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일, 하느님 자비주일]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요한20,19-31)

2022. 4. 24. 오전 5:37: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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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424일 일요일

 

[부활 제2주일, 하느님 자비주일]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요한20,19-31)

 



1독서<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사도5,12-16)

12 사도들의 손을 통하여 백성 가운데에서 많은 표징과 이적이 일어났다. 그들은 모두 한마음으로 솔로몬 주랑에 모이곤 하였다.

13 다른 사람들은 아무도 감히 그들 가운데에 끼어들지 못하였다. 백성은 그들을 존경하여, 14 주님을 믿는 남녀 신자들의 무리가 더욱더 늘어났다.

15 그리하여 사람들은 병자들을 한길까지 데려다가 침상이나 들것에 눕혀 놓고, 베드로가 지나갈 때에 그의 그림자만이라도 누구에겐가 드리워지기를 바랐다.

16 예루살렘 주변의 여러 고을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병자들과 또 더러운 영에게 시달리는 이들을 데리고 몰려들었는데, 그들도 모두 병이 나았다.

 

화답송시편 118(117),2-4.22-24.25-27ㄱㄴ(1)

주님은 좋으신 분, 찬송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이스라엘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아론의 집안은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주님을 경외하는 이는 말하여라. “주님의 자애는 영원하시다.”

집 짓는 이들이 내버린 돌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네. 주님이 이루신 일우리 눈에는 놀랍기만 하네. 이날은 주님이 마련하신 날, 이날을 기뻐하며 즐거워하세.

주님, 구원을 베풀어 주소서. 주님, 번영을 이루어 주소서. 주님의 이름으로 오는 이는 복되어라. 우리는 주님의 집에서 너희에게 축복하노라. 주님은 하느님 우리를 비추시네.

 

2독서<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묵시1,9-11.12-13.17-19)

9 여러분의 형제로서, 예수님 안에서 여러분과 더불어 환난을 겪고 그분의 나라에 같이 참여하며 함께 인내하는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과 예수님에 대한 증언 때문에 파트모스라는 섬에서 지내고 있었습니다.

10 어느 주일에 나는 성령께 사로잡혀 내 뒤에서 나팔 소리처럼 울리는 큰 목소리를 들었습니다.

11 그 목소리가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네가 보는 것을 책에 기록하여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보내라.”

12 나는 나에게 말하는 것이 누구의 목소리인지 보려고 돌아섰습니다. 돌아서서 보니 황금 등잔대가 일곱 개 있고,

13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

17 나는 그분을 뵙고, 죽은 사람처럼 그분 발 앞에 엎드렸습니다. 그러자 그분께서 나에게 오른손을 얹고 말씀하셨습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나는 처음이며 마지막이고

18 살아 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

 

복음<여드레 뒤에 예수님께서 오셨다.>(요한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부활 제2주일, 하느님의 자비 주일 제1독서(사도2,42-47)

 

"형제들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기도하는 일에 전념하였다."(사도2,42)

 

사도행전 2장 42절의 '전념하였다'에 해당하는 '프로스카르테룬테스' (proskarteruntes)의 원형 '프로스카르테레오'(proskartereo)는 '힘입게 집착하다'라는 의미이다.

 

여기서는 현재 분사형으로 사용되었으며, 미완료 과거 동사 '에산'(esan)과 서로 관련되어 쓰여서 계속하여 힘썼음이 강조되고 있다.

 

말하자면, '(그들은) 계속해서 전념하고 있었다(They were continually devoting themselves)'는 뜻이다.

 

원문에서 '에산 데 프로스카르테룬테스'(esan de proskarteruntes)가 사도행전 2장 42절의 제일 앞에 쓰여서,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기도하는 일' 네 가지 모두를 포함하는 것으로 나온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

 

사도행전 2장 42절부터 47절 까지는 오순절 성령 강림으로 시작된 예루살렘 초대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을 간략하게 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 공동체는 예수님을 따르는 강력한 신앙 공동체를 형성하게 되었는데, 바로 사도들의 가르침이 중심이 된 공동체였다.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고'에 해당하는 '테 디다케 톤 아포스톨론' (te didache ton apostollon; to the teaching of the apostles)에서 '사도들'은 복수형이고,'가르침'(디다케)은 '단수형'이다.

