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6년 03월 25일 수요일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참된 자유 (요한8,31-42)
제1독서<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다니3,14-20.91-92.95)
14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화답송>다니3,52ㄱ.52ㄷ.53.54.55.56(◎52ㄴ) ◎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 주님,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
○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당신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영광의 성전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어좌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커룹 위에 앉으시어 깊은 곳을 살피시는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하늘의 궁창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복음<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8,31-4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다니3,14-20.91-92.95)
히브리어로 '다니엘'은 '하느님께서 나의 심판관이시다'는 뜻이다,
다니엘서의 작중 연대(글 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는 네부카드네자르가 바빌론 왕좌에 오른 B.C.605년 이후부터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통치 시절에 예루살렘 공략과 바빌론 유배가 크게 B.C.597년과 B.C.587년에 두 번 있었는데, 그때가 여호야킨이 남부 유다를 다스리던 때였다(2열왕24,10-16; 에제1,2).
다니엘이란 한 인물을 통해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서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표이다.
다니엘서의 저작 연대(저자가 기록한 시점)는 마카베오 항쟁을 불러일으킨 안티오코스 4세(BC175-164년)의 박해때이다. 본문 자체가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가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사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다니엘8,9-13; 9,27 ;11,31참조).
기원전 164년에 있었던 성전 정화는 언급하면서도 같은 해에 있었던 박해자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책의 저작 연대를 기원전 164년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다니엘서 1-6장에 나오는 여섯 가지 이야기는 박해 상황에 걸맞지 않게 유머스럽고 긴장감이 덜하다. 이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출중한 인물들이 고대 근동의 궁정안에서 벌인 활약상을 전하는 3인칭 궁정 설화의 전형적 예들이다.
이 궁전 설화들은 마카베오 항쟁 훨씬 이전에 디아스포라(본국이 아닌 곳에서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유다인들이 이방인 왕궁에서 겪었던 갈등과 성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서 저자는 이 궁정 설화들을 입수해서 마카베오의 박해 상황에 맞게 편집했을 것이다.
다니엘서 3장은 다니엘의 세 동료가 우상 숭배를 거절한 탓으로 불가마에 던져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이다.
다니엘서 2장과는 달리 3장에서 네부카드네자르는 현명한 군주가 아니라 어리석고 잔인한 폭군이다. 그는 금신상(아마도 자기 자신의 상)을 만들어 놓고 문무대신들에게 거기다가 절을 하라고 명령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권능과 위엄을 만천하에 드러낼 뿐 아니라 이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욕망이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함께 자신의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내 제국의 힘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실용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니엘의 세 친구가 거절하자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활활 타는 불가마에 던지게 한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불길을 가마 밖으로 내몰아 세 젊은이를 보호한다.
그때 불가마속에서 세 젊은이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그리스어 역본에만 나오는 '아자르야의 노래'와 '세 젊은이의 노래'이다(다니3,24-90).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 (15)
본절 서두에 나오는 '이제라도'에 해당하는 '케안 헨'(kean hen)은 '만약 지금이라도'로 직역되며 이미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자신이 직권으로 부여하겠다는 뉘앙스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 세 유다인들의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다니1,19.20), 과거 그들의 간절한 중재 기도로 인해 자신의 꿈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다니2,49). 이와 같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으로서는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금신상에 절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세 사람이 남는다는 것은 왕으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돌려 다시 주어진 기회에 금신상에 절한다면, 네부카드네자르는 이렇게 한 번 그들에게 은혜를 베풂으로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네부카드네자르임금이 그들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돌이킬 수 있도록 상당히 이례적인 한 번의 기회를 더 부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악기소리가 날 때에'에서 '날 때에'에 해당하는 '베잇따나 띠 티쉬메운'(beiddana di tishmeun)은 문자적으로 '너희가 듣는 바로 그 때에'(at the time you hear) 라는 의미이다. 이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곧바로 절해야 한다는 즉각성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즉시)에 해당하는 '빠흐 샤아타'(bah shaatha)가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그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임금인 자신의 명령에 거역하면 조금의 가차도 없이 즉각 불가마(풀무불)가운데 던질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당시 불가마가 금 신상 가까이에 있었고,그 세 사람을 그 곳에 던져 넣을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졌단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수 있겠느냐?" (15)
네부카드네자르의 이 발언은 실상 유다인들이 믿던 하느님께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그는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대적하고 경멸하는 말을 내뱉고 있다.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신'이라는 말은 분명 '하느님'을 염두에 둔 말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손에서 이들 유다 사람들을 건져 낼 수 없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에 해당하는 '엘라흐'(elah)는 아람어에서 '하느님'을 지칭하는 단수형 명사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에 의하면,그 하느님은 일전에 자신에게 꿈을 계시해 주시고 그 꿈의 모든 비밀을 명확하게 설명해주신 전지하신 신이셨지만, 지금은 자신의 권한 하에서 불가마에 떨어진 사람들을 안전하게 건져낼 능력이 없는 신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은 부분적이었고 불완전했으므로 자신의 권력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능력보다 더 크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만일 이 세 사람이 네부카드네자르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무능함을 시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같은 임금의 제안이 담긴 이면의 의미를 그들이 알고 있었기에 이들 세 명의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은 목숨을 내놓고 금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극구 거부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내 손'에 해당하는 '예다이'(yedai)는 사실상 네부카드네자르 자신의 무소불위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위치를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신보다 높은 최고의 신적 위치에 올려 놓고 있다.
