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4주간 목요일] 진실로 진실로 (요한 13,16-20)
바오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 회당에서 이스라엘의 구원 역사를 설명하며 백성을 격려한다. (사도13,13-25)
13 바오로 일행은 파포스에서 배를 타고 팜필리아의 페르게로 가고, 요한은 그들과 헤어져 예루살렘으로 돌아갔다.
14 그들은 페르게에서 더 나아가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 이르러,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앉았다.
15 율법과 예언서 봉독이 끝나자 회당장들이 그들에게 사람을 보내어, “형제들이여, 백성을 격려할 말씀이 있으면 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16 그러자 바오로가 일어나 조용히 하라고 손짓한 다음 이렇게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그리고 하느님을 경외하는 여러분, 내 말을 들어 보십시오.
17 이 이스라엘 백성의 하느님께서는 우리 조상들을 선택하시고, 이집트 땅에서 나그네살이할 때에 그들을 큰 백성으로 키워 주셨으며, 권능의 팔로 그들을 거기에서 데리고 나오셨습니다.
18 그리고 약 사십 년 동안 광야에서 그들의 소행을 참아 주시고,
19 가나안 땅에서 일곱 민족을 멸하시어 그 땅을 그들의 상속 재산으로 주셨는데,
20 그때까지 약 사백오십 년이 걸렸습니다. 그 뒤에 사무엘 예언자 때까지 판관들을 세워 주시고,
21 그다음에 그들이 임금을 요구하자, 하느님께서는 벤야민 지파 사람으로서 키스의 아들인 사울을 그들에게 사십 년 동안 임금으로 세워 주셨습니다.
22 그러고 나서 그를 물리치시고 그들에게 다윗을 임금으로 세우셨습니다. 그에 대해서는 ‘내가 이사이의 아들 다윗을 찾아냈으니, 그는 내 마음에 드는 사람으로 나의 뜻을 모두 실천할 것이다.’ 하고 증언해 주셨습니다.
23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4 이분께서 오시기 전에 요한이 이스라엘 온 백성에게 회개의 세례를 미리 선포하였습니다.
25 요한은 사명을 다 마칠 무렵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너희는 내가 누구라고 생각하느냐? 나는 그분이 아니다. 그분께서는 내 뒤에 오시는데, 나는 그분의 신발 끈을 풀어 드리기에도 합당하지 않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당신이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당신을 맞아들이는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13,16-20)
예수님께서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신 다음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17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8 내가 너희를 모두 가리켜 말하는 것은 아니다. 내가 뽑은 이들을 나는 안다. 그러나 ‘제 빵을 먹던 그가 발꿈치를 치켜들며 저에게 대들었습니다.’라는 성경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19 일이 일어나기 전에 내가 미리 너희에게 말해 둔다. 일이 일어날 때에 내가 나임을 너희가 믿게 하려는 것이다.
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내가 보내는 이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맞아들이는 것이고, 나를 맞아들이는 사람은 나를 보내신 분을 맞아들이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목요일 제1독서 (사도13,13~25)
"이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하느님께서는 약속하신 대로
예수님을 구원자로 이스라엘에 보내셨습니다." (23)
'예수'라는 이름은 '구원자' 또는 '야훼는 구원', '야훼께서 구원하신다'는 뜻의
히브리어 '여호수아', '죠수아'를 희랍식 이름으로 표기한 것이다.
마태오 복음 1장 20~21절에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라고 계시되어 있다.
루카 복음 1장 31~33절에도 '보라, 이제 네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터이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여라. 그분께서는 큰 인물이 되시고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드님이라 불리실 것이다. 주 하느님께서 그분의 조상 다윗의 왕좌를
그분께 주시어, 그분께서 야곱 집안을 영원히 다스리시니
그분의 나라는 끝이 없을 것이다.'라고 계시되어 있다.
일찌기 하느님께서는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에게 '내 집안과 내 나라 안에서
그를 영원히 세우리니, 그의 왕좌는 영원히 튼튼하게 하겠다.'(1역대17,14)고
말씀하셨는데, 사도 바오로는 다윗의 후손 가운데에서 구원자를 세우고
그 구원자를 보내셨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사도 바오로는 피시디아의 안티오키아에서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그곳에 모인 사람들에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의 조상들을 선택하시어
그들을 이끄신 역사와 구원자(구세주)의 약속을 상기시키고
그 약속에 따라 예수님께서 오셨다는 사실을 깨우쳐 주고 있다.
사도 바오로는 이스라엘 역사를 끌어내서 그 역사안에서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조상들과의 약속을 어떤 방식으로 지키셨고, 그리고
그 약속의 성취가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를 밝힌다.
겉으로는 현세적이고 정치적인 상황을 볼 때, 다윗의 왕조는 무너진 것 같이 보인다.
