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기도문 해설(1-5)

2020. 7. 14. 오전 6:37:02

글자


오늘부터 5회에 걸쳐 주님의 기도문 해설편을 올리겠습니다.

다시한번 주님의 기도문의 깊은 뜻을 헤아려 행복한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저와함께

묵상해 봅시다.~~살롬.

 

2020. 7. 10.

(공동번역성서)

주님의기도문(I)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루가11:1-4)

1 예수께서 하루는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 하나가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2 예수께서는 이렇게 가르쳐 주셨다. '너희는 기도할 때 이렇게 하여라.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소서. 3 날마다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4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오니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

 

(마태6:9-13)

9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나의 품속에 가지고 있는 나의 가장 깊은 소원이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한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추구하고 있으며 무엇을 가장 소원하고 있는가?‘로 그 사람의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의 가슴 속 깊은 곳의 소원이 나를 정의하고 나의 기도가 그 소원을 표현하는 것이라 한다면 내가 지금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가가 바로 내가 누구인가를 정의 할 수 있는 척도가 될 수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지요?

나는 지금 어떤 기도를 하고 있습니까? 이렇게 우리의 가슴 깊은 곳의 소원이 우리의 기도로 나타나고 그 기도가 우리가 누구인가를 나타내는 것이라면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주님의기도문이야말로 주님 안에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이겠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셨다는 것은 우리 성도는 바로 주님께서 가르쳐 주신 그 기도의 내용 안에 들어 있는 것들을 소원으로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소원을 가지고 사는 이들로서의 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정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의기도문을 공부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 주님의기도문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문으로 하느님의 啓示며 하느님의 깊은 소망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주님의기도문을 통해 하느님의 가장 깊은 소원을 발견하고 또 그 기도를 우리의 기도로 만듦으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깊은 소원과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당신께서 바라시는 것을 우리에게 소원하게 만들어서 우리를 당신의 계획대로 만들어 낼 것임을 우리는 주님의기도문 속에서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루가11:1) 1 예수께서 하루는 어떤 곳에서 기도를 하고 계셨다. 기도를 마치셨을 때 제자 하나가 '주님, 요한이 자기 제자들에게 가르쳐준 것같이 저희에게도 기도를 가르쳐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이런 요구를 했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입니다. 왜냐하면 예수의 제자들은 유대인이었고 유대인들은 기도를 열심히 하고 있었던 사람들이고 그들은 기도가 무엇인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건 다시 말해서 제자들이 기도를 할 줄 몰라서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구한 것이 아니라는 이야기인 것입니다.

그들이 줄줄이 꿰고 있던 시편의 내용들이 모두 기도문 아닙니까? 더욱이 예수님 당시 유대에는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잘 알고 있을 유명한 기도문들이 이미 있었습니다. 그들은 그 기도문들을 수시로 암송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카디쉬라는 좀 짧은 형태의 기도문도 있었고, 18번 축복기도라 불리는 세모네 에스레라는 기도문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카디쉬와 같은 기도문들을 매일 두 세 번씩 낭송하도록 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그렇게 기도를 많이 알고 있었고 많이 하고 있었고 시편기도를 줄줄 외며 따라서 하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상당히 놀라운 일인 것입니다.

그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요청한 데는 이런 배경이 있습니다. 예수님 당시에는 메시아가 곧 와서 하느님나라를 실현하리라는 기대가 유대인들 간에 팽배해 있었습니다. 그리고 메시아가 와서 하느님나라를 이루도록 하려면 그에 앞서 유대인들이 회개하고 하느님께 새롭게 헌신하고 순종하는 일들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이 널리 퍼져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러한 부흥운동이 유대인들 안에서 많이 일어났고 단체들도 많이 생겼었습니다.

바리새인들의 바리새운동도 그 중 하나이고 사해 주변 쿰란에 모여 살던 에센파도 그 중 하나였으며 세례요한도 회개와 심판의 부흥운동을 주도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자신들의 슬로건으로 기도문을 만들어서 암송을 했었습니다. 그들은 각자 자신들의 신학적인 이해와 이상과 소망 등을 담아 표현하는 특별한 기도문을 작성했습니다. 요한도 자신의 신학과 종말론적 소망 등을 담아 기도문을 만들었고 제자들에게 가르쳐서 날마다 하느님께 기도하도록 했었다는 것은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예수님의 제자들이 예수님께 기도를 가르쳐 달라고 한 것은 기도의 방법이나 기도의 정의를 물은 것이 아니라 스승님 이제 우리도 하나의 부흥운동을 이끌어 가는 무리가 되었으니 우리의 슬로건은 뭡니까하고 물은 것입니다. 쉬운 말로 당신이 추구하는바가 뭔지 가르쳐 주십시오.’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으로 채택한 마태복음 6장의 주님의기도문은 산상수훈의 일부입니다. 마태복음을 1장부터 잘 읽어보면 마태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부터 시작해서 예수님의 생애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2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태어나시자마자 애굽으로 쫓겨 가셨다가 다시 애굽에서 나오시는 장면이 나오고 3장에서 예수님은 세례를 받으시고 3장 후반부터 4장에서는 예수께서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십니다. 그리고 산 위에 오르셔서 산상수훈을 하십니다.

눈치 빠른 분들은 이미 아셨겠지만 이렇게 예수님의 생애의 전개는 이스라엘의 역사와 동일하게 전개되어 집니다. 그래서 마태복음에서는 일부러 예수님이 애굽에서 나오신지 30년이 넘은 후의 사건인 세례를 주님이 애굽에서 나오신 사건 바로 뒤에 붙여서 기술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이스라엘의 역사 중에 오늘 우리가 공부할 본문이 들어 있는 산상수훈은 어느 지점이겠습니까? 잘 생각해 보세요.

이스라엘이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고 광야의 시내산에서 이스라엘이 가나안에 들어가서 살 때에 지켜야 할 율법들을 받은 것처럼 예수님께서 새 이스라엘을 상징하는 열두 제자를 데리고 산에 올라가셔서 그들에게 천국 백성이 지켜야 할 율법들을 산상수훈을 통해 우리에게 들려주시고 계시는 장면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신약의 산상 수훈은 구약의 시내 산인 것입니다.

구약의 출애굽은 어떻게 끝이 납니까?

(신명27:9-26) 9 모세는 레위인 사제들을 거느리고, 온 이스라엘에게 외쳤다. '너 이스라엘아 조용히 들어라. 너희는 오늘 너희 하느님 야훼의 백성이 되었다. 10 그런즉 너희는 너희 하느님 야훼의 말씀을 따라 내가 오늘 너희에게 일러 주는 그의 계명과 규정을 지켜야 한다.' 11 같은 날 모세는 백성에게 다음과 같은 명령을 내렸다. 12 요르단강을 건넌 다음에 시므온, 레위, 유다, 이싸갈, 요셉, 베냐민 지파들은 백성에게 복을 달라고 기도하기 위하여 그리짐산 쪽으로 나서라. 13 그리고 르우벤, 가드, 아셀, 즈불룬, , 납달리 지파들은 저주를 빌기 위하여 에발산 쪽으로 나서라. 14 그 다음 레위인들은 큰 소리로 온 이스라엘 사람에게 외쳐라. 15 '야훼께서 역겨워하시는 우상을 새기거나 부어 만드는 자, 기술공이 손으로 만든 것을 남 몰래 모시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고 대답하여라. 16 '아비나 어미를 업신여기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17 '이웃집 땅의 경계선을 옮기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18 '소경을 엉뚱한 길로 이끄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19 '떠돌이와 고아와 과부의 인권을 짓밟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20 '아비의 이불자락을 들치고 아비의 아내와 자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21 '어떤 짐승하고나 교접하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22 '아비의 딸이든 어미의 딸이든 제 누이와 자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23 '장모와 자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24 '남 몰래 동족을 쳐 죽이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25 '뇌물을 받고 죄없는 사람의 피를 흘리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26 '이 법을 어느 하나라도 실천하지 않고 짓밟는 자에게 저주를' 하면, 온 백성은 '아멘' 하여라.

이곳은 구약의 하느님과 이스라엘이 계약을 맺으시는 클라이맥스 부분입니다. 이스라엘이 요단을 건넌 후 가나안에 들어가면 에발산과 그리심 산에 서서 레위인 들이 열두 가지 계약을 이야기하면 아멘, 아멘 해야 하는데 모두 이러저러한 것을 하면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아멘, 저주를 받을 것이라. 아멘으로 끝이 납니다. 그런데 산상수훈에서 천국 백성과 하느님이 맺으시는 계약은 어떻게 시작하나요? ‘행복하다, 행복하다로 시작합니다.

율법 아래 있었던 구약의 이스라엘은 죄 가운데서 하느님과 계약을 맺었기 때문에 죄 지으면 저주 받는다로 끝이 나지만 이제 신약에서 새로운 이스라엘, 천국 백성에게 주어지는 하느님의 율법은 예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순종으로 주어지는 복으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약의 계약에서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노래를 하나 적어서 가르쳐서 부르게 하라고 하시는 장면이 이어집니다.

(신명31:19) 이제 너는 이 노래를 적어 이스라엘 백성에게 가르쳐 주어라. 그리하여 이 노래가 입에서 떠나지 않아 내가 이스라엘 백성에게 어떤 일을 했는지를 일깨워 주는 증거가 되게 하여라.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이스라엘에게 가르쳐 부르게 하라는 노래는 자신들이 하느님 앞에서 얼마나 불순종했는지를 증거 하게 하기 위해 부르라는 노래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노래를 외워 불렀는데 그 노래는 자기 자신들의 불순종을 증거 하는 노래였습니다. 다시 신약으로 돌아옵니다. 신약에서 구약의 모세의 노래와 대조적으로 예수께서 동일하게 하느님의 백성들에게 외워 부르라는 기도가 있는데 그것이 바로 주의기도문인 것입니다.

구약과 신약의 대조 점과 연속성을 잘 아시겠지요? 그렇게 구약에서는 이스라엘이 얼마나 죄악 된 민족인가를 외워서 불러야 했고, 신약에서는 영적인 출애굽을 한 하느님의 백성들이 자신들을 저주의 자리에서 복된 자리로 불러주신 하느님께 불러야 할 노래가 있었으니 그게 바로 주의기도문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의기도문은 바로 성도의 신분과 정체성, 그리고 그들이 하느님께 드리는 감사와 성도가 이 땅에서 무엇을 추구해야 하는가가 모두 들어 있는 아주 중요한 그리스도교의 핵심 교리들의 보고인 것입니다.

주님의기도문에는 일곱 가지의 기도제목이 있습니다. 먼저 하느님 아버지를 부르고 그 뒤에 일곱 가지의 기도 제목이 붙는데 그 첫 번째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일곱이란 숫자는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안식의 수요 완전수라고 했습니다. 그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완전한 기도를 가르치셨다는 것으로 풀이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주님의기도문만 제대로 공부하면 우리가 무엇을 기도해야 하는가를 정확하게 알 수 있는 것이지요.

주님의기도문의 일곱 개 기도 제목 중 세 개는 하느님 당신에 대한 기도이고 네 개는 우리에 대한 기도입니다. 주님의기도문은 그렇게 세 개의 thou petition 과 네 개의 we petition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입니다.

 

거기에 제일먼저 나오는 말이 헬라어 파테르입니다. 우리말로 아빠라는 말입니다. 예수님 전후의 유대 어떤 문헌에도 하느님을 향해 파테르, 아빠라고 기록된 곳은 없다고 합니다. 물론 구약의 여러 곳에 하느님을 아버지 혹은 어머니로 표현한 곳은 여러 곳이 있습니다. 몇 군데만 찾아볼까요?

(이사49:15) 여인이 자기 젖먹이를 어찌 잊으랴! 자기가 낳은 아이를 어찌 가엾게 여기지 않으랴! 어미는 혹시 잊을지 몰라도 나는 결코 너를 잊지 아니하리라.

여기서는 하느님을 어머니와 같다는 표현을 씁니다.

(출애4:22-23) 22 그러면 너는 파라오에게 말하여라. '야훼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이스라엘은 나의 맏아들이다. 23 내가 너에게 내 아들을 내보내어 나를 예배하게 하라고 일렀건만 너는 그를 내보내지 않았다. 들어라, 내가 이제 너의 맏아들을 죽이리라.''

여기서도 하느님이 부모처럼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여기서는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아들이라고 표현을 하십니다. 그리고 성경이 하느님을 이스라엘의 아버지라고 표현한 곳도 여러 곳 있습니다.

(이사64:8) 야훼여, 너무 노여워 마십시오. 우리 죄를 영원히 기억하지는 마십시오. 굽어 살펴 주십시오. 우리는 모두 당신의 백성입니다.

그렇지요? 그러나 이곳에서는 아버지의 의미가 부모와 자식 관계에 있어서의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창조자, 구원자의 뜻으로 쓰인 것입니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주님의 입에서 아바라는 말이 나온 것입니다. 헬라어의 아바라는 말은 어린아이가 아버지를 부르던 우리말의 아빠와 같은 말입니다. 그 단어는 본질적으로 본체 적으로 하나인 친아버지와 자식 사이에서만 쓰이던 단어입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아버지라는 말을 창조주요 구원자로서의 표현으로는 썼지만 이렇게 아바라는 말은 예수님이 처음으로, 그리고 혼자서만 쓰시던 말이었습니다. 그것은 예수그리스도께서 하느님의 독생자 아들로서 그와 본체 적으로 본질적으로 하나이시기 때문에 쓰실 수 있는 단어였던 것입니다. 정말 아빠니까요.

