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화요일]내가 나임을 (요한 8,21-30)

2019. 4. 9. 오전 4:3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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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순 제5주간 화요일]내가 나임을 (요한 8,21-30)







주님께서 광야에서 불평을 하는 이스라엘 백성에게 불 뱀을 보내시어 많은 백성이 죽었는데, 모세가 기도하여 구리 뱀을 매달아 쳐다보면 살아나게 한다. (민수21,4-9)
그 무렵 이스라엘은 4 에돔 땅을 돌아서 가려고, 호르 산을 떠나 갈대 바다로 가는 길에 들어섰다. 길을 가는 동안에 백성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5 그래서 백성은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당신들은 어쩌자고 우리를 이집트에서 올라오게 하여, 이 광야에서 죽게 하시오? 양식도 없고 물도 없소. 이 보잘것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6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 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7 백성이 모세에게 와서 간청하였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8 그러자 주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너는 불 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 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9 그리하여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예수님께서는 위에서 오셨다고 하시며, 사람의 아들을 들어올린 뒤에야 당신임을 깨달을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8,21-30)
그때에 예수님께서 바리사이들에게 21 이르셨다. “나는 간다. 너희가 나를 찾겠지만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22 그러자 유다인들이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하였다.
23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
24 그래서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라고 내가 말하였다. 정녕 내가 나임을 믿지 않으면,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25 그러자 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누구요?” 하고 물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처음부터 내가 너희에게 말해 오지 않았느냐?
26 나는 너희에 관하여 이야기할 것도, 심판할 것도 많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참되시기에,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것을 이 세상에 이야기할 따름이다.”
27 그들은 예수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28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 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
29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30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시자 많은 사람이 그분을 믿었다.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민수21,4-9)


"갈대 바다로 가는 길" (4)


'홍해 길' 사해남부에서 '아라바'(여호11,2) 광야로 거쳐 홍해의 동쪽에 위치한 아카바 만의 항구 도시인 '에츠욘게베르'(1열왕9,26)에 이르는 길이었다.  그 대부분이 사막 지대인 아라바 광야를 거쳐야 하였기 때문에, 매우 거칠고 여행하기에 힘든 길이었다.


이스라엘의 출애굽 1세대 역시 가나안 땅을 앞에 두고 카데스에서 다시 돌이켜 '갈대 바다쪽 광야로' 떠난 적이 있다.(민수14,25) 그런데 이제 그 길을 통하여 가나안에서 점차 멀어졌을 뿐 아니라 매우 험한 길을 가게 되었므로 백성들의 마음은 조급해 질 수 밖에 없었을 것이다.(신명2,8참조)


"마음이 조급해졌다" (4)


'조급해지다'(상하다)에 해당하는 '티크챠르'(tiqetsar)의 기본형인 '카차르'(qatsar)는  본래 '짧다'(11,23)란 뜻을 지닌 동사인데, 본문과 같이 '마음'(네페쉬; nepesh)을 주어로 할 때는 '(마음이)참을 수 없다' 뜻을 지닌다.


즉 '갈대 바다로 가는 길'이 거칠고 험했기에, 이스라엘 백성들의 마음이 견디지 못하고 약속의 땅 가나안으로 빨리 들어 가기만을 재촉하며 조급해진 상태를 암시한다. 말하자면 '갈대 바다로 가는 길'을 참아내지 못한 것은 그들의 육체 때문이 아니라, 가나안을 주시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의 성취를 바라며, 끝까지 인내하지 못하고 조급했던 그들의 마음 때문이었던 것이다.


"하느님과 모세에게 불평하였다" (5)


'에게'로 번역된 히브리어 전치사 '빼'(be)는 보통 '~안에'라는 뜻이다. 여기서는 '~을 대항하여'(against)란 뜻을 가진다. 그리고 '불평하였다'로 번역된 '예답베르'(yedaber)의 기본형인 '따바르'(dabar)는 '말하다'란 뜻을 가진 동사이다.(민수12,1)


따라서 본문을 직역하면, '그리고(그 백성은) 하느님을 대항하여 그리고 모세를  대항하여 말했다' 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거칠고 험한 '갈대 바다로 가는 길'로 인하여 그리고 양식도 물도 없음으로 인해서 하느님을 대적하는 죄를 범했던 것이다.