 

이것은 베드로의 설교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된 수천 명의 제자들에게 열두 사도 모두가 가르쳤음을 보여 주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러 사도들의 가르침은 한 가지였다는 사실을 나타낸다.

 

왜냐하면, 사도들이 자신들의 생각이나 개인적인 철학을 가르친 것이 아니고,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영적, 그분의 생애와 구원 사업, 즉 복음만을 가르쳤기 때문이다.

 

바로 사도들이 가르친 내용은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가르쳐 주셨던 내용(마태28,20)과 예수님의 생애를 기본으로 한다 (사도3,15; 4,10; 1코린15,1~4).

 

교회가 사도들의 가르침을 받은 것은(1테살4,1.2) 하느님께로부터 온 권위에 입각한 것으로 이것은 교회를 교회이게 하고 교회답게 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다.

 

'친교를 이루며 빵을 떼어 나누고'

 

원문은 '카이 테 코이노니아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kai te koinonia te kllasei tu artu)인데, 초대 교회의 두번째 특징적인 모습은 '사도들의 가르침'에 이어서 '성도들의 친교'(to the communal life)이다.

 

초대 교회에서 '성도들의 친교'는 정신적인 친교일 뿐 아니라 물질적인 친교이기도 하다.

 

'친교'에 해당하는 '코이노니아'(koinonia; fellowship)는 신약 성경에서 '사귀다'(2코린6,14)로 번역되거나 '헌금'의 의미로 '동정하다','자기의 것을 나누어 주다'(로마15,26)라는 뜻으로 사용되었다.

 

오순절 성령 강림 이후 교회를 구성한 공동체의 성도들은 같은 믿음 안에서 서로 영적인 친교를 나누었을 뿐만 아니라 물질적으로 서로 도왔던 것이다.

 

'빵을 떼어 나누고'

 

그 다음 초대 교회의 특징적인 모습은 '성찬'이다. 여기서 '빵을 떼어 나누고'에 해당하는 '테 클라세이 투 아르투' (fractio panis; to the breaking of bread)는 단순한 식사가 아니다.

 

초대 교회에서는 성도들이 모이면 아가페 형식의 기본적인 식사를 하고, 그 다음 주님의 가르침에 따라 성찬의 의식을 하였다.

 

먼저 아가페 형식의 식사를 한 것은 공동체의 형제들 가운데 가난해서 식사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지체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기서 '빵을 떼어 나누었으며'라는 표현은 성찬의 전례의식, 곧 성체성사를 나타내는 용어이다(마태26,26; 마르코14,22; 루카22,19; 1코린11,23.24).

 

초대 교회 성도들은 모일 때마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기념하는 성찬의 전례 즉 성체성사를 거행하였던 것이다.

 

'기도하는 일에'

 

원문은 '카이 타이스 프로슈카이스'(kai tais proseuchais; and to the prayers)인데,초대 교회의 네번째 특징은 '기도'였다.

 

초대 교회가 역동성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기도가 뒷받침되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예수님의 기도의 권면에 따라(마태7,7; 26,41; 루카18,1; 요한16,24) 기도에 힘썼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사도행전에 기도에 대한 기록이 너무나 풍부하다는 데서 잘 보여준다(사도4,24; 12,5.12; 21,5).

 


 

20220424일 일요일

[부활 제2주일 곧, 하느님의 자비 주일](매일미사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부활 제2주일, 교회는 토마스의 불신앙에 관한 이야기를 듣습니다.

오늘 복음은 두려움에 사로잡힌 제자들이 문을 잠가 놓고 있는 모습을 전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들에게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나타나시어 용기를 북돋아 주시고 성령을 불어넣어 주십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제자들 가운데 토마스는 없었습니다.

그 때문에 그는 주님의 부활을 믿지 못합니다.

 

여드레 뒤, 토마스를 포함한 제자들이 함께 모였을 때 예수님께서 다시 나타나십니다.

그리고 말씀하십니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이 구절 뒷부분의 그리스 말 본문을 직역하면,

믿지 않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이가 되어라.’입니다.

 

토마스를 향한 예수님의 명령은

지금껏 품어 온 불신과 의심을 내려놓으라는 초대의 말씀으로 이해할 수 있습니다.