그런데 중요한 것은 예수께서 우리에게 기도를 하라고 하실 때에 하늘에 계신 우리 아빠라고 부르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 것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그 독생자 되심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엄청난 선포입니다. 우리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처럼 하느님의 친아들, 딸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기도는 거기서부터 출발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부모와 자식이라는 관계의 성립이 전제가 되지 않고는 기도가 시작될 수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주의기도문이 아빠로 시작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도는 창조주와 피조물 사이에서 피조물의 필요에 의해서 생긴 것이 아니라 창세전에 이미 성부하느님과 성자 하느님 사이의 대화에서 시작된 것이 기도라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셔서 습관적으로 반복해서 밤이 맞도록 기도하시고 하신 것은 인간의 몸으로 오셨기 때문에 그 나약함으로 하느님 앞에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창세전부터 그 아버지 하느님과 나누셨던 대화를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에게 있어서 기도라는 것은 예수님을 떠나서 설명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구약에 기도에 관해 설명되어진 부분이 있나요? 없지요? 그 것은, 기도는 영원부터 기도하셨던 예수께서 오셔서 기도를 가르쳐 주시기 전에는 우리 인간은 기도가 뭔지 알 수도 없었다는 증거인 것입니다. 그래서 기도는 하느님과 우리의 부자관계 부녀관계가 먼저 전제가 되지 않으면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 되는 행위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 애틋한 사랑의 관계가 먼저 확인되지 않으면 기도는 출발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예수께서 겟세마니에서, 십자가에서 왜 그렇게 힘들어 하셨는지 아세요? 40일 단식을 하시고도 끄떡도 없으시던 그 기개는 다 어디 가고 그렇게 힘겨워 하신 것일까요? 주님은 그 사랑하는, 뗄 레야 뗄 수 없는 관계의 아버지와 아들이 그 십자가에서 등을 돌려야만 했기에 그토록 힘겨워 하셨던 것입니다. 하느님이 등을 돌리시고 저주를 하셔야만 하는 죄, 그 분은 우리의 죄가 되셔서 그렇게 하느님과 처음으로 떨어지셔야만 했던 것입니다. 그 사랑의 아버지가 바로 우리 아버지가 되셨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께서 이렇게 기도하라고 가르쳐 주신 기도를 하기 위해 눈을 감고,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하는 순간 그 놀라운 축복과 우리의 신분에 대한 확인으로 온 몸에 전율을 느껴야만 하는 존재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고 우리 아버지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난 아버지의 아들이다. 난 아버지의 딸이다. 우리 아버지는 예수를 사랑하신 그 동일한 사랑으로 나를 사랑하고 계시다.’라는 복 된 현실을 감지하고 선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엄청난 하늘의 기도와 우리의 필요를 소리 질러 외쳐대는 저급한 이 세상 사람들의 기도와 어떻게 바꿀 수 있겠습니까?

그런데 또 한 가지 주목할 것은 주님께서 아버지는 아버지인데 내 아버지라 하지 않고 우리 아버지라고 부르라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기도라는 것은 우리 개인의 필요를 채우기 위해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기도는 계약공동체인 교회의 소망이 담겨야 하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내 아버지가 아니라 우리 아버지라 하는 것입니다. 따라서 엄밀히 말하면 성도의 기도는 개인적인 것을 지양하고 공동체적인 것을 지향하는 쪽으로 바뀌어 가야 하는 것이지요. 이렇게 기도는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아버지와 딸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입니다.

 

(루가11:5-13) 5 예수께서는 그들에게 또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희 중 한 사람에게 어떤 친구가 있다고 하자. 한밤중에 그 친구를 찾아 가서 '여보게, 빵 세 개만 꾸어 주게. 6 내 친구 하나가 먼 길을 가다가 우리 집에 들렀는데 내어 놓을 것이 있어야지' 하고 사정을 한다면 7 그 친구는 안에서 '귀찮게 굴지 말게. 벌써 문을 닫아 걸고 아이들도 나도 다 잠자리에 들었으니 일어나서 줄 수가 없네' 하고 거절할 것이다. 8 잘 들어라. 이렇게 우정만으로는 일어나서 빵을 내어 주지 않겠지만 귀찮게 졸라대면 마침내는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청을 들어 주지 않겠느냐? 9 그러므로 나는 말한다. 구하여라, 받을 것이다. 찾아라, 얻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열릴 것이다. 10 누구든지 구하면 받고 찾으면 얻고 문을 두드리면 열릴 것이다. 11 생선을 달라는 자식에게 뱀을 줄 아비가 어디 있겠으며 12 달걀을 달라는데 전갈을 줄 사람이 어디 있겠느냐? 13 너희가 악하면서도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야 구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것 곧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하느님께 열심히 강청(强請)하면 하느님도 귀찮아서 들어주실 수밖에 없다는 식의 설교를 들으신 적이 있다면 얼른 그 이야기는 지워 버리세요. 이 이야기는 절대 그런 것에 초점을 두고 있는 이야기가 아닙니다.

유대인들 사회에서 친구관계라는 것은 우리의 그 것과는 사뭇 다른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친구 사이라는 것은 새벽 두시고 세시고 간에 친구가 요청하면 뭣이든 네 것 내 것 없이 나누어주는 것이 유대인의 친구 관계입니다. 이 이야기는 그러한 유대인들의 관습을 전제하고 읽어야 하는 것입니다. 밤에 어떤 사람이 친구의 집에 가서 문을 두드립니다. 그리고는 내 친구가 여행 중에 왔는데 먹을 것이 없어서 그러니 빵 세 덩이만 빌리자고 하지요? 그랬더니 집 주인이 밤이 너무 늦었다고 하면서 친구의 청을 거절합니다. 이 이야기의 초점은 유대인들의 친구 관계를 감안할 때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을 반어법적으로 떠 올리게 하는 것입니다. 아무리 늦은 밤이라도 친구가 요청하면 당연히 일어나서 줘야 합니다. 그런데 사람이 다 한결같을 수는 없잖아요? 그래서 절대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는 일이지만 혹 친구사이임에도 불구하고 친구의 청을 거절 하는 일이 있을 수도 있겠지만 너희와 나는 부자지간인데 너희의 자녀로서의 요구를 내가 왜 듣지 않겠느냐? 당연히 듣는다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이 이야기의 중심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부자지간이 확인된 사람은 무엇이든지 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면 찾을 것이요 두드리면 열리리라는 것입니다. 무얼 구하라고요? 영적인 것들 말입니다. 오늘은 기도가 어디에서 출발해야 하는 지에 관해서만 잘 숙지해 두세요. 하느님과 내가 부자지간, 부녀 지간이 되었다는 것에서 출발해야 하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아빠하고 그 분을 먼저 부르는 것입니다. 주님의기도문을 여는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어구가 담고 있는 메시지가 무엇인지 확실하게 아셨지요?

 

 

오늘은 둘째날입니다.

다시한번 주님의 기도문의 깊은 뜻을 헤아려 행복한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저와함께

묵상해 봅시다.~~살롬.

2020. 7. 11.

(공동번역성서)

주님의기도문(II)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마태6:9-13)

9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요한복음 1221절에. “선생님, 예수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저에게는 그 말씀이 마치 설교자인 저를 향하여 던지는 부탁의 말씀 같이 들렸습니다. 설교 내내 그 눈앞에 보이는 말씀이 가슴을 찔렀습니다. ‘난 지금 이들이 그토록 뵙고 싶어 하는 그 예수를 전하고 있는가? 아니면 내 이야기를, 내 자랑을, 내 무용담을 겸손이라는 분을 발라서 이들에게 자랑하고 있는가?’ “예 오늘도 성도들이 뵙고 싶어 하는 예수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노자의 도덕경을 읽어도 알 수 있는 그런 이야기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만을 이야기하겠습니다.” 김용옥 교수의 강연 같은 학술 세미나 말고, 윤리강연 말고 예수를 뵙게 하여 주십시오.“ 저는 성도들의 얼굴을 보면서 이런 외침을 듣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공부하고 있는 주님의기도문을 통해서도 예수를 발견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의기도문 첫 번째 시간에서 주님의기도문의 배경과 주님의기도문의 처음 시작인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라는 대목을 함께 공부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도를 가르쳐 주시면서 파테르라는 단어를 쓰게 하심으로 본질적으로 본체적으로 우리를 하느님의 아들의 수준으로 취급해 주신다는 것. 그리고 기도는 반드시 그 회복된 하느님과 그 분의 자녀들의 관계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지요?

 

오늘은 주님기도문의 일곱 개 기도제목 중 세 가지의 thou petition의 첫 번째 것을 공부해 보겠습니다. 그게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와 상관없이 이미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어떤 것에 의해서도 그 거룩이 침해를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가 그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라고 기도를 해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일까요? 우리가 우리의 정성과 노력으로 그 분의 거룩한 이름에 무엇을 더 보탤 수 있는 것입니까? 비슷한 경우가 있습니다. 때때로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린다는 말을 합니다. 우리의 어떤 노력이, 우리의 가진 것 중 어떤 것이 그 분의 영광에 도움이 될까요? 하느님은 이미 영광스러운 분이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 분을 영화롭게 해야 한다고 하고 그 분께 영광을 돌려야 한다고 합니다. 그게 무슨 의미입니까?

잘 들어 보세요. 예를 들어 드리겠습니다.

여기 우물이 있다고 해 보지요. 그렇다면 그 시원하게 샘솟는 마르지 않는 우물을 가장 위하는 길이 뭡니까? 다른 우물에서 물을 길어다가 그 우물에 부으면서 우물아, 우물아 참 좋지? 내가 네게 물을 보태주고 있잖아그러면 그 우물이 기뻐할까요? 그렇게 하면 그 우물에게 영광이 돌아갑니까? 그 우물은 이미 물을 충분히 가지고 있고 더 이상 시원하고 더 이상 맑을 수 없는 물인데 다른 것을 가져다 부어 주면서 참 좋지?” 하는 게 그 우물을 위하는 것이냐는 말입니다. 아니면 우물가를 금으로 치장을 해 주면 그게 우물을 진정 위하는 일이겠습니까?

정말 그 우물을 위하는 길은 그 우물물을 맛있게 마시고 야 참 시원하다하고 진심어린 칭찬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 우물을 자랑하는 것이 그 우물에게 가장 크게 영광을 돌리는 길인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하느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심을 받기를 원한다는 것은 그 하느님이 누구신지 알고 그분의 크심과 높으심과 그 분의 거룩하심을 인정하며 그 하느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일에 감격하여 그 것을 즐기고 누리며 다른 이에게 그 생명수의 진가를 자랑하는 것이지요. 제가 지금 설명한 내용은 다분히 철학적인 설명입니다. 그래도 이해하기는 쉽지요?

 

그럼 이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해달라는 기도가 구원 역사적 측면에서는 이 부분을 어떻게 이해를 해야 하는지 성경을 통해 설명해 보겠습니다. 먼저 예수께서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게 해달라고 기도하라는 것에는 이미 하느님의 이름이 더러워 졌다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느님의 이름이 더러워 질 수 있나요?

하느님은 초월자이십니다. 그 분은 영원부터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어떻게 그 이름이 더러워 질 수 있나요? 본질적인 하느님의 이름이 더러워 질 수는 없습니다. 그 분의 이름은 이 세상 어떤 것으로도 본질적인 면에서 더럽혀질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인간과 계약을 맺으시고 관계를 맺으시면서 이 세상에서 세상 사람들에게 하느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당했다는 측면에서 볼 때 하느님의 이름은 더러워졌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지금도 더럽힘을 당하고 계시지요. 에제키엘서로 가서 확인해 보겠습니다.

(에제키엘36:16-23) 16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17 '너 사람아, 이스라엘 족속은 고국에 살고 있을 때, 고약한 짓들을 해서 그 땅을 부정하게 만들었다. 내가 보기에 그 하는 짓이 월경하는 여인처럼 부정하였다. 18 땅에 피를 흘리고 우상을 섬기느라고 땅을 부정하게 만들어 나의 울화를 터뜨렸다. 19 그래서 그들을 뭇 민족들 가운데 흐트러뜨려 여러 나라에 쫓아 보냈다. 못된 짓을 한 만큼 그들을 벌한 것이다. 20 그들은 가는 곳곳에서 뭇 민족들에게 욕을 먹었다. '이것이 야훼의 백성이란 것들인가, 그에게 받은 땅에서 쫓겨 났구나.' 이런 말을 듣게끔 행동하여 거룩한 나의 이름을 욕되게 만들었다. 21 이스라엘 족속은 가는 곳곳에서 나의 거룩한 이름이 뭇 민족에게 멸시를 받게 했지만 그러나 나는 내 명예를 회복하고야 말리라. 22 그러니 너는 이스라엘 족속에게 일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이스라엘 족속아, 나는 너희 때문이 아니라 너희가 가는 곳곳에서 뭇 민족에게 멸시를 받게 한 거룩한 내 이름 때문에 행동할 것이다. 23 너희는 내 이름을 뭇 민족에게 멸시받게 했지만 나는 야훼다. 내 이름이 다시는 멸시를 받지 않고 오히려 들날리게 하리라.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너희에게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면, 뭇 민족은 이를 보고 내가 야훼임을 알게 되리라.

하느님께서 계약으로 내 백성이라고 하셨던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에서 계속해서 죄를 지었습니다. 하느님은 분명히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셨습니다. 너희들이 내 말을 잘 듣고 지키면 너희가 이곳에서 복을 받고 잘 살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너희들을 이 약속의 땅에서 쫓아내 버릴 것이라고. 그런데 이스라엘이 계속 범죄하고 패역한 일을 저지르자 하느님께서 그들을 가나안에서 쫓아내 버리십니다. 그랬더니 그 열국의 백성들이 하느님을 욕하고 우습게 여겼습니다. 이방 나라들이 오죽 하느님이 못 났으면 자기 백성 하나 간수 못하고 이렇게 열국에 흩어서 고통을 받게 하는가?”하고 하느님을 모욕했다는 것입니다. 당시는 사람들이 인간사를 신들의 전쟁에 의한 것이라 여겼던 때입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이스라엘 백성이 승승장구하면 하느님이 하늘에서 승리를 하고 계신 것이고 가나안 사람들이 이기면 바알이 센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이 바벨론에게 패배한 뒤 포로로 잡혀가고 여기저기 흩어지게 되자 이방 사람들이 그 하느님을 업신여기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자기 백성 하나 지키지 못하는 하느님, 못난 하느님, 약골 하느님그렇게 이스라엘의 죄로 말미암아 하느님의 이름이 더럽힘을 받은 것입니다. 그래서 에제키엘에게 하느님이 말씀하시기를 나의 더럽혀진 이름을 내가 거룩하게 하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저는 이 에제키엘서를 읽으면서 오늘날도 우리 그리스도인이라고 자처하는 자들로 말미암아 모욕을 당하고 계신 하느님을 생각하며 조금 씁쓸했습니다.

하느님께서 어떻게 그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고 하시는가 볼까요?

(에제키엘36:24-28) 24 내가 너희를 뭇 민족 가운데서 데려 내 오고 모든 나라에서 모아 고국으로 데려다가 25 정화수를 끼얹어 너희의 모든 부정을 깨끗이 씻어 주리라. 온갖 우상을 섬기는 중에 묻었던 때를 깨끗이 씻어 주고 26 새 마음을 넣어 주며 새 기운을 불어 넣어 주리라. 너희 몸에서 돌처럼 굳은 마음을 도려 내고 살처럼 부드러운 마음을 넣어 주리라. 27 나의 기운을 너희 속에 넣어 주리니, 그리 되면 너희는 내가 세워준 규정을 따라 살 수 있고 나에게서 받은 법도를 실천할 수 있게 되리라. 28 너희는 내가 너희 조상들에게 준 땅에서 살면서 나의 백성이 될 것이요 나는 너희의 하느님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 자기의 백성을 구원하심으로, 열국에 흩어져 있는 자기의 백성을 취하여 내고 모아서 그들을 정결케 한 후에 하느님께서 그들을 데리고 가나안으로 들어가시는 것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이 스스로 정결케 될 수 없다는 것을 아심으로 하느님께서 직접 물로 씻어 정결케 하시고 그 마음에 새 마음을 주시고 새 영을 주셔서 완전히 새 사람으로 만드셔서 더 이상 하느님의 말을 안 듣고는 못 배기는 그런 사람으로 만들어서 가나안으로 데리고 들어가심으로 당신의 백성으로 만들고 그 백성들의 하느님이 되시는 것으로 더렵혀진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바로 니고데모에게 말씀하신 그 거듭남을 우리에게 거저 주심으로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시겠다는 것입니다.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는 그 거듭남.

