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중 제24주일] 용서 (마태 18,21-35)

2020. 9. 13. 오전 6: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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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913일 주일

[연중 제24주일] 용서 (마태 18,21-35)

1독서<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집회 27,3028,7)

30 분노와 진노 역시 혐오스러운 것인데도 죄지은 사람은 이것들을 지니고 있다28,1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 그분께서는 그의 죄악을 엄격히 헤아리시리라2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3 인간이 인간에게 화를 품고서 주님께 치유를 구할 수 있겠느냐4 인간이 같은 인간에게 자비를 품지 않으면서 자기 죄의 용서를 청할 수 있겠느냐5 죽을 몸으로 태어난 인간이 분노를 품고 있으면 누가 그의 죄를 사해 줄 수 있겠느냐6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7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화답송 시편 103(102),1-2.3-4.9-10.11-12(8)

주님은 자비롭고 너그러우시며 분노에는 더디시나 자애는 넘치시네.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내 안의 모든 것도 거룩하신 그 이름 찬미하여라. 내 영혼아, 주님을 찬미하여라. 그분의 온갖 은혜 하나도 잊지 마라.

네 모든 잘못을 용서하시고, 네 모든 아픔을 없애시는 분. 네 목숨을 구렁에서 구해 내시고, 자애와 자비의 관을 씌우시는 분.

끝까지 캐묻지 않으시고, 끝끝내 화를 품지 않으시네. 우리를 죄대로 다루지 않으시고, 우리의 잘못대로 갚지 않으시네.

하늘이 땅 위에 드높은 것처럼, 당신을 경외하는 이에게 자애가 넘치시네. 해 뜨는 데서 해 지는 데가 먼 것처럼, 우리의 허물들을 멀리 치우시네.

 

2독서<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로마 14,7-9)

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복음<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마태 18,21-35)

21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22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3 그러므로 하늘나라는 자기 종들과 셈을 하려는 어떤 임금에게 비길 수 있다24 임금이 셈을 하기 시작하자 만 탈렌트를 빚진 사람 하나가 끌려왔다25 그런데 그가 빚을 갚을 길이 없으므로, 주인은 그 종에게 자신과 아내와 자식과 그 밖에 가진 것을 다 팔아서 갚으라고 명령하였다26 그러자 그 종이 엎드려 절하며, ‘제발 참아 주십시오. 제가 다 갚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27 그 종의 주인은 가엾은 마음이 들어, 그를 놓아주고 부채도 탕감해 주었다28 그런데 그 종이 나가서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을 빚진 동료 하나를 만났다. 그러자 그를 붙들어 멱살을 잡고 빚진 것을 갚아라.’ 하고 말하였다29 그의 동료는 엎드려서, ‘제발 참아 주게. 내가 갚겠네.’ 하고 청하였다30 그러나 그는 들어주려고 하지 않았다. 그리고 가서 그 동료가 빚진 것을 다 갚을 때까지 감옥에 가두었다31 동료들이 그렇게 벌어진 일을 보고 너무 안타까운 나머지, 주인에게 가서 그 일을 죄다 일렀다32 그러자 주인이 그 종을 불러들여 말하였다. ‘이 악한 종아, 네가 청하기에 나는 너에게 빚을 다 탕감해 주었다33 내가 너에게 자비를 베푼 것처럼 너도 네 동료에게 자비를 베풀었어야 하지 않느냐?’ 34 그러고 나서 화가 난 주인은 그를 고문 형리에게 넘겨 빚진 것을 다 갚게 하였다35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연중 제24주일 제1독서 (집회27,30―28,7)


복수하는 자는 주님의 복수를 만나게 되리라그분께서는 그의 죄악을 엄격히 헤아리시리라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28,1-2)


집회서는 유다 지혜 문학의 총결산이라 부른다. 이 책의 원문은 기원전 180년경에 예루살렘에서 벤 시라(집회50,27)에 의해 히브리어로 쓰여졌다. 기원전 130년경에 벤 시라의 손자가 이집트에서 이 책의 히브리어 사본을 발견하고, 히브리어를 모른 채, 그리스어만 사용하는 디아스포라 유다인들을 위해 그리스어로 옮겼으며, 이 그리스어 본문이 현존하고 있다.