한편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이라는 토마스의 신앙 고백은

예수님께서 주님이시며, ‘하느님이시라는 이중 고백을 포함합니다.

이 탁월한 표현은 초기 교회 공동체 전례 때 사용되었을

신앙 고백이 반영되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에서는 믿음과 증언, 믿음과 행복이 긴밀히 연결됩니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의 파스카 신비를 체험한 교회는,

이제 더 이상 직접 보는 것이 아니라 목격 증인의 증언을 믿음의 토대로 삼습니다.

 

이러한 신앙 전통으로 말미암아,

우리도 성경과 성전, 수많은 성인과 이름 모를 이웃의 힘 있는 증언을 통하여

부활하신 주 예수님과 새로운 관계를 맺도록 끊임없이 초대를 받습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부활 제2주일]

주님과 우리의 만남은 필연이었다.

(요한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 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 잠가 놓은 문, 곧 주님께서 선택하신 이들의 문(집, 마음)을 뚫고 들어오시는 주님이심을 보여주신다. 그리고 그들의 모든 죄가 십ㄷ자가에서 당신의 대속으로 다 씻겨 졌으니 평화를 누리라 하신다.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 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 대속으로 못 박히셨던 손과 창에 찔렸던 옆구리다. 십자가로 거저 얻는 의로움, 곧 구원의 새 계약의 피와 물이 흘러내린 그리스도의 옆구리다. 그러니 평화를 누리라 하신다.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 곧 끝나버릴 그것도 위장된 세상의 평화가 아닌 영원한 하늘의 평화를 전하라 하시는 것이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 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 성령을 받아야 우리(나)가 주님의 대속, 그 구원의 새 계약으로 거저 용서받았음을 믿을 수 있고, 다른 이들도 용서 받도록, 용서가 이루어지도록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의 힘, 지혜로 십자가의 복음을 진리로 전하라는 말씀이시다. 그것이 큰 계명의 이웃을 나 자신처럼 사랑함 이다.

 

(창세2,7) 7 그때에 주 하느님께서 흙의 먼지로 사람을 빚으시고, 그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사람이 *생명체가 되었다.

= 첫 창조는 숨으로, 흙이 생명이 될 수 있는 생명체가 된 것이다. 그 생명체인 사람을 그 또한 죄로 죽어야 했던 그 옛사람을 그리스도께서 다시 숨, 성령으로 재 창조, 새 창조로 새 사람, 곧 하늘의 생명이 되게 하신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대속, 그 새 계약이 있었기 때문이다.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ㄱ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

= 토마스는 얼마나 부러웠을까?

 

25ㄴ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 토마스는 부활하신 주님을 뵙고도 두려워서 문을 잠가놓고 떨고 있는 다른 제자들의 모습을 보며 의문이 들었던 것이다. 주님을 뵙고도 여전히 떨고 있었으며 주님은 왜 그런 그들을 그대로 내버려 두실까? 하는 의문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주님을 더욱 뵙고 싶었던 것이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 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 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 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았을 때 했던 토마스의 말 그대로 예수님께서 똑 같이 말씀하신다. 예수님은 늘 토마스 곁에 함께 하셨던 것이다. 곧 당신께서 선택한 이들을 구원에 이르기까지 끝까지 사람하심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

(요한13,1) 1 파스카 축제가 시작되기 전, 예수님께서는 이 세상에서 아버지께로 건너가실 때가 온 것을 아셨다. 그분께서는 이 세상에서 사랑하신 *당신의 사람들을 끝까지 사랑하셨다.

= 예수님의 사랑으로 시작하셔서 그 예수님의 사랑으로 끝까지 사랑하시는 것이 구원의 완료, 종결이다.

 

(로마8,29-30) 29 하느님께서는 미리 뽑으신 이들을 당신의 아드님과 같은 모상이 되도록 미리 정하셨습니다. 그리하여 그 아드님께서 많은 형제 가운데 맏이가 되게 하셨습니다. 30 그렇게 미리 정하신 이들을 또한 부르셨고, 부르신 이들을 또한 의롭게 하셨으며, 의롭게 하신 이들을 또한 영광스럽게 해 주셨습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 그분의 대속으로 거저 의롭게, 영광스럽게 되는 것이다. 모든 인간들의 죄로 대신 못이 박힌 손, 그리고 창에 찔린 옆구리, 그 죽기까지 끝까지 하신 사랑하심이다. 그러니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하신다.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 예수님의 옆구리에 손가락을 넣어보지 않고, 믿음을 고백한 것이다. 곧 믿음이 들어와 버린 것이다. 믿음은 보고, 안보고에서 발생되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신 예수님께서 주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래서 주님이라는 단어가 등장한 것이다.

