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수요일]진리가 자유롭게(요한 8,31-42)

2019. 4. 10. 오전 4:47:51

글자


[사순 제5주간 수요일]진리가 자유롭게(요한 8,31-42)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은 그의 신들을 섬기지 않은 세 젊은이를 불가마에 넣지만, 천사가 그들을 지켜 주는 것을 보고 탄복한다. (다니 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예수님께서는 당신 말씀 안에 머무르면 당신 제자가 되어 진리를 깨닫고 자유롭게 될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불 속의 다니엘의 세친구(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와 주님의 천사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다니3,14-20.92-92.95)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다니3, 91~92)

  

히브리어로 '다니엘''하느님께서 나의 심판관이시다' 뜻이다.

다니엘서의 작중 연대(글 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는

네부카드네자르바빌론 왕좌에 오른 b.c.605년 이후 부터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통치 시절예루살렘 공략과 바빌론 유배

크게 b.c.597년과 b.c.587년에 두 번 있었는데, 그때가 여호야킨

남부 유다를 다스리던 때였다(2열왕24,10-16; 에제1,2).

 

다니엘이란 한 인물을 통해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서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표이다.

 

다니엘서의 저작 연대(저자가 기록한 시점)는 마카베오 항쟁을 불러 일으킨

안티오코스 4세(bc175-164년)의 박해때이다.

 

본문 자체가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가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사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다니엘8,9-13; 9,27 ;11,31참조).

 

그런데 기원전 164년에 있었던 성전 정화는 언급하면서도

같은 해에 있었던 박해자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책의 저작 연대 기원전 164년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다니엘서 1~6장에 나오는 여섯 가지 이야기는

박해 상황에 걸맞지 않게 유머스럽고 긴장감이 덜하다.

 


이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출중한 인물들이 고대 근동의 궁정안에서

벌인 활약상을 전하는 3인칭 궁정 설화 전형적 예들이다.

 

이 궁전 설화들은 마카베오 항쟁 훨씬 이전에 디아스포라(본국이 아닌 곳에서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유다인들이 이방인 왕궁에서

겪었던 갈등과 성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서 저자는 이 궁정 설화들을 입수해서

마카베오의 박해 상황에 맞게 편집했을 것이다.

 



다니엘서 3장은 다니엘의 세 동료가 우상 숭배를 거절한 탓으로

불가마에 던져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이다.

 


다니엘서 2장과는 달리 3장에서 네부카드네자르

현명한 군주가 아니라 어리석고 잔인한 폭군이다.

 

그는 금신상(아마도 자기 자신의 상)을 만들어 놓고

문무대신들에게 거기다가 절을 하라고 명령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권능과 위엄을 만천하에 드러낼 뿐 아니라

이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욕망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함께

자신의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내

제국의 힘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실용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니엘의 세 친구가 거절하자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활활 타는 불가마에 던지게 한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불길을 가마 밖으로 내몰아

세 젊은이를 보호한다.

 


그때 불가마속에서 세 젊은이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그리스어 역본에만 나오는 '아자르야의 노래'

'세 젊은이의 노래'이다(다니3,24-90).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 (15)

 

본절 서두에 나오는 '이제라도' 해당하는 '케안 헨'(kean hen)

'만약 지금이라도'로 직역되며, 이미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자신이 직권으로 부여하겠다는 뉘앙스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 세 유다인들의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다니1,19.20),

과거 그들의 간절한 중재 기도로 인해 자신의 꿈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다니2,49).

이와 같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으로서는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금신상에 절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세 사람이 남는다는 것은

왕으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돌려 다시 주어진 기회에 금신상에 절한다면,

네부카드네자르는 이렇게 한 번 그들에게 은혜를 베풂으로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네부카드네자르임금이 그들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돌이킬 수 있도록

상당히 이례적인 한 번의 기회를 더 부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악기소리가 날 때에'에서 '날 때에' 해당하는 '베잇따나 띠 티쉬메운'

(beiddana di tishmeun)은 문자적으로 '너희가 듣는 바로 그 때에'

(at the time you hear) 라는 의미이다.

