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4주간 월요일]왕실 관리 아들 치유(요한 4,43-54)

2019. 4. 1. 오전 5:2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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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4주간 월요일]왕실 관리 아들 치유(요한 4,43-54)


이사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리니,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라고 한다. (이사 65,17-21)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7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18 그러니 너희는 내가 창조하는 것을 대대로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보라, 내가 예루살렘을 ‘즐거움’으로, 그 백성을 ‘기쁨’으로 창조하리라.
19 나는 예루살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나의 백성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라. 그 안에서 다시는 우는 소리가, 울부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리라.
20 거기에는 며칠 살지 못하고 죽는 아기도 없고  제 수명을 채우지 못하는 노인도 없으리라. 백 살에 죽는 자를 젊었다 하고 백 살에 못 미친 자를 저주받았다 하리라.
21 그들은 집을 지어 그 안에서 살고 포도밭을 가꾸어 그 열매를 먹으리라.”


예수님께서는 카나에서 왕실 관리가 카파르나움에 있는 앓아누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자 고쳐 주신다. (요한 4,43-54)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사마리아를 43 떠나 갈릴래아로 가셨다.
44 예수님께서는 친히, 예언자는 자기 고향에서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증언하신 적이 있다.
45 예수님께서 갈릴래아에 가시자 갈릴래아 사람들이 그분을 맞아들였다. 그들도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갔다가, 예수님께서 축제 때에 그곳에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기 때문이다. 46 예수님께서는 물을 포도주로 만드신 적이 있는 갈릴래아 카나로 다시 가셨다. 거기에 왕실 관리가 한 사람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카파르나움에서 앓아누워 있었다.
47 그는 예수님께서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에 오셨다는 말을 듣고  예수님을 찾아와, 자기 아들이 죽게 되었으니  카파르나움으로 내려가시어 아들을 고쳐 주십사고 청하였다.
48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49 그래도 그 왕실 관리는 예수님께 “주님, 제 아이가 죽기 전에 같이 내려가 주십시오.” 하고 말하였다.
50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가거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그 사람은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이르신 말씀을 믿고 떠나갔다.
51 그가 내려가는 도중에 그의 종들이 마주 와서 아이가 살아났다고 말하였다.
52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53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
54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유다를 떠나 갈릴래아로 가시어  두 번째 표징을 일으키셨다.



 

 사순 제4주간 월요일 제1독서 (이사야65,17-21)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17)


이사야서 65장 17절부터 25절까지는 주님께서 장차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 실현될 종말론적 축복에 대한 예언을 다룬다.

 

이와 같은 예언은 메시야 왕국과 관련하여 이사야서 11장 6-9절, 25장 6-8절, 26장 19절, 35장 등에서 분명하게 또는 희미하게 예언되었다. 또한 이것은 요한 묵시록 21장의 주제이기도 하다.


이러한 새 하늘과 새 땅의 예언 남은 자의 보존과 악인의 심판을 예언한 이사야서 65장 8-16절 단락 바로 다음에 제시된다는 것은, 이 새로운 왕국이 주 하느님의 신실한 종들만 누릴 수 있는 의로운 왕국이라는 사실을 암시한다.


그곳은 어린 양의 피로 구속함을 받은 거룩한 자들 오직 어린 양의 생명의 책에 기록된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으며(묵시21,8.27), 다시는 죽음이나 눈물이 없고(이사25,8; 묵시21,4), 주님을 아는 지식으로 가득할 것이므로(이사11,9),  주님께서 그 왕국에 머무는 백성들의 모든 소망을 다 알고 그 소원대로 축복을 주시는 곳이다(이사65,24).


이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대한 예언은 궁극적으로 영원한 천국의 모습(루카16,23; 요한14,2; 필리3,20; 1테살4,17; 묵시7,15-17; 22,1-5)을 연상케 하는 예언이라고 단정할 수 있다.


