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스카 성야] 살아 계신 분 (루카 24,1-12)

2019. 4. 20. 오전 5:26: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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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스카 성야] 살아 계신 분 (루카 24,1-12)


천지를 창조하시고, 아브라함에게 언약하시고, 이스라엘 자손들을 이집트에서 구해 내시며, 크나큰 자비로 부르시고, 영원한 계약을 맺으신 하느님께서는, 당신 생명의 계명에서 예지를 배우라며, 새 마음과 새 영을 주겠다고 하신다.(탈출 14,15―15,1ㄱ)
그 무렵 15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어찌하여 나에게 부르짖느냐?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
16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가게 하여라.
17 나는 이집트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여, 너희를 뒤따라 들어가게 하겠다. 그런 다음 나는 파라오와 그의 모든 군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겠다.
18 내가 파라오와 그의 병거와 기병들을 쳐서 나의 영광을 드러내면, 이집트인들은 내가 주님임을 알게 될 것이다.”
19 이스라엘 군대 앞에 서서 나아가던 하느님의 천사가  자리를 옮겨 그들 뒤로 갔다. 구름 기둥도 그들 앞에서 자리를 옮겨 그들 뒤로 가 섰다.
20 그리하여 그것은 이집트 군대와 이스라엘 군대 사이에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자 그 구름이 한쪽은 어둡게 하고, 다른 쪽은 밤을 밝혀 주었다. 그래서 밤새도록 아무도 이쪽에서 저쪽으로 다가갈 수 없었다.
21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내시어, 바다를 마른땅으로 만드셨다.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
22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 들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23 뒤이어 이집트인들이 쫓아왔다. 파라오의 모든 말과 병거와 기병들이 그들을 따라 바다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24 새벽녘에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보시고, 이집트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셨다.
25 그리고 그분께서는 이집트 병거들의 바퀴를 움직이지 못하게 하시어, 병거를 몰기 어렵게 만드셨다. 그러자 이집트인들이 “이스라엘을 피해 달아나자. 주님이 그들을 위해서 이집트와 싸우신다.” 하고 말하였다.
26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바다 위로 손을 뻗어, 이집트인들과 그들의 병거와 기병들 위로 물이 되돌아오게 하여라.”
27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날이 새자 물이 제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래서 도망치던 이집트인들이 물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주님께서는 이집트인들을 바다 한가운데로 처넣으셨다.
28 물이 되돌아와서, 이스라엘 자손들을 따라 바다로 들어선  파라오의 모든 군대의 병거와 기병들을 덮쳐 버렸다. 그들 가운데 한 사람도 살아남지 못하였다.
29 그러나 이스라엘 자손들은 바다 가운데로 마른땅을 걸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
30 그날 주님께서는 이렇게 이스라엘을 이집트인들의 손에서 구해 주셨고, 이스라엘은 바닷가에 죽어 있는 이집트인들을 보게 되었다.
31 이렇게 이스라엘은 주님께서 이집트인들에게 행사하신 큰 권능을 보았다. 그리하여 백성은 주님을 경외하고, 주님과 그분의 종 모세를 믿게 되었다.
15,1 그때 모세와 이스라엘 자손들이 주님께 이 노래를 불렀다.


바오로 사도는,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가르친다.(로마 6,3-11)
형제 여러분, 3 그리스도 예수님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은 우리가  모두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여러분은 모릅니까?
4 과연 우리는 그분의 죽음과 하나 되는 세례를 통하여 그분과 함께 묻혔습니다. 그리하여 그리스도께서 아버지의 영광을 통하여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신 것처럼, 우리도 새로운 삶을 살아가게 되었습니다.
5 사실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
6 우리는 압니다. 우리의 옛 인간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힘으로써  죄의 지배를 받는 몸이 소멸하여, 우리가 더 이상 죄의 종노릇을 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7 죽은 사람은 죄에서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8 그래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니  그분과 함께 살리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9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되살아나시어  다시는 돌아가시지 않으리라는 것을 압니다. 죽음은 더 이상 그분 위에 군림하지 못합니다.
10 그분께서 돌아가신 것은 죄와 관련하여 단 한 번 돌아가신 것이고, 그분께서 사시는 것은 하느님을 위하여 사시는 것입니다.
11 이와 같이 여러분 자신도 죄에서는 죽었지만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하느님을 위하여 살고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예수님께서는 무덤을 보러 간 여자들에게 마주 오시며 평안하냐고 인사하시고, 형제들에게 가서 갈릴래아로 가라고 전하라고 하신다.(루카 24,1-12)
1 주간 첫날 새벽 일찍이 그 여자들은 준비한 향료를 가지고 무덤으로 갔다.
2 그런데 그들이 보니 무덤에서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
3 그래서 안으로 들어가 보니 주 예수님의 시신이 없었다.
4 여자들이 그 일로 당황하고 있는데, 눈부시게 차려입은 남자 둘이 그들에게 나타났다.
5 여자들이 두려워 얼굴을 땅으로 숙이자 두 남자가 그들에게 말하였다. “어찌하여 살아 계신 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찾고 있느냐?
6 그분께서는 여기에 계시지 않는다. 되살아나셨다. 그분께서 갈릴래아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무엇이라고 말씀하셨는지 기억해 보아라.
7 사람의 아들은 죄인들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8 그러자 여자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기억해 내었다.
9 그리고 무덤에서 돌아와  열한 제자와 그 밖의 모든 이에게 이 일을 다 알렸다.
10 그들은 마리아 막달레나, 요안나, 그리고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였다. 그들과 함께 있던 다른 여자들도 사도들에게 이 일을 이야기하였다.
11 사도들에게는 그 이야기가 헛소리처럼 여겨졌다. 그래서 사도들은 그 여자들의 말을 믿지 않았다.
12 그러나 베드로는 일어나 무덤으로 달려가서 몸을 굽혀 들여다보았다. 그곳에는 아마포만 놓여 있었다. 그는 일어난 일을 속으로 놀라워하며 돌아갔다
.




