 있다는 사실을 선포하는 데에만 급급하였다. 그리고 완벽한 수라고 인식되던 일곱이라는 수를 만들기 위해 세례와 견진을 분리하여 두 성사로 만들기까지 하였다.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못하고, 엄청난 보속으로만 죄가 용서된다고 믿던 신자들을 위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선포하기 위해 발생한 13세기의 개인고백 고해성사 의무였다. 고해성사에서 보속을 주는 것은 죄를 용서받기 위해 그 시대에 흔히 행해지던 엄청난 보속을 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러나 지금은 그것을 통하지 않으면, 하느님이 용서하지 않는다는 메시지를 발생시키는 성사가 되었다. 오늘은 모든 사람이 스스로 넘치는 정보를 받고, 스스로 판단하고 선택하면서 살아간다. 높은 사람 앞에 가서 무릎을 꿇고 통촉하심을 빌고 그의 지시를 받아 사는 세상이 아니다.

요한복음서는 예수가 제자들에게 복음 선포를 명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고 알린다. “성령을 받으시오.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들은 용서받을 것이요,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20, 22-23) (*“여러분이 누구의 죄든지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입니다."라는 말씀은 죄의 용서가 제자들의 임의에 맡겨졌다는 뜻이 아니다. 한 번 긍정적으로 말하고 그것을 부정으로 다시 한 번 더 말하며 강조하는 유대인들의 화법(話法)이다.)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곧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를 선포하는 것이라는 말씀이다. 그것이 성령이 우리 안에 이루시는 일이기도 하다. 초기 신앙인들이 발생시킨 교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선포되는 교회, 성령이 살아 계시는 교회이기 위해서는 죄를 용서하시는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선포하는 교회가 되어야 한다. 라테란 제4차 공의회와 트렌토 공의회의 정신을 계승하는 교회라면, 오늘의 신앙인들이 하느님이 용서하신다는 사실을 체험할 수 있는 새로운 양식들, 예를 들면, 개인고백 없는 공동참회 전례와 같은 것을 만들어 실천해야 한다.

4. 새롭게 해석되어야 하는 신앙언어

현대인은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이 몸담고 있는 제도와 그 제도가 부여하는 권위를 보고 그 사람의 말을 수용하지 않는다. 그것은 전근대(前近代)적 사고방식이다. 현대인은 하나의 언어가 수용할만한 것이라고 스스로 판단할 때, 그것을 수용한다. 신앙 체험은 인간이 하는 다른 체험들 안에서 구원으로 해석될 수 있어야 한다. 증오와 복수에 비하여 사랑과 용서가 구원이며, 인간이 사랑하고 용서할 때, 참으로 자유롭다는 사실은 자명하다. 신앙은 현세적 체험들을 지닌 인간 각자가 전승된 신앙언어를 접하면서, 하느님과의 연대성 안에서 자기의 삶과 세상에 대해 새롭게 해석하며 갖는 확신이다.

그리스도 신앙언어 전승이 전하는 메시지에는 새로운 체험을 발생시키는 교육적 제안이 내포되어 있다. 이 교육적 제안은 초현세적 체험으로 사람을 인도하지 않는다. 기적적인 것을 찾고, 그것을 얻어내는 신앙이 아니다. 이 교육은 인간이 이미 한 체험들을 하느님과 연대성 안에서 새롭게 해석하게 하고, 인간 존재의 새로운 의미를 탐구하게 한다. 인간은 살면서 끊임없이 배운다. 인간은 두려움과 후회와 싸우며, 의미와 사랑과 용기를 추구한다.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상처(傷處) 받고, 자기에게 소중한 사람들이 사라지는 상실(喪失)을 겪으며, 덧없이 흘러가는 시간들을 이해하려고 노력한다. 많은 사람들은 재물, 지위, 안전한 직업 등에서 삶의 의미를 찾으려 한다. 그리스도 신앙의 메시지는 이렇게 인간이 스스로 부여하는 인생의 의미에 하느님과의 연대성을 동기로 발생하는 해방적 성격을 지닌 새로운 이해와 깨달음을 준다. 그것이 구원이다.