본 단락 예언의 궁극적 성취는 요한 묵시록 21장의 내용과 더불어, 그리스도 재림 이후 종말의 날, 모든 세대의 성도들이 영원히 누릴 궁극적인 축복인 새 하늘과 새 땅의 이상과 관련된 축복으로 여겨야 한다.


한편, 새 성경에는 번역되지 않았지만, 원문상 본절은 이유 접속사 '키'(ki)로 시작된다. 이것을 고려할 때, 앞절인 이사야 65장 16절 후반절에 제시된 것의 이유를 말하는 것으로 간주된다.

하느님의 백성들이 과거에 당하던 환난을 모두 잊고 곤경을 완전히 벗어버릴 수 있게 되는 이유를 제시하는 내용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하느님께서 이루실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있다. 하느님께서 창조하시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아담의 타락 이후 죄가 들어와서 오염된 이 세상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세상이 될 것이다.


'보라, 나 이제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리라'로 번역된 원문은 '키 힌니 보레 샤마임 하다쉼 와아레츠 하다샤'<ki(for)  hinni(behold)  bore(i create)  shamaim(heavens) hadashaim(new)  waarets(and a earth) hadasha(new) ; behold, i willnew heavens and a new earth>이다.


여기서 '창조하리라'에 해당하는 '보레'(bore)원형 '빠라'(bara)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하신 주님의 창조 사업을 묘사한 단어(창세1,1) 동일한 동사라는 사실을 통해서도 드러나지만, 여기에서 예언되고 있는 새 하늘과 새 땅은 엄밀히 말해서 현재의 것을 바탕으로 새롭게 개조하는 것이 아닌 본질적으로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창조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그 세계에는 지금 이 세상에서 범람하고 있는 죄와 고통, 또는 저주나 죽음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사도 베드로도 옛 세계와 완전히 사라져 버린 후 새 하늘과 새 땅이 올 것이라고 예언하였다(2베드3,12-13).


한편 본문에서 '빠라'(bara) 동사는 임박한 미래를 나타내는 분사형으로 표현되어 있다. 이것은 이처럼 새로운 창조가 임박했다는 사실을 암시한다.


이사야 예언자가 본 단락을 예언하고 있는 시점은 대략적으로  북부 이스라엘앗시리아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고, 남부 유다 역시 앗시리아에 의해 수많은 성읍들이 유린을 당했고, 또한 장차 바빌론 침공에 의한 남부 유다파멸의 그림자먼 발치에서 다가오고 있는 시점이었다.


아울러 이 시기에 남부 유다는 내적으로 불의와 부정, 폭력과 우상 숭배 등으로 몸살을 앓고 있었으며, 권력자들과 기득권자들이 저지르는 많은 죄악과 폭력으로 말미암아 소외된 자들의 눈물과 고통과 신음소리가 끊이지 않는 상황이었다.


그러한 급박한 위기 상황과 답답한 현실 상황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장차 하느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하면서 창세기 1장 1절에서 사용된 '빠라'(bara)동사를 분사형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놀라운 일이 임박했다는 사실을 강조하고자 했다.


물론 현재의 우리가 볼 때에는, 2,700년 전에 이사야 예언자가 새 하늘과 새 땅을 예언한 것이고 그렇게 임박했다는 종말은 아직도 오지 않았다.

하지만 영원하신 하느님, 천년을 하루같이 여기시는(시편90,4) 하느님의 관점에서(2베드3,8) 이것은 곧 닥칠 일임과 동시에 반드시 이루어질 임박한 사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전능하신 하느님, 절대 주권자이신 하느님께서는 당신이 계획하신 일을 반드시 이루시며 언제든지 그 일을 이루실 수 있기 때문에, 이 일을 이처럼 임박한 미래의 일, 곧 닥칠 일로 묘사한 것이다.

이러한 표현은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칫 주님께 대한 믿음이 흔들릴 수 있는 의로운 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한 의도에서 제시된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예전의 것들은 이제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으리라.'

본문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에 따른 결과 가운데 하나의 현상을 말해준다.