그러나 나탄 예언자를 통해 다윗에게 말씀하신 그 왕좌가 영원할 것이라는
하느님의 말씀이 공허한 메아리 처럼 들리는 상황에서도, 사도 바오로는
하느님께서 선택하신 이스라엘을 위해서 다윗과 약속하신 그 왕좌가
영원히 견고할 것이라는 말씀이 예수님을 통해 이루어졌다고
밝히고 있는 것이다.
부활 제4주간 목요일 복음(요한13,16~20)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고, 파견된 이는 파견한 이보다 높지 않다.
이것을 알고 그대로 실천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16~17)
예수님께서 신적 권위를 가지고 어떤 중요한 내용을 선포할 때 사용하는 관용구가
바로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이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로 하여금 경각심을 갖게 하기 위해 '아멘 아멘 레고 휘민'
(amen amen lego hymin; I tell you the truth; verily verily I say
to you)이라는 표현을 쓰셨다.
예수님께서는 여기서 당신 자신을 '주인'과 '파견한 이'로 지칭하고,
제자들을 '종'과 '파견된 이'로 지칭하여, 당신께서 행동으로 보여 주고
말씀으로 명령하신 내용을 반드시 지킬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신다.
특히 '~는 ~보다 높지 않다'는 첫 구절의 내용을 이어지는 구절에서 반복하는
'동의적 대구법'이라는 문학적 기교를 사용해서 예수님 자신과 제자들의
관계(주인, 파견한 이; 종, 파견된 이)를 강조함으로써, 완전한 순종을 촉구하신다.
여기서 '주인'으로 번역된 '퀴리우'(kyriou; lord; master)의 원형 '퀴리오스'
(kyrios)는 요한 복음 13장 13,14절에서 '주'(Lord)로 번역된 단어이며,
'않고'로 번역된 '우크 에스틴'(ouk estin; is not)은 현재 시제의 부정
(否定)으로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항상 그렇다는 것을 나타낸다.
스승보다 훌륭한 학자, 스승보다 훌륭한 의사, 스승보다 훌륭한 화가,
스승보다 훌륭한 음악가, 스승보다 훌륭한 조각가 등은 얼만든지 나올 수 있지만,
예수님보다 더 높은 자가 된다는 것은 영원히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주인이시고,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다.
이러한 본질적인 관계를 바로 아는 이들은 결코 마음을 높이거나
스스로 교만하지 않게 된다.
섬김과 봉사를 부끄럽게 여기는 이들은 자기 자신이 그리스도보다
더 높다고 생각하는 자이다.
모든 사람은 예수님의 종일 뿐이다.
예수님께서는 죄의 종이 되었던 우리를 당신 자신의 몸값을 지불하시고
다시 사셔서, 당신 소유로 삼으셨다(로마6,6~18).
어느 누가 자기 자신을 예수님과 견주려고 한다면, 그는 자신을 지존하신 분과
같이 높이려 했던 사탄, 즉 루치펠의 전철을 밟는 것이다(이사14,12~17; 루카10,18).
하느님의 뜻은 하늘과 땅 위와 땅 아래에 있는 자들의 무릎을 예수님의 이름
앞에 꿇게 하는 것과 모든 존재의 입으로 예수님을 '주님'이시라고 고백하게
하는 것이다(필리2,9~11).
예수님께서 우리의 '주님'이시라면, 우리는 예수님의 종이다.
우리는 이 평범한 이치를 잊지 않고, 자신의 도리에 충실하도록 힘써야 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언제든지 자신이 예수님의 종이며, 그분의 보내심을
받은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음을 유념하고 자신을 낮추어야 한다.
또한 모든 판단과 결정의 근거를 주인이신 그리스도에게 두어야 한다.
진리되신 그분이 옳다고 하시는 것은 세상 모든 사람이 옳지 않다고
반대할지라도 옳은 것이며, 만물의 주권을 가지신 그분이 명령하시는
일체의 일들은 아무리 많은 어려움이 따를지라도, 포기하거나
지체하지 말고 힘써 행해야 하는 것이다.
한편, '파견된 이'에 해당하는 '아포스톨로스'(apostolos; the one who is sent)는
필리피서 2장 25절과 코린토 2서 8장 23절에서 '협력자'로 번역되고, 여기서는
'파견된 이'로 번역된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다 '사도'로 번역되었다.
공관 복음서에서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특별히 선택하신 제자들에게
복음 전파의 사명을 맡기는 문맥에서 쓰였다.
반면에 여기서는 단순히 섬김과 봉사의 의무를 교훈하기 위한 문맥에서, 그리고
파견한 이와의 관계의 문맥에서 나오므로, 그들을 파견한 이가 겸손히 섬기는데,
그로부터 파견된 이가 자신의 위엄을 내세우며 섬김의 도를 외면해서는
안된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이다.