파스카 성야 제3독서 (탈출14,15-15,1ㄱ)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15)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가게 하여라.(16)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 내시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셨다.(21)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22) 

 새벽녘에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보시고,

 이집트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셨다." (24)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앞으로 나아가라고 일러라.'(15) 

 

'앞으로 나아가라고'에 해당하는 '웨잇싸우'(weissau)의 기본형 '나싸'(nassa)

장막의 말뚝을 뽑아 내어 여행을 출발하거나 진행 중임을 뜻하는 단어이다.

 

 장막을 걷고 다시 여행을 시작하라는 하느님의 명령이다.

 

하느님께서 출발 명령을 하시는 이러한 모습 전쟁에서의 지휘관의 명령을

연상하게 한다.

 

이스라엘은 하느님의 군대로서 하느님의 명령과 함께 이제 하느님의 전쟁에

참여하기 시작한 것이다.

 

악의 세력과의 전쟁을 수행하시는 총사령관이신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하느님의 군대인 이스라엘은 그 전쟁에 참여하기 위하여 출발하고 있는 것이다.

 

'너는 네 지팡이를 들고 바다 위로 손을 뻗어 바다를 가르고서는,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가게 하여라.'(16)

 

'가르고서는'에 해당하는 '우베카에후'(ubeqaehu)는 직역하면

'그리고 너는 그것을 쪼개라'는 뜻이다.

 

'베카에후'의 기본형인 '빠카'(baqa) '(하나로 된 것을)쪼개다',

'(닫힌 것을)열다', '(알을)깨다'등의 의미가 있다.

 

본문은 홍해 바다를 둘로 완전하 갈라지게 하라는 명령이다.

 

그런데 여기서 동사가 단순 능동형으로 사용되어 모세가 단지 지팡이를 든 손을

바다 위로 내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바닷물을 가르는 행위까지 그에게 속한 것임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실제로는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내밀고 있을 때 하느님께서

강한 바람을 사용하여 바다를 갈라지게 하셨다(탈출14,21).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홍해를 '쪼개는'일이 하느님의 능력에 의한 것일지라도

그 임무는 하느님의 대리자인 모세에게 속한 것임을 이러한 표현을 시사하고 있다.

 

'빠얍바샤'(bayabbasha) '마른 땅'으로 번역되었다.

 

'마르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야베쉬'(yabesh)에서 유래한 명사 '얍바샤'

(yabbasha) '~안에(안으로)' 뜻의 전치사 '뻬'(be)와 정관사 '하'

(ha)가 결합된 형태이다.

 

그런데 '야베쉬' '얍바샤' 어근은 기본적으로 '수분을 지닌 물체가

수분이 없어서 마르다' 의미를 지니고 있다.

 

이 말 속에는 선택하신 이스라엘 백성들을 안전하게 인도하시려는

놀라운 하느님의 사랑과 돌보심이 있다.

 

바다나 강에 물이 빠지고 나면, 원래 물에 깊이 잠겼던 부분은 갯벌이나

진흙 수렁과 같이 사람이 걷기에도 힘든 땅이 되는 것 당연하다.