이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곧바로 절해야 한다는 즉각성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즉시)에 해당하는 '빠흐 샤아타'(bah shaatha)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그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임금인 자신의 명령에 거역하면

조금의 가차도 없이 즉각 불가마(풀무불)가운데 던질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당시 불가마가 금 신상 가까이에 있었고, 그 세 사람을

그 곳에 던져 넣을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졌단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수 있겠느냐?" (15)

 

네부카드네자르의 이 발언은 실상 유다인들이 믿던 하느님께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그는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대적하고 경멸하는 말을 내뱉고 있다.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신'이라는 말은 분명 '하느님'을 염두에 둔 말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손에서

이들 유다 사람들을 건져 낼 수 없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에 해당하는 '엘라흐'(elah)는 아람어에서

'하느님'을 지칭하는 단수형 명사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에 의하면, 그 하느님은 일전에 자신에게

꿈을 계시해 주시고 그 꿈의 모든 비밀을 명확하게 설명해주신

전지(全知)하신 신이셨지만, 지금은 자신의 권한 하에서 불가마에

떨어진 사람들을 안전하게 건져낼 능력이 없는 신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은

부분적이었고 불완전했으므로, 자신의 권력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능력보다 더 크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만일 이 세 사람이 네부카드네자르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무능함을 시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같은 임금의 제안이 담긴 이면의 의미를 그들이 알고 있었기에

이들 세 명의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은 목숨을 내놓고

금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극구 거부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내 손'에 해당하는 '예다이'(yedai)는 사실상

네부카드네자르 자신의 무소불위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자신의 위치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신보다 높은 최고의 신적 위치에 올려 놓고 있다.

 

이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뿐 아니라 타인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어낸 다른 인간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교만의 함정이다.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자는 자신의 근본과 한계를 쉽게 망각해 버리고

자신의 능력이 무한한 것인 양 착각하며, 자신의 존재를 종종

신격화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의 그러한 오만방자한 신성모독적 언행

세 젊은이들이 소유한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가마를 여는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19)

 

'일곱 배' 해당하는 '하드 쉬봐'(had shibah) '칠 배'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가능한 한 최상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불가마(풀무불)은 벽돌을 굽거나 금속을 녹이는 등의

용도에 맞게 일정한 온도로 가열을 했지만, 그날 만큼은

이러한 용도와 관계없이 온도를 극대화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 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킨 세 사람이

당할 혹독한 시련의 강도를 묘사한 것이며, 동시에 네부카드네자르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극한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역시도 자기 내면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한

파격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는 네부카드네자르를 신격화하고,

그가 가진 권세와 권력을 통하여 그를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 아니라,

 다친 곳 하나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2)

 


'결박이 풀려서' 해당하는 '셰라인'(sherain)은 원래 '자유롭게 하다',

'풀어주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셰레'(shere)수동태 분사형으로

'자유롭게 된'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불 속에 떨어진 세 사람에게 가해진 단단한 결박이

풀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서 하나는 불에 그 결박이 완전히 탔을 것이라는 설명

다른 하나는 네번 째 하느님의 아들 같은 존재가 풀어 주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또한 '네 사람' 해당하는 '꾸브린 아르베아'(gubrin arbeah)

'네 명의 남자들'이라는 의미이다.

불 속에 떨어진 사람의 숫자는 셋이었으며, 그들을 붙들고 던진 군사들마저

모두 용광로 밖에서 타 죽었기 때문에 이 역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거닐고 있는데'에 해당하는 '마흘레킨'(mahlekin)

'걸어 다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할라크'(halak)

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 속을 계속해서 이리저리 활보하고 있는

그 네 사람의 동작을 나타낸다.

 

그들이 이렇게 힘차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는 것은

불 속에서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다 사실을 암시한다.

 

주 하느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 광경을 설명할 길이 없다.

 


'다친 곳 하나 없이'에 해당하는 '와하발 라 이타이'

(wahabal la ithai)'상처가 전혀 없었다' 의미이다.

 

불 속의 네 사람의 상태에 대해 그 정도로 정확히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위치가 그 용광로에서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신(들)의 아들'에 해당하는 '레바르 엘라힌'(lebar elahin)

다신론(多神論)적 세계관에 익숙해 있던 당시 네부카드네자르

이교적 인지 능력을 넘어서 그 자신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표현을 천사 혹은 천사들 가운데서도 대천사 미카엘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하여

신약의 관점에서 육화(강생) 이전의 그리스도의 형상이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뜻을 가진

제2위 천주 성자이신 임마누엘의 반영이라고 본다.

 

제2위 천주 성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신실한 종들과 함께

친히 고난을 함께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고난을 견뎌내게 하셨으며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셨던 것이다.