주님의 방식을 선택하라
-반영억라파엘신부-
얼굴을 보면 기쁨도 슬픔도 엿볼 수 있습니다. 아무리 밝은 모습을 보여주려고 해도 근심 걱정이 있으면 그늘진 모습을 감추지 못합니다. 그러나 시련과 고통 속에서도 평온을 잃지 않는 분도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는 육체적 정신적 아픔이 너무 크게 보이는데도 얼굴은 환한 미소를 담고 있는 분이 계셔서 ‘아주 편안해 보이십니다’하고 인사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그분께서 말씀하셨습니다. “기쁨도 고통도 다 뜻이 있어 주시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하느님께서 주신 생명을 하느님께 맡겨야지요. 나를 사랑하시는 분께 맡기고 나니까 그렇게 편할 수가 없어요!”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온 세상에 가서 모든 피조물에게 복음을 선포하여라”하셨습니다. 복음은 기쁜 소식이고 그것은 “주님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받는다”는 소식입니다. 잘못과 죄, 허물에도 불구하고 자비로 용서해 주시고 생명을 주신다는 것이 기쁜 소식입니다. 그러나 이 소식을 그저 입으로 전하는 것으로는 부족합니다. 먼저 내 자신이 믿고, 믿는 바를 생활로써 드러내야 하는 것입니다. 시련과 고통 가운데에서도 나와 함께하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으로 평온을 잃지 않는 모습이야 말로 복음의 선포입니다. 사실 바오로 사도는 “기회가 좋든지 나쁘든지”(2티모4,2) 말씀을 선포하라고 권고합니다. 그리고 ‘인간의 말재주로 복음을 전한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그 뜻을 잃고 맙니다’(1고린1,17).
우리는 주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결정적인 순간이 오면 흔들리는 모습을 보입니다. 하느님이 날 사랑하시는 데 왜 이런 고통과 아픔을 주느냐고 소리칩니다. 그러나 그때야 말로 십자가의 주님을 만날 수 있는 기회요, 간절히 기도할 때입니다. 그러므로 “걱정일랑 하느님께 떠맡기십시오. 당신은 그분의 것이고 그분은 당신을 잊지 않으십니다”(십자가의 성 요한). 예수님께서도 “내가 세상 끝 날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28,20). 고 약속 하셨습니다.
따라서 어떤 처지에서든지 내 자신이 복음이 되어 주님을 전해야겠습니다. 내가 복된 기쁨을 담고 있어야 그 기쁨을 전할 수 있는 만큼 먼저 큰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복음의 선포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어제도 오늘도 내일도 주님께서는 나를 기대합니다. 그리고 우리는“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에게 힘입어 나는 무슨 일이든지 할 수 있습니다”(필리4,13). 주님께서 주신 사명을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신앙이 더욱 확고해 지길 희망합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세상의 방식이 아니라 예수님의 방식이 진정한 행복을 가져다줌을 사람들이 받아들이도록 가르치고 설득하라는 의미도 담겨 있습니다. 먼저 주님의 가르침을 살고 기뻐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의 말씀입니다. "오늘은 선교의 때이며 용기를 내야 할 때입니다. 비틀거리는 걸음도 다시 힘을 내는 용기이며, 복음에 타오를 열정을 다시 가지는 것이며, 그분과 함께하는 선교의 열정에 대한 신뢰를 회복하는 것입니다. 용기를 가져야 합니다. 용기를 가진다는 것은 언제나 성공이 보장된다는 뜻이 아닙니다. 이겨내기 위해서가 아니더라도 싸움을 계속할 수 있는 용기를 청하는 것입니다. 회심하지 않더라도 지속적인 선포를 해야 합니다."
“이론적으로는 복음화할 수 없습니다. 복음화는 몸으로 부딪쳐야 하고, 사람을 상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론이 아닌 구체적 상황에서부터 출발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하는 것입니다. 성령의 용기가 세례를 베풀 수 있도록 재촉합니다. 저 너머로 가십시오. 여러분의 몫이 끝났다고 느낄 때까지 가십시오. 복음화는 그렇게 하는 것입니다. 다음 세 가지 단어는 우리의 삶과 표양과 말로 복음화를 실행해야 하는 우리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핵심어입니다. △“일어나라, 일어나라(Alzati, alzati)” △“가까이 다가가라(accostati)”, “가까이함”(vicinanza) △“상황에서 시작해라(parti dalla situazione)”는 구체성(concreta)입니다. 이들은 아주 단순한 방식이지만 예수님의 방식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복음을 선포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길을 걸어 가셨고, 항상 사람들 가까이 계셨고, 항상 구체적인 상황, 구체성에서 출발하셨습니다. 복음화는 이 세가지 태도로만 할 수 있으며, 성령의 능력으로 할 수 있습니다. 성령 없이는 이 세가지 태도도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성령께서 우리를 일어날 수 있도록, 가까이 다가갈 수 있도록, 상황으로부터 시작할 수 있도록 재촉하십니다.” 더 큰 사랑으로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