하느님이 자기의 백성을 영원한 구원으로 인도하심으로 말미암아 열국으로 하여금 하느님은 신실하신 분이며 하느님은 거룩하신 분이시라는 고백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것은 우리의 구원과 뗄 레야 뗄 수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살펴보고 있는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기를 소원 합니다.‘라는 기도는 하느님 그 에제키엘에게 약속하셨던 그 하느님 백성의 구원이 이루어지게 하소서.”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기도가 이미 응답이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께 기도를 한다는 것 자체가 이미 우리는 구원을 얻은 자라는 증거니까요? 그렇지요?

그 기도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그 구원이 이루어졌습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라고 기도 하는 것은 바로 그 기도의 응답이 예수 그리스도임을 확인하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직 옛 사람을 입고 있는 우리의 구원이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며 하느님께 겸손히 그 구원의 완성을 간구 드리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시지요?

 

어떤 분이 하느님은 지금 지옥을 보수 공사 하고 계시는 중이라고 말씀을 하시더라고요. 왜 그런가 하니 한국의 찜질방이 지옥불이 무색해 질 정도로 너무 뜨거워져서 더 온도를 높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한참을 웃다가 정말 오늘날 사람들이 지옥을 믿기는 믿는 것일까?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어떠세요? 정말 그 지옥이 믿겨지기는 하시나요? 영원히 죽지도 않고 죽을 수도 없는 곳에서 우리가 상상할 수 없는 고통 속에 신음해야 하는 그 곳이 실존한다는 것을 정말 믿으세요? 아님 그냥 농담에나 등장하는 그런 곳으로 생각하십니까? 우리가 정말 그 지옥에 갈 뻔 했다는 사실을 인정하시나요? 그리고 우리가 어떻게 거기서 빠져 나오게 되었는지를 정말 아십니까? 어떻게 된 게 사람들에게 지옥이라는 것이 농담거리로 밖에 안 여겨지는 것 같아요.

우리는 오직 그 예수의 은혜로 인해서 지옥에서 건져냄을 받은 것을 잊지 마세요.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고 하느님의 열심에 의해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영적인 관점에서입니다. 그러나 지금 우리는 구원 얻은 자답게 지어져 가고 있고 완성되어져 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날마다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의 삶 속에서 구원 얻은 자다운 삶이 나오게 되기를 열망해야 하는 것이며 그러한 기도를 하는 자답게 우리의 손과 발을 움직여 신자다운 삶을 경주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 크게 한 번 외칩시다. 하느님 당신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옵소서. 아멘.

 

 

오늘은 세째날입니다.

다시한번 주님의 기도문의 깊은 뜻을 헤아려 행복한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저와함께

묵상해 봅시다.~~살롬.

2020. 7. 12.

(공동번역성서)

주님기도문(III)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마태6:9-13)

9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앞에서 하느님의 이름이 거룩하게 되는 유일한 방법은 하느님의 백성들의 구원으로만 말미암는 다는 것을 우리는 함께 확인했습니다. 따라서 우리 성도들은 영적으로 완성이 된 그 구원이 우리의 삶 속에서도 완성되어지고 성숙되어지도록 기도를 함으로써 우리의 구원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어 반드시 완성이 될 것이라는 것을 확인 하는 것이고 그러한 하느님의 백성다운 삶을 분투 속에서 경주할 수 있는 것이라 했지요?

이번에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는 같은 맥락에서 추적을 해볼 수 있는 것이기에 오늘 함께 공부를 하는 것입니다. ‘나라가 오게 하시며라는 그 나라는 ‘thy kingdom come’에서 확인 할 수 있듯이 Kingdom, 왕국입니다. 우리가 기다리는 하느님 나라는 민주주의 공화국이 아니라 왕이 다스리는 왕국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하느님 나라는 왕이신 하느님이 다스리고 백성들이 그 통치에 순종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따라서 왕국인 하느님 나라는 왕이신 그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할 마음이 없는 자들은 못 들어 가는 곳입니다.

 

혹시 이순신 장군의 난중일기를 읽어 본 적이 있으세요? 난중일기라는 책은 임진왜란 당시 이순신 장군이 쓴 일기를 모아 놓은 책입니다. 거기에 이런 시가 있습니다. 한산 섬 달 밝은 밤에 수루에 홀로 앉아 큰 칼 옆에 차고 깊은 시름하는 차에 어디서 일성호가는 남의 애를 끊나니통영에 가면 아직 이순신 장군이 그 시를 읊던 제승당 자리가 있습니다. 달이 휘영청 밝은 밤에 남해 앞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수루에서 깊은 시름을 하고 있는 이순신을 생각해 보세요. 그 적막한 바다를 가로 질러 한줄기 피리 소리가 그 달밤에 들립니다. 거기서 이순신은 애가 끊어지는 느낌을 받았다는 시입니다. 그 장군의 애를 끊게 한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알려진 바대로 그 고통스러운 한 밤의 고민은 전쟁으로 인한 근심이었겠습니까? 난중일기를 잘 보면 이순신 장군은 전쟁을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했던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끊임없이 솟구쳐 오르는 인생에 대한 질문을 잊을 수 있는 분주함을 제공한 전쟁을 이순신은 즐겼습니다. 난중일기를 앞뒤로 잘 읽어보면 한산 섬에서 그의 애를 끊게 한 것은 도대체 나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가?”에 대한 답답함의 소산이었습니다.

조선 최고의 천재라는 매월당 김시습도 이런 시를 썼습니다. 미친 듯이 옛 사람에게 물어본다. 나는 도대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인가? 왜 아무도 나에게 대답하지 않는가?’ 그렇게 자신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이며 왜 이렇게 나의 선택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인생을 살다가 가야 하는지, 도대체 이 인생 속에서 인간은 무엇을 추구하다가 가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고민을 처절하게 하다가 간 우리 조상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런 경우를 보면서 혈기 왕성하고 의심 많은 사람들이 이런 질문을 하곤 하지요? “그런 사람들에게 예수가 조금 일찍 전해졌으면 그들도 곧 진리를 깨닫고 천국에 갔을 텐데, 그렇게 예수가 전해지기 전에 죽은 우리 조상들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러면 조금 일찍 예수가 전해 졌다면 정말 그들이 예수를 믿게 되었을까요? 하느님은 예수를 믿을 수도 있었던 사람들을 한 사람이라도 놓치실 수 있는 분이신가요? 하느님은 창세전에 구원 받을 당신의 백성들을 이미 정해 놓으신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예수가 조금 일찍 전해졌으면 이순신도 강증산도 김시습도 예수를 믿을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라는 말을 할 수 있는 것입니까?

루소 같은 사람은 진리를 찾아 헤매며 성경을 일 백 독()을 한 사람입니다. 그럼에도 그는 나는 왜 그리스도인이 아닌가라는 책을 썼을 뿐입니다. 그에게 예수가 전해졌고 그 예수에 관한 완벽한 정보가 담겨 있는 성경을 백 번을 읽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왜 예수를 믿을 수 없는지에 관해 책을 썼던 것입니다.

피뢰침을 발명한 벤자민 프랭클린은 당시 그 유명한 황금의 입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던 조지 휫필드의 친구였습니다. 조지 휫필드는 당시 전 세계의 영적 대 각성 운동의 중심에 서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의 설교를 듣고 수많은 사람들이 하느님께로 돌아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대 설교자가 그토록 자주 찾아와 개인적으로 복음을 설명했는데도 그는 결국 하느님을 만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누가 스스로 예수를 받아들일 수 있습니까? 없습니다. 하느님께서 창세전에 택하셔서 이름을 부른 이들 외에는 절대 예수를 알 수도 없고 예수를 이해 할 수도 없습니다.

우리는 자꾸 지옥에 가는 사람들을 두고, 그들은 지옥에 안 가도 될 뻔한 사람들인데 우리가 게을러서 복음을 안전했기 때문에 그들이 복음을 못 들어서 지옥에 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닙니다. 그들은 지옥에 가고 싶어서 가는 것입니다. 제 대답이 좀 의외인가요? 지옥에 가고 싶어서 지옥엘 가다니요?

죄란 하느님의 통치가 싫어서 나도 하느님처럼 되어서 내 인생을 내가 책임지고 싶다는 자들이지요. 그들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히 죽이시고 하느님께 순종하는 것을 기쁨으로 삼는 이들로 새롭게 살려내시는 것이 구원입니다. 그러한 하느님의 백성이 아니면 인간은 모두 자기 마음대로, 자기가 원하는 대로 살고 싶어 합니다. 차라리 지옥에 가서 고통을 당할지언정 하느님이 하라는 대로 해야 하고 , 무조건 하느님이 옳다고 인정해야 하는 하느님의 나라에는 절대 가기 싫어하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모두 자기가 원해서 지옥에 간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느님의 나라는 하느님이 통치하시고 그 통치에 순종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있는 곳입니다. 민중이 주인이 되고 민주주의가 통하는 곳이 아니라 하느님 홀로 통치하시고 거기에 순종하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어우러져 사는 곳이 천국입니다. 천국은 그저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가 있는 곳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천국을 공간적이며 물질적인 곳으로 바라보면 안 됩니다. 天國은 이 지긋지긋한 덩어리인 우리의 육체가 지금처럼 죄에 대한 욕구를 토해내는 그런 곳이 아니라 하느님의 통치를 기쁘게 받아들이고 그렇게 살며 거기서 최상의 행복을 얻는 그런 곳이기 때문에 우리는 그 곳을 오매불망 기다리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나라가 오게하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은 그 하느님의 통치가 우리 가운데 임하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성경을 읽으면서 그 성경의 주제가 무엇으로 생각하며 읽습니까? 책에는 반드시 주제가 있을 것 아닙니까? 저는 이해하기 쉽게 성경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또 다른 주제를 대라면 어떤 것들을 대겠습니까?

하느님 나라, 계약, 사랑, 구속사(救贖史), 하느님의 주권(主權), 은혜, 은총 등 여러 가지로 성경의 주제를 표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중에서 거시적으로 다른 모든 것들을 품어 안을 수 있는 주제를 대라면 하느님나라입니다. 성경은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하느님나라의 완성을 그 주제로 삼고 있는 책입니다. 그 하느님나라의 완성의 중심에 예수 그리스도가 계시기에 저는 주제를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씀을 드린 것이고, 그렇게 하느님께서 당신의 나라를 완성하시는 길에 당신의 백성을 구원해 가시는 역사를 구속사(救贖史)라 하는 것이기에 그렇게 주제를 댈 수 있는 것이고, 그렇게 완성된 하느님나라는 하느님과 그 분의 백성, 백성들 상호 간의 사랑이 풍성한 곳이며 이 땅에서도 그러한 수직적, 수평적 사랑을 추구하며 사는 것이 그 나라 백성다운 삶이라는 의미에서 성경의 주제를 사랑이라고 할 수 도 있는 것이며, 하느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완성을 당신의 계약을 따라 이루어 가신다는 의미에서 성경의 주제를 계약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이고 그 모든 것들은 하느님의 주권에 의해 시작되고 완성이 된다는 의미에서 하느님의 주권이 성경의 주제라고 말할 수 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들은 하느님 나라라는 대 주제 안에 부제들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의 주제는 하느님 나라입니다.

그렇다면 국가의 삼요소가 국민, 주권, 영토입니다. 거기서 제일 중요한 것이 주권입니다. 왜냐? 어떤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 나라를 빼앗기면 그 나라의 주권을 잃었다고 하지요? 우리나라가 일제에서 광복을 맞았을 때 일제히 신문들이 조선이 주권을 찾았다고 보도를 했습니다. 이렇게 국가의 삼 요소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주권입니다. 그렇다면 주권이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누구에게 통치권이 있느냐가 주권입니다. 민주주의 공화국은 주권이 국민에게 있습니다. 그래서 국민의 대표들인 국회의원들이 나라를 이끕니다. 그러나 왕국의 주권은 왕에게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느님이라는 왕이 다스리는 하느님 나라의 주권은 하느님께만 있는 것이지요.

주권에는 입법, 사법, 행정의 삼 요소가 있어요. 법을 세우고 그 법으로 나라를 다스리며 그 법을 어겼을 때 재판을 해서 상벌을 가하는 그런 것이 주권 속에 모두 들어 있습니다. 그런데 그걸 다 하느님께서 하시는 것이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이해가 가세요? 인간은 원래 하느님의 통치에 순종할 때에 가장 행복하도록 지어진 하느님 절대 의존적 존재들입니다. 그런데 인간이 그 하느님의 은혜의 장중을 떠나서 스스로 자기들 인생의 통치자가 되어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살고자 하는데서 인간이 겪는 모든 고통과 슬픔과 아픔들이 배태된 것입니다.

따라서 구원 받은 우리 성도들은 그 하느님 나라에서의 하느님의 통치가 이 땅에서도 즐겁게 받아들여지기를 기도하는 것입니다.

그 하늘에 계신 하느님 아버지의 왕국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하느님에 의해 건설된 나라를 말합니다. 우리 인간과 하느님이 협조해서 만든 나라가 아닌 전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진 나라를 말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 나라 백성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될 수 없고 하느님께로 난 자들만이 그 나라의 백성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요한1:12-13) 12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13 그들은 혈육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난 것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난 것이다.

 

마태복음에 보면 처음에 족보가 나옵니다. 거기에 보면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 14대요 다윗에서 바벨론 유배까지 14대요, 바벨론 유배에서 예수님까지 14대라고 적혀있습니다. 성경이 일부러 그렇게 14라는 숫자로 족보를 나누고 있음을 우리는 금방 알 수 있습니다. 147이 두 개인 숫자이지요? 그렇게 따지면 믿음의 조상인 아브라함에서 예수님까지 7이 여섯 개인 족보가 나오게 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그 족보의 마지막이십니다. 여섯 번째 세대의 마지막이시며 일곱 번째 세대의 시작으로 예수님이 오신 것입니다. 완전한 안식의 숫자 7이 채워지기 위해서는 마지막 세대가 와야 하는데 그 세대는 예수님을 시작으로 성령으로 난 자들이 그 세대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그 족보의 메시지인 것입니다. 그 하늘의 안식에 들어갈 수 있는 자들은 예수님의 아래로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 곳은 아노덴위로부터 난 자들, 거듭난 자들로 이루어진 나라입니다.