믿음은 우리의 결핍을 찾아내서 채우는 방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믿음의 주인이신 예수님에 의해서 거저 한번에 주어지는 것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니 주님과의 만남이 중요한 것이다. 만남은 그분 말씀을 기억(기도)하는 것이다.

 

(히브12,2) 2 그러면서 우리 믿음의 영도자이시며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바라봅시다. 그분께서는 당신 앞에 놓인 기쁨을 내다보시면서, 부끄러움도 아랑곳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견디어 내시어, 하느님의 어좌 오른쪽에 앉으셨습니다.

= 예수님의 십자가를 구원의 진리로 바라보는 것이 믿음이다. 토마스는 보고서 믿겠다고 부활의 주님을 기다렸다. 그런데 그 보는 행위에 앞서 *만남이라는 것이 이루어지자 *믿음이 토마스에게 들어와 버린 것이다. 믿음이 들어와 토마스가 믿는 자가 된 것이다. 하늘의 믿음으로 믿음이 되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라는 것이다.

 

29ㄱ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 ‘나를 보고 믿겠다고? 그것은 아니지’ 하시는, 되물음이신 것이다.

 

29ㄴ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바라크-福)하다.”

= 보이지 않고 믿는 것이 福(바라크)이다. 하신다. 곧 하느님 나라의 기쁜 소식, 복음, 그 구원의 말씀 선포를 듣고 믿는 사람이 福이다. 그리고 그 말씀을 ‘보호자 성령의 이끄심으로 온전히 깨달아 올바로 믿는 이가 복이다.’ 하시는 것이다. 보이는 것이 아닌 보이지 않는 것을 믿는 것, 올바른 믿음이다.

 

(1코린2,9-10) 9 그러나 성경에 기록된 그대로 되었습니다. “어떠한 눈도 본 적이 없고 어떠한 귀도 들은 적이 없으며 사람의 마음에도 떠오른 적이 없는 것들을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을 위하여 마련해 두셨다.” 10 하느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것들을 바로 우리에게 계시해 주셨습니다. 성령께서는 모든 것을, 그리고 하느님의 깊은 비밀까지도 통찰하십니다.

= 성령의 인도로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감추어진 뜻을 깨닫는 것이 복인 것이다. 하느님의 구원의 계획, 그 진리를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고, 성령께서 그 십자가를 진리로 우리에게 적용하시어 영원한 생명, 곧 구원을 완성하신 것이다.(로마8,1~ 히브10,15~ 참조)

 

그래서 요한은 이 책의 목적이 예수님으로 얻는 영원한 생명임을 밝힌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 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아멘>

 

☨천주의 성령님! 저희를 충만하게 하시어 복받은 자임을 기억하며 살게 하소서 ~아멘!!!

 



 

 부활 제2주일 복음(요한20,19-31)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는냐? 보지 않고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28-29)

 

'토마스'에 해당하는 '디뒤모스'(Didymos; Thomas)는 아람어(Aramic)적인 표현으로 '쌍둥이'라는 뜻도 있지만, '이중성'이라는 뜻도 갖는다.

 

여기서 요한 복음사가가 이것을 밝힌 것은 육적인 열정에 비해 영적인 믿음이 뒷받침되지 못한 그의 신앙 상태를 그대로 잘 드러내 주기 때문이다.

 

이런 토마스가 7일간 계속되던 유월절 축제 기간이 완전히 끝나고, 동시에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처음 나타나신 주일로부터 7일이 지나 다시 주일이 된 '여드레 뒤에' 부활하신 주님의 발현을 체험하고 신앙 고백을 한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에 해당하는 '호 퀴리오스 무 카이 호 테오스 무'(ho kyrios mou kai ho theos mou; My Lord and my God)는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아드님이실 뿐만 아니라 죽음의 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심으로써 모든 믿는 이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드러낸다.

 

여기서 '저의'에 해당하는 '무'(mou; my)라는 1인칭 단수 소유 대명사가 두 번이나 사용되었다.