전통적으로 그리스도교에서는 집회서를 '리베르 에클레시아스티쿠스'(liber ecclesiasticus:교회의 책)이라 불렀는데, 이 이름은 치프리아누스 시대 이후 서방 교회에서 새로 입교한 사람들을 교육할 때에 이 책의 가르침을 이용하였기 때문에 붙여진 것이다.


집회서의 원저자 벤 시라는 율법서와 예언서, 그밖의 성문서에 속하는 책들을 읽고 해독하는 일에 평생을 바쳐오다가, 배우기를 즐기는 사람들이 율법에 맞는 삶을 한층 더 진지하게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 이 책을 썼다.


집회서는 인생과 관련한 온갖 실천적 주제들을 두서없이 다루는데, 편의상 5부분으로 나눈다.

1(1,1-16,23)~저자는 주님을 경외함이 지혜의 근본임을 천명한다. 여기서 '경외함'은 벌 받을까 두려워하는 소극적인 삶의 자세가 아니라 어른을 삼가 공경하는 적극적이고 긍정적인 자세를 말한다.

2(16,24-23,28)~하느님의 창조위업과 창조주 하느님 앞에 선 인간의 위치를 서술하고, 지혜로운 이와 어리석은 자에 관한 금언들을 나열한다.

3(24,1-32,13)~지혜와 율법에 관한 가르침과 기타 금언들을 포함한다.

4(32,14-42,13)~하느님 경외와 올바른 처세를 강조한다.

5(42,15-50,29)~하느님의 영광과 조상들의 올바른 삶을 기린다.

부록~51


오늘 독서는 3부에 해당되는데, 3부는 25~32장에서 여러 가지 격언과 애인. 장사. 언행. 정의와 신의. 위선. 원망. 빚보증. 자선. 자녀교육. 건강과 재산. 음주와 잔치등과 관련된 구체적 처세 지침들이 나온다.


오늘 1독서(집회27,30-28,7)<분노와 용서>에 대한 말씀을 주신다. 우리가 복수와 적개심이 전제된, 마음속의 화인 분노를 풀고 용서할 때, 주님께서 우리를 용서해 주신다는 말씀이다. 교리에서는, 분노(ira;anger)란 칠죄종의 하나로서, 복수(앙갚음)하고자 하는 무질서한 감정이라 정의한다. 우리는 누구로부터 정신적으로나 물리적으로 상처받고, 모욕입고, 손해보고, 고통당했을 때, 의로운 분노()가 일어난다.


이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 영생의 복음적 가치관인 '악을 악으로, 욕을 욕으로 갚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는 말씀에 따라, 그리고 박해하는 사람을 저주하지 말고 축복해 주라는 말씀에 따라(로마12,9-21) 의지적 신앙의 행위로, 분노의 대상을 용서해 줄 수 있다. 내가 의지적으로 주님 말씀에 따라 의지적으로 용서한다. 용서해 줄 수 있다. 그렇다고 내 마음속의 상처받은 감정의 문제가 해결되는가 하면 그렇지 않다. 시간이 걸린다.


우리는 용서(remissio;venia;forgiveness) 콤플렉스에 빠질 필요가 없다. 용서는 내가 상대방한테 찾아가 이러쿵 저러쿵 할 필요가 없다. 용서는 피해자의 특권이라는 말이 있듯이, 상대방과 관계없이 내가 혼자 하는 것이라 쉬운 것이다.