이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뿐 아니라 타인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어낸 다른 인간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교만의 함정이다.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자는 자신의 근본과 한계를 쉽게 망각해 버리고 자신의 능력이 무한한 것인 양 착각하며,자신의 존재를 종종 신격화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의 그러한 오만방자한 신성모독적 언행이 세 젊은이들이 소유한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가마를 여는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19)
'일곱 배'에 해당하는 '하드 쉬봐'(had shibah)는 '칠 배'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가능한 한 최상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불가마(풀무불)은 벽돌을 굽거나 금속을 녹이는 등의 용도에 맞게 일정한 온도로 가열을 했지만 그날 만큼은 이러한 용도와 관계없이 온도를 극대화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 배'는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킨 세 사람이 당할 혹독한 시련의 강도를 묘사한 것이며, 동시에 네부카드네자르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극한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역시도 자기 내면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한 파격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는 네부카드네자르를 신격화하고,그가 가진 권세와 권력을 통하여 그를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 아니라, 다친 곳 하나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2)
'결박이 풀려서'에 해당하는 '셰라인'(sherain)은 원래 '자유롭게 하다','풀어주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셰레'(shere)의 수동태 분사형으로 '자유롭게 된'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불 속에 떨어진 세 사람에게 가해진 단단한 결박이 풀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서 하나는 불에 그 결박이 완전히 탔을 것이라는 설명과 다른 하나는 네번 째 하느님의 아들 같은 존재가 풀어 주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또한 '네 사람'에 해당하는 '꾸브린 아르베아'(gubrin arbeah)는 '네 명의 남자들'이라는 의미이다. 불 속에 떨어진 사람의 숫자는 셋이었으며, 그들을 붙들고 던진 군사들마저 모두 용광로 밖에서 타 죽었기 때문에 이 역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거닐고 있는데'에 해당하는 '마흘레킨'(mahlekin)은 '걸어 다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할라크'(halak)의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 속을 계속해서 이리저리 활보하고 있는 그 네 사람의 동작을 나타낸다.
그들이 이렇게 힘차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는 것은 불 속에서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주 하느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 광경을 설명할 길이 없다.
'다친 곳 하나 없이'에 해당하는 '와하발 라 이타이'(wahabal la ithai)는 '상처가 전혀 없었다'는 의미이다. 불 속의 네 사람의 상태에 대해 그 정도로 정확히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위치가 그 용광로에서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신(들)의 아들'에 해당하는 '레바르 엘라힌'(lebar elahin)은 다신론(多神論)적 세계관에 익숙해 있던 당시 네부카드네자르의 이교적 인지 능력을 넘어서 그 자신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표현을 천사 혹은 천사들 가운데서도 대천사 미카엘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하여 신약의 관점에서 육화(강생)이전의 그리스도의 형상이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는 뜻을 가진 제2위 천주 성자이신 임마누엘의 반영이라고 본다.
제2위 천주 성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신실한 종들과 함께 친히 고난을 함께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고난을 견뎌내게 하셨으며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셨던 것이다.
천주 성자 하느님의 그와 같은 임재와 보호하심은 사실상 당시 바빌론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던 모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대표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시대와 장소가 변해도 여전히 모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에 대해 베푸시는 은혜를 암시하는 예표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허규 베네딕토 신부)
오늘은 진리와 관련된 말씀을 듣습니다.