 

이것은 이전에는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해서 지식적으로만 알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분께서 하느님의 진정한 하느님이시라는 사실을, 개인적으로 그리고 실제적으로 체험하여 깨달았음을 보여 준다.

 

특히 원문에서는 '~이시며'와 '~이십니다'에 해당하는 영어의 Be동사에 해당하는 희랍어 '에이미'(eimi) 동사가 생략되었고, 각 단어들 앞에 각각 '호'(ho)라는 관사가 각각 사용되어서 예수님의 유일성과 신성(神性)이 더욱 강조된다.

 

토마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나 뵙게 되자 직접 못 자국과 창 자국을 먼저 볼 필요도 없이 그의 의심들이 눈 녹듯이 모두 사라졌고, 이 고백의 말을 외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것은 잘 정리된 신앙 고백이라고도 할 수 있지만, 놀라움에 가득찬 탄성과 같은 것이다.

 

특히 여기서 강조되어야 하는 것은 토마스가 이전에 자신이 함께했던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주님을 동일시했다는 점이다.

 

이처럼 예수님의 부활은 의심많은 토마스와 같은 사람에게도 능력을 발휘하는 영혼의 부활이요, 육체의 부활이며, 뿐만 아니라 역사적인 부활이었다.

 

토마스가 체험한 이 부활의 능력은 그를 의심많은 제자에서 참된 신앙을 고백하며 결단하는 제자로 바꾸어 버렸다.

 

한편, 요한 복음 20장 27절에서는 '믿음없는 자'에 해당하는 '아피스토스'(apistos; faithless)와 '믿는 자'에 해당하는 '피스토스'(pistos; believing)가 서로 대조 되었고, 요한 복음 20장 29절에서는 토마스로 대표되는 '보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헤오라카스~페피스튜카스'(heorakas~pepiteukas)와 '보지 않고 믿는 자들'에 해당하는 '호이 메 이돈테스 카이 피스튜산테스'(hoi me idontes kai pisteusantes; these who have not seen and you have believed)가 서로 대조되었다.

 

첫번째의 대조는 불신앙을 버리고 신앙을 촉구하는 요한 복음서의 기록 목적 (요한20,31)을 반영한다.

 

신앙과 불신앙 사이의 선택은 당시의 등장 인물들에게 부과된 선택이었을 뿐만 아니라 요한 복음에서 독자들인 초대 교회 성도들과 오늘날 이 말씀을 듣는 우리들에게 계속해서 던져지는 핵심적인 질문이다.

 

그러나 두번째 대조는 성경의 어떤 인물들도 당시까지는 다다르지 못한 높은 신앙에 대한 촉구이다.

 

즉 토마스 뿐만 아니라 다른 제자들조차도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그들의 눈으로 보기 전에는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을 확실히 믿지 못했었다.

 

그러나 예수님의 승천 이후의 시대에 태어나 예수님을 받아들인 자들은 모두 보지 않고서도 믿는, 참으로 더 복된 자들이라는 말이다.

 




생명의 말씀(2022424(다해)부활 제2주일/ 서울주보)


상처는 결코 마지막이 아닙니다


정수용이냐시오 신부 | 가톨릭평화방송 · 평화신문 보도주간

 

너무나 사랑하고 존경했던 스승님이 억울하게 돌아가셨습니다. 그것도 우리와 함께했던 동지 가운데서 배신자가 나왔습니다. 예루살렘에 들어올 때, 스승님을 보고 환호하는 사람들이 많았기에 이렇게 손쓸 겨를도 없이 일이 진행될 줄은 상상도 못 했습니다.

순식간에 체포되셨고, 재판과 형 집행도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율법 학자들은 율법을 잘 안다는 이유로 거들먹거리고 성전의 이권을 챙기며 떵떵거리고 사는데, 스승님은 가난한 이들에게 진리의 말씀을 전했다는 이유로 그렇게 끔찍한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입니다.

우리 제자들도 갑자기 겁을 먹었습니다. 이제 다음 차례로 우리까지 잡혀가는 것은 아닌지. 언제 소환장이 날아오고, 조사를 받고, 고문을 당할지 모르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잠가 놓고 공포에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우리 앞에 스승님이 나타나셨습니다! 분명 지난 삼 년간 따라다니며 함께 지냈던 그 스승님이 분명합니다. 손과 발, 그리고 옆구리의 상처도 보여주십니다. 어안이 벙벙했지만 너무나 반가웠고, 주체할 수 없는 기쁨이 가슴에 가득했습니다.