그러나 화해(reconciliatio)는 다르다. 화해란 상대방과 직접 만나, 진실과 사실, 잘잘못을 따지고 나서, 서로 수용하고 인정할 것은 하고, 용서하고 악수하는 것을 말한다. 제단에 예물을 드리려 할 때, 거기에서 형제가 너에게 원망을 품고 있는 것이 생각나거든, 예물을 거기 제단 앞에 놓아두고 물러가, 먼저 그 형제와 화해한 다음에 돌아와서 예물을 바치라고 예수님게서 말씀하셨다.(마태5,21-24참조)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실천한다고 너무 성급하게 화해해서는 안된다. 그럴 경우에 겉으로는 형식적으로 화해가 이루어진 것 같이 보이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근본적인 마음의 상처 문제와 화해의 문제가 동시에 해결되지 않는다. 좀 시간을 가지고, 작금의 문제를 복음적 관점과 자신의 영혼의 성화의 관점인 영성적 차원에서 깊이 성찰해 보아야, 본질적 문제가 해결된다.

 


연중 제24주일 복음(마태18,21-35)

 

그때에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21~22)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에 해당하는 '아페소'(apheso; i forgive)의 원형 '아피에미'(aphiemi)'~으로부터'라는 분리를 나타내는 전치사 '아포'(apo)'보내다', '가게 하다'는 뜻을 지니는 동사 '히에미'(hiemi)의 합성어에서 유래하여 일차적으로는 '보내 버리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희랍어에서 이 단어는 다양하게 사용되는데, 아내와의 인연을 끊어버린다는 뜻에서 '이혼하다'는 용례로 사용되었고(1코린7,11), 또한 숨이 완전히 떠나 버린다는 의미에서 '죽는다'는 용례로 사용되며(마태27,50), 그리고 채권자로서 권리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의미에서 '탕감하다'는 용례로도 사용된다(마태18,30).


그러니까 '아피에미'(aphiemi)라는 단어는 원래의 상태에서 완전히 떠나 다른 상태로 가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 본문에서도 이 단어는 상대가 자신에 대하여 잘못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 잘못에 더 이상 개의치 않고, 잘못을 하지 않았을 때와 똑같이 대한다는 의미로 쓰였으며, 이것은 형벌을 유보하는 정도가 아니라 완전히 용서하는 것을 가리킨다.


한편,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타키스'(heptakis; seven times)는 이에 상응하는 히브리어 '셰바'(sheba)와 마찬가지로, 근동 문화권에서는 중요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하느님께서는 제7일에 천지 창조를 완성하신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완전'을 의미한다.


그리고 제7일은 거룩한 안식일이며, 7년은 거룩한 안식년으로 지켜졌던 규정에서 알 수 있듯이 이 숫자는 '거룩'을 뜻한다.

뿐만 아니라 대속죄일에 피를 일곱 번 뿌린 사실과(레위16,11이하) 관련해 볼 때 이 숫자는 죄 용서의 상징적 의미도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님 당시 랍비들은 자신에게 잘못한 자에 대해 세 번 용서해 주는 것을 대단한 관용으로 평가했으며, 이것을 실천하도록 가르쳤다.

따라서 베드로는 이보다 훨씬 더 큰 관용의 자세를 보이기 위해 히브리인에게 큰 의미를 지니는 숫자인 '7'을 염두에 두고, 일곱 번이나 용서하면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도를 가지고 예수님께 말씀드렸다고 볼 수 있다.


'일흔 일곱 번까지라도'


'일흔 일곱 번'에 해당하는 '헵도메콘타키스 헵타'(hebdomekontakis hepta;seventy- seven times)에서 '헵도메콘타키스(hebdomekontakis;seventy times)'70'을 의미하며, '헵타'(hepta)'7'을 의미한다.

그런데 이 두 숫자가 합쳐진 이 표현은 해석상 다소 문제가 있다. 이것을 '490'(70×7)으로도 볼 수 있고, '77'(70+7)로도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것은 그 의미에 있어서 아무런 차이가 없다.

예수님께서는 무한한 용서를 나타내기 위한 상징적 용도로 '헵도메콘타키스헵타'라는 표현을 사용했기 때문에, '490'이나 '77'이라는 특정한 숫자의 크기에 의미가 있지 않다.


베드로는 충분하지 않겠느냐는 의미로 '7'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반면에, 예수님께서는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로 '70''7'이란 숫자를 겹쳐서 사용한 것이다.