그러나 복음은 진리가 무엇인지 꼭 집어 말해 주지는 않습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 따르면 ‘내 안에 머무는 것’을 통하여 ‘진리를 깨닫고’ 그것으로 ‘자유롭게 되는 것’이 모두 진리와 연결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는 것, 이는 다르게 표현하면 예수님 말씀을 믿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말씀하시고 아버지의 뜻에 따라 사람들을 가르치십니다.
결국 진리는 예수님을 통하여 전해지는 아버지의 뜻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느님의 계시입니다.
진리에 관한 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빌라도에게 신문을 받으실 때의 장면을 떠올릴 수 있습니다.
빌라도는 유다인들의 고소처럼 정말 예수님께서 임금이신지 묻습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십니다. “나는 진리를 증언하려고 태어났으며, 진리를 증언하려고 세상에 왔다.”(요한 18,37)
빌라도가 다시 묻습니다. “진리가 무엇이오?”(요한 18,38)
이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침묵하십니다. 답이 필요한 질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진리는 예수님께서 행하신 모든 업적을 통하여 드러나기에 예수님 자신이라고도 말할 수 있습니다.
빌라도의 질문은 예수님보다 오히려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처럼 들립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진리인지 대답할 수 있어야 합니다.
복음은 처음부터 예수님을 통하여 그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예수님 말씀을 믿고 진리를 깨닫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우리는 자유를 누릴 수 있을 것입니다.
(허규 베네딕토 신부)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요한8,31-38)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 인간의 지혜의 말, 그 자기 말을 버리고 예수님의 지혜의 말씀 안에 머무르며, 그 말씀을 의지하며 사는 이들이 제자입니다.
인간의 말은 도덕과 윤리이며 예수님의 말씀은 대속으로 얻는 용서, 자유 그 진리입니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자유를 주는 진리입니다.
(요한14,6)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 죄인들의 속죄 제물로 죽으신 그 십자가의 길이 구원의 진리입니다. 곧 예수님의 죽음으로 얻는 자유입니다.
왜~ 그 길을 가셔요?
(요한3,16)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속죄제물)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그래서~~
(로마3,24) 그러나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이루어진 속량을 통하여 그분의 은총으로 거저 의롭게 됩니다.
= 십자가가 주는 구원의 용서, 의로움이 아닌 사람의 규정, 교리, 계명의 그 자기 의로움으로 구원에 이르겠다는 이는 예수님의 죽음을 헛되게 하는 죄, 불의입니다.
그래서 앞에~
(요한8,21.24) 21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 라고 하셨던 것입니다. 자기 의로움의 죄입니다.
(에제33,13) 내가 의인에게 반드시 살 것이라고 하였어도, 그가 자기의 의로움만 믿고 불의를 저지르면, 그의 의로운 행위는 하나도 기억되지 않은 채, 자기가 저지른 불의 때문에 죽을 것이다.
= 인간의 의로움은 구원의 힘이 없습니다. 완전한 것이 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인간의 의로움은 더러운 개짐(똥걸레)일 뿐이라고 하셨습니다.(이사64,5) 그래서 예수님께서 죽으러 오셔야만 했습니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 자유가 무엇인지도 모릅니다. 법을 지켜야 자유가 온다고 착각합니다. 그러나 그럴수록 마음 깊은 곳에 죄만 쌓일 뿐입니다.
(루가15,29) 그가 아버지에게 대답하였다. ‘보십시오, 저는 여러 해 동안 종처럼 아버지를 섬기며 아버지의 명을 한 번도 어기지 않았습니다. 이러한 저에게 아버지는 친구들과 즐기라고 염소 한 마리 주신 적이 없습니다.
= 아들이면서도 아버지가 두려워 종으로 사는 아들입니다. 신앙인 이면서도 신앙이 법이 되어 종처럼 사는 모습입니다. 십자가가 주는 의로움이 아닌 자기 의로움을 위한 신앙을 살기 때문입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 죄는 불의입니다. 죄(하마트리아-과녁을 벗어나다)
자기의 의로움만 믿고 십자가의 의로움을 믿지 않는 그 하늘의 의로움을 향하지 않은 그 과녁을 벗어난 것, 불의, 죄입니다. 그 벗어난 길에서 방향을 바꾸어 돌아서는 것, 메타노이아-회개입니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 열심하고 분주하게 바쁜 그 섬김의 행위의 신앙으로는 아들이 될 수 없습니다. 말씀을 듣고 먹어서(잉태) 구원의 진리(아들)를 깨달아(낳아야)합니다.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님, 그분의 십자가가 내 죄를 대속하신 내 십자가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렇게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그 예수님으로 하느님의 자녀, 아들이 됩니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자유는 깨닫는 것입니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 그분의 말씀을 전하고~
너희는 뱀의 유혹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선악의 열매로 먹어 열심히 행한다. 입니다.