신학은 전승된 신앙언어와 그 시대 인간 ‘인식의 망’ 사이에 교류가 가능하도록 하는 사명을 지닌 학문이다. 그 사명을 다 하기 위해 신학은 경전의 언어를 발생시킨, 원초의 체험과 신앙의 역사 안에 나타난 언어들의 전승을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과 연결하여 새롭게 해석한다. 그것을 역사비평(歷史批評)이라 부른다. 그런 해석을 하지 못하면, 신학은 과거 언어만을 반복 강요하면서, 시대착오적인 신앙인을 만드는 데에 기여할 것이다. 신학은 그 시대가 지닌 ‘인식의 망’에서도 신앙언어를 구원적인 것, 즉 기쁜 소식으로 이해하고 실천하게 하는 창조적 학문이다.

계시에 대한 올바른 이해는 과거 한 시대의 해석에 안주하여, 같은 언어만을 반복하면서 순종을 강요하는 권위주의적 자세에서 발생하지 않는다. 그리스도 신앙언어는 하느님에게 순종하라고 말하지, 사람에게 순종하라고 말하지 않는다. 과거 유럽의 중세 사회에서는 하위자가 상위자에게 순종하는 것은 하위자의 실효성을 높이는 길이었다. 종교 집단은 과거 인간 문화의 유산을 하느님을 배경으로 정당화하기 쉽다. 종교 집단도 인간의 집단이기에 무지(無知)로 말미암은 횡포들은 있게 마련이다. 그리고 인간은 구실만 있으면, 다른 사람들 위에 군림하려는 유혹을 항상 받는다. 그래서 라틴어 격언은 ‘인간은 인간에게 늑대’라고 말한다. 권위주의적 언어는 종교라는 인간 집단의 언어일 수는 있어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을 전달하는 그리스도적 신앙언어일 수는 없다. 그리스도 신앙언어의 핵심인 섬김이 외면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가까이 불러 이르셨다. ‘너희도 알다시피 다른 민족들의 통치자라는 자들은 백성 위에 군림하고, 고관들은 백성에게 세도를 부린다. 그러나 너 희는 그래서는 안 된다. 너희 가운데에서 높은 사람이 되려는 이는 너희를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또한 너희 가운데에서 첫째가 되려는 이는 모든 이의 종이 되 어야 한다. 사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고, 또 많 은 이들의 몸값으로 자기 목숨을 바치러 왔다.’”(마르 10, 42-45)


나오면서

현대 신앙언어는 위기를 겪고 있다. 전승된 신앙언어를 새롭게 해석하지 않고, 그것을 반복만 하면서, 하느님의 권위로 그것을 정당화하고 있다. 사람들이 지닌 ‘인식의 망’은 과거와 달라졌는데, 신앙공동체들은 과거의 언어에 집착하여 그것을 반복하는 데에만 급급하다. 그러면서 기적과 신비와 권위로 사람들의 시선을 끌어간다.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에는 과거와 같이 기적과 신비와 권위가 곧 구원이라는 등식(等式)이 없다. 그 ‘인식의 망’에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것은 인간 삶에 대한 근본적 신뢰, 타인을 위한 투신(投身), 선을 행하고 악을 거슬려 싸워야 하는 마음 등이다. 이런 것과 연결된 언어는 현대인에게 구원으로 쉽게 이해된다. 현대인의 생활 여건은 과거의 것과는 많이 다르다. 패러다임이 달라졌다고 말할 것이다. 수직적인 것이 퇴색하고, 수평적인 것이 실효성을 지니는 시대이다. 현대인을 위한 신앙언어는 그들이 체험하는 구원에 열려있어야 한다.

오늘 신앙은 기적과 신비와 권위를 주는 것인 양 말할 때, 흔히 볼 수 있는 현상은 신앙이 마치 인간 삶에서 발생한 원리들을 하느님의 힘을 빌려 성취하는 수단인 양 제시되는 것이다. 하느님은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원리를 당신의 전능한 힘으로 성취하고, 우리의 힘으로 이루지 못하는 사필귀정(事必歸正)을 하느님이 실현해주는 것 같이 말하기도 한다. 흔히 하느님의 마음에 들면 입신양명(立身揚名)과 부귀영화(富貴榮華)를 얻을 수 있다고 말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런 언어들은 예수로 말미암아 발생한 기본 원리들, 곧 하느님의 나라를 위한 원리들을 외면하고 있다. 예수는 율법을 매개로 인과응보를 주장하던 유대교 당국의 가르침에 맞서서 하느님의 자비와 용서와 사랑을 가르쳤다. 예수는 입신양명의 길을 가르치지 않고, 섬김을 실천하라고 가르쳤다. 예수는 당신도 섬기는 사람이라고 말하였다(루가 22, 27). 부귀영화를 주는 하느님이 아니라, 가난한 이들, 버려진 이들과도 함께 계시는 하느님을 예수는 가르쳤다. 그리고 그 하느님을 아버지로 한 생명을 살아서 그들과의 어떤 연대성을 살 것을 촉구하였다.