 

[2020913일 연중 제24주일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로마 14,7-9)

 

우리는 요즘 용서란~ 예수님의 십자가로 받는 것이라 묵상했어요.


참조~(로마3,25) 25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속죄의 제물로 내세우셨습니다. 예수님의 피로 이루어진 속죄는 믿음으로 얻어집니다. 사람들이 이전에 지은 죄들을 용서하시어 당신의 의로움을 보여 주시려고 그리하신 것입니다.


(골로1,13-14) 13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어둠의 권세에서 구해 내시어 당신께서 사랑하시는 아드님의 나라로 옮겨 주셨습니다. 14 이 아드님 안에서 우리는 속량을, 곧 죄의 용서를 받습니다.

= 기억하면서~

오늘 제2독서 ~

(로마 14,7-9)

7 *우리 가운데에는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사람도 없고 자신을 위하여 죽는 사람도 없습니다.

= 십자가로 용서받아 살아난 우리~


그래서 8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9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 죄인, 그 우리와 한 몸이 되시기 위해 죽으셨다 사흗날에 부활하신 그리스도, 그 그리스도의 대속이 오늘 제1독서 집회서 에서 말씀하신 우리가 지켜야할 계명, 계약인 것이다. 그것이 하느님의 법규, 계명, 구원의 계약인 것이다.

창세기 9장 죄인들의 구원을 위해 하늘이 활을 맞아 대신 죽으시겠다는 무지개 언약! 그 무지개 계약을 탈출기 1522절 이하~에서 더 구체적으로 말씀하신, 그 죄인 (쓴물)들을 의인(단물)으로 살리시기 위한 나무 하나의 죽음이 하느님의 법규와 규정, 계명인 것이다.

그리고 그 하느님의 계명을 십자나무의 대속 그 죽음 ()으로 맺는 구원의 새 계약이신 예수님(루가22,20), 그 하느님의 계명, 계약을 구원의 진리로 깨달아 흘려버리지 않고 마음에 꼭 지키는 것, 그것이 신앙인이 지켜야할 행실인 것이다.


(로마3,21-24) 21 그러나 이제는 율법과 상관없이 하느님의 의로움이 나타났습니다. 이는 율법과 예언자들이 증언하는 것입니다. 22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하여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은 믿는 모든 이를 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아무 차별도 없습니다. 23 모든 사람이 죄를 지어 하느님의 영광을 잃었습니다. 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사람의 계명으로 지킨 그 자기 의로움이 구원의 권위 없음을 깨닫고 믿는 이는 누구나 거저 얻는 하늘의 의로움, 그 십자가의 복음을 진리로 의탁했을 때 용서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나와 너, 우리가 받는 하느님의 용서인 것이다.

*그런데 주님! 오늘 복음에서처럼 하느님의 그 크신 용서를 받고도 여전히 저는 자신을 위해 살고 있습니다.

저의 듯을 무시하고 탓 했을 때 원망이라는 놈으로 힘들어 하는 저 자신을 사도의 고백에 의탁하여 기도드립니다.


(로마7,19-25) 19 선을 바라면서도 하지 못하고, 악을 바라지 않으면서도 그것을 하고 맙니다. 20 그래서 내가 바라지 않는 것을 하면, 그 일을 하는 것은 더 이상 내가 아니라 내 안에 자리 잡은 죄입니다. 22 나의 내적 인간은 하느님의 법을 두고 기뻐합니다. 23 그러나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 감사하게도~ 25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나를 구해 주신 하느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렇게 나 자신이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섬기지만, 육으로는 죄의 법을 섬깁니다.

= 주님! 그리스도를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갈라2,20) 20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 육신 안에서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시고 나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속죄 제물로 내어 주실 수밖에 없으셨던 아버지 하느님의 사랑을 깨닫고 염치없는 감사를 드립니다.

천주의 성령님 이제와 저희 죽을 때 저희 죄인들을 위하여 늘 간구해 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아멘.


오늘 복음은 814일 묵상을 참조하세요. 살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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