그리스도교는 죄를 짓지 않는 것이 목적이 아닙니다. 죄를 짓는 자신의 실체를 똑바로 직시하고 그 죄에 올바로 반응하는 것을 목적으로 합니다.
하느님의 도움 없이는 그저 죽은 흙의 먼지일 뿐입니다.~라는 그 자기 버림(否認)의 고백을 하는 것이 최종 목적입니다.(코헬3,18 루가9,23참조) 그래서 십자가의 예수님과 화목하여 가는 것이지 훌륭한 사람이 되어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의 능력으로 갈 수 있는 하늘이라면~ 예수님께서 죽으실 필요가 없으셨습니다. 그것이 불가능하기에~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를 예비 하셨습니다.
(에페1,4) 세상 창조 이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선택하시어, 우리가 당신 앞에서 거룩하고 흠 없는 사람이 되게 해 주셨습니다. 사랑으로(십자가로)~~~
♡ 아멘
[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김상우 바오로 신부)
구약 성경에서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신원은 구원의 보증 수표처럼 이해됩니다.
하느님께서 아브라함과 맺으신 계약에 따르면 세 가지 약속, 곧 수많은 후손과 땅과 축복이라는 선물이 상속 재산처럼 주어질 것이기 때문입니다(창세 17장 참조).
유다인들이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칭호를 중요시한 이유입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오늘 복음을 읽으면 유다인들과 예수님의 대화가 입체적으로 다가옵니다.
복음 속 유다인들 뿐 아니라 인류는 죄의 종으로 살아갈 수밖에 없는데,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라고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고 그분 말씀 안에 머무른다면, 이 믿음의 진리는 믿는 이를 자유롭게 할 것입니다.
그분께서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라고 하십니다.
주님께서 믿는 이들에게 선사하시는 자유는 정치적 자유도 아니며, 인간적 성찰과 사유로 얻게 되는 단순한 내적 자유도 아닙니다.
주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훨씬 깊은 의미를 지닙니다.
성부, 성자, 성령의 삼위일체 하느님과 일치를 이루면서 얻게 되는 자유로서, 믿는 이들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도록 해 주는 능력입니다.
이 자유는 예수님을 통하여 믿는 이들에게 거저 주어지는 하느님의 선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겉으로 드러나는 칭호나 명예 같은 것들에 안주할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 하느님과 이루는 내적 친교와 일치를 생각과 말과 행위로 실천하는 신앙인이 되어야 합니다.
(김상우 바오로 신부)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저울에 올라봐야 내 몸무게가 얼마인지 안다.
(요한8,31-42)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 인간의 말을 否認하고 예수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 弟子다. 본8장 전체 주제는 ‘예수님께서 세상의 빛’이라는 것이다.
(요한8,12) 12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이는 어둠 속을 걷지 않고 생명의 빛을 얻을 것이다.”
=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빛을 알고, 살고, 누릴 수 있는 것이다. 말씀에 올라가봐야 어둠의 무게를, 곧 말씀 안에 머물러야 罪의 무게를 알 수 있고 그 죄를 容恕하시는, 인간의 知覺으로는 알 수 없는 그 하느님의 크신 慈悲, 사랑의 무게를 알 수 있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 사람의 말을 善惡으로 어둠에 묶이게 하지만 예수님의 말씀은 眞理로 빛, 自由를 주신다.
(야고1,25) 25 그러나 완전한 법 곧 자유의 법을 들여다보고 거기에 *머물면, 듣고서 잊어버리는 사람이 아니라 실천에 옮겨 *실행하는 사람이 됩니다. 그러한 사람은 자기의 그 실행으로 행복해질 것입니다.