"이 보잘것 없는 양식은 이제 진저리가 나오" (5)


먼저 '보잘 것 없는' 해당하는 '켈로겔'(qelogel)이란 형용사의 어근은 '가벼운', '가치없는', '만족스럽지 못한'이란 의미이다.  여기서의 '이 보잘것 없는 양식'은 특별히 '만나' 지칭한다.(탈출16,31)


그리고 '진저리가 나다'로 번역된 '카차'(qatsah)의 원형 '쿠츠'(quts)는 '싫어하다'(잠언3,7), '미워하다'(1열왕11,25), '가증스럽게 여기다'(레위20,23)등으로 번역되는데, 이 동사는 단순히 싫어하는 정도를 넘어서 강한 거부감을 나타내며, 나아가서는 그 대상이 없어지고 끊어지기를 바라는 감정적 반응을 나타내는 말이다.


이 만나는 출애굽 초기, 굶주림에 허덕이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하느님께서 직접 내려 주신 것으로(탈출16,12), 처음에는 꿀처럼 달았던 만나를 그들은 기쁘고 감사한 마음으로 먹었었다.

그러나 이제 40년이 지나가면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만나가 싫어지고 질리게 되었을 뿐 아니라 급기야 이 음식에 대한 불평을 하게 되었고, 나아가서 음식을 주신 하느님의 존재와 출애굽 자체마저 원망하게 되고 말았다.(민수20,24 ; 신명9,24)

이것은 곧 하느님께 대한 심각한 불신앙이었고, 하느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는 교만한 행위였다.


"불뱀들은" (6)


'불뱀들'이란 단어는 '뱀'을 뜻하는 '네하쉬'(nehash)의 복수형인 '네하쉼'(nehashim)에

'불사르다'(민수19,5), '불타다'(1사무30,3)란 뜻을 지닌 동사 '사라프'(saraph)에서 유래된 명사 '세라핌'(seraphim)이 결합된 것이다.


이 뱀들은 당시 이스라엘이 여행하던 광야 지역(특히 아라바 지역)에 많이 서식하던

독사 가운데 한 종류로서(신명8,15), 등에 '불타는 듯한 붉은 반점'이 있는 뱀을 일컫는다.

이 뱀들은 독성이 강해서 한 번 물리게 되면, 그 독이 온 몸에 퍼지며 높은 열이 올라 결국 죽음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따라서 '불뱀'이란 이름은 뱀의 모양 뿐만 아니라 그 맹독성을 강조하여 붙여진 이름이기도 했다.


"그러자 주님께서 백성에게 불뱀들을 보내셨다.  그것들이 백성을 물어, 많은 이스라엘 백성이 죽었다" (6)


'보내셨다'에 해당하는 '와에솰라흐'(wayeshalah)는 '솰라흐'(shalah)의 강조형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이다.

기본적으로 사람이나 선물등을 '보내다'란 뜻을 지닌 '솰라흐'가 강조형으로 쓰이면 '놓아 주다'(예레14,53), '풀어 주다', '해방하다'란 의미를 지니게 된다.(이사45,13 ; 즈카9,11)

본문에서는 하느님께서 보호의 손길을 거두시고, 심판을 위해 적대적인 것을  풀어 놓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예레9,16 ; 아모4,10)


하느님께서는 가나안의 진입을 위한 남은 여정을 참아 내지 못하고, 식물과 물이 없음으로 인해, 하느님을 교만하게 대적함으로써 범죄한 이스라엘 백성들을 징계하시는   아라바 광야에서 서식하던  '불뱀'들을 보내셔서 그들을 물게 하셨던 것이다.