 


천주 성자 하느님의 그와 같은 임재와 보호하심은 사실상 당시

바빌론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던 모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대표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시대와 장소가 변해도 모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에 대해

여전히 베푸시는 은혜를 암시하는 예표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내 말 안에 '머무르면'" 


 기차를 타고 여행을 하는 두 장교가 있었습니다. 한 사람은 잉거솔이라고 하는 대령이었는데, 잉거솔은 하느님을 믿지도 않을 뿐만 아니라 무신론에 대한 책까지 저술한 사람이었습니다. 또 한 사람은 루 윌리스라고 하는 육군 대장이었는데 하느님에 대하여서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상태로서 전혀 무관심한 사람이었습니다. 윌리스 장군의 부모는 그리스도교인 이었지만 윌리스 자신은 무관심 했던 것입니다. 친구 사이였던 두 사람이 주고받는 이야기는 예수님에 관한 모독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잉거솔 대령이 말했습니다. “그 예수쟁이들 말입니다. 예수가 하느님의 아들이니 하느님이니 하는 허튼 소리나 하는데, 그 예수라는 사람을 소재로 하여 에로틱한 소설을 쓰면 어떨까요? 그러면 많은 돈도 벌 수 있을 겁니다.”

윌리스는 전역을 하고서 이것저것을 해 보았으나 신통한 일이 없었습니다. 윌리스는 생각 끝에 이전에 잉거솔이 말한 대로 예수를 소재로 한 에로소설을 쓰기로 작정 했습니다. 계획하는 일이 성공하려면, 먼저 예수에 대하여 알아야 하는데 알기 위해서는 성경을 읽어야만 했습니다. 그래서 윌리스는 성경을 열심히 읽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 현장에 가서 직접 자료를 수집하기까지 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성경을 읽으면 읽을수록 예수가 실재 인물로 자신의 마음에 다가 오는 것이었습니다. 원고를 마친 내용은 처음 계획한 내용하고는 전혀 딴판이었습니다. 탈고를 마친 윌리스는 무릎을 꿇고 예수를 하느님으로 고백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 내용이 바로 영화로도 제작된 벤허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 안에 머무르기 위해서는 먼저 당신 말씀안에 머물러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당신 말씀은 진리이신데, 그 진리가 우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십니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가장 좋은 방법은 그분의 말씀을 끊임없이 묵상하여 그 진리를 깨닫는 것입니다. 말씀을 묵상하다보면 기적을 보는 것과 같은 신기한 말씀의 힘을 깨닫게 됩니다. 그러나 먼저 성경을 읽지 않는다면 그 말씀이 어떻게 나에게 영향을 줄 수 있겠습니까? 위의 예처럼 안 좋은 지향으로 성경을 읽어도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말씀의 힘입니다. 그러나 그 말씀을 읽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말씀 안에 머무는 것입니다. 요한복음에서 머문다는 단어는 큰 의미를 지닙니다. 그렇게 머물러서 나의 것이 되지 않으면, 오히려 말씀이 독이 되기도 합니다.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유다인들은 매일 성경을 읽고 공부하여 성경을 외우다시피 하는 이들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말씀이 그들 마음에 있지 못했던 것입니다. 읽는다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 말씀을 통해 내가 변화되어야 참으로 말씀을 받아들인 것입니다. 성경을 너무나 잘 알던 바오로도 결국 교회를 박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말씀은 읽고 공부해서 만족되는 것이 아니라 내 삶이 그 말씀 때문에 변화될 때까지 그 말씀을 잡고 놓지 않는 끈기와 성령의 비추임이 필요한 것입니다. 바오로는 아나니야에게 안수를 받아 성령을 받고 그 성령의 빛으로 성경을 다시 묵상해서 재해석 하였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이 그를 자유롭게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가장 부족한 것은 말씀이 아닙니다. 우리는 마음만 먹으면 말씀을 읽고 쓰고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말씀 안에 충분히 머무는 것은 잘 하지 못합니다.


미국의 존스 홉킨스 대학병원의 벤 카슨 의사는 신의 손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는 모든 의사들이 포기한 하루 120번의 발작을 일으키는 4살짜리 악성뇌종양환자를 수술해서 완치시켰으며 세계에서 처음으로 머리와 몸이 붙은 샴쌍둥이를 분리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러나 신의 손으로 불리며 성공을 거둔 벤 카슨 박사지만, 그의 어린 시절을 보고 그가 위대한 의사가 되리라고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습니다. 그는 디트로이트 빈민가에서 태어났고, 8세 때 부모님의 이혼으로 불행한 가정에서 자랐으며 소년기에는 흑인불량배들과 어울려 싸움을 일삼는 장래가 어두운 아이였습니다. 그는 피부가 검다는 이유로 친구들에게 따돌림을 당했고 초등학교 때는 항상 꼴지를 도맡아 했습니다. 어느 날 그에게 기자가 찾아와서 질문을 했습니다. “오늘 당신을 만들어 준 것은 무엇입니까?” “나의 어머니 쇼냐 카슨 덕분입니다. 어머니는 내가 늘 꼴찌를 하면서 흑인이라고 따돌림을 당할 때도 , 너는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할 수 있어. 노력만 하면 할 수 있어라는 말을 끊임없이 들려주시며 격려해 주셨습니다.”   