여기에는 강한 부정의 의미를 나타내는 부정어 '로'(lo)가 두번이나 사용되어 결코 기억되지도 않고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사실이 강조되고 있다.


또한 '예전의 것들은'에 해당하는 '하리쇼노트'(harishonoth)는 복수형 단어로서 직역하면 '이전 것들'(the former things)이 된다. 이것은 이사야서 65장 16절에 예언된 '지난날의 곤경들' 포함하여 옛 세상에서 겪을 수 있는 모든 종류의 고난들, 죄악들을 다 포함한다.


그리고 '마음에 떠오른다'는 의미로 사용된 '타알레나 알 레브'(thaallena alleb)문자적으로 '마음의 표면위로 떠오르다'(ascend on the heart; come to mind)

뉘앙스를 가지고 있다.

본문의 조금도 기억나지도, 마음에 떠오르지도 않는다는 표현은 새 하늘과 새 땅의 창조가 이전의 것들과는 전혀 새로운 것이 될 것임을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지나간 곤경들'로 부터 진정으로 자유로워지기 위해서는 곤경 자체에서 해방될 뿐 아니라 그 곤경을 당했던 기억 자체에서 완전히 벗어나서 기억의 치유가 이루어져야 한다.

그런데 주님께서 창조하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그렇게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생활이 과거의 부정적 상황과 완전히 단절된 행복을 향유하고 구가하는 것임을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사순 제4주간 월요일 복음(요한4,43~54)


그래서 그가 종들에게 아이가 나아지기 시작한 시간을 묻자, "어제 오후 한 시에 열이 떨어졌습니다."하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그 아버지는 바로 그 시간에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신 것을 알았다. 그리하여 그와 그의 온 집안은 믿게 되었다.(52~53)


왕실 관리가 자기 종들이 전하는 말을 듣고서 먼저 차도가 보이기 시작한 시간을 마치 수사관이 심문하듯 세밀하게 물었다.


이렇게 그가 자기 아들이 차도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에 집착하는 이유는 이 일이 우연인지, 아니면 인술에 의한 것인지, 예수님의 능력에 의한 것인지 확인하고자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세밀한 확인을 통해서 그는 의심할 것 없이 예수님의 신적 능력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확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이것은 결국 자연스럽게 '그와 그의 온 집안이 믿게 되었다'(53절)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그리고 왕실 관리가 종을 통해 아들의 병이 낳은 시점으로 확인한 시간은 '어제 오후 한시'라고 나오는데, 유대인들의 시간으로는 '어제 제 칠시'이며, 여기서 '어제'라고 표현한 것은 일몰 시간을 기준으로 하루를 계산하는 유대인의 관습 때문이며, 그래서 카나에서 멀리 떨어진 카파르나눔으로 돌아가고 있던 왕실 관리가 종과 만난 시간은 오후 한시로부터 5시간 이상 지난 시간으로 보는 것이 전혀 무리가 없다.


요한 복음 4장 53절의 '알았다'에 해당하는 '에그노'(egno; knew)'기노스코'(ginosko)의 부정 과거 시제인데, 이 단어는 주로 관찰과 경험에 의해 아는 것을 나타낸다.

이 왕실 관리와 그의 온 집안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서 믿음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니라 그분이 행하신 기적을 체험하고서야 비로소 믿게 되었음을 시사해 준다.


관찰과 경험에 바탕을 둔 지식이 확실하기는 하지만, 주님의 말씀보다 표징과 이적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은 적절한 믿음의 태도라고 볼 수가 없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는 이 사건이 주는 긍정적인 측면도 있다. 그것은 체험적인 신앙이 인간을 견고하게 세워줄 수 있기 때문이다.


'믿게 되었다'에 해당하는 '에피스튜센'(episteusen; believed)'피스튜오'(pisteuo)의 부정 과거 시제로 사경을 헤매던 아들의 다시 살아남이 그 집안에

미친 결과를 나타낸다.