마침 그날, 우리 동지 중 하나인 토마스는 그 자리에 없었습니다. 우리는 못 자국이 선명한 스승님이었다고 전해주었지만, 토마스는 우리가 주님을 뵈었다는 말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러면서 그분의 못 자국을 직접 보고 만져보아야 믿을 수 있겠다 합니다. 하긴, 다시 살아오신 스승님을 직접 보고도 이게 꿈인가 생시인가 싶은데, 그 자리에 없었던 토마스의 반응도 이해는 갑니다.

그 일이 있고 여드레 뒤, 우리는 아직도 두려운 마음이 들어 집안 문을 모두 잠그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시 스승님이 나타나셨습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그분은 지난주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먼저 인사를 건네주셨습니다. 그리고는 다정한 눈빛으로 토마스에게도 다가가셨습니다.

어리둥절해 하는 토마스에게 당신의 못 자국을 보여주시고, 옆구리의 상처도 만지게 해주십니다. “저의 주님, 저의 하느님!” 토마스도 눈물을 흘리며 스승님을 향해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이제 그분의 상처를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상처는 우리를 두렵게 만들지 않았습니다. 사실 스승님께서 부활하셨다는 것만 빼고, 저 문밖은 아무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끝까지 뻔뻔하게 거짓말하는 율법 학자들과 사제들은 십자가로 모든 것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분은 부활하셨고, 우리에게 당신 상처를 보여주셨습니다. 우리 역시 그 상처를 보고 만져보았지만, 이젠 무섭

지 않습니다. 상처는 십자가의 결과지만, 그것이 끝이 아님을 알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잠갔던 저 문을 열고 얼른 나가야겠습니다.

우리가 보고 들을 것을 빨리 사람들에게 전해야겠습니다. 특별히, 지금 스승님처럼 상처 입은 사람들을 만나러 달려가야겠습니다. 그 상처가 끝이 아니라고 선포해야 하겠습니다.

 



  


 

2022년 04월 24일 [부활 제2주일하느님 자비주일]

 

<본기도>

성자의 피로 얻은 구원의 신비를 더욱 깊이 깨닫게 하소서.

 

복음(요한20,19-31)

19 그날 곧 주간 첫날 저녁이 되자제자들은 유다인들이 두려워 문을 모두 잠가 놓고 있었다그런데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예수님이 평화시다.(에페2,14)

 

(필리4,7) 7 사람의 모든 이해를 뛰어넘는 하느님의 평화가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지켜 줄 것입니다.

세상이 주는 평화가 아닌 하늘의 평화다곧 그리스도의 대속(代贖)으로 얻는 영원한 평화(平和).

 

2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당신의 두 손과 옆구리를 그들에게 보여 주셨다제자들은 주님을 뵙고 기뻐하였다.

대속의 흔적(痕迹)이다곧 우리 죄()의 용서(容恕), ()를 선포하는 속죄판그리고 평화로 참 자율흘 주시는 새 계약의 흔적이다. (419일 묵상참조)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처럼 나도 너희를 보낸다.”

하느님께서 우리의 평화로 보내주신 예수님곧 그분의 피(새 계약)로 얻는 평화를 선포하라는 말씀이다그러기 위해서예수님처럼 세상이 주는 평화를 원하는 이들의 반박핍박을 감수해야 한다.

 

22 이렇게 이르시고 나서 그들에게 *숨을 불어넣으며 말씀하셨다. “성령을 받아라.

예수님 당신의 생명을 불어 넣으심이다.

 

(티토3,6) 6 이 성령을 하느님께서는 우리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풍성히 부어 주셨습니다.

 

23 너희가 누구의 죄든지 용서해 주면 그가 용서를 받을 것이고그대로 두면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다.”

성령의 보호하심,이끄심을 받지 못하면 절대 믿을 수도받아들일 수도 없는 평화다모든 인간은 세상이 주는 평화를 원하기 때문이다그래서 이웃에게 전()할 때 먼저 성령께 나와 이웃을 위한 기도를 해야 한다. ‘듣는 귀의 마음을 열어 주시라고 기도해야 한다.

