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제2주간 토요일]호수 위를 걸어 (요한 6,16-21)

2019. 5. 4. 오전 5:32:54

글자



[부활 제2주간 토요일]호수 위를 걸어 (요한 6,16-21)


사도들은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뽑아 식탁 봉사를 맡기고,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기로 한다. (사도 6,1-7)
1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2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3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4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5 이 말에 온 공동체가 동의하였다. 그리하여 그들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인 스테파노, 그리고 필리포스, 프로코로스, 니카노르, 티몬, 파르메나스, 또 유다교로 개종한 안티오키아 출신 니콜라오스를 뽑아,
6 사도들 앞에 세웠다. 사도들은 기도하고 그들에게 안수하였다.
7 하느님의 말씀은 더욱 자라나, 예루살렘 제자들의 수가 크게 늘어나고  사제들의 큰 무리도 믿음을 받아들였다.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제자들은 두려워한다. (요한 6,16-21)
저녁때가 되자 예수님의 16 제자들은 호수로 내려가서,
17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 카파르나움으로 떠났다.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
18 그때에 큰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
19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20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21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


                        부제로 임명되고 양식을 나눠주는 첫 순교자 성 스테파노

 

 부활 제2주간 토요일 (사도6,1-7)

 

"그 무렵 제자들이 점점 늘어나자,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히브리계 유다인들에게

 불평을 터뜨리게 되었다. 그들의 과부들이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홀대를 받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두 사도가 제자들의 공동체를 불러 모아 말하였다.

"우리가 하느님의 말씀을 제쳐 놓고 식탁 봉사를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그러니 형제 여러분, 여러분 가운데에서 평판이 좋고 

 성령과 지혜가 충만한 사람 일곱을 찾아내십시오.

 그들에게 이 직무를 맡기고,

 우리는 기도와 말씀 봉사에만 전념하겠습니다." (1-4)

 

본문에서 '불평'으로 번역된 '공귀스모스'(gongysmos)

'투덜댐' 또는 '원망'이라는 의미의 명사이다.

 

이것은 특히 70인역(LXX; 구약의 히브리서를 희랍어로 번역한 책)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지도자 모세와 주 하느님을 향해 원망한 것을 묘사할 때 쓰인 단어가

본문의 단어와 동일한 명사와 그 동사형이라는 점(탈출16,7; 민수14,27)을 감안할 때

그리스계 유대인들의 불평이 하느님의 교회에 심각한 피해를 주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사탄은 교회조직 내에 있는 구성원들의 투덜거림과 불평을 통해

교회를 위기에 몰아 넣으려 했던 것이다.

여기서 히브리계 유다인들 팔레스티나에서 살면서

유대의 풍습을 따르고 아람어를 사용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들은 디아스포라 유대인들(그리스계 유다인들)에 비해 자긍심이 강했지만

그것이 그들로 하여금 그리스계 유다인들에 대한 구제(사도2,45)를 소홀히 한 이유는 아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초대교회는 온 신도들이 한마음 한뜻이 되어 유무상통하는 아름다운 공동체였지

사람을 차별하는 집단이 아니었기 때문이다(사도4,32).

다만 그리스계 유다인들의 과부들이 구제에서 빠지게 된 것은

아마도 그것을 관장하던 히브리계 유다인들의 행정 착오 때문이었을 것이다.


초대 교회는 비교적 넉넉한 사람들의 봉헌금(사도4,34-37)으로

상대적으로 가난한 신도들의 필요를 채워 주었으며,

특히 생계 유지가 힘든 과부들(사도4,31-37)은 매일 구제의 대상 되었다.

여기서 '매일 배급을 받을 때에' 번역된 '엔 테 다이코니아 테 카테메리네'

(en te diakonia te kathemerine)초대 교회 당시 매일 행해지던 구제를 일컫는다.


이것은 의지할 데 없는 과부들을 돌아보라는 하느님의 명령(탈출22,20; 신명10,18)에 따라

유다인들이 지켜온  아름다운 전통을 계속 이어가는 모습이기도 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리스계 과부들은 언젠부턴가 

그 매일의 구제에서 조금씩 제외되기 시작했다.