 

그런데 하느님께서는 지금 그것이 마른 땅이 될 것이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과 어린 아이들과 가축들과 짐을 실은 수레들이 안전하고

쉽게 건널 수 있도록 하느님께서 초자연적으로 역사(役事)하실 것이라는

강력한 의지가 담겨져 있는 말씀이다.

 

더군다나 '마른 땅'을 가리키는 히브리어 '얍바샤' 신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창세기 1장 9절,10절 창조 때에 물과 분리된 '마른 땅' 기리키는데 사용되었다.

하느님께서는 이처럼 물 가운데서 땅을 분리하여 그곳엔 온갖 생명이 자라게 하셨다.

 

또한 노아의 홍수 후에 물이 걷히고 땅이 마른(창세8,14) 다음에 그 땅위에서

생명체들이 다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었다.

 

마찬가지로  홍해 바다 갈라지는 사건 속에서도 바다가 갈라지고 그곳에 드러나는

마른 땅 하느님께서 생명을 보호하시기 위한 또 다른 당신의 자비로우신 의지가

개입된 특별한 역사(役事)였음을 알 수 있다.

 

이제 바다 가운데 새 길을 통해서 이스라엘 자손은 하느님의 백성으로

새롭게 태어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느님의 창조와 구원을 위한 재창조의 역사(役事)가 바다 가운데

마른 땅이 드러나는 현상 가운데서도 맥맥히 흐르고 있음을 보게 된다.

 

그리고  이 일이 탈출기 14장 24절에 '새벽에'(habboqer) 일어나고 있다는 것

예의 주시해야 한다.

 

'모세가 바다 위로 손을 뻗었다.

 주님께서는 밤새도록 거센 샛바람으로 바닷물을 밀어 내시어,

 바다를 마른 땅으로 만드셨다.' (21)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 난 길로 가는데

어려움을 겪지 않도록 질퍽이는 진흙투성이일 수 밖에 없는 바다 밑의 땅을

완전히 마른 땅으로 만드신 것이다.

 

바다를 가른 것과 마찬가지로 여기에도 하느님의 세심한 배려로

당신의 초자연적 능력이 개입된 것이다.

 

'그리하여 바닷물이 갈라지자, 이스라엘 자손들이 바다 가운데로

 마른 땅을 걸어 들어갔다. 물은 그들 좌우에서 벽이 되어 주었다.'(22)

 

본문은 탈출기 14장 16절에서 하신 주님의 말씀이 그대로 이루어졌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당신이 말씀하시고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이루시는 분이시다.

 

그런데 신약의 히브리서 저자는 이러한 이스라엘 자손들의 행위를

믿음에 의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히브11,29).

 

이 말은 이스라엘 자손들이 아무런 두려움이나 주저함없이 주님 말씀에 의존하여

즉각적으로 홍해를 건넜음을 시사해 주는 것이다.

 

그리고 '벽이 되어' 해당하는 '라헴 호마'(lahem homah)

'그 벽이 그들만을 위한 것'을 나타내 주고 있다.

 

 그 벽이 이스라엘 자손들을 위한 벽으로만 작용하고, 이집트 사람들을 위해서는

벽이 되지 않을 것임을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새벽녘에 주님께서 불기둥과 구름 기둥에서 이집트 군대를 내려다보시고,

 이집트 군대를 혼란에 빠뜨리셨다.'(24)  

 

여기서 '혼란에 빠뜨리셨다'에 해당하는 '와야함'(wayaham; and troubled;

and threw it into confusion) '혼란에 빠뜨리다', '교란시키다'(2역대15,6),

'어지럽게 하다'(1사무7,10)라는 뜻을 가진 동사 '하맘'(hamam) 미완료형

계속적 '와우'(wau; and)가 결합된 형태로 '그리고 그가 어지럽게 했다'라는 뜻이다.

 

이 동사는 구약에서 13회나 사용되었는데, 그중에 10회가 하느님을 주어로 삼고 있으며,

그 대부분이 이스라엘의 적대자를 당황케 하여 치시는 것을 묘사하는데 사용되었다

(여호10,10; 판관4,15).

 

그러므로 이 단어는 이스라엘이 적대자와 싸우는 전쟁에서 결코 간과할 수 없는

중요한 측면을 드러내 주고 있다.

 

 전쟁을 수행하는 것은 하느님의 군대로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이지만,

이스라엘을 도와 승리하게 하시는 분은 바로 하느님이시며 동시에

진정한 승리자가 하느님이심을 나타내 주고 있다.

 

따라서 지금 이 시대에도 사탄과의 영적 전쟁을 수행하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담대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전능하신 하느님께서 친히 우리들의 배후에서

우리 자신들을 위하여 싸워 주시기 때문이다.