이렇게 어머니의 한마디 말에 머물 줄 알아도 삶 자체가 변화될 수 있습니다. 말씀은 흘러넘치지만 그 말씀이 내 안에서 이런 열매를 맺는 경우는 많지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 말씀 안에 머물라고 하셨습니다. 보석 감정하는 것을 보셨을 것입니다. 한 눈에 그것이 보석인지 알아맞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전문가도 랜턴이 달린 커다란 돋보기를 쓰고 핀셋으로 집어 이리 돌리고 저리 돌리며 그것에 진품인지 가짜인지 확신이 들 때까지 집중하여 살펴봅니다. 하느님의 말씀은 보석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합니다. 우리는 한 마디, 혹은 한 단어라도 그것이 완전히 성령의 비추임으로 완전히 나의 것이 될 때까지 그 말씀 안에 머물 줄을 알아야하겠습니다.




다니엘 예언서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사실을 알려 줍니다. 저자는, 시리아의 셀레우키아 임금인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시대에 일어난 종교 박해의 상황을 나타내고 그들의 신앙에 충실한 유다인들을 지키려고, 기원전 6세기의 바빌론 유배 시대에 일어난 사건들을 전해 줍니다.
안티오코스가 예루살렘 성전에 제우스 상을 세웠던 것처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도 자신이 세운 상에 절하지 않는 모든 이를 사형에 처합니다. 다니엘의 젊은 세 친구,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는 임금이 세운 상에 절하지 않아 사형을 받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에서 세 젊은이를 구해 주시고 불경한 임금은 회개하게 됩니다.
박해는 의인의 믿음을 보여 줍니다. 의인은 선과 악 사이의 싸움에서 하느님께 충실하면서 학대와 고문에도 자신의 내적 자유를 지키며 하느님의 은혜에 힘입어 승리를 거두고 맙니다. 초기 박해들부터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졌으나 하느님을 찬미하며 견디어 낸 세 젊은이로 표상된 교회를 보게 됩니다. 박해 속에서도 교회는 끊임없이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하고 노래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은 믿음으로 당신을 받아들이지 않는 적대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변론을 보여 줍니다. 아브라함은 하느님의 부르심에 무조건 응답하면서 그분의 약속을 신뢰하는 마음을 지닌 자유를 표상합니다. 아브라함의 참된 후손들은 예수님께서 행하신 것처럼, 하느님 앞에서 아브라함의 믿음과 태도를 닮아 가는 이들입니다. 오늘날 개인적인 신앙보다는 하느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신앙만이 우리를 구원해 줍니다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댓글 0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

매일말씀묵상

목록 전체보기 →
[사순 제5주간 금요일]하느님 독 (요한10,31-42)19.04.12조회 70[사순 제5주간 목요일]영생 (요한 8,51-59)19.04.11조회 59[사순 제5주간 수요일]진리가 자유롭게(요한 8,31-42)19.04.10조회 42[사순 제5주간 화요일]내가 나임을 (요한 8,21-30)19.04.09조회 81[사순 제5주간 월요일]세상의 빛(요한 8,12-20)19.04.08조회 68[사순 제4주간 토요일]성경 연구(요한 7,40-53)19.04.06조회 82[사순 제4주간 금요일]초막절 (요한 7,1-2.10.25-30)19.04.05조회 55[사순 제4주간 목요일]성경이 증언 (요한 5,31-47)19.04.04조회 43[사순 제4주간 수요일]지금이 바로 그때 (요한 5,17-30)19.04.03조회 61[사순 제4주간 화요일]벳자타 못가 병자 치유 (요한 5,1-16)19.04.02조회 63[사순 제4주간 월요일]왕실 관리 아들 치유(요한 4,43-54)19.04.01조회 90[사순 제3주간 토요일]기도 (루카 18,9-14)19.03.30조회 90[사순 제3주간 금요일] 사랑 (마르 12,28ㄱㄷ-34)19.03.29조회 69[사순 제3주간 목요일] 벙어리 치유 (루카 11,14-23)19.03.28조회 58[사순 제3주간 수요일]율법과 예언서 완성 (마태 5,17-19)19.03.27조회 42[사순 제2주간 금요일]악한 소작인의 비유(마태 21,33-43.45-46)19.03.21조회 80[사순 제2주간 목요일]부자와 라자로 (루카 16,19-31)19.03.21조회 1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