예수가 가르친 기본적인 것, 곧 하느님의 나라에 대한 가르침에 손상을 주는 교회의 복음 선포라면,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신앙은 없고, 예수 그리스도와 하느님을 빙자한 종교집단이 있을 뿐이다. 인류역사와 더불어 종교들은 항상 있어왔고, 종교집단들은 초자연적 힘을 빌려 인간의 소원을 성취하는 것 같이 가르치기도 하였다. 그리스도 교회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하고 전래(傳來)된 신앙언어를 현대인이 자기 ‘인식의 망’에서 이해하도록 새롭게 해석해야 한다. 현대인이 이기심을 극복하고 생명과 삶의 신비에 접근하여 아버지이신 하느님을 발견하는 데 도움을 주는 오늘의 신앙언어가 되어야 한다.

인간에게 요구된 자기 극복과 생명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결정적으로 나타났다고 믿는 그리스도 신앙이다. “그분 말고 다른 어느 누구한테도 구원은 없습니다. 사람에게 주어진 이름 가운데 우리가 의지하여 구원받아야 할 이름은 하늘 아래 없습니다.”(사도 4, 12). 초기 신앙공동체가 하는 고백이며, 베드로가 유대교 최고의회에서 증언한 내용이다. 타종교를 거부하고 비판하기 위한, 배타적 의미로 사용하지 말아야 하는 말이다. 예수를 죽이면서 그분을 거부한 유대교 당국 앞에, 초기 그리스도 신앙인들이 그들의 믿음을 표현한 말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생명과 삶의 신비를 알리는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초기 공동체의 신앙고백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발생한 그리스도 신앙 언어는 현대인의 체험을 조명하면서 그들에게 전달하는 구원의 메시지를 지녀야 한다. 그 역할을 하지 못하는 신앙언어는 과거의 언어를 반복하는 독백이 되거나, 일반 종교적 염원을 담은 기복(祈福)적 소원성취의 언어로 전락하고 말 것이다. 그런 언어가 지배하는 종교 집단에는 입으로는 하느님을 말하면서 실제로는 현세적 부귀영화가 최종적 가치일 것이다.

현대인의 ‘인식의 망’ 혹은 패러다임이 변하였다. 신앙언어가 현대인의 체험을 조명하고 그 체험에 전달하는 바가 있기 위해서는 신학이 현대인이 지닌 ‘인식의 망’을 이해하고 그것을 참조하여 신앙언어를 새롭게 발생시켜야 한다. 신앙의 응답을 오늘의 인간 체험 안에 나타나는 인간적 문제들과 연결시켜서 표현하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인간은 각자 세상과 자기의 인생에 대해 어떤 의미를 부여하고, 그 의미에 응답하면서 살고 있다. 그리스도 신앙언어는 현대인이 보는 의미와 그들이 하는 응답에 해방적 성격을 부여하여 하느님으로 말미암은 구원을 보게 해야 한다. 각자가 자기 방식대로 이미 터득한 의미와 응답이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새롭게 해석되어, 그들의 삶에 결정적인 가치로 살아있게 도와주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내가 율법이나 예언자들의 말을 혁파하러 온 줄로 여기지 마시오. 혁파하러 온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완성하러 왔습니다.“(마태 5, 17)는 말씀과 같이 그리스도 신앙언어는 인간이 하는 부분적 응답을 완성시키는 언어가 되어야 한다. ◆
 

   
 
서공석 신부/ 1964년 파리에서 사제로 수품되었다. 파리 가톨릭대학교에서 신학석사(1965), 교황청 그레고리오 대학에서 신학박사(1968) 학위를 취득했다. 광주 대건신학대학(현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 부산 메리놀 병원장, 서강대학교 종교학과 교수 등을 역임하고 부산 사직성당 주임신부로 봉직하고, 은퇴 후 예수공부모임 등에서 깅의를 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새로워져야 합니다', '예수-하느님-교회', '디오그네투스에게'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댓글 1

  • 2012년 3월 26일 오후 5:10

    현정시가 올린 글 뒷북으로 두 신부님의 글을 올려봅니다. 누가 다 옳고 그르다기보다는 우리가 보다 다양한 시각을 접하는 차원에서...

아무 이야기나!

목록 전체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