♣ 믿음과 희망과 사랑의 다리가 되어 ♣ 


이 거룩한 밤에 교회는 우리를 어둠과 죄에서 빛과 생명으로 구원하신 주님의 업적을 노래합니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을 미리 보여 주는 이스라엘의 파스카는 사실 희망의 발견입니다. 절망과 위기 상황에서 홍해를 갈라 건너게 해주심 또한 희망의 표지였습니다. 파스카는 광야의 목마름과 배고픔, 지침과 외로움에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건너가는 희망의 순례입니다. 


주님께서는 “자, 목마른 자들아, 모두 물가로 오너라.”(이사 55,1) 하시며, “변치 않는 자애로”(55,3) 친히 생명과 희망의 길을 열어주십니다. 주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의 죄를 깨끗이 씻어주시고 용서해주시어, “새 마음을 주고 새 영을 넣어 주시며”(에제 36,26), 죽음의 과거에서 해방된 새로운 미래를 열어주십니다. 


오늘 복음의 빈무덤 사건에서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여인들은 어두움과 두려움을 체험합니다. 천사가 그들에게 “두려워하지 말라”고 안심시키며, 그들이 나자렛 사람 예수를 찾지만 그분은 여기 계시지 않다고 알려줍니다. 그들은 “덜덜 떨면서 겁에 질려” 무덤에서 나와 달아납니다(마르 16,8).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는 죽음의 상징인 무덤문을 열고 나가시어 갈릴래아에서 제자들을 기다리십니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네 삶의 자리에서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그분 친히 우리가 만든 두려움과 아집의 문, 이기심과 탐욕의 문, 편견과 차별의 문을 열어주시어 빛으로 나아가게 해주십니다. 이렇듯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죽음이 곧 새로운 삶의 시작이요, 또 다른 창조요 영원한 삶에로 건너감이며, 죽여도 죽지 않는 생명임을 보여주십니다. 


어떻게 이 부활의 신비를 바로 여기서 재현하며 살아야 할까요? 

무엇보다도 먼저 부활이 시공을 초월한 신비스런 사건이나 육신의 소생을 뜻하는 것이 아님을 깨달야 합니다. 부활은 거짓과 폭력, 돈과 권력의 힘 그 어떤 것으로도 죽일 수 없는 하느님의 생명을 뜻합니다. 부활은 하느님의 생명이 죽음을 이김을, 절망이 희망을 이길 수 없음을 보여준 결정적 사건입니다. 이 진리를 굳게 믿고 빛과 희망 속에 살아가야 합니다. 


다음으로 부활신앙은 무덤을 비우시고 되살아나신 예수님처럼, 죽음에 이르는 헌신과 투신으로 살아내야 할 과제이기도 합니다. 이웃과 더불어 행복하고 정의로운 세상이 되도록 나 자신에 대해 죽는 것이 부활신앙의 본질입니다. 죄악과 허물, 탐욕과 무관심, 편견과 차별, 미움과 증오를 무덤에 묻어버릴 때 참 부활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생명의 힘으로 연대하여 죽음의 문화에 맞서야 합니다. 생명을 되살리도록 자신을 내어놓고, 남의 짐을 져주지 않고서는 결코 부활을 체험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죽음으로써 그리스도와 함께 살게 될 것입니다(로마 6,8). 죽음의 문화를 생명으로 되돌리는 길은 그것뿐입니다. 


부활은 '지금, 여기에서' 재현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그분과 더불어 사랑으로 모든 것을 받아들이도록 힘써야 합니다. 죄스럽고 불의한 말과 생각과 행동의 쓰레기를 태워버리고, 주님의 영으로 나 자신과 다른 이들과 세상사를 ‘다시 새롭게 보도록’ 힘써야겠지요. 그리고 악을 무력화 할만큼의 큰 선과 무관심과 냉대를 녹이고도 남을 사랑을 지녀야겠습니다.


주님의 부활은 불신에서 믿음으로, 오류에서 진리로, 어둠에서 빛으로 건너가는 '신앙의 다리'입니다. 부활은 절망을 희망으로, 슬픔을 기쁨으로 바꿔주는 '희망의 다리'입니다. 부활은 미움에서 사랑으로, 다툼에서 용서로, 분열에서 일치로, 차별에서 평등으로, 이기심과 탐욕에서 공유와 나눔으로 나아가는 '사랑의 다리'입니다. 나아가 부활은 불의와 억압에서 정의로 건너가는 '해방의 다리'입니다. 


우리 모두 죽여도 죽일 수 없는 부활의 신비를 묵상하며, 세상에 빛을 밝히는 믿음의 다리, 희망의 다리, 사랑의 다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기경호 프란치스코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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