=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이 실천(實踐), 實行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 자신들의 律法이 法의 종(從) 노릇인 것을 모른다. 오늘날 세상의 풍요(豊饒)가 죽음의 文化요 종살이임을 우리 모두가 모르고 사는 것 같다. 세상 모든 萬物 안에 들어있는 하느님의 뜻, 구원(救援)을 깨닫지 못하고 세상의 풍요에 만족하며 사는 것을 聖經은 罪라고 한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 율법(祭祀와 倫理)으로 의롭게 살았던 그들에게 죄의 종이라 하신다. 그 인간들의 의로움으로는 하늘의 생명, 구원을 받을 수 없는데도 그 자신(세상)들의 말, 뜻을 고집하기에 죄라고 하신 것이다.(요한16,8~참조)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 율법의 종, 그 사람들의 의로움은 영원히 땅에 머무르지만(갇히지만) 그 율법이 요구하는 것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대속의 죽음으로 완성하신 그 의로움을 진리로 믿으면, 거저 의롭게 되어 예수님과 함께 아들이 되어 하느님 나라에서 영원히 머무르게 된다는 말씀이시다.(로마3,24~참조)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세상의 힘, 돈과 명예가 절대 자유를 주지 못한다. 우리의 모든 것을 代贖하신 그 십자가의예수님께만 자유가 있다.
(2코린3,17) 17 주님은 영이십니다. 그리고 주님의 영이 계신 곳에는 *자유가 있습니다.
(1코린7,22-23) 22 주님 안에서 부르심을 받은 종은 이미 *주님 안에서 해방된 *자유인입니다. 마찬가지로 부르심을 받은 자유인은 *그리스도의 종입니다. 23 하느님께서 값(대속)을 치르고 여러분을 *속량해 주셨습니다. 사람의 종이 되지 마십시오.
(갈라5,1.13) 1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자유롭게 하시려고 해방시켜 주셨습니다. 그러니 굳건히 서서 다시는 종살이의 멍에를 메지 마십시오. 13 형제 여러분, 여러분은 *자유롭게 되라고 부르심을 받았습니다. 다만 그 자유를 *육을 위하는 구실로 삼지 마십시오. 오히려 *사랑으로 서로 섬기십시오.
= 그 누구도 판단하지 않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 예수님께서 주시는 하늘의 평화, 의로움, 영광, 그 풍요보다 세상의 풍요를 더 좋아한다는 말씀이시다. 그 세상의 풍요가 영원한 죽음임을 망각(妄覺)하고 살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 예수님은 하느님께 받은 진리의 말슴을 전하고, 율법학자들은 그들의 아비, 곧 뱀의 말인 선악으로 실천한다는 말씀이시다.(요한8,44 참조)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 아브라함이 한 일 - 아브라함은 하느님께서 마련하신 대속의 제물을 바쳤다. 곧 속죄 제물이신 *예수그리스도를 바친 것이다.
(창세22,13-14) 13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보니, 덤불에 뿔이 걸린 *숫양 한 마리가 있었다. 아브라함은 가서 그 숫양을 끌어와 아들 대신 *번제물로 바쳤다. 14 아브라함은 그곳의 이름을 *‘야훼 이레’라 하였다. 그래서 오늘도 사람들은 ‘주님의 산에서 마련된다.’고들 한다.
= 아브라함은 숫 양이신 예수님으로만 하늘의 생명,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알았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 자신들의 욕망을 위한 神으로 만들어 놓고 하느님이라 한다. 예물, 돈을 드리면 소원을 들어 주시는 그 우상(偶像), 하느님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그 가짜 하느님 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그 가짜 하느님께 기도(祈禱)하고 예물(禮物)을 드리는 것이다.
(마르7,8.13) 8 너희는 하느님의 계명(뜻)을 버리고 사람의 전통(뜻)을 지키는 것이다.” 13 너희는 이렇게 너희가 전하는 *전통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폐기하는 것이다. 너희는 이런 짓들을 많이 한다.”
= 하느님의 소원, 뜻이 이루어 지기를 바라는 것이 그리스도 신앙(信仰)이다. 그래야 그분의 뜻으로 흙, 죄인, 그 없음인 우리가 그리스도를 통해 하늘의 존재, 아들이 되어 하느님의 집에 영원히 머무르게 되는 것이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 그들의 죄로 죽으러 오셨다는 말씀이다. 또한 율법을 고집하는 자들은 하느님의 자녀가 아니라는 말씀이신 것이다.
(요한6,37-40) 37 아버지께서 나에게 주시는 사람은 모두 나에게 *올 것이고, 나에게 오는 사람을 나는 물리치지 않을 것이다. 38 나는 내 뜻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을 *실천하려고 하늘에서 내려왔기 때문이다. 39 나를 보내신 분의 뜻은, 그분께서 나에게 주신 사람을 하나도 잃지 않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것이다. 40 내 아버지의 뜻은 또, 아들을 보고 믿는 사람은 누구나 *영원한 생명을 얻는 것이다. 나는 마지막 날에 그들을 다시 살릴 것이다.” (아멘)
☨ 천주의 성령님! 저희가 말씀 안에 머물며 우리의 본질을 깨닫고 늘 하느님의 뜻을 갈망하게 하소서 ~아멘!!!