'홀대를 받았기' 의미로 번역된 단어 '파레테오룬토'(paretheorunto)의 원형

'파라테오레오'(paratheoreo)'간과하다'(overlook), '소홀히하다'(neglect)라는 의미의 동사이다.


본문에서는 어떤 일의 반복이나 계속됨을 나타내는 미완료 과거 수동태 쓰였다.

이것은 그리스계 과부들이 그 매일의 구제에서 단 하루 제외되어서 원망했던 것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제외되어 온 데에 대한 불만을 참지 못해서 원망했던 것이다.

그래서 너무나 당연해 보이는 이 불평을 사탄은 교회를 위기에 몰아넣는 기회로 사용하여

히브리계 유다인들과 그리스계 유다인들이 일치를 이루는데 어려움이 생기게 한 것이다.

 

한편 본문에서는 유념해야 할 중요한 단어가 있다.

이는 '배급'(구제)으로 번역된 '디아코니아'(diakonia)라는 단어이다.

이 단어는 '섬김'(1코린16,15), '직무'(2티모4,5). '봉사'(사도21,19)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그리고 '구제'(자선,희사)를 가리키는 단어는 '엘레에모쉬네'(eleemosine)라고 따로 있다

(마태6,2; 루카11,41; 사도10,4).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행전의 저자가 '구제'를 표현하면서

굳이 '직무', '섬김', '봉사' 의미하는 단어 '디아코니아'를 사용한 것은

특별한 이유가 있어서이다.

사도행전의 저자는 이 단어를 1절과 4절에 함께 사용함으로써

중요한 원리를 말하고자 한다.


4절에 '말씀 봉사'(말씀 전하는 것; te diakonia tu logu; 테 디아코니아 투 로구;

the ministry of the word)에서 '봉사'(전하는 것)으로 번역된 단어도 '디아코니아'인데,

이것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보여준다.

즉 사도들의 말씀 선포의 직무와 평신도들의 구제하는 등의 직무가

우열의 차이없이 모두 하느님 앞에서 동등한 직무라는 사실을

동일한 단어의 사용을 통하여 보여 주고자 한 것이다.


다만 말씀 봉사 구제 봉사 직무의 성격에 차이 있을 뿐이다.

또한 사도들의 말씀 전하는 직무는 신도들에 대해 지시하고

신도들 위에 군림하는 권리를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구제의 직무처럼 신도들을 섬기고 교회가 성장하도록 돕는 봉사의 직무라는 것을

1절과 4절의 '디아코니아'라는 단어의 사용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물론 에페소서 4장 11절에서처럼  사도와 예언자, 복음 선포자,

목자와 교사의 순으로 말씀을 전하는 직무의 우위성이 드러난다.

그러나 사도행전 6장 1~4절에서는 그 일에 봉사하는 사람들의 정신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잘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복음(요한6,16-21)


그들이 배를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저어 갔을 때,

예수님께서 호수 위를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시는 것을 보고 두려워하였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  (19-20)


요한 복음 6장 19절주어는 예수님이 아니라 배 안에 있는 제자들이며,

'예수님께서 ~ 오시는 것을'에 해당하는 '톤 이에순~기노메논' <ton

Iesoun~ginomenon ; Jesus ~drawing(approaching)>은 '보고'에

해당하는 '테오루신'(theorousin; they saw) 동사의 목적절이다.


여기서 강조되고 있는 것 '그들이 보고 두려워하였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오시는 것을' 부분에서 그들로 하여금 놀라게 만든

두 개의 단어에 주목해야 한다.


둘 다 현재 분사로서 진행중임을 나타내고 있는데, 하나는 '걸어'로 번역된

'페리파툰타'(peropatounta; walking)이고, 또 하나는 '오시는 것을'로 번역된

'기노메논'(ginomenon; drawing)이다.

'페리파툰타'(peripatounta)'페리파테오'(peripateo)의 현재 분사이며,

기본적인 의미는 '돌아다니다'(walk around)이다.


예수님께서 땅 위에서 돌아다니셨다면, 도무지 이상할 것이 없다.