"우리가 주님과 당신께 불평하여 죄를 지었습니다.   이 뱀을 우리에게서  치워 주시도록 주님께 기도해 주십시오" (7)


'우리가 ~죄를 지었습니다' 해당하는 '하타누'(hatanu)는 '(목표를)빗나가다'(잠언8,36 ;욥5,24), '(관습과 윤리상의)범죄하다'(1열왕18,14),'비난할 만하다'(창세43,9 ; 44,32)등의 뜻을 지닌 '하다'(hata)의 1인칭 공동 복수형이다.

따라서 본문에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에게 주신 목표, 하느님의 뜻을 어기고 잘못된 방향으로 빗나갔다는 의미이다.


즉 가나안 땅을 주시리라는 하느님의 약속이 그들에게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잠시의 고난을 인내하지 못하였고, 하느님을 대적하여 교만하게 굴었다. 이러한 이스라엘의 행위는 하느님의 선하신 뜻에서 크게 빗나간 것으로서,  하느님께 죄를 범한 것이다.


한편 본구절은 불뱀으로 인한 재난이 자신들의 죄로 인한 하느님의 심판이었다는 것을 백성들이 깨닫고 고백하는 장면이다


이렇듯 하느님께서 그 사랑하시는 자에게 행하시는 징계는 회유와 권면의 채찍질로서, 그들로 하여금 범죄의 길에서 회개하고 돌이키게 하기 위한 선하신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였다" (7)


'기도하였다'에 해당하는 '이트팔렐'(yithphalel)은 '팔랄'(phalal)동사의 재귀형으로 '기도하다'(창세20,7 ;욥42,8)란 뜻이다. 그런데 이 동사의 강조형은 다소 뜻이 변해 '심판하다', '다스리다'(시편106,30),  '중재하다'(1사무2,25) 등의 의미를 갖는다.


더욱이 '~을 위하여' 뜻의 '빼아드'(bead)는 기도, 간구등과 관련하여 예언자들을 포함한 지도자들의 중재적인 역할을 강조하는 전치사이다.(탈출8,28 ; 1사무12,19 ;2열왕19,4 ;예레21,2) 또한 사제들에게 준 명령에도 이 단어를 사용하여 '~을 위하여(뻬아드) 속죄하라'는 권면이 나온다.(레위9,7 ;에제45,22) 따라서 본문은 모세의 백성을 위한 중보 기도였음을 알 수 있다.


"너는 불뱀을 만들어 기둥 위에 달아 놓아라.  물린자는 누구든지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8)


여기서는 실제적으로 '불뱀'과 모양이 비슷하게 만들어진 '구리뱀'(놋뱀)을 말한다. 겉으로는 불뱀의 형상을 가졌지만 독이 없었고, 또 전혀 해가 없을 뿐 아니라 이를 쳐다보는 자가 죽음에서 벗어날 수 있었던 이 '구리뱀'(놋뱀)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 것이다.(요한3,14.15 ;갈라3,13 ;골로2,15)


'기둥'(장대)에 해당하는 '네쓰'(nes)는 '빛나다'(즈카9,16), '눈에 띄다'라는 뜻의 '나싸쓰'(nasas)에서 유래한 말로, 곧 많은 사람들이 눈에 확연히 띄도록, 끝에 헝겊을 매단 '기'(旗)(예레50,2), '기호'(이사11,2)를 뜻하는 말이다.


구약성경에서 이 단어는 어떤 공동의 행위를 위해서 또는 중요한 정보의 전달을 위해서 사람들에게 알리고 모이게 하는 '표지'를 의미하고 있다.(이사13,2 ;18,3 ;31,9 ;예레4,21 ;에제27,7) 특별히 '네쓰'는 주님을 부르는 명칭 가운데 '주님은 나의 깃발(군기)'이라는 뜻이 있는 '야훼 니씨'(탈출17,15)와 관련이 있다.


따라서 '기둥'으로 번역된 '네쓰'는 단순한 장대를 의미한다고 생각하기 보다는 특별한 표지를 통하여 중요한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 세운 기(旗)로 보아야 한다. 이 표지는 바로 불뱀의 형상으로 만들어진 구리뱀이었고, 그 정보는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기둥 위에 단 구리뱀은 하나의 '공개적인 전시', '승리의 표지'였다. 치명적인 독을 가진 불뱀을 구리뱀의 형상으로 처형한 하나의 승리적인 전시였던 것이다.