'진리가 너희를'
-유광수 신부-
인간의 가장 큰 욕망은 자유를 누리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부터 해방되는 것이다.
그러나 인간은 자유를 누리고 싶어도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죽음이라는 감옥, 죄의 감옥, 율법(모든 법)의 감옥에 갇혀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감옥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지만 인간은 벗어날 수가 없다. 누군가가 나를 이 감옥에서부터 꺼내주지 않으면 인간 스스로의 힘으로는 나올 수 없다.
즉 자유를 누릴 수 없다. 아무리 자유를 누리고 싶다는 욕망은 있어도 감옥에서 나올 수 없기 때문에 자신의 삶을 원망하고 비관하고 불행하다고 생각한다.
그럼 누가 우리를 이 감옥에서 꺼내 줄 수 있는가? 누가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는가?
하느님만이 감옥에서 인간을 꺼 내 줄 수 있다. 그래서 인간을 해방시켜 주기 위해서 해방자이신 예수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그렇다. 자유는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자유는 다른 분한테서부터 주어지는 선물이다. 나에게 자유를 선물할 수 있는 분한테서 받는 것이다.
사실 우리에게 이 선물보다 더 큰 선물은 없다. 그 동안 우리는 얼마나 자유를 갈망해왔는가? 사실 우리가 살아가는 것은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가 아닌가? 남의 지배를 받지 않고 내 마음대로 살고 싶어서 돈을 벌고 권력을 잡으려고 하고 배우고 하는 모든 것은 알고 보면 자유를 누리기 위해서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유에 대한 목마름이 있고 굶주려 있다.
그럼에도 우리는 자유를 누리지 못하고 있다. 이 자유는 내가 만들 수 없기 때문이다. 자유는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다. 이 선물은 오직 한 분 즉 예수 그리스도만이 나에게 줄 수 있다. 따라서 나는 다른 분이 아닌 예수 그리스도한테만이 이 자유를 받을 수 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이 자유를 자기 힘으로 쟁취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기 힘으로 이 자유를 가지려고 노력한다. 그래서 자유와 평화를 얻는다는 명목아래 전쟁을 일으키고 폭력을 사용한다. 그래서 또 다른 도전을 받고 원수가 되고 구속받는다.
예수님은 어떻게 우리에게 자유를 선물로 주시는가? 진리를 가르쳐 주심으로써 자유를 누리도록 해주신다. 그렇다면 우리는 진리를 받아들여야 한다. 진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진리 안에서 산다는 것이다. 진리란 무엇인가?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란 말은 매우 중요한 단어이다.
신약에서 진리란 단어는 25번 사용하였는데 그 중에서 16번을 요한 복음에서 사용하였다.
요한에게 있어서 진리란 어떤 사상이 아니다. 요한 복음에서 진리란 예수라는 구체적이고 실제적인 인격을 말한다.
즉 예수님이 말씀하시고 행하신 모는 것이 다 진리이다.
예수님의 모든 말씀은 진리이기 때문에 그 말씀 안에 사는 것이 곧 인간이 진리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즉 말씀 안에 뿌리를 내리는 것이다. 나의 모든 생각과 말과 행동은 모두 이 말씀에서 나와야 한다. 말씀에서 길러내야 한다. 그것이 진리를 사는 것이다. 나의 모든 말과 행동이 말씀에서 길러내려면 늘 말씀을 되새겨야 한다. 말씀을 되새긴다는 것은 말씀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내가 진리를 생활하려면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말씀을 들어도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를 깨닫지 못한다면 진리를 살아갈 수 없다. 진리를 생활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진리를 듣고 그 말씀이 무슨 뜻인가를 깨달아야 한다. 그리고 깨달은 그 말씀대로 생활하는 것이다. 즉 깨달은 그 말씀대로 나도 생각하고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것이다.
그럴 때 나에게 자유가 주어지는 것이다. 자유는 진리를 깨닫고 생활할 때 주어지는 결과이다. 진리를 깨달아야 내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를 알게 되고 잘못된 것을 알아야 거짓에서 진리에로 돌아올 수 있다.
거짓에서 진리로 돌아 설 때 거짓에서 해방되는 것이고 대신 자유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오늘의 묵상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성주간이 가까워지고 있는 이때, 예수님께서는 우리 신앙의 매우 중요한 본질 하나를 가르쳐 주십니다.