하지만 예수님께서 걸어다니시는 곳이 사람이 흉내낼 수 없는 바다,

즉 거친 파도가 몰아치는 물 위였다는 사실이 그들로 하여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게 한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마치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놀라서 소리친 것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기노메논'(ginomenon)'기노마이'(ginomai)의 현재 분사인데,

'가까운'이라는 뜻을 가진 부사 '엥귀스'(enggys; nigh)와 함께 쓰일 때

'~에 접근하다'는 의미가 된다.

파도가 높이 일고 있는 바다 위를 마치 육지처럼 걸어서 배에 접근하시는

예수님의 진행중인 모습이 매우 실감나게 묘사된 것이다.


특히 이 사건을 보도하고 있는 복음사가 가운데 사도요한만이 당시 이 일이

일어난 곳이 육지에서 '스물다섯이나 서른 스타디온 쯤' 떨어진 곳임을 밝히고 있다.

이것은 '십이리쯤'으로도 번역될 수 있는데, 오늘날의 거리로 환산하면

4.6~5.6km 정도이다.

당시 제자들이 건너려 했던 코스의 갈릴래아 호수의 폭이 8km쯤이었다고 본다면,

그들이 바다 한가운데 있었던 것이 된다.

바로 이곳으로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찾아오신 것이다.


한편, 요한 복음 6장 20절'나다'로 번역된 '에고 에이미'(Ego eimi; I am)

예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서 서술하실 때에 사용하신 독특한 문구이다.

특히 요한 복음에서는 이 진술들이 자주 등장하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자신의 절대적 신성(神性)을 직접 나타내는 가장 순수하고도 완전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요한9,26; 6,35.48.51; 8,12.28.58; 13,19; 14,6; 15,1.5; 18,37).


예수님께서는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절대적이고

유일한 대리자로 계시하신다.

또한, 이것은 구약의 '나는 ~이다'(탈출3,14)에서 온 것인데,

이 용어를 통해 당신 자신을 나타내신 분은 주님이시다.


제자들을 두려움으로 떨게 한 그 장본인이 예수님이라는 사실을 확인하는 순간,

그들의 불안감은 소멸되어 없어지고,  또 다른 놀라움에 사로잡히게 되었는데,

그것은 바로 예수님의 위대하심에 대한 놀라움이었다.

곤경과 불안에 빠진 제자들의 귀에 들린 예수님의 음성은 잃었던 마음의

평정을 되찾아 주었고, 제자들이 곤경과 맞설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었다.

 

부활 제2주간 토요일 / 2015-4-18

거센 풍랑 속에서 만나는 예수님

 

바람 잘 날이 없는 게 우리네 삶이다.

문제는 바람이 아니라 인생 풍파 속에서 어디에 뿌리를 두고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이느냐이다.

고통과 시련 중에 돈이나 힘있어보이는 사람에게 의지하거나 절망과 체념에 빠져드는 경우도 적지 않다.

 

오늘의 말씀에 귀 기울여보자.

오늘 복음의 대목은 예수님의 신적인 자기 계시(6,20)에 역점을 둔 그리스도론적인 보도내용이다.

이 표징은 위험에 있는 사도들을 구해준다기보다는 그들의 믿음을 시험에 들게 할지도 모르는, 앞으로 나올 이해하기 힘든 설교를 믿어야 한다는 징표이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하여 자신의 현존을 드러내신다.

예수님께서는 물 위를 걸어가심으로써 자신의 정체성과 신성을 드러내신다.

해가 지는 ‘저녁때가 되자’ 제자들은 배를 타고 호수 건너편으로 떠났다(6,16-17).

“이미 어두워졌는데도 예수님께서는 아직 그들에게 가지 않으셨다.”(6,17) 거센 바람이 불어 호수에 물결이 높게 일었다(6,18).

 

어둠이 내린 가운데 예수님께서 계시지 않고, 거센 풍랑이 인 상황, 곧 제자들 스스로 자기네들에게만 의존한 상황은 혼돈과 죽음의 세력 및 폭력이 난무한 위협적인 상황을 말해준다.

예수님께서는 호수 위를 걸어 제자들에게 가까이 다가가셨다.

그분은 하느님께서 바다를 장악하여 걸어가시듯(욥기 9,8; 이사17,12-13 참조) 그런 신적인 능력을 갖춘 분으로 묘사되고 있다.