이것은 바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사건을 예표한다. 즉 십자가의  사건은 한 귀퉁이에서 소수의 사람들만이 알 수 있게 행해진 것이 아닌,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사 온 인류의 죄를 대속하시고, 구원자가 되셨다는 하느님의 사랑의 메시지를 널리 선포하시기 위해, 빛이 있는 곳에서 행해진 대승리의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것을 보면 살게 될 것이다" (8)


'보면'으로 번역된 '웨라아'(weraah)에서 접속사 '와우'(wau)는 이어 나오는 '와하이' (wahai ; 살게 될 것이다)에 결합된 접속사 '와우'와 연계되어 단순히 '그리고'란 뜻만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행동의 계속적인 진행을 나타내어 '그리고 그때'란 뜻을 지닌다.

따라서 '웨라아 오토'(weraah otho)는 '그리고 그것을(기둥에 달린 구리뱀) 바라볼 때'번역할 수 있다.


그리고 '살게 될 것이다' 해당하는 '하이'(hai)는 기본형인 '하야'(haya)인데,  이 동사는 '살다'(에스텔4,11), '회생하다'(2열왕13,21)란 뜻을 가진다.

이처럼 '생명의 보존'을 기본적 개념으로 지니면서도 '생명의 회복'이란 보다 적극적인 개념을 동시에 내포하는 동사 '하야'가 쓰인  것은 불뱀에 물려 고통받는 자들을 '치유하시는 하느님'(탈출15,26)의 은혜 보여주는 것인 동시에,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서 영원한 생명과 구원을 주실 예수 그리스도를 계시하고,  또 그를 통한 하느님의 사랑을 표현 것이다.



이와 같이 불뱀에 물려 목숨이 경각에 달린 자들이 하느님의 은총의 역사(役事)를 덧입어 살아날 수 있는 길은 오로지 '기둥에 달린 구리 뱀'을 바라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구리뱀' 자체에 어떤 신통력이 있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약속의 말씀을 믿고 그 말씀대로 절대 순종하는 법을 가르치시기 위한 것이다.


"모세는 구리 뱀을 만들어 그것을 기둥 위에 달아 놓았다.  뱀이 사람을 물었을 때, 그 사람이 구리 뱀을 쳐다보면 살아났다." (9)


'쳐다보면'에 해당하는 '웨힙비트'(wehibbit)는 한번을 제외하고(이사5,30) 모든 용례에서 사역형으로만 사용되는 동사 '나바트'(nabat)에 접속사 '와우'(wau)가 결합된 형태로 쓰였다.


'나바트'는 '바라보다'(탈출33,8), '살펴보다'(시편142,5), '감찰하다'(애가5,1), '앙망하다'(시편34,6) 등으로 번역되는데, 특히 이 동사가 '하느님을 바라보다'란 뜻으로 쓰일 때는  '하느님께만 눈을 고정시키고 유일한 도움이신 하느님의 뜻에 따라 살아가다'의미를 내포하게 된다.(시편34,6 ;이사51,1 ;22,11)


본문 역시 온전한 믿음과 신앙의 눈으로 하느님을 바라본다는 개념을 내포하고 있다. 실제로 기둥에 달아놓은 구리뱀을 바라보면 살리라는 하느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 들이고, 그 말씀을 따라 그것을 바라보는 자는 불뱀에 물린  상처와 모든 증상이 말끔히 치유되었다.


이처럼 '나바트'라는 단어의 의미대로 그들의 '쳐다보는' 행위는  하느님의 말씀을 '신뢰'하고 '순종'하는 것이었으며, 이것을 통해 구원의 기쁨을 맛 볼수 있게 된 것이었다.(요한3,16)







 


 사순 제5주간 화요일 복음(요한8,21~30)


그래서 예수님께서 다시 그들에게 이르셨다. "너희는 사람의 아들을 들어 올리 뒤에야 내가 나임을 깨달을 뿐만 아니라, 내가 스스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아버지께서 가르쳐주신 대로만 말한다는 것을 깨달을 것이다.(28)  나를 보내신 분께서는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내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29)


 '너희가 들어 올린'에 해당하는 '호탄 휩소세테'(horan hypsosete; when you have lifted up)가 실제로는 현재형으로 번역되고 있다(when you lift up).