‘그분의 제자가 되려면’ 무엇보다도 그분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스승의 말씀을 듣고 간직하며 그 말씀 안에 머무는 것은 제자로서 당연히 하여야 할 일입니다.
말씀을 따르는 것이야말로 스승과 제자 사이를 드러내 주는 일차적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굳이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려는 것일까요?
그분의 제자가 되면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진리를 깨달으려면 진리 자체이신 분 가까이에 머물러야 합니다.
그러면 또 다른 질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진리는 왜 그렇게 중요한 것일까요?
그 답도 오늘 본문에 나옵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인간의 존엄은 ‘자유’를 통해서 발현됩니다.
구속이나 검열 또는 규제의 방식으로 누군가를 대하면, 그는 사람이 아니라 동물로 전락하여 버립니다.
교육이 아닌 조련으로 길들여지기 때문입니다.
한편 오늘 독서는 불가마에 던져진 세 청년의 이야기로 진리가 어떻게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알려 줍니다.
하느님만을 섬기고 우상을 거부하며 ‘진리’를 선택한 그들은 불가마 안에서도 ‘자유롭게’ 걸어 다닙니다.
그러자 박해의 주범인 네부카드네자르조차 “신의 아들” 같은 존재가 불가마 속에서 그들과 함께 거닐고 있음을 증언합니다.
진정한 인간으로 살아가는 데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은 ‘자유’이고,
이 자유는 ‘진리’에서만 싹트며, 진리는 그분의 ‘말씀’이기에, 교회는 무엇보다도 그분의 말씀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놀랍게도 하느님의 말씀을 따를 때 진리이신 그분께서는 모든 상황을 역전시키십니다.
심지어 지옥의 불가마같이 뜨겁고 고통스러운 현실 속에 있다 하더라도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걸으시기 때문입니다.
(김혜윤 베아트릭스 수녀)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인간의 본성은 하느님을 거짓으로 만든다.
복음(요한8,30-44)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자유(自由)를 주는 진리(眞理)란?~
(요한14,6 15,26) 14,6 예수님께서 그(제자)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나를 통하지 않고서는 아무도 아버지께 갈 수 없다. 15,26 내가 아버지에게서 너희에게로 보낼 보호자, 곧 아버지에게서 나오시는 진리의 영이 오시면, 그분께서 나를 증언하실 것이다.
= 성경(聖經)전체는 모두 피조물들의 모든 죄를 대속하신 창조주 하느님의 외아들(獨生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代贖), 그 십자가의 죽음, 그 피의 새 계약으로 얻는 용서, 생명, 구원, 안식을 말하고 있다. 그것이 자유를 주는 진리다.
예수님 당신을 믿는다는 이들에게 “ 당신의 말 안에 머물러야 제자가 되고, 진리를 깨달아 자유롭게 된다” 하신 것이 당신이 전한 하느님의 말씀을 하느님의 지혜(智慧)이신 성령(聖靈)의 이끄심으로 올바로 듣고, 올바로 깨달아, 올바른 믿음, 진리로 자라야함을 말씀하신 것이다.
인간이 진리라고 말하는 인간의 뜻, 의(義)를 위한 선악의 계명, 지혜 등은 절대 자유를 줄 수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그 진리라는 것에 메이게(묶이게)한다.
(잠언3,5) 5 네 마음을 다하여 주님을 신뢰하고 너의 예지에는 의지하지 마라.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 자신들의 뜻, 욕망을 위해 만들어낸 자신들의 법이 종(奴)으로 살게하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다.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 도덕과 윤리의 잘못, 그 죄의 차원을 넘어 자신들의 뜻, 육적 유익을 위한 말씀으로 듣고, 믿어, 행(行)하는 것이 하느님의 뜻인 하늘의 대속, 그 구원의 의(義), 진리를 벗어난 죄(하마르티아-과녁을 벗어나다)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 육(肉)의 욕망, 그 죄(罪)에서 정녕 자유롭게 해 주실 분은 그 죄를 대속(代贖)하시는 하느님의 아드님 예수 그리스도 뿐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 하느님의 뜻을 위한 그분의 영광을 위한 말씀으로 받아들일 마음이 없다는 것이다. 곧 영원한 생명인 영(靈)의 구원에는 관심이 없고, 현세적 영광, 욕망을 위한 신앙을 살고 있음을 지적하심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 예수님은 하느님의 뜻인 구원의 말씀을 얘기하시고, 사람들은 그 말씀을 계명(誡命), 교리(敎理)로 만들어 열심히 실천해 자신들이 원하는 것을 하느님으로부터 얻어내려는 그들의 속셈을 드러내신 것이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 아비-뱀이다. 곧 뱀의 유혹(誘惑)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자신의 욕망을 위해 선악(善惡)의 말씀, 계명으로 먹은 아담을 따라하는 거짓 후예라는 말씀이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 성경 말씀 안에 머무르는 우리는 안다. 하느님께서 창조 이전부터 예비, 계획하셨던 구원의 진리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믿는다.(에페1,4)
43 어찌하여 너희는 내 이야기를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가 내 말을 *들을 줄 모르기 때문이다.