용서(容恕)도 마찬가지다인간은 사람과 사람 사이에 용서를 말한다그러면 죄()는 그대로 남아있게 된다인간들끼리의 용서는 죄를 완전하게깨끗하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히브9,22참조그래서 인간들끼리의 용서는 하늘의 의(), 영원한 생명을 주지 못한다.


(예레2,22 13,23) 2,22 네가 비록 잿물로 네 몸을 씻고 비누를 아무리 많이 쓴다 해도 죄악의 얼룩은 그대로 내 앞에 남아 있다주 하느님의 말씀이다. 13,23 에티오피아(아프리카사람이 자기 피부색을표범이 자기 얼룩을 바꿀 수 있겠느냐그럴 수만 있다면 악에 익숙해진 너희도 선을 행할 수 있으리라.

그러니까 23절의 말씀은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용서하고용서 받도록 선포하라는 말씀이다그랬을 때 나를 힘들게 하는 사람을 내가 미워할용서할 자격이 없음을 깨닫게 된다그것이 우리의 용서(容恕).

 

24 열두 제자 가운데 하나로서 쌍둥이라고 불리는 토마스는 예수님께서 오셨을 때에 그들과 함께 있지 않았다. 25 그래서 다른 제자들이 그에게 우리는 주님을 뵈었소.” 하고 말하였다그러나 토마스는 그들에게,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말하였다.

앞 20절에서 우리 죄의 용서의를 선포하는 속죄판과 평화로 참 자유를 주시는 새 계약의 흔적임을 확인했다.

 

26 여드레 뒤에 제자들이 다시 집 안에 모여 있었는데 토마스도 그들과 함께 있었다문이 다 잠겨 있었는데도 예수님께서 오시어 가운데에 서시며,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말씀하셨다. 27 그러고 나서 토마스에게 이르셨다. “네 손가락을 여기 대 보고 내 손을 보아라네 손을 뻗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아라그리고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28 토마스가 예수님께 대답하였다. “저의 주님저의 하느님!” 29 그러자 예수님께서 토마스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나를 보고서야 믿느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

보지 않고 믿는곧 보이지 않는 죄()의 용서(容恕), ()를 선포(宣布)하는 참 평화(平和)를 주시는 새 계약(契約)의 흔적(痕迹)임을 믿는 우리가 복()’이다.

 

30 예수님께서는 이 책에 기록되지 않은 다른 많은 표징도 제자들 앞에서 일으키셨다. 31 이것들을 기록한 목적은 예수님께서 메시아시며 하느님의 아드님이심을 여러분이 믿고또 그렇게 믿어서 그분의 이름으로 생명을 얻게 하려는 것이다.

신앙의 목적은 땅()의 목숨을 위한 것이 아닌 하늘의 생명을 얻기 위한 것이라는 말이다곧 하느님께 세상의 것을 구()하고 청()해서 그 땅의 것으로 누리는 평화가 아니라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피 새 계약을 진리(眞理)로 믿어 얻는 하늘의 평화인 것이다.

*성경(聖經)에 기록된 모든 말씀과 표징(標徵)들은 그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고 있다. 그래서 말씀의 결론(結論)이 새 계약의 예수 그리스도로 맺어야 한다.

 

(2코린3,6) 6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새 계약의 일꾼이 되는 자격을 주셨습니다이 계약은 문자가 아니라 성령으로 된 것입니다문자는 사람을 죽이고 성령은 사람을 살립니다.

문자(도덕과 윤리)는 죽음의 심판을 주지만 문자 안에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영(), 성령께서는 속죄판(贖罪板), 새 계약의 주님을 구원의 진리로 증언(證言)하시며 다시 살리신다.(요한15,26 로마8,1-4 참조)

 

은총이신 천주의 성령님!

세상이 약속한 평화에 속지 않고우리의 죄로 죽으시고 우리를 의()롭게 하시려 부활하신 그 피의 새 계약이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늘 주신 하늘의 참평화를 잃지 않고 이 땅에서부터 누릴수 있도록 말씀 안에 늘 머무는 삶을신앙을

살게 하소서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아버지의 나라(지혜)가 아버지의 뜻(사랑)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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