 

그런데 제자들은 그 모습을 보고 두려워하였다(6,19).

 

예수님께서는 바로 이런 상황에서 “나다. 두려워하지 마라.”하시며 자신을 계시해주신다.

‘나다’(그리스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말씀은 구약의 하느님 자기 계시 표현양식에 따라 자신을 계시하신다(탈출 3,14).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생명의 빵’, ‘세상의 빛’, ‘착한 목자’, ‘부활’, ‘길이요 진리요 생명’, ‘포도나무’이시다.

 

"두려워하지 마라"는 것은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과 함께 계실 것을 약속하시며 주시는 말씀이다(민수 21,34).

곧,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자기 자신을 확인시킬 뿐만 아니라, 신적인 능력을 갖춘 자로서 계시하며 자신에게 신뢰하도록 요청하면서 위로하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을 배 안으로 모셔 들이려고 하는데, 배는 어느새 그들이 가려던 곳에 가 닿았다(6,21).

 

제자들이 물위를 걸어온 분을 배 안으로 맞아들이려 했다는 것은 곧 그분이 바로 자기네들의 스승 예수라는 것을 알고서 두려움을 이겨냈다는 것을 뜻한다(마태 14,28-33 참조).

호수 가운데쯤에 있던 배가 어느새 목적지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은 놀라운 표징으로서 예수님의 권능을 보여준다.

 

예수님께서 친히 자신을 계시해주시자 곧바로 평온, 평화의 상태에 들어간 것이다. 

우리 인생길도 늘 만만치 않다.

원치 않은 시련과 고통이 찾아들어 힘겹게 살아가는 때가 얼마나 많은가!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라 살아가는데도 때로는 하느님이 원망스럽고 아예 계시지 않다고 느껴지는, 이른바 ‘신앙의 메마름’과 ‘하느님 부재 체험’을 하기도 한다.

그렇듯 우리 인생은 큰 바람에 출렁거리는 호수와도 같이 요동치는 세상살이기도 하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께서는 친히 그 물 위를 걸어 ‘가까이 다가오시어’ 두려움에 떨고 있는 우리에게 용기와 힘을 주신다.

 

절대고독, 끝없는 하느님 부재 상태, 메마름, 마음의 흔들림과 고통 속에서도

늘 함께하시는 주님을 향한 끈을 놓지 말자!

또한 우리도 예수님처럼 고통을 겪는 이들과 ‘함께 있어주고’ ‘고통을 같이 나누며’, 사랑 때문에 격랑 속에서도 함께 위험을 감수하였으면 한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부활 제3주간 화요일] 생명의 빵 (요한 6,30-35)19.05.07조회 61[부활 제3주간 월요일]하느님의 일(요한6,22-29)19.05.06조회 62[부활 제2주간 토요일]호수 위를 걸어 (요한 6,16-21)19.05.04조회 42[부활 제2주간 목요일] 증언 (요한 3,31-36)19.05.02조회 59[부활 제2주간 수요일]외아들을 믿는 (요한3,16-21)19.05.01조회 56[부활 제2주간 화요일]영원한 생명 (요한 3,7ㄱ.8-15)19.04.30조회 43[부활제2주간 월요일]물과 성령 (요한3,1-8)19.04.29조회 41[부활 팔일 축제 토요일]복음을 선포하여라 (마르 16,9-15)19.04.27조회 55[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14)19.04.26조회 56[부활 팔일 축제 금요일]와서 아침을 먹어라(요한 21,1-14)19.04.26조회 57[부활 팔일 축제 목요일]성경에 기록된 대로(루가 24,35-48)19.04.25조회 62[부활 팔일 축제 수요일]엠마오 길에서 (루카 24,13-35)19.04.24조회 76[부활 팔일 축제 월요일]평안하냐?” (마태 28,8-15)19.04.22조회 43[파스카 성야] 살아 계신 분 (루카 24,1-12)19.04.20조회 80[주님 수난 성금요일]다 이루어졌다(요한18,1―19,42)19.04.19조회 48[주님 만찬 성목요일]洗足禮 (요한 13,1-15)19.04.18조회 66[성주간 수요일]저는 아니겠지요 (마태 26,14-25)19.04.17조회 4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