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민 신부 "나는 저승을 믿지 않는다"
2012년 02월 25일 (토) 12:56: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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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단테가 상상한 우주, 그리고 천국 | ||
‘내가 믿지 않는 부활’이라는 말로 실마리를 풀어나가고자 한다. 부활은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이 상투적으로 믿는 부활을 넘어선 경지이기 때문이다.
나는 천국이든 극락이든 저승을 믿지 않는다
나는 죽은 이들이 부활하여 가게 된다는 저승(천국이든 극락이든)을 믿지 않는다. 예수님은 하느님나라의 복음(하느님 나라가 가까이 왔다. 지금 여기에.)을 통하여 저승에 대한 우리의 상투적인 사고를 수정하여 주신다. 부활신앙은 죽음이 지배하는 듯한 세상이지만 불사불멸의 영원한 가치와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고백하게 한다. 이 신앙은 언젠가 사라지고 마는 인생이지만 하느님처럼 존중하고 사랑해야 함을 선언한다. 이 신앙은 세상을 사랑하게 한다.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사랑을 믿게 한다.
이런 의미에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이 가지고 있는 저승에서 영생을 누리게 된다는 부활신앙은 복음적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복음의 삶을 사는데 방해가 된다. 세상을 떠나야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영생을 누릴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복음에 근거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이들을 향하여 예수님께서 복음을 선포하시면서 말씀하신다. “회개하라. 복음을 믿으라.”(마르 1,15)
세상을 향하여 회개한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부활의 삶을 살기 위해 세상을 떠나려는 생각을 버리고 세상을 향하여 회개해야 한다. 우리는 우리 가운데 이미 와 있는 하느님 나라에 맞갖은 충실한 삶을 지금 여기에서 살 때 그리스도를 만날 수 있고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마태오복음 25장) 우리는 살아서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부활의 기쁨을 맛보아야 한다. 예수님의 복음을 따르며 부활을 믿는 그리스도교는 현실 도피의 종교가 아니다.
다시 살아나는 삶은 없다
나는 내가 죽은 후 얼마만큼의 세월이 흐른 후 다시 살아나게 되리라는 것을 믿지 않는다. 죽음으로 내 인생은 모두 끝난다. 다시 살아나는 삶은 없다. 보통 사람들이 상투적으로 생각하는 부활은 기나긴 역사를 거치면서 특히 그리스철학을 비롯하여 무수한 철학의 영향을 받아 형성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부활신앙도 변질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생과 사, 영원과 시간을 동전의 앞뒷면과 같은 하나의 개념으로 대하지 못하였다. 그 영향을 받은 그리스도교도 인간이 죽으면 육은 땅에 묻히고 영은 부활하여 영원히 살게 된다는 식의 사고에 젖어들게 되었다. 이는 그리스도교적 사고가 아니었고, 초기교회는 당연히 이런 사고를 정면으로 부정하였다. 이것이 ‘육신의 부활’을 이야기하게 된 배경이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육신의 부활을 도로 그리스 식으로 받아들여 ‘육신의 부활’을 영과 재결합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리스도교는 그리스인이 생각하는 것처럼 육체를 부정적으로 보지 않는다. 그러기에 영만의 부활이나 영과 육의 재결합을 모른다. 부활을 깨닫기 위해서는 영과 육, 생과 사가 하나의 실재를 이루고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인간은 사멸하는 육을 지닌 존재지만 불사불멸의 생명을 가지고 살아가는 영원한 존재이다. 이것이 예수님의 복음이다.
부활은 살아 있는 동안 체험해야 한다
나는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고 믿는다. 산 자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는 것은 부활은 살아 있는 동안 체험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며 동시에 산 자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덤에 묻힌 시체가 다시 살아나 영생을 누릴 수 없다는 것은 의미하며 동시에 산 자만이 죽을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들은 이미 부활했거나 아니거나 둘 중의 하나다.
우리보다 앞서 죽은 이들이 지하세계에서 부활을 기다리며 누워 있다는 것은 오로지 인간의 상상일 뿐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살아생전에 “나는 부활이다”라고 하신 말씀에 유념해야 한다. 무엇을 체험하였기에 그분은 살아 있는 당신을 부활이라고 하셨는가? 그분의 죽음으로부터 달아났던 제자들은 무엇을 체험하였기에 다시 돌아와서 그분의 부활을 선포하는데 목숨을 걸었을까?