하느님의 통치를 즐겁게 받아들이며 순종하는 성령으로 거듭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이 하나느님 나라인 것입니다. 인간의 자연적인 생식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라가 아닌 하느님에 의해 만들어지는 나라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는 우리가 발전시켜서 만들 수 있는 곳이 아니고 하늘로부터 임해야 하는 나라인 것입니다. 우리는 거듭난 자들로서 그렇게 하늘로부터 임한 그 하늘나라의 백성인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을 나그네로, 이방인으로 살아가도록 되어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하늘나라에 속한 하늘나라 사람들이 소원하는 것이 어떤 것이어야 하겠습니까? 하늘에 속한 사람들이 이 세상에 속한 속된 것에만 목을 매고 있다면 그 같은 코미디가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 나라 사람들이기 때문에 이 땅의 것들을 얼마나 누리고 있는 가로 우리의 진가를 나타낼 수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인가는 우리가 얼마나 성공적으로 이 땅에서 살아가느냐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라의 평가 기준은 그렇게 우리의 학식이나 재산이나 지위로 평가되어지지 않습니다.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고지 꼭대기로 올라가면 하느님께 영광이 된다?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그런 것에 관심이 없으십니다. 우리는 하느님나라 백성이므로 얼마나 예수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가고 있는 가로 평가되어져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속한 왕국이 이 세상에 있으면 우리의 진가는 이 세상 것들로 나타나는게 맞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속한 왕국은 하늘에 있는 하늘나라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열매는 하늘나라의 것으로 나타나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우리가 이제 얼마 있다가 다 내려놓고 부수고 올라가야 할 이 땅의 나의 업적과 나의 재물에만 관심을 가질 수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은 아직 하늘나라가 무엇인지도 자기가 하느님 왕국의 백성인지 조차 정확히 인식하지 못하고 있는 사람들인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 왕국의 백성으로서 그 하늘의 나라,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해야 하는 자들입니다. 어서 어서 하느님의 구속사가 마무리 되어 하느님이 통치하시는 하느님의 나라가 이 땅에 오기를 바라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들이 이 땅에서의 자기의 소원성취나 만사형통의 기적이나 바라는 것으로 그리스도교를 정의하고 있다면 이런 웃지 못 할 일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런데 성경은 그 나라가 이미 임했다고 말씀하십니다. 이게 오늘 설교의 핵심 포인트입니다.

(마르1:15) '때가 다 되어 하느님의 나라가 다가 왔다. 회개하고 이 복음을 믿어라' 하셨다.

여기에서 다가 왔다라고 번역이 된"엥기조"는 마태복음에도 동일하게 쓰인 단어입니다.

(마태26:46) 일어나 가자. 나를 넘겨 줄 자가 가까이 와 있다.'

여기서도 가까이 왔다라고 번역이 되어 있지요? 예수님은 지금 당신을 팔 유다가 이미 와있다는 의미에서 엥기조라는 단어를 쓰신 것입니다. 그러니까 주님은 하느님 나라가 이미 이 땅에 와 있다는 의미로 가까이 왔다는 표현을 하고 계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그 나라가 어디에 어떻게 와 있다는 말입니까?

(루가17:20-21) 20 하느님 나라가 언제 오겠느냐는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질문을 받으시고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하느님 나라가 오는 것을 눈으로 볼 수는 없다. 21 '보아라, 여기 있다' 혹은 '저기 있다' 고 말할 수도 없다. 하느님 나라는 바로 너희 가운데 있다.'

그 나라가 우리 안에 있답니다.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는 재창조 되었고 하느님의 통치를 받기를 즐거워하는 자들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나라의 백성이 되었고 그 하느님의 통치가 있고 하느님의 백성이 있는 곳이 바로 하느님 나라라는 것입니다. 우리 안에 그 나라가 있다는 말은 그것을 뜻하는 것입니다. 잘 알겠지요?

주님의기도문을 헬라어로 읽다가 문득 재미있는 것을 발견했습니다. 주님의기도문 안에 쓰인 동사가 전부 과거 시제라는 것입니다. 헬라어에는 aorist, 부정과거 시제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 부정과거는 과거의 1회적인 specific하고 demanding한 사건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시며라고 기도하는 것에는 그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임하고 있고 반드시 임할 것이란 뜻이 모두 담겨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왕국을 이해 할 때도 역시 already, not yet의 교리로 이해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이미 우리에게 임했습니다. 하느님은 그 약속하시고 계획하신 것을 실패하실 수 없는 분이시기에 우리는 믿음으로 그 나라를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그 나라는 예수께서 다시 오시는 날 완전하게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나라가 임하기를 기도하면서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맞다. 우리는 그 나라 백성이다. 그리고 그 나라는 이미 임했으며 반드시 올 것이다.”라는 것을 주의기도문 속에서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 땅에서 하늘나라를 살아야 하는, 하늘의 원리로 살아야 하는 하느님 나라의 백성들에게는 환난과 고난이 찾아오게 되는 것입니다. 왜 환난과 고난이 옵니까? 이 세상의 원리는 오른 뺨을 한 대 맞으면 그 모욕감이 없어질 때까지 상대방을 패주는 게 이 땅의 원리입니다. 이 땅의 삶의 원리는 힘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힘 이외에는 이 땅에서 누가 우수한지 가려낼 수 없기 때문에 힘으로 상대를 제압해야 합니다. 그러나 하늘의 원리는 오른 뺨을 맞으면 왼뺨을 돌려 대주는 십자가의 원리입니다. 우리는 바로 그 십자가의 원리로 힘의 원리가 지배하는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니 당연히 충돌이 생기지요? 그러나 하느님이 그렇게 살라고 하셨기에 그 분의 통치에 순종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영적인 면으로 세상은 육적인 면으로 다른 차원, 다른 원리로 살아야 하는 자들이기에 우리는 세상과 부딪칠 수밖에 없습니다. 그것을 성경은 성도의 고난, 환난, 고통이라 표현하는 것입니다.

자기의 모든 희망이 이 세상에서의 체면에 있으면 어떻게 뺨을 맞고 가만히 있을 수 있습니까? 그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라도 가서 두들겨 패 줘야 합니다. 자기가 겁쟁이가 아니라는 것을 보여 줘야 하는 것이 이 세상의 삶의 이치입니다. 힘의 원리로 사는 세상 사람들은 그렇게 인정을 받아야 만족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자기의 모든 희망이 저 하늘나라에 있다면 그 까짓 체면쯤 조금 구겨져도 괜찮다로 갈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저 천국의 것으로 만족을 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나라에 동참한 자는 환난과 인내에도 동참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술, 담배, 도박, 마약을 왜 한다고 생각하세요? 한마디로 심심해서 입니다. 그 마음속에 뻥 뚫려 있는 공허를 메울 수 없기 때문에 무언가에 몰두하는 것입니다. 그 심심함을 잊기 위해서. 그러나 예수의 은혜와 천국의 희망으로 그 마음이 가득 채워져 있는 사람에게는 술 담배 도박이 필요 없습니다. 은혜에 취하면 술에 취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희열이 있다는 것을 아십니까? 은혜에 취해서 왜 도박하는 자리에서 시간을 죽이겠습니까? 술보다 도박보다 더 좋은 것이 있는데 왜 그런 것으로 시간을 죽이겠습니까? 마약 중독자가 유일하게 마약의 유혹을 잊을 수 있을 때가 도박을 할 때라 지요? 인간은 세상의 힘을 대표하는 돈 앞에서는 다른 모든 것들을 잊게 된다는 반증입니다. 우리 성도들은 하느님 나라의 힘인 하느님을 우리 안에 소유한 자들입니다. 그 사랑과 은혜에 취해 보세요. 다른 것이 우습게 보이게 되지요. 그처럼 하늘의 희망으로 사는 자들은 이 땅의 체면 따위와는 별 상관없이 살 수 있게 됩니다. 하늘의 것을 소유한 자로서 대 만족하며 살아갈 수 있습니다.

 

(묵시1:9) 여러분의 형제이며 함께 예수를 믿는 사람으로서 환난을 같이 겪고 한 나라의 백성으로서 같이 견디어 온 나 요한은 하느님의 말씀을 전파하고 예수를 증언한 탓으로 파트모스라는 섬에 갇혀 있었습니다.

예수의 나라, 예수의 환난, 예수의 참음(견디다)equation입니다.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개념이라는 것입니다. 예수의 나라에 동참한 자는 이 땅에서 환난에 처하게 되고 그 딜레마를 해결하는 길이 참음이라는 것입니다. 인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예수의 환난과 나라와 참음에 동참하는 자라는 사도 요한의 고백을 함께 하는 자들이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너희들은 지금 환난을 당하지만 너희는 그 하느님 나라를 믿음으로 보았으므로 참아라.’ 그러나 그 나라는, 그 때는 반드시 옵니다. 속히 올 것입니다. 세상 모든 민족과 언어와 나라가 아니 사탄까지도 하느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인정하게 되는 날은 반드시 옵니다. 그러니 조금 만 참으십시오. 그럴 때 우리는 하느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소서.’라는 기도를 하며 그 나라의 도래를 확인하고 확신하고 힘을 얻는 것입니다.

바로 그와 맥락을 같이해서 아버지의뜻이 하늘에서 와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를 하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과 하느님나라에서 영원히 함께 사는 하느님나라를 이루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하느님나라의 완성입니다. 하느님의 그 뜻은 이미 살펴 본 것처럼 이미 이루어져 있고 이루어 질 것입니다. 그럼 하느님의 그 뜻은 어차피 하느님께서 이루실 텐데 우리가 그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이유는 뭔가요? 이 세상에는 두 종류의 사람들이 있는데 한 종류는 하느님에게 당신의 뜻이 이루어지이다라고 기도하는 사람들이 있고 다른 한 종류의 사람은 하느님이 너희의 뜻이 이루어질 지어다.”라고 방치해 두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아주 무서운 말입니다. 하느님이 인간을 가장 잔인하게 저주하시는 방법이 자기들 마음대로 살게 놔두는 것입니다.

(로마1:24. 28-32) 24 그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자기 욕정대로 살면서 더러운 짓을 하여 서로의 몸을 욕되게 하는 것을 그대로 내버려 두셨습니다. 28 인간이 하느님을 알아보려고도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이 올바른 판단력을 잃고, 해서는 안 될 일들을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다. 29 그래서 인간은 온갖 부정과 부패와 탐욕과 악독으로 가득 차 있으며 시기와 살의와 분쟁과 사기와 악의에 싸여서 없는 말을 지어내고 30 서로 헐뜯고 하느님의 미움을 사고 난폭하고 거만하며 제 자랑만 하고 악한 일을 꾀하고 부모를 거역할 뿐더러 분별력도, 신의도, 31 온정도, 자비도 없습니다. 32 그런 모양으로 사는 자는 마땅히 죽어야 한다는 하느님의 법을 잘 알면서도 그들은 자기들만 그런 짓들을 행하는 게 아니라 그런 짓들을 행하는 남들을 두둔하기까지 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면서 간혹 어느 순간 그 자식을 포기 할 때가 있습니다. 아침에 학교 안가고 매일 오락실이나 가고 놀러나 다니는 자식을 처음에는 야단도 치고 매를 대기도 하다가, 하다하다 정 안되면 나중에 나오는 소리가 네 마음대로 해, 네 인생이지 내 인생이냐입니다. 이렇게 되면 정말 큰일 나는 것입니다. 제가 설교 때마다 소리 지른다고 뒤에서 소곤대지 마세요. 어떤 분들은 제가 너무 과격하게 닦달을 한다고 불만이세요. 언젠가 제 목소리가 매력적인 저음으로 깔리면서 농담이나 하고 유머나 들먹이며 인생이 다 그런 거지요 뭐, 착하게 잘 먹고 잘살다 가세요.” 그러면 교회는 끝장 난 것입니다. 하느님의 말씀대로 잘 못 살고 있는 성도들을 보며 어떻게 소리를 안 지르나?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들이 잘 못 가고 있는 것을 보면서 애가 타지 않겠습니까?

하느님께서그래 네 맘대로 살아, 네가 원하는 것 다 이루면서 살아그렇게 놔두시면 죄인이 하고 싶고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죄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결국 죄만 짓다가 모두 죽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러므로 우리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기도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좋은 본보기를 주님이 보여주셨습니다.

예수님이 잡히시던 날 밤에 어떤 기도를 하셨습니까? “나는 이 잔이 내게로 오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라고 기도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뜻은 그 잔을 내게서 멀리하옵소서.”였습니다. 반면에 하느님의 뜻은 너의 뜻을 접고 나의 뜻인 십자가를 지고 죽어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살려내라, 나의 왕국을 이루어 내라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 순종하셨습니다. 그 예수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어 우리는 그러한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삶을 쫓아 살아야 합니다. 이 세상에서 내가 원하는 것들을 포기해야 한다 할지라도 그것이 하느님의 뜻이라면 과감히 포기할 수 있는 신앙인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땅에서의 삶에 연연하지 않으며 하느님의 뜻을 위해서는 십자가라도 마다하지 않는 것이 바로 하느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옵소서.’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이 이루어진다면 이 세상에서의 부귀와 영화, 생명까지도 내려놓고 기쁘게 그 뜻에 따르겠다고 나서는 자들이 그리스도인들인 것입니다. 하느님의 뜻은 우리가 하늘의 것을 영위하고 누리는데 있지 이 세상의 것들을 붙들고 애걸하는데 있지 않습니다. 그런 면에서 그리스도인들의 죽음은 우리 믿음의 승리의 시간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의 죽음은 하느님 한 분만 붙들기 위해 이 땅의 모든 것을 놓는 최종적 순간인 것입니다. 내가 사랑하는 가족, 내가 사랑했던 이 세상의 모든 것을 하느님을 잡기 위해 모두 놓는 것을 신자의 죽음이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께서도 성도의 죽음을 귀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 땅에서 그렇게 매일 매일 세상에 대해 죽어야 합니다. 그리고 결국에 우리의 목숨을 놓아야 할 때 아쉬움 없이 기쁘게 떠날 준비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시편116:15) 야훼께 충실한 자(성도)의 죽음은 그분께 귀중하다.

정말 천국을 그리워하세요? 정말 그 곳에 가고 싶으십니까? 아니면 이곳이 더 좋으세요? 이곳에서 누리던 많은 것들을 다 놓고 기쁘게 갈 수 있을 만큼 그 하느님 나라를 아십니까?