= 아담의 선악으로 그 인간의 본성대로 듣고 있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44 너희는 너희 아비인 악마에게서 났고, 너희 아비의 욕망대로 하기를 원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로서, 진리 편에 서 본 적이 없다. 그 안에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 그가 거짓을 말할 때에는 본성에서 그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가 거짓말쟁이며 거짓의 아비기 때문이다.
=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① 영적인 사람-퓨뉴마 티고스 ② 어린이 같은 사람- 싸이 티코스, 그리스도 안에 있으나 어린자라는 뜻이다. ③ 현세적인 사람-* 퓨슈케 티코스
(1코린3,1) 1 형제 여러분, 여러분에게 이야기할 때, 나는 여러분을 영적이 아니라 육적인 사람, 곧 그리스도 안에서는 *어린아이와 같은 사람으로 대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1코린2,14) 14 그러나 *현세적 인간은 하느님의 영에게서 오는 것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한 사람에게는 그것이 어리석음이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영적으로만 판단할 수 있기에 그러한 사람은 그것을 깨닫지 못합니다.
= 현세적, 그리고 어린아이에서 영적인 사람이 되려면, 말씀을 인간의 본성대로 들으면 안된다. “청하라, 찾아라, 두드려라. 그러면 열릴 것이다” 약속하신(루가11,9-13) 보호자 성령께 의탁해야 한다.
(요한14,16.25-26) 16 내가 아버지께 청하면, 아버지께서는 다른 보호자를 너희에게 보내시어, 영원히 너희와 함께 있도록 하실 것이다. 25 나는 너희와 함께 있는 동안에 이것들을 이야기하였다. 26 보호자, 곧 아버지께서 내 이름으로 보내실 성령께서 너희에게 모든 것을 가르치시고 내가 너희에게 말한 모든 것을 기억하게 해 주실 것이다.
(요한16,12-13) 12 내가 너희에게 할 말이 아직도 많지만 너희가 지금은 그것을 감당하지 못한다. 13 그러나 그분 곧 진리의 영께서 오시면 너희를 모든 진리 안으로 이끌어 주실 것이다. 그분께서는 스스로 이야기하지 않으시고 들으시는 것만 이야기하시며, 또 앞으로 올 일들을 너희에게 알려 주실 것이다.
= 그러면 영적인 사람으로 성숙된다.
(에페4,13) 13 그리하여 우리가 모두 하느님의 아드님에 대한 믿음과 지식에서 일치를 이루고 성숙한 사람이 되며 그리스도의 충만한 경지에 다다르게 됩니다.
(에페3,16-19) 16 아버지께서 당신의 풍성한 영광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여러분의 내적 인간이 당신 힘으로 굳세어지게 하시고, 17 여러분의 믿음을 통하여 그리스도께서 여러분의 마음 안에 사시게 하시며, 여러분이 사랑에 뿌리를 내리고 그것을 기초로 삼게 하시기를 빕니다. 18 그리하여 여러분이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한지 깨닫는 능력을 지니고, 19 인간의 지각을 뛰어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게 해 주시기를 빕니다. 이렇게 하여 여러분이 하느님의 온갖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빕니다. (아멘)
= 곧 하느님을 채우심이다. 사도는 그 확신을 갖고 ‘믿는다는 성도들의 성숙을 위해 기도한 것’이다.
☨보호자이신 천주의 성령님!
본성에 따른 헛된 신앙으로 고난, 절망을 상지 않게 저희 모두의 마음에 충만하소서. 말씀이, 믿음이 굳세게 하소서. 저희 모두를 의탁합니다.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우리)에서도 이루어지소서. 영광이 성부와 성자와 성령께 처음과 같이 이제와 항상 영원히~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