‘사후’는 ‘인생 다음’이 아니라 ‘인생 중’에 일어나는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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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의 빛>이라는 동영상에 나오는 잭 칙(Jack Chick)의 천국 그림. |
예수님께서 ‘죽은 다음’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것은 ‘인생이 끝난 다음’ 사흘의 시간이 흐른 후에 다시 살아나셨다는 의미가 아니다. ‘사후’는 인생 한복판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며 또 이 시간 안에 일어나게 해야 하는 일이다. 살아 있는 동안 내 인생에 ‘사후’가 발생하게 할 때 새 하늘 새 땅 새 세계가 열리는 체험을 하게 될 것이다. 그는 새 인간으로 살아가게 될 것이다.
십자가 죽음 이전에 “나는 부활이다.”고 말씀하신 예수님은 새 인간이다. 이로써 그분은 죽음이 생의 마지막에 다가오는 일이기만 한 것이 아니라, 살아 있는 우리의 삶 안에서 끊임없이 일어나고 있는 일임을 깨우쳐 주셨다. 이를 깨달은 자는 늘 부활의 삶을 산다. 부활은 죽기 전 인생에서 일어나는 사건이고, 죽기 전에 일어나야 할 사건이다. 인간은 죽기 전에 죽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이런 면에서 부활은 깨달음의 문제이다. 살아 있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기에 그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다. 죽은 자가 부활할 수 없는 것은 죽은 자는 깨달을 수 없기 때문이다. 부활신앙이 우리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살아 있는 동안 부활의 이치를 깨달아 새 삶을 살도록 하라’는 것이다. 부활신앙은 살아 있는 우리로 하여금 영생을 살게 해준다. “살아서 나를 믿는 모든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요한 11,26)
바오로는 말한다.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로마 6,4) 크리소스토무스는 말한다. “우리 머리가 물속에 잠기듯, 낡은 인간은 무덤에 묻히고 완전히 잠겨 영영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우리 머리를 물에서 다시 건져 낼 때 거기서 새 인간이 태어난다.” 영원한 생명은 영원한 죽음을 통해서 체험된다. 영생은 자신을 영원히 사리지게 하는 삶을 통하여 체험된다. 죽기 전에 죽을 수 있는 인간, 남을 위하여 죽을 수 있는 인간, 그대는 정말 행복하다. 그대만이 부활의 삶을 살 수 있기에.
예수는 생의 마지막에 '당신을 죽인 삶'을 최종적으로 보여주셨다
예수님의 십자가(죽음)는 그분 생애의 마지막에 일어난 일이 아니라 그분의 생애 처음부터 그분의 생애 안에 늘 일어난 일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사건이다. 처음에 제자들은 그분께서 남을 위하여 당신의 목숨을 이미 다 바친 삶을 사셨다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벗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 것보다 위대한 사랑은 없다.” “목숨을 잃으면 얻을 것이고, 버리면 얻을 것이다.” “이는 내 몸이다. 너희는 받아먹어라”는 말씀들을 들으면서도 듣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분은 당신 생의 마지막에 ‘당신을 죽인 삶’을 구체적으로 보여 주신다. 당신 생애 마지막에 일어난 골고타의 사건은 당신의 생애 중에 항상 일어난 일, 곧 늘 당신 자신을 죽이는 삶을 최종적으로 보여준 사건이었다. 제자들은 한참 후에 그분의 삶을 깨닫게 된다. 이로써 그들에게 인생의 과제도 주어졌다. 그들도 이제 그분처럼 죽고 부활한 삶을 살아야 한다. 그분처럼 기적을 일으키면서 살아야 한다.
*이 글은 이제민 신부가 대화문화아카데미에서 주관하는 <삶의 신학 콜로키움>에서 발제한 내용을 필자가 다시 보완정리한 글입니다.
이제민 신부/

마산교구 소속으로 1980년 사제품, 1986년 독일 뷔르츠부르크 대학교에서 신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광주 가톨릭대학교 교수를 거쳐 구암천구교회와 반송천주교회에서 본당 사목을 하고, 지금은 마산교구 명례성지에서 일하고 있다. 저서로 '교회-순결한 창녀', '하느님의 얼굴', '우리 아버지', '녹지 않는 소금', '교회는 누구인가?', '우리가 예수를 사는 이유는?', '사랑이 보일 때까지', '우리가 예수를 찾는 이유는', '그분처럼 말하고 싶다', '예수는 정말 부활했을까?', '내 안에 그리스도가', '제3의인생-수동의 영성', '말은 시들지 않는다', '만남 속으로' 등이 있다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http://www.catholicnews.c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