하느님 나라는 이미 임했고 반드시 임할 것이며 하느님의 뜻도 이미 이루어져 있고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환난과 궁핍 속에서도 그 나라를, 그 뜻을 믿음으로 기다리며 세상의 공격을 넉넉히 이기며 사는 자들이고 죽음까지도 불사하며 하느님의 뜻을 쫒아야 하는 그리스도인입니다.

 

 

오늘은 네째날입니다.

다시한번 주님의 기도문의 깊은 뜻을 헤아려 행복한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저와함께

묵상해 봅시다.~~살롬.

2020. 7. 13.

(공동번역성서)

주님의기도문(IV)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지은 자를 사하여 준 것 같이 우리의 죄를 사하여 주옵소서

 

(마태6:9-13)

9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인류의 역사상 가장 큰 실험은 아마 공산주의라는 이데올로기 일 것입니다. 마르크스와 엥겔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모든 사람들이 능력껏 일하고 모든 사람들이 필요 껏 쓰는 프롤레타리아 유토피아를 만들겠다고 호언장담했습니다. 그러나 유토피아는커녕 70-80년 동안 실험한 끝에 공산주의가 남긴 것은 대 재앙 뿐입니다.

이 것은 무엇을 반증하는가 하면 인간들이 자기들이 스스로 왕이 되겠다고 하느님을 떠난 뒤 자신들을 스스로 보호하고 자신들의 힘을 쌓기 위해 만들어 놓은 그 어떤 것으로도 스스로의 안녕과 행복을 확보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여실히 증명해 준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느님의 통치를 바래야 하는 자들이며 이 땅의 유토피아가 아닌 하느님 나라를 구해야 하는 자들인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만일 이 기도가 우리가 이해하는 이 땅에서의 우리가 필요한 양식을 구하는 것이라면 성경은 자체 내에서 심각한 모순을 갖게 됩니다. 같은 장의 25절을 보면 분명 그런 것을 위해 기도하지 말라고 명확히 나와 있거든요.

(마태6:25) '그러므로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는 무엇을 먹고 마시며 살아갈까, 또 몸에는 무엇을 걸칠까 하고 걱정하지 말아라. 목숨이 음식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또 몸이 옷보다 소중하지 않느냐?

그렇지요? 그렇다면 성경이 각기 모순된 요구를 한 장에서 이야기 할 리는 없고 우리가 놓치고 있는 어떤 심오한 뜻이 있지 않겠습니까? 그 심오한 뜻을 한번 밝혀보도록 하겠습니다.

성경을 잘 보면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일용할 양식이라는 단어 옆에 풋 노트가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거기에 혹 내일의 양식 이라는 말이 적혀 있을 것입니다. 그 이유는 일용할이라고 번역이 된 헬라어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가 여러 가지 뜻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는 헬라의 어떤 문헌에도 쓰인바가 없는 아주 생소한 단어입니다. 성경에서도 딱 여기서 한번 쓰였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자들도 이 단어에 대해 세 가지의 견해를 보이고 있는 것입니다. 첫 번째가 에피우지온이라는 단어를 에피우지아의 합성어로 보고 삶에 필요한이라는 뜻으로 풀이를 합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친숙한 해석이지요? 두 번째가 그날을 위한, 당일을 위한이라는 뜻으로 풀이를 합니다. 세 번째가 오는 날에 필요한혹은다음날에 필요한으로 해석을 하는 견해입니다. 개인적으로 이 세 번째 해석을 지지합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신학자들도 거의 세 번째 견해에 의견일치를 보이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 기간 동안 아람어를 쓰셨습니다. 아람어는 바벨론의 언어인데 이스라엘이 바벨론 포로로 70년간 있으면서 그들의 일상 언어가 아람어가 되어있었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히브리어는 유대인들의 학자들이나 쓸 정도로 일반인들에게는 거의 잊혀 진 언어였습니다. 그런데 아람어 주의기도문에는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옵시고라고 되어 있습니다.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이 신학의 기본이라는 것은 다 알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해설이 아무리 그럴 듯하다 해도 성경이 전하고자 하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이야기로 흐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예를 들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세대주의자들이 해석을 할 때에 이렇게 해석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가는 사람이 도중에 강도를 만난다. 예루살렘은 천국을 말하는 것이고 사마리아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것이다. 강도는 사탄이고 선한 사마리아인은 예수님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이 포도주와 기름을 부어 치료를 한다. 포도주는 예수님의 보혈을 의미하고 기름은 성령을 의미한다. 여관으로 데리고 가는데 그 여관이 교회이고 그 여관 주인에게 동전 두 개를 준다. 그것을 신약과 구약이라 하고 다시 오겠다고 약속을 하고 간다. 그 것은 예수님이 재림을 하실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어떠세요? 어찌 보면 딱 맞아떨어지는 해석 같지 않으세요?

그러나 그 비유는 율법사가 예수님께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을 수 있느냐고 물었을 때 예수님이 율법사에게 하신 대답으로 주신 말씀입니다. 수님이 그 율법사에게 율법에 뭐라 기록되었느냐고 물으시자 그 율법사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고 뜻을 다해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했다고 정확하게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께서 가서 그렇게 행하라고 하십니다. 그러니까 율법사가 누가 내 이웃입니까 라고 묻지요? 그 때에 주님께서 이 비유를 말씀하신 것입니다. 그러면서 결론을 누가 네 이웃인가 잘 정리하고 있어라. 네 입맛에 맞는 이웃 고르려 하지 말고 네가 다른 사람들의 이웃으로 살라고 내려 주신 것입니다. 이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담고 있는 메시지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잘 못하면 성경을 우리가 원하는 쪽으로 임의로 해석하게 되어버립니다. 그래서 성경을 성경이 아닌 자기의 상식을 동원해서 푸는 것은 위험한 것입니다.

 

이렇게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하는데 왜 세 번째 해석인 내일의 양식을 지지하는가 하면 구약에서 내일의 양식을 오늘 주신 적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 때가 광야에서 만나를 주신 사건입니다. 하느님은 6일 째 되는 날에 안식일인 다음날 것까지 주셨습니다. 왜 여섯째 날에 다음날 것까지 주셨습니까? 안 식일에는 그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켜야 하기 때문에 일곱째 날에는 일을 하지 않고 여섯째 날에 일곱째 날 것까지 거두고 안식일에는 태초에 하나님께서 창조해 놓으신 온전한 창조를 기념하며 즐기고 종말에 이루어질 참 안식을 고대하라고 여섯 째날 다음날 것까지 주신 것입니다.

그렇게 여섯째 날 내일의 양식까지 주심으로 그 안식의 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을 확신하게 하신 것입니다. 안식의 날인 내일이 오지 않을 것이라면 하느님께서 굳이 내일의 양식까지 오늘 주실 필요가 없잖아요? 내가 벌써 내일의 양식을 소유하고 있으므로, 여섯째 날 일곱째 날의 양식을 소유함으로 일곱째 날인 안식일을 여섯째 날에 미리 누리면서 살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러면 구속사 적인 측면에서 주님의기도문에서 쓰인 내일의 양식이라는 것에 대해 조금 깊이 살펴보겠습니다. 예수님이 쓰셨던 아람어 주님의기도문을 보면 거기 마헬이라는 아람어 단어가 나오는데 그 단어가 내일의라는 뜻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아람어의 마헬이라는 단어는 그냥 24시간 후의 내일이라는 뜻이 아니라 오늘과는 다른 날, 즉 다가올 시대의 내일을 가리키는 단어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오늘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 오는 날의 양식을 주소서라고 기도한다는 것은 우리는 지금 바로 다가올 영원한 안식의 나라, 천국이 임하게 될 바로 전인 종말을 살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것이며 이 땅에서 그 천국을 맛보면서 사는 자들임을 확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울러 그 안식의 나라, 하느님 나라는 반드시 오고야 말 것이라는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다가올 내일, 즉 하늘나라를 살게 될 하늘나라의 백성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에서 저 하늘의 것으로 먹고 마시는 자들인 것입니다. 그 나라를 통치하시는 왕이 주시는 것으로 만족하며 그 나라를 준비하며 사는 자들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면 그 하늘의 양식이 무엇입니까? 우리가 오늘 내일의 양식을 우리에게 주소서.”라고 기도해야 하는 그 하늘의 양식이 무엇인가요? 요한복음에 정확하게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요한6:27-35) 27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영원히 살게 하며 없어지지 않을 양식을 얻도록 힘써라. 이 양식은 사람의 아들이 너희에게 주려는 것이다. 하느님 아버지께서 사람의 아들에게 그 권능을 주셨기 때문이다' 하고 말씀하셨다. 28 사람들은 이 말씀을 듣고 '하느님의 일을 위해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다. 29 예수께서는 '하느님께서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일을 하는 것이다' 하고 대답하셨다. 30 그들은 다시 '무슨 기적을 보여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시겠습니까? 31 '그는 하늘에서 빵을 내려다가 그들을 먹이셨다' 는 성경 말씀대로 우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습니다.' 하고 말했다. 32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하늘에서 너희에게 진정한 빵을 내려 주시는 분은 내 아버지이시다. 33 하느님께서 주시는 빵은 하늘에서 내려오는 것이며 세상에 생명을 준다.' 34 이 말씀을 듣고 그들이 '선생님, 그 빵을 항상 저희에게 주십시오' 하자 예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셨다. 35 '내가 바로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고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보다시피 그 양식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바라야 하는 그 내일의 양식인 예수는 하늘 왕의 신분으로, 하지만 이 땅의 왕이 아니기 때문에 이 땅에서 고난을 받으시고 핍박을 받으시고 그러나 지금은 하늘의 영원한 영광의 보좌에 앉으신 그 예수입니다. 그렇기에 우리는 그 하늘의 양식인 예수를 바라며 예수를 원하며 나도 그렇게 살겠습니다. 나도 그 하늘의 백성이기 때문에 하늘의 왕이 살다 가신 그 길을 나도 따라가겠습니다.”하는 신앙고백이 바로 우리에게 내일의 양식인 예수를 주옵소서.’라는 기도문이 담고 있는 내용인 것입니다. 그 하늘의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아는 자들만이 그러한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2고린4:17-18) 17 우리는 지금 잠시 동안 가벼운 고난을 격고 있지만 그것은 한량없이 크고 영원한 영광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입니다. 18 우리는 보이는 것에 눈길을 돌리지 않고 보이지 않는 것에 눈길을 돌립니다. 보이는 것은 잠시뿐이지만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이 땅에서 당하는 고난은 때로는 눈물도 안 나올 만큼 힘이 들 때가 있습니다. 때로는 스스로 목숨을 끊고 싶을 만큼 괴롭기도 합니다. 그러나 누구보다 더 고난을 당했던 사도 바오로는 내가 당할 만큼 당해 보았다. 그러나 내가 하늘의 영광을 알기에 이렇게 이야기한다. 그 하늘의 영광과 이 땅의 고난은 비교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러니 조금만 참아라. 그리고 그 달려갈 길을 계속 달려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 눈에 보이는 이곳은 잠깐이면 지나갈 것이지만 보이지 않는 저 천국은 영원한 곳임을 아는 자들, 그들이 오늘날 나에게 내일의 양식을 주소서. 그 예수를 쫒아 살게 하소서. 하느님 그렇게 살겠습니다.” 하고 기도하고 서약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오늘을 살지만 다가 올 내일, 즉 천국을 아울러 사는 자들이기에, 그 나라는 우리에게 임했기에, 그 하느님의 뜻은 이루어져 있기에 내일의 양식인, 하늘의 빵 예수 그리스도만을 바라며 그 삶을 쫒으며 살겠노라고 고백하며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그리스도교이지 어떤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삼박자 축복을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교가 아닌 것입니다. 요한12장의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고 또 하느님의 계명을 지키면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는 구절은 예수를 믿는 사람은 그의 영혼이 잘 된 것처럼 병도 안 걸리고 모든 일이 술술 잘 풀리게 된다는 그런 뜻이 아닙니다.

(1데살5:16-18) 16 항상 기뻐하십시오. 17 늘 기도하십시오. 18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십시오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여러분에게 보여 주신 하느님의 뜻입니다.

잘 보세요. 바오로가 교회에게 어떤 처지에서든지(凡事)’에 감사하라 합니다. 여기서 어떤 처지모든 일을 뜻하는 단어가 아닙니다. 어떻게 우리가 모든 일에 다 감사할 수 있어요? 바오로가 말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의 어떤 처지란, 하느님께서 그 예수를 통해서 구원을 이루시고 그 백성들을 버려두지 않으시고 이 땅에서 세밀하게 그 삶에 간섭하셔서 그들을 자식답게 만드시는 그 모든 일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 어떤 처지가 잘되는 길은 우리가 원하는 대로 이루어져 가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우리를 고쳐 가시고자 하시는 대로 우리가 만들어져 가는 길인 것입니다. 그래서 어떤 처지에 잘된다는 것은 우리를 패서라도 자식답게 만드시겠다는 하느님의 뜻이 우리의 삶에 이루어져 가고 있는 것을 어떤 처지든 잘된다고 하는 것입니다. 감옥에 가있던 요셉을 가리켜 그의 삶이 형통하였더라고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저의가 동일하게 나타나는 말인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이 잘됨같이 어떤 처지든지 잘된다고 하는 것은~

우리의 영혼이 잘된 것처럼, 전에는 자기 마음대로 살던 죄인들이 이제 하느님의 통치 속으로 들어와 하느님의 뜻대로 살게 된 것처럼, 그 신자의 모든 일이 하느님의 뜻에 맞게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이 어떤 처지에서든지 잘되기를 간구한다는 어구의 진의입니다. 그렇게 너의 어떤 처지에서든지 가 그 영혼의 잘됨같이 하느님의 통치 아래로 들어가게 되기를 원한다는 기도 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렇게 사는 것은 너무나 힘이 들겠지요? 내 욕심과 내 야망을 접고 하느님의 뜻과 하느님의 말씀에 순종하며 사는 것이 어찌 쉬울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바오로가 어떤 처지에서든지 감사하라는 것입니다. 확실히 아시겠어요? 그 구절은 절대 이 땅에서도 잘 먹고 잘 살게 해 주겠다는 하느님 약속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늘의 양식인 예수 그리스도로 살게 하소서.’하고 기도 할 수 있는 자들은 이 땅의 것에 눈을 두고 사는 자들이 아니고 영원한 영광의 나라를 바라며 사는 자들이기에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이웃을 사랑할 수 없는 이유가 죄인들은 자기 스스로 자기의 양식을 구하며 살아야 하기 때문에 모든 사람들이 다 경쟁 상대입니다. 하다못해 옆집 애가 자기 집 애 보다 공부를 조금 잘 해도 배 아파서 못 견디는 것이 인간입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를 알고 영원한 나라를 아는 자들은 굳이 이 땅에서 이 땅의 것으로 누구와 경쟁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이 진정으로 이웃을 사랑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그 사랑을 근거로 자기에게 오른 뺨을 때린 사람을 왼뺨을 돌려대며 용서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들은 왼뺨을 돌려 대면서 이렇게 기도 할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여 주소서.” 여기서 우리의 잘못는 복수로 쓰였습니다. 그렇게 죄들이라고 복수를 쓴 것은 구체적인 죄의 행위들을 모두 용서해 달라고 요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마치 우리가 하느님의 모범이 되는 것처럼 기술이 되어있습니다. 그렇지요?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 준 것을 보고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여 달라는 말처럼 들립니다. 여기서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자를 용서()해 준 것 같이는 완료형입니다.