이처럼 이러한 이적을 체험한 결과로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당시 상류층 사람들이 예수님을 적대시한 경우가 많았던 사회적 분위기를 감안할 때 왕실 관리의 위치에서 결코 쉽지 않은 결단을 그가 내린 것으로 보인다.


'그의 온 집안이'에 해당하는 '헤 오아키아 아우투 홀레'(he oikia autou hole; all his household)를 가리키는데, '오이키아'(oikia)건물로서의 집의 의미보다는 훨씬 많은 용례에서 '가족'(household)'식구'(family)를 나타낸다.


예수님을 알지 못했던 그 왕실 관리가 소문으로 들었거나 한 두 번 본 일이 있는 예수님께로 자신의 절박한 문제를 가지고 감으로써, 그와 그의 온 집안에 값으로 계산할 수 없는 축복이 찾아오게 되었다는 것예수님께 관한 지식을 널리 알리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깨닫게 한다.



<하느님의 계획은 따로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 등장하는 왕실 관리는 꽤 고관이었던가 봅니다. 그러나 이 한세상 살아가다보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인생의 풍파를 만나게 되고 좌절도 겪게 되기 마련이죠.

   그리 잘 나가던 인생이었는데, 단 한 번도 큰 어려움 겪지 않고 승승장구해온 날들이었는데, 이번에 큰 암초에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금이야 옥이야 애지중지하던 아들이 덜컥 중병에 걸리고 만 것입니다. 부자였기에 아들의 치유를 위해 별의별 방법을 다 동원해봤겠지요. 그러나 백약이 무효였습니다.


   이런 그에게 누군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를 전해줍니다. 귀가 번쩍 뜨인 그는 즉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납니다. 그가 살던 카파르나움에서 예수님께서 계시던 카나까지는 당시로서는 꽤 먼 거리였습니다. 30km 이상 되는 거리였으니, 약 80리였습니다.

   이윽고 왕실관리는 예수님 앞에 당도합니다. 어렵게, 정중하게 말문을 엽니다.

   “선생님, 제 아들이 거의 다 죽게 되었습니다. 제발 저와 같이 가셔서 좀 도와주십시오.”


   아들의 위중함 앞에 왕실관리는 더 이상 체면도 뭣도 없습니다. 아들만 낫게 된다면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상관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서 예수님의 반응은 의외입니다. “알았다. 지금 당장 가자. 모든 것이 잘 될 테니 걱정하지 말거라.”라는 대답을 기대했는데...

   그보다는 책망 비슷한 말씀을 던지십니다.

   “너희는 표징과 이적을 보지 않으면 믿지 않을 것이다.”


   왕실관리, 예수님께 올 때는 나름대로의 개인적 계획을 지니고 왔었습니다. 일단 예수님을 자기 집으로 모시고 가서, 아이를 치유시키는 데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준비하게 한후, 아들이 치유되고 나면 큰 잔치를 벌여야지. 예수님께서 오랜만에 잘 드시도록 배려해야지. 그리고 제대로 사례도 해야지. 한 며칠 편히 쉬시게 해드려야지.”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런 모든 인간적인 계획을 뒤집으십니다. 그까지 가시지도 않습니다. 번거롭게 민폐도 끼치지 않으십니다. 그저 한 말씀만 하십니다.

   “가라. 네 아들은 살아날 것이다.”

   예수님께서 왕실관리에게 요구하신 것은 단 한 가지 ‘믿음’뿐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메시아이라는 진리, 그분께서는 못하실 일이 없다는 것, 그분께서는 우리를 반드시 구원하시리라는 믿음, 그분께서는 우리를 영원한 생명으로 인도하시리라는 단 하나의 믿음을 요구하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신앙을 조금 점검해보면 좋겠습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그리 큰 것이 아닙니다. 그리 복잡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님이 곧 메시아 하느님이시라는 것, 그분은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우리를 위해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목숨까지 바치신 분이라는 것, 그분의 죽음으로 인해 우리 모든 죄인들도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다는 것...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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