셈 족의 언어를 가장 잘 연구해서 파악하고 있다는 요아킴 예레미야스에 따르면 여기서 쓰인 헬라어의 아페카멘을 아람어로 번역을 해서 읽어보면 아람어의 완료형은 시제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동시적인 것의 완료형으로 보아야 한다고 합니다. 왜 학자들이 아리송한 어구나 구절들을 아람어로 번역을 해보는지 아세요? 말씀드린 대로 예수님이 당시에 쓰시던 언어가 아람어였기 때문입니다. 주님께서 아람어로 말씀하신 것을 헬라어로 옮겨 놓은 것이니 다시 아람어로 옮겨서 연구를 해 보는 것입니다. 그렇게 이 부분을 아람어로 다시 번역을 해 보면 하느님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옵소서. 그와 동시에 우리도 우리에게 죄지은 자들을 용서하겠나이다.”의 뜻이 됩니다. 그러니까 하느님께 죄 용서를 구하면서 내가 누구를 용서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게 무슨 뜻이 되는가? “하느님 내가 아무개를 용서하고 있지 못하는 그 죄만 빼놓고 딴 죄만 용서해 주옵소서.”의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 나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옵소서. 그러나 저 놈만은 내가 용서 못 합니다. 그러니까 그 죄는 좀 눈감아 주세요이렇게 말이 안 되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의기도문을 통해 하느님께 용서를 구할 수 있는 자들은 자신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 한 자들만 이 그 기도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주님의기도문 바로 다음절인 마태복음 614절과 15절을 보세요.

(마태6:14-15) 14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면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도 너희를 용서하실 것이다. 15 그러나 너희가 남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면 아버지께서도 너희의 잘못을 용서하지 않으실 것이다.'

무섭죠? 이와 동일한 내용이 마태복음 1835절에 또 나옵니다.

(마태18:35)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들을 서로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실 것이다.'

이 말씀은 어떤 비유의 결론으로 하신 말씀인데 그 비유가 우리가 잘 아는 일만 달란트 빚진 자와 백 데나리온 빚진 자의 비유입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왕에게 일만 달란트를 빚진 자가 갚을 능력이 없어서 왕이 탕감을 해 주고 놓아주었습니다. 당시 갈릴리와 베레아 주민 전체가 로마 정부에 내는 1년치 세금이 이백 달란트였습니다. 그러니 일만 달란트라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액수인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금액은 절대 값을 수 없는 금액이란 것을 상징적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엄청난 빚을 탕감 받은 자가 나가다가 자기에게 백 데나리온 빚진 자를 만났는데 갑자기 멱살을 잡고 옥에 가두어 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왕이 그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던 자를 다시 잡아다가 내가 너에게 그 큰 금액을 탕감해 주었는데 너는 겨우 백 데나리온에 사람을 옥에 넣었느냐하시며 그 갚을 수 없는 금액인 일만 달란트를 다 갚을 때까지 옥에 넣어 버렸습니다. 그 말은 영원한 지옥에 던져 버렸다는 뜻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어서 예수께서 하시는 말씀이 너희가 진심으로 형제를 용서하지 아니하면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이와 같이 하시리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가 용서하지 않으면 하느님도 우리를 용서하시지 않겠다고 하시는 것입니다. 큰일 났지요? 우리는 그게 잘 안 되잖아요? 어때요? 이 중에도 딴 기도들은 그런 대로 수긍하겠는데 그 기도는 아무래도 아직 못하겠다. 난 그렇게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다이렇게 생각하는 사람들 있을 것입니다.

아닙니다. 자기에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지 못한 자들은 주님의기도문을 하느님께 올릴 수 없는 자이며 주님의기도문은 하나의 완성된 기도문이므로 어느 것은 하고 어느 것은 안하고 할 수 없는 기도문입니다. 그렇다면 기도는 해야 하고 기도를 할 수 있는 자격은 안 되는 이 딜레마를 어떻게 해결해야 합니까? 여기서 또 union christ그리스도와의 연합이 필요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의 삶이 우리의 삶이 되었고 우리의 삶이 예수의 삶으로 전가 된 것을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겟세마니 에서의 예수님의 기도에도 동참한 자들이 되었고 십자가에서 예수와 함께 죽었고 예수님과 함께 부활을 한 자들입니다. 성도는 그 모든 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들입니다. 그럼 예수께서 하느님의 백성들을 용서하실 때 우리는 어디 있었나요? 그 안에 있었습니다. 예수께서 십자가에서 아버지! 저들을 용서해 주소서. 저들은 자기의 하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하실 때 우리는 그 예수 안에 있던 자들이었습니다. 우리는 지금 여전히 이 꼴이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용서를 한 자들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기도를 드릴 수 있는 자격이 생긴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죄를 용서 해 주옵소서. 우리도 우리에게 죄 지은 자를 용서하겠나이다.”라고 기도하면서 다시 한 번 우리의 신분을 확인하며 감격하는 것이다. 어떻게 우리가 이웃을 용서하는 자가 되었는지 그리고 하느님께 당당하게 우리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할 수 있는 자들이 되었는지 다시 곱씹으며 감사하는 것입니다. 그러한 감사 속에서 진정한 용서가 조금씩 나오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우리는 그렇게 용서한 자가 되었고, 용서받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 예수께 감사하며 그 분의 삶을 쫒아 이 땅에서 실제로 이웃을 용서해 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빠삐용이라고 하는 영화 맨 마지막 장면에 보면 악마의 섬에서 스티브 맥퀸이 탈출하는 것으로 영화는 끝이 납니다. 스티브 맥퀸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면서 더스틴 호프만에게 같이 탈출할 것을 권면하지요? 그러나 그는 거절합니다. 무서웠던 것이지요. 스티브 맥퀸이 절벽에서 뛰어 내려 정말 운 좋게 조수를 잘 타서 탈출에 성공을 합니다. 그리고 절벽 위에 있는 더스틴 호프만을 쳐다보면서 승리의 손짓을 합니다. 그것을 본 더스틴 호프만이 이런 대사를 합니다. "그대가 아무리 이 섬으로부터 탈출을 해도 그대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지 않았다면 그대는 여전히 감옥 속에 있는 것이야!" 뒤집어 말하면 나는 아무리 이 악마의 섬에 있다고 하더라도 나로부터 자유하면 나는 자유인이다.이런 뜻입니다. 그 영화에서는 스티브 맥퀸이 왜 탈출하려고 했는지 이유를 밝혀주지 않습니다. 그 이야기는 실화입니다. 스티브 맥퀸이 열연을 했던 실제 그 주인공의 실명은 앙리 샤리에르라고 하는 사람입니다. 그는 1930년도 324일 새벽에 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에 느닷없이 살인범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습니다. 그리고 신문에 그 사건이 대서특필이 됩니다. 앙리 사리에르를 체포한 젊은 검사는 하루아침에 프랑스의 유명한 검사로 칭송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수사였습니다. 젊은 검사도 나중에 그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알려지면 자기 명예에 금이 가게 될 것을 두려워 한 그 검사는 다른 불량배들을 동원해서 거짓 증인들을 세웁니다. 그리고 정말 앙리 샤리에르를 살인범이 되도록 꾸면 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1931년 법정에서 한사람도 죽인 일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살인죄의 누명을 쓰고 종신형의 선고를 받습니다.

그래서 억울한 앙리 샤리에르는 그 이후에 기회만 있으면 탈출을 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유는 한 가지였습니다. 그 검사와 거짓증언을 한 사람들을 죽이고 복수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마침내 1944년도에 영화에서 본 것처럼 아홉 번째의 탈출을 시도함으로 그는 그 악마의 섬으로부터 탈출에 성공합니다. 그리고 남미의 아르헨티나 등을 전전하며 돈을 많이 모읍니다. 그리고 1967년도 그가 만61세가 되던 해 프랑스 법상 그 애매한 공소시효가 만료되기를 기다렸다가 그는 남미로부터 파리 행 비행기를 탑니다. 단 한 가지 자신을 그토록 모함을 한 자들을 찾아내어 죽이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나 파리에 도착한 앙리 샤리에르는 팔일 동안 밤새 생각하고 또 생각하던 끝에 마음으로부터 그들을 용서합니다. 그리고 그가 빠피용의 후편 격인 방꼬라고 하는 자기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힙니다. "나는 하느님께 기도했다. 내가 복수를 포기한 대가로 다시는 이런 비극이 생기지 않도록 해달라고 나 자신에게 속삭였다. 너는 이겼다. 친구여! 너는 자유롭고 사랑 받는 미래의 주인공으로 여기 있다. 이 일에 관계된 모든 사람 중에 네가 가장 자유롭고 가장 행복한 사람이다"

30년 동안 자기 증오심의 노예가 되어 살던 앙리 샤리에르가 용서를 선포하고 자기로부터 자유 하는 순간 그는 정말 자유 한 삶이 무엇인지를 깨달았던 것입니다. 그 시간 이후로 앙리 샤리에르는 참 자유를 만끽하는 한 사람, 인간을 사랑하는 자유의 인간이 되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문자 그대로 그는 빠삐용이 된 것입니다. 빠삐용이라는 단어는 나비라고 하는 단어입니다. 그는 원수들을 용서함으로 나비가 되어 자기를 얽어매는 증오와 복수의 굴레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비상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용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위대한 용서를 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완전하게 자유로워졌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땅에서 그 예수의 용서를 따라 용서하며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용서를 청원하는 동시에 용서를 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자들입니다. 왜냐하면 주님의기도문의 기도는 청원인 동시에 서약이기 때문입니다.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난 그 나라 통치에 순종하겠습니다.”하고 서약하는 것이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소서.”라고 기도하면서나도 내게 죄 지은 자들을 용서하며 살겠습니다.”하고 서약하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한발 한발 예수님께서 요구하시는 점도 없고 흠도 없는 천국 백성의 수준을 향하여 변화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렇게 용서받은 자로서 하느님 앞에 기도하며 계약을 신실하게 지키시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예레31:31-34) 31 앞으로 내가 이스라엘과 유다의 가문과 새 계약을 맺을 날이 온다. 나 야훼가 분명히 일러둔다. 32 이 새 계약은 그 백성의 조상들의 손을 잡아 에집트에서 데려 내 오던 때에 맺은 것과는 같지 않다. 나는 그들을 내 것으로 삼았지만, 그들은 나와 맺은 계약을 깨뜨리고 말았다. 귀담아 들어라. 33 그 날 내가 이스라엘 가문과 맺을 계약이란 그들의 가슴에 새겨 줄 내 법을 말한다. 내가 분명히 말해 둔다. 그 마음에 내 법을 새겨주어, 나는 그들의 하느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될 것이다. 34 내가 그들의 잘못을 다시는 기억하지 아니하고 그 죄를 용서하여 주리니, 다시는 이웃이나 동기끼리 서로 깨우쳐 주며 야훼의 심정을 알아 드리자고 하지 않아도 될 것이며, 높은 사람이나 낮은 사람이나 내 마음을 모르는 사람이 없으리라. 이는 내 말이라, 어김이 없다.'

우리는 주님의기도문의 기도를 하느님 앞에 올릴 때마다 이렇게 새 계약을 세워주신 하느님께서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새 계약을 우리 가운데 이루시고 그 말씀대로 우리를 완전하게 용서하셨음에 감격하며 그렇게 신실하게 약속을 지키시는 하느님께서 반드시 속히 우리를 그 천국으로 인도하실 것을 거듭 확인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종말을 살아가는, "내일을"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양식이 아닌 하늘의 양식, 예수 그리스도로 살아가는 자들이며, 이 땅의 것으로 살지 않고 하늘이 주시는 양식으로 사는 자들이 됨으로 아담에게 내린 저주가 풀린 자들이며 그 것으로 만족하며 사는 자들이기에 이웃을 시기하지 않고 질투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으며 참으로 용서할 수 있는 자들이 되어 하느님께 당당히 "나도 이렇게 용서하는 자가 되었으니 내 죄도 확실히 용서가 된 것을 난 확신합니다." 하고 기도 할 수 있는 자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오늘날 우리에게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이를 용서해 준 것같이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라고 기도하면서 우리의 신분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내일의 양식인 예수가 이렇게 내 안에 있으므로 그 하느님 나라는 속히 반드시 올 것이란 것을 확신하는 것입니다. 그 나라는 속히 옵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주신 그 내일의 양식을 확실하게 소유하고 있으십니까? 그것으로 만족하며, 그것이 이 세상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것이란 것을 알기에 사소한 것으로 남을 단죄하지 않고 용서하며 살고 계십니까?

인간들은 아담의 범죄로 말미암아 우리의 생명을 스스로 유지하며 살게 되었습니다. 농사를 짓고 땀을 흘려 그 땀의 열매인 양식으로 살게 된 것입니다. 거기서 나온 것들이 바로 현대 문명들입니다. 과학, 철학, 교육, 종교, 물질주의, 실용주의, 성공주의, 고지론 등등 그러나 예수로 말미암아 그 저주에서 풀려난 자들은 하느님께서 하늘의 양식으로 그들을 먹이십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느님만으로 만족하며 하느님만을 추구하며 희망하며 오늘을 사는 것입니다.

 

오늘은 다섯째날로 맺습니다.

다시한번 주님의 기도문의 깊은 뜻을 헤아려 행복한 하느님 백성으로 거듭나기를 저와 함께

묵상해 봅시다.~~함께 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살롬.

2020. 7. 14.

(공동번역성서)

주님의기도문(V)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마태6:9-13)

9 그러므로 이렇게 기도하여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온 세상이 아버지를 하느님으로 받들게 하시며 10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하소서. 11 오늘 우리에게 필요한 양식을 주시고 12 우리가 우리에게 잘못한 이를 용서하듯이 우리의 잘못을 용서하시고 13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 ( 나라와 권세와 영광이 영원토록 아버지의 것입니다. 아멘. )

 

오늘은 주님의기도문의 마지막 청원인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에 관해 공부를 하겠습니다. 유혹이라는 말을 먼저 잘 정의해야 오늘의 설교가 이해가 쉬우실 것입니다. 여기서 유혹이라는 말로 번역이 된 헬라어 페이라조유혹” “시험 두 의미를 모두 갖고 있는 단어입니다. 한글 여러 성경에는 유혹이라는 단어가 사탄의 유혹하느님의 시험이 두 가지가 구별 없이 그냥유혹이라고 쓰여서 혼동(混同)이 될 때가 간혹 있습니다. 이러한 모순을 성경에서 발견하신 것이 있을 것입니다. 하느님은 분명 우리를 유혹하십니다. 하느님은 아브라함을 유혹하셨고 이스라엘을 시험하셨습니다.

(창세22:1) 1 이런 일들이 있은 뒤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을 시험해 보시려고 '아브라함아!' 하고 부르셨다. '어서 말씀하십시오' 하고 아브라함이 대답하자

(신명8:2-3) 2 너희는 지난 사십 년간 광야에서 너희 하느님 야훼께서 어떻게 너희를 인도해 주셨던가 더듬어 생각해 보아라. 하느님께서 너희를 고생시킨 것은 너희가 당신의 계명을 지킬 것인지 아닌지 시련을 주어 시험 해 보려고 하신 것이다. 3 하느님께서는 너희를 고생시키시고 굶기시다가 너희가 일찌기 몰랐고 너희 선조들도 몰랐던 만나를 먹여 주셨다. 이는 사람이 빵만으로는 살지 못하고 야훼의 입에서 떨어지는 말씀을 따라야 산다는 것을 너희에게 가르쳐 주시려는 것이었다.

하느님은 이렇게 우리의 믿음을 확인하시고 우리의 믿음을 교육하시기 위해 우리를 시험하십니다. 그런데 반대로 야고보서에서는 하느님은 우리를 유혹하지 않으신다고 하십니다.

(야고1:13-15) 13 유혹을 당할 때에 아무도 '하느님께서 나를 유혹하신다' 는 말을 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악의 유혹을 받으실 분도 아니시지만 악을 행하도록 사람을 유혹하실 분도 아니십니다. 14 사실은 사람이 자기 욕심에 끌려서 유혹을 당하고 함정에 빠지게되는 것입니다. 15 욕심이 잉태하면 죄를 낳고 죄가 자라면 죽음을 가져 옵니다.

그렇지요? 구약에 사용된 히브리어 나싸나 헬라어페이라조모두 사탄의 유혹과 하느님의 시험에 혼용되기 때문에 이런 혼동이 있는 것입니다. 야고보서에서의 하느님은 아무도 유혹하지 아니하신다는 구절의 유혹은 우리를 넘어뜨려 지옥으로 끌고 가려는 사탄의 유혹을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보통 신앙생활 잘 하던 사람이 갑자기 전에 하던 악한 습관이나 죄에 빠지게 되면 저 사람 시험 들었어.” 하는데 거기서의 시험이 바로 이 사탄의 유혹입니다. 하느님은 그렇게 인간이 죄를 지어 하느님을 등지고 지옥으로 향하게끔 유혹하시지 않는다는 것이 하느님은 아무도 유혹, 시험하지 않으신다는 어구가 담고 있는 뜻입니다.

반면에 광야에서 이스라엘을 물이 없고 먹을 것이 없는 곳으로 데리고 가셔서 물도 주고 먹을 것도 주고 하시면서 그들의 삶에 간섭을 하시면서 사람이 빵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말씀으로 사는 것이라는 것을 가르치시기 위해 앞서서 끌고 가시는 것을 우리는 하느님의 유혹이라 합니다. 하느님의 백성들을 향한 그 유혹, 시험은 사랑을 근거로 나온 것입니다. 그러니까 하느님의 유혹은 우리에게 유익한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끊임없이 시험하셔서 결국에는 모리아 산에서 이사악을 드릴 수 있는 자로 만들어 내신 그 시험은 우리에게는 축복인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성경은 하느님이 당신의 백성들을 유혹, 시험하신다고 기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기도해야할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의 내용은 사탄의 세력으로부터 지켜 주소서.‘ 라는 말이 되는 것입니다. 그러한 해석을 더욱 더 확실하게 뒷받침해주는 증거가 바로 뒤에 나옵니다. 그 뒤에 바로 붙어 있는 악에서 구하소서.”이라는 말 투 포네로우는 남성 속격으로 사탄을 뜻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살펴보고 있는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소서.‘라는 기도는 정확하게 사탄의 유혹으로부터 우리를 지켜 주시옵소서.”라는 기도가 되는 것입니다. 죄에 빠진 아담 적 실존을 갖고 있는 모든 인간들은 사탄의 세력 하에 있는 자들입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통치가 싫어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원수가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그 중에 어떤 무리들에게 하느님께서 은혜를 허락하셔서 하느님의 편이 되게 하셨는데 나머지들은 모두 그 죄악 속에 내버려두셨습니다. 사탄과 죄인들은 한 덩어리가 되어서 하느님께서 가만 놔두면 하느님을 향해 칼을 뽑아들게 되어있는 자들입니다. 우리를 시험에 들게 하지 마시라는 기도는 우리를 그 사탄의 세력에서 구원해 달라는 기도인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불나방의 근육이 너무나 자연스럽게 불로 향하게 되듯이 그렇게 죄를 지향하는 자들이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언제든지 그 사탄의 편으로 달음박질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존재들입니다.

만일 하느님이 우리의 삶에 간섭을 하지 않으시고 가만 놔두시면 어떻게 되는지 상상을 해 보셨나요? 하느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강퍅하게 하셨다는 말을 기억하세요? 분명 하느님께서는 모세를 보내기 전인 출애굽기 4장에서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셔서 이스라엘을 못 놓아주게 하신 다음 마지막에 이스라엘은 내 맏아들인데 네가 놓아주지 않았으니 내가 너의 맏아들을 죽이겠다.”고 파라오에게 행할 일을 미리 계획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 애굽의 맏아들들을 죽이기로 이미 계획이 세워져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전에 아홉 가지 재앙이 내립니다. 한 가지 재앙이 내릴 때 마다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강퍅)하게 하셔서 그 파라오가 이스라엘을 놓아주지 아니했다고 성경은 말합니다. 그럼 하느님이 착한 사람 데려다가 계속 마음을 완고하게 하셔서 못 놓아주게 하신 다음 결국 그들의 맏아들을 죽이시기 위해 계획을 세우시는 것이라는 말입니까? 하느님께서 파라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는 것은 로마서 1장의 하느님께서 죄인들을 그 마음의 정욕대로 내버려 두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은 하느님께서 악인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다고 표현을 하는 것입니다.

파라오처럼 하느님께서 악인들의 삶에 간섭하지 않으시고, 악함을 막지 않으시고 놔두면 죄인은 끝까지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리에 선다는 것을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강이 피로 변했습니다. 개구리가 온 천지를 덮었습니다. 모기가 날려서 살수가 없었습니다. 파리가 온통 마을을 덮습니다. 가축병(獸疫), 피부병, 우박, 메뚜기가 흑암이 그들을 쳐도 파라오는 계속해서 하느님과 맞서서 싸웁니다. 그게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왜요? 자신이 왕이어야 하는데 왕이라는 자가 나타났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그를 죽이고 싶은 것입니다. 그게 하느님의 은혜를 떠나버린 죄인들의 모습입니다. 결국 맏이들이 다 죽었는데도 또 따라옵니다.

하느님의 불기둥과 구름기둥이 그들을 막아섰습니다. 이스라엘 쪽에는 불기둥이 환하게 비추고 애굽 쪽에는 흑암이 덮입니다. 그런데도 파라오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습니다. 그들의 눈앞에서 홍해가 갈라집니다. 두려운 광경입니다. 자기가 쫓고 있는 적들의 하느님이 엄청난 기적을 일으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눈앞에서 바다가 갈라졌는데도 파라오와 애굽 군대들은 거기를 따라 들어갑니다. 하느님께서 죄인들의 상태를 그대로 방치해 두시면 죄인들은 이렇게 끝까지 하느님을 대적하는 자리에까지 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결국 다 죽는 것입니다. 죄라는 것이 그렇게 무시무시한 것입니다. 우리가 어디서 건짐을 받은 건지 이해가 가십니까? 그렇게 하느님께서 사탄과 그 무리들을 완전하게 완고하게 버려두심으로 최후에 어떤 결과가 일어나게 됩니까? 예제키엘서 38장에서 그 비참한 죄인들의 최후가 나오는데 곡과 마곡의 전쟁입니다.

(예제38:1-6 15-18) 1 야훼께서 나에게 말씀을 내리셨다. 2 '너 사람아, 너는 마곡 땅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메섹과 두발의 맹주인 곡에게 그를 쳐서 이르는 나의 말을 전하여라. 3 '주 야훼가 말한다. 메섹과 두발의 맹주 곡아, 내가 너에게로 가리라. 4 내가 너를 돌려 세우고 갈고리로 턱을 찍어 끌어 내리라. 너와 너의 말과 기병, 완전무장한 군인, 크고 작은 방패와 칼을 잡은 대군을 끌어 내리라. 5 작은 방패를 들고 투구를 쓰고 함께 출동한 페르샤와 에디오피아와 리비야, 6 전군을 거느리고 함께 출동한 고멜, 북쪽 끝에서 전군을 거느리고 출동한 도가르마족, 이 큰 대군을 끌어 내리라 15 너는 북녘 끝, 네가 자리잡고 있던 고장을 떠나 연합군을 거느리고 쳐들어 갈 것이다. 대군이 떼지어 모두 말을 타고 쳐들어 갈 것이다. 16 구름이 땅을 뒤덮듯이 너는 나의 백성 이스라엘에게로 쳐들어 갈 것이다. 한참 세월이 지난 후에 나는 너를 내 땅으로 쳐들어가게 할 것이다. 곡아, 내가 뭇 민족에게 나를 알리기 위하여 너에게서 나의 거룩함을 드러내 보이리라. 17 주 야훼가 말한다. 내가 일찌기 나의 종 이스라엘의 예언자들을 시켜 한 말이 너를 두고 한 말이다. 그 때 그들은 네가 이스라엘을 쳐들어가리라고 예언해 두었다. 18 때가 되어 곡이 이스라엘 나라를 쳐들어가는 날, 나는 터지는 격분을 참지 못할 것이다. 주 야훼가 하는 말이다. 나는 화가 났다.

마지막 때에 일어나는 곡과 마곡의 전쟁입니다. 요한 묵시록에서는 그 전쟁을 인용하여 아마겟돈 전쟁으로 묘사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겟돈 전쟁은 지금 우리가 치르고 있는 영적 전쟁의 결론에 해당하는 부분입니다. 하느님께서 지금은 사회법이나 양심 등으로 죄인들의 죄 성이 극에 달하는 것을 막고 계십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의 구속사가 역사 속에서 진행되어져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들의 죄 성을 막지 않고 놔두었을 때 살인 등의 극한 적인 범죄나 전쟁 등으로 인류가 조기에 멸망해 버리면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여러 가지 일반은총으로 인간들이 극한의 상황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막고 계신 것입니다. 그러나 어느 날 하느님께서 완전히 그들을 풀어서 내버려두시는 날이 오게 됩니다. 묵시록에서는 그 때를 사탄이 무저갱에서 풀리는 때라고 하기도 합니다. 우리가 요한 묵시록의 무저갱이라는 말을 너무 장소적 개념으로만 알고 있어서 오해를 하기 쉬운데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다는 말은 십자가로 말미암아 하늘에서 더 이상 성도들을 고소하지 못하고 이 땅에 내려와서 성도들을 핍박하며 쫓아다니는 상태를 말하는 것이지 어딘가에 꽁꽁 묶여 있다는 말이 아닌 것입니다. 그렇게 사탄이 더 이상 하느님 택한 백성들의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미칠 수 없는 상태를 사탄이 무저갱에 갇혀 있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히브2:14) 자녀들은 다 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골로2:15) 그리고 십자가로 권세와 세력의 천신들을 사로잡아 그 무장을 해제시키시고 그들을 구경거리로 삼아 끌고 개선의 행진을 하셨습니다.

(유다1:6) 또 천사들도 자기 자리를 지키지 않고 자기가 사는 곳을 버렸을 때에 하느님께서는 그들을 영원한 사슬로 묶어서 그 큰 심판의 날까지 암흑 속에 가두어 두셨습니다.

이렇게 사탄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에 영향을 끼칠 수 없는 그 상태를 무저갱에 갇혀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 종말 때가 되면 그 사탄이 총력을 기울여 성도들을 핍박하도록 하느님이 놔두실 것입니다. 요한 묵시록 11장에 보면 그 때 성도들은 이 세상에서 죽는 모습으로 보여 질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묵시11:7-10) 7 그러나 그들이(두증인. 교회 ,성경) 증언을 끝내면 끝없이 깊은 구렁으로부터 그 짐승이 올라 와서 그들과 싸워 이기고 그들을 죽일 것입니다. 8 그리고 그들의 시체는 그 큰 도성의 한길에 버려질 것입니다. 그 도성은 그들의 주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셨던 곳이며 상징적으로는 소돔이라고도 하고 에집트라고도 합니다. 9 여러 백성과 종족과 언어와 민족에 속한 사람들이 사흘 반 동안 그들의 시체를 구경할 것이며 그 시체가 무덤에 안장되는 것을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10 그리고 땅 위에 사는 사람들이 그들의 죽음을 보고 기뻐하고 즐거워하며 서로 선물을 교환할 것입니다. 이 두 예언자는 땅 위에 사는 사람들에게 괴로운 존재였던 것입니다.

여기에 보면 교회를 상징하는 두 증인(교회, 성경)이 죽습니다. 큰 성길 다른 말로 세상을 상징하는 바벨론 성에서 죽는 것입니다. 교회는 그렇게 이 세상에서 죽고 지는 모습으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하늘의 왕이신 예수님께서 이 광야 같은 세상에서 핍박 끝에 죽으셨듯이, 그러나 그 삶이 진정한 승리의 삶이었던 것처럼 교회 공동체도 동일한 예수의 삶을 살게 되는데 교회는 열심히 전도하고 팽창해서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을 이 땅에 이루는 공동체가 아니라 점점 세상의 핍박 속에 죽임을 당하는 공동체로 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가 삼일 만에 부활하셨듯이 교회도 그 죽음 뒤에 황홀하고 영광스러운 부활을 할 것이라는 것이 이 땅에서의 교회의 모습이며 우리 모습인 것입니다.

그 전쟁이 아마겟돈 전쟁입니다. 그러나 그 전쟁은 마지막 날 어느 때에 한 번 있는 전쟁이 아니라 지금도 우리의 삶 속에 크고 작은 전쟁으로 그 아마겟돈 전쟁은 벌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마지막에 정말 엄청난 영적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그 전쟁의 연장선상에 놓여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 전쟁의 정도는 우리가 신앙인으로 성숙되어짐에 따라 점점 깊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점점 나아질 거야. 언젠가는 폼 한번 잡아볼 날 있을 거야이렇게 생각하고 있나요?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하느님의 참 교회는 순교를 향해 가고 있는 것이며 매일 매일 나의 옛 사람을 죽이는 순교의 삶을 살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무시무시한 영적 전쟁의 현장을 성도라는 사람들이 왜 이렇게들 인식하지 못 하고 있는 걸까요? 사람들이 하느님의 백성으로 제대로 살고 있지 않으니까 그들의 삶에 전쟁이 없는 것입니다. 어차피 사탄의 편처럼 살고 있는데 그들의 삶에 무슨 거룩한 전쟁이 있겠습니까? 그런 사람들이 전쟁은 무슨 전쟁이야? 지금 전쟁이 있긴 있어?”하고 안심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뜻대로 제대로 살고 있는 사람들은 심각한 영적 전쟁을 하고 있습니다. 북한에 있는 그리스도인들, 회교권 나라에 있는 그리스도인들만 영적 전쟁하고 있는 것 아닙니다. 교회는 한 몸입니다. 어디선가 그런 핍박 속에 던져져 있는 교회가 있다는 것은 우리도 동일한 핍박과 처절한 전쟁을 치르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 상태가 바로 그렇게 무시무시하고 심각한 것이라는 것을 좀 깨달아 알라고 그런 핍박받는 우리 형제자매들을 우리 눈에 보여 주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런 무시무시한 영적 전쟁을 치르고 있는 중인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은 우리 교회에게 우리를 시험(유혹)에 들지 말게 해 달라는 기도를 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영적 전쟁에서의 기도는 전쟁터에서 쓰는 워키토키의 역할을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를 마치 엄마 아빠 용돈 주세요.‘ 하는 인터 콤으로만 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기도는 전쟁터에서 전쟁을 치르고 있는 사람들이 유일한 생명줄로 가지고 있는 워키토키입니다. “하느님 지금 실탄이 떨어져 가고 있습니다. 하느님 지금 적의 포탄 공세가 너무 심합니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기도는 바로 그런 영적 전쟁에서 우리가 하느님과 통화하는 워키토키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긴박한 전쟁터에서 우리를 시험(유혹)에 들게 하지 마옵시고 다만 악에서 구하옵소서.” 라고 기도하면서 하느님 저는 어떻게 저 멸망 받을 무리에 속하지 않게 된 것입니까하며 일단 감사하게 되는 것이며 지금이 그 마지막 아마겟돈으로 향하는 그 길인 것을 재확인하고 우리가 그들의 편으로 혹여 달려가지 않을 수 있도록 하느님께 간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때로 이렇게 세상 앞에 맥없이 당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느님께서 우박과 전염병 과 불과 유황으로 그들을 다 죽여 버리신다는 그 승리의 약속을 이루실 것을 확신하며 기뻐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를 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아무 기도나 하고 예수님 이름만 갖다 붙이면 무조건 다 들어주는 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입니까? 아닙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라는 것은 그 예수님의 수준으로 예수님의 뜻을 분별하여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하느님 앞에 드려지면 품질보증 그 기도라면 내가 마음 놓고 들어줄 수 있는 기도이다.” 라고 하느님께서 큐 마크를 찍으시는 기도가 예수님의 이름으로 드리는 기도를 말합니다. 그러니 우리가 기도를 얼마나 신중히 해야 하는 지 아시겠지요?

어떤 동네에서는 다들 그 분이 유명한분이신 줄을 알고 존경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아들 녀석이 그 동네 구멍가게에 가서 아저씨 우리 아버지 누구인지 아시지요? 우리 아버지 이름으로 소주 한 병만 주세요.’한다면 그게 말이 되겠느냐는 것이지요. 그런데 우리의 기도를 잘 보면 거의 그런 수준 아닙니까? 유치해서 들어주지 못할 정도의 그런 기도들이 얼마나 많이 있어요. “하느님,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합니다. 복권 당첨되게 해 주세요” “하느님, 예수님의 이름을 걸고 기도합니다. 이 땅에서 폼 한번 잡게 해 주세요아닙니다. 정말 예수님을 아는 자들은 그 예수님의 수준에 맞는 기도를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도가 그런 것이라면 예수께서 직접 가르쳐 주신 기도는 예수님의 소원이라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이름으로 이 주님의기도문을 한다는 것은 이 기도문이 우리의 염원과 소원이기도 한 것이지만 예수님의 소원이기도 하다는 말이잖아요?

그럼 하느님이신 그 분이 소원하시는 것이 안 들어 질 것이 있겠습니까? 다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럼 우리를 유혹에 빠지지 않게 하시고 악에서 구하소서.’하는 기도는 영적으로 이미 그 기도는 이루어 졌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 전쟁에서 안전한 것입니까? 네 안전합니다.

 

광야에서 예수께서 유혹을 받으시고 완전한 승리를 하시어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습니다. 아담은 유혹에 실패하여 천사들에게 쫓겨났지만 예수님은 유혹을 이기시고 천사들의 시중을 받으셨습니다. 그리고 그 광야에 짐승들이 와서 예수님과 함께 지냅니다. 광야에 웬 짐승인가요? 그 것은 예수께서 유혹을 이기심으로 광야가 짐승이 사는 에덴으로 회복되는 것을 힌트 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에덴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아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우리가 예수 잘 믿으면 에덴을 회복해서 거기에 가서 살게 되는 줄 알고 있습니다. 太初에 지어진 것처럼 벌거벗고요. 그러면 거기는 또 유혹이 있다는 말이 됩니다. 누디스트들이 그 에덴을 근거로 자신들의 입장을 변호하고 나서곤 하지요? 태초에 하느님의 뜻에 따라 지어진 대로 우리 벗고 살자고요. 정말 하느님이 에덴에서 벗겨놓고 사는 것을 목적으로 하셨겠습니까? 하느님은 벌거벗은 아담과 하와가 묵시록의 의 아마포를 입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만들어져 가는가를 보여주시기 위해 우주를 창조하신 것입니다. 하느님의 애초의 목적은 요한 묵시록의 새 하늘과 새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에덴에는 선악과가 있지만 예수로 말미암아 그 시험이 완성되었으므로 새 하늘과 새 땅에는 선악과가 없는 것입니다. 선악과가 있는 곳으로 다시 돌아가고 싶으십니까? 그렇게 예수께서 유혹을 이기실 때 우리가 그 속에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시험을 받으실 때 우리가 그 예수 안에서 유혹을 모두 이긴 것입니다.

그러면 당연히 그 유혹에서 우리를 건지실 것인데 왜 우리가 기도해야 하나요? 역시 우리를 위해서입니다. 우리의 실존은 어떻습니까? 매일 같이 유혹에 지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그 사탄의 세력에 굴복하고 있습니다. 겉으로만 보면 우리도 그 아마겟돈 전쟁의 하느님의 적군으로 서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것은 어떻게 된 것입니까? 거기서 또 복된 교리를 찾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맞습니다. 그것이 우리의 실존입니다. 마치 우리는 사탄의 편인 것처럼 매일 매일 실패하고 실수하며 삽니다. 하느님의 약속은 반드시 이루어 질 것입니다. 우리는 분명 하느님이 원하시는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까지 자라게 될 것입니다. 모든 것은 그렇게 약속이 되어있고 확실하게 이루어질 것입니다. 그러나 아직 우리는 이 땅에 살고 있습니다. 그렇게 유혹(시험)에 실패하면서 난 이렇게 사탄의 편에서야 마땅한 자인데 어떻게 나에게 그런 은혜가 임 했는가 감격하십시오. 난 여전히 이런 꼴인데 하느님께서 예수의 삶을 나에게 전가 시키셔서 너는 백점이다.”라고 말씀해 주시는 것에 감동하십시오. 우리는 그렇게 그 은혜를 아는 만큼 감사로 들어가게 되고 그 감사로 우리에게 오는 유혹(시험)에서 가끔 한번 가끔 두 번 이겨 가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느님의 자녀로 지어져 가는 것입니다.

사탄은 우리를 열심히 공격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자각을 못하고 있을 뿐입니다. 이제는 칼로 총으로 위협해서 우리를 공격하지 않습니다. 우리의 이성을 동원해서 공격해 들어옵니다.

제 친구 중에 공학 박사가 있습니다. 공학 박사인 그 친구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을 들고 이런 질문을 해 온 적이 있습니다. ‘질량이 있는 물체는 빛의 속도로 날아갈 수 없다. 예수님은 2000년 전에 승천하셨다. 그리고 그분은 육체를 갖고 계셨다. 질량이 있다는 것이다. 그 천국은 삼층 천, 그러니까 저 우주 너머에 있다고 들었다. 가까운 안드로메다 성운까지 200만 광년이다. 광년이라는 것은 빛의 속도 1초에 30만 킬로미터로 달려서 1년을 가야하는 거리이다. 예수님은 지금 빛의 속도로 가고 계셔도 안드로메다 성운까지도 못 가셨을 것이다. 그런데도 너는 하느님이 천지를 창조한 것을 믿느냐? 예수께서 하느님이심을 믿느냐?‘

어떠세요? 우리는 뭐라 대답하겠어요?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내가 믿는 하느님은 천지를 창조하시고 우주의 질서와 법칙도 아울러 창조하신 분이시다. 그런 분이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을 따라서만 달려야하겠니?‘

인간들의 수준이 고작 이정도입니다. 그리고 어떻게 해서든 하느님을 부정하려고 안간힘을 쓰는 것이 죄인들의 속성입니다.

사람들은 과학이 인류를 부요하게 만든다고 생각합니다. 과학과 문명은 하느님을 떠난 카인의 후예들이 자신들의 삶을 스스로 책임지기 위해 만들고 발전시켜 온 것입니다. 예전에는 번개가 치면 하느님 앞에 벌벌 떨면서 자기의 죄라도 뉘우치는 순진함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피뢰침 만들어서 꽃아 놓고 하느님을 조롱합니다. 홍수가 나서 논밭이 잠기면 하느님 앞에 겸허해 지고 겸손해 지던 사람들이 둑을 만들고 물길을 마음대로 바꿔가며 우리 스스로 얼마든지 살아갈 수 있다고 하느님을 불필요한 존재로 만들어 버리고 있습니다. 과학이 정말 인류를 부요케 한다고 생각하세요? 아닙니다. 과학은 우리를 점점 하느님으로부터 멀어지게 만들고 있습니다. 우리는 과학으로 하느님을 제한 할 수 없습니다. 과학으로 하나느을 밝혀 보겠다고 하는 것도 언어도단입니다. 그 분은 우리의 이성의 한계 너머에 계신 분이십니다. 우리는 그 보이지 않는 하느님을 믿는 믿음으로 사는 자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계속해서 그렇게 우리의 이성을 자극해서 인간을 유혹합니다. 그 어줍지 않은 이성은 종교 다원주의를 만들고 자기의 이해 범위 안에서 하느님을 제한합니다. 인간의 이성에 대한 신뢰는 이미 세계 2차 대전 때 다 무너져 버렸음에도 사탄은 여전히 그 이성을 또 자극합니다. 마르쿠젠이나 하버마스 같은 사람이 또 변증법적 이성이니 뭐니 해서 다시 들고 나왔습니다. 그랬더니 현대의 지성들이 또 인간의 이성에 기대를 합니다. 정말 우리는 우리 이성을 얼마나 신뢰할 수 있는 것일까요? 기원전 5세기 사람인 피타고라스의 정리도 아직 이해 못하는 이 이성으로 하느님을 이해하겠다는 것입니까? 사탄은 끊임없이 이렇게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렇게 과학과 문명과 이성과 우리 옛 사람이 젖어 있던 죄 성을 자극하여 우리를 유혹에 빠지게 할 때 하느님께 기도하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주님의기도문을 다 배웠습니다. 그러면 이제 어떻게 하겠습니까? 이제 실생활에 적용하셔야지요. 운전을 하다가 어떤 사람이 싹 끼어들었을 때 사탄으로부터 가서 복수해라는 유혹을 받게 되면 즉시 "하느님 나라가 임하게 해 주소서, 그래서 하느님의 통치가 내 삶에 임하게 하소서라고 기도하십시오. ”하느님 저는 복수하고 싶지만 내 뜻대로 마시고 하느님의 뜻이 내 삶에 이루어지게 하소서 그리하여 내가 내 이웃을 용서하고 원수를 사랑하는 사람이 되게 하소서. 저 사람에게 복수하고픈 마음을 심고 있는 악한 세력에서 저를 구해 주소서."하고 기도하십시오. 손해를 보셨습니까? 누군가 억지를 부려 우릴 괴롭히고 있어요? 그 때에 지금까지 배웠던 주님 가르쳐 주신 기도를 열심히 하느님께 올려 보내십시오.

우리는 오직 그 기도의 응답인 예수로 말미암지 않고는 우리는 아마겟돈 전쟁의 사탄의 편에서 멸망당할 수밖에 없는 자들이라는 것을 매일매일 깨닫기 바랍니다. 내 삶에 예수의 도움이나타 나서 예수의 성품으로 변화되어질 수 있기를 매일 매일 기도하세요.

주님의기도문은 하느님 나라에 관한 것이며 하느님 나라의 도래를 희망하는 기도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소원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가 무슨 기도를 하고 있는가에 따라 그 사람의 신분과 정체성이 결정된다는 것을 주님의기도문 첫 시간에 살펴보았었지요? 주님께서 우리에게 너희는 이런 기도를 해야 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심으로 우리는 우리의 신분이 얼마나 엄청난 것이며 대단한 것인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주님의기도문을 배우면서 우리 하느님의 백성들은 이 땅의 것들에 매여 사는 자들이 아닌 하느님 나라를 바라며 살아가야 하는 자들임을 자각하고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현실에 굴복하지 말고 거기에 무릎 꿇지 말고 씩씩하고 당당하게 달려갈 길을 달려가야 한다는 확신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하느님 나라는 누구에게나 이해되어지고 열려 있는 곳이 아닙니다. 그러한 하느님 나라를 희망하며 기도를 하게 된 우리는 얼마나 축복 받은 사람들입니까? 이렇게 주님의기도문 안에 모든 기도의 해답이 들어있습니다. 그 청원과 서약 안에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할지 무엇을 희망하며 살아야 할지 모두 들어있습니다. 그 안에서 나의 기도가 행해져야 합니다. 예수의 소원인 기도, 그리고 예수가 다 이루어 놓으신 그 기도 그것이 주님의기도문입니다. 그래서 주님의기도문을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예수님 고맙습니다.”입니다. 그것 말고는 없습니다.

매일 매일 기도할 때마다 주님의기도문을 떠올리며 우리의 기도할 바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확인고 천국 백성으로서의 그 신분을 확인하며 감격하십시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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