희랍어에서 부정 과거가 직설법에서만 과거의 의미를 지닌다는 법칙이 있으므로, '휩소세테'(hypsosete)는 과거나 미래 완료로 볼 것이 아니라 '실제로 든다'는 동작의 개시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으며, 영적인 눈으로 볼 때 이미 예수님의 십자가 고난이 시작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뒤에야 ~깨달을 뿐만 아니라 ~깨달을 것이다'에 해당하는 '토테 그노세스테'(tote gnosesthe; then you will know)직역하면 '그리고나서 너희가 알 것이다'가 된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리신 후에 비로소 그분이 말씀하신 내용들이 곧 하느님의 말씀이라는 사실이 명백하게 드러나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깨달을'로 번역된 '그노세스테'(gnosesthe) '기노스코'(ginosko)의 미래 중간태이다.

희랍어에서 중간태의 특징은 동작의 주인공을 강조하며,  동작과 주격을 보다 밀접하게 관계지어 준다는 것이다.

즉 이것은 때가 이르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진실하다는 것이 객관적으로 확실하게 드러나게 되므로, 예수님을 거부하면 그 사람들조차 이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된다는 강조의 의미를 지닌다.



실제로 이 세상의 마지막 날에 예수님께서 천군 천사들을 대동하고 심판하시는 주님으로 재림하실 때에, 예수님의 메시야되심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게 될 것이다.



한편 요한 복음 8장 29절은 앞의 8장 28절와 함께 예수님께서 성부 하느님과의 밀접한 관계를 강조하심으로써 자신의 메시야되심을 암시하고 있다.


여기서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당신을 혼자 버려두지 않으시고 늘 함께 하시는 친밀한 일치의 이유가 당신 자신이 하느님께서 언제나 마음에 드는 일을 하고 있기 때문임을 밝힌다.



여기서 '마음에 드는 일을'에 해당하는 '타 아레스타'(ta aresta; what please him; those things that please)복수형으로서 '기뻐하는 일들', '뜻에 맞는 일들'이라는 뜻이며, 예수님께서 힘써 추구하시는 것들이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에 맞는 일로서 그분의 기쁨이 되는 일들임을 보여 준다.






사순 제 5주간 화요일




혼자 버려두지 않는다


반영억신부


국어공부를 잘 한 사람은 ‘주제파악’을 할 줄 알고, 산수공부를 잘한 사람은 ‘분수’를 알며, 지리공부를 잘 한 사람은 ‘있어야 할 자리’를 안다고 말합니다. 주제를 파악한다는 것은 중요합니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안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을 말하며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라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아버지 하느님으로부터 파견 받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계셨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하느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느님의 마음에 드는 일을 하는 것이 분수를 아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당신이 하셔야 할 일을 분명히 알고 계셨고 그것을 행하셨습니다. 행함에 있어서 당신의 자리가 어디인지를 확고히 하셨습니다. 가난하고 고통을 받는 사람들, 버림받은 이들을 우선적으로 선택하셨습니다. 성한 사람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자에게는 필요하다고 하시며 명의가 되어주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무엇이며 서 있어야 할 자리가 어디인가가 명확해졌습니다. 


누군가와 마음을 주고받을 수 있고 기댈 곳이 있다면 다행입니다. 신뢰를 가지고 만날 수 있고 말하지 않아도 통할 수 있다면 복입니다. 내 마음을 알아달라고 호소하지 않아도 공감해 주고 배려하는 친구가 있다면 행운을 잡은 것입니다. 소유하지 않고 지배하지 않으며 있는 그대로를 인정해 주는 이웃을 만난 것이 기쁨입니다. 더군다나 침묵 중에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을 만난다면 더 없이 행복합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습니다. 기왕이면 주님과 더불어 복을 만들고 기쁨을 나눌 수 있는 일과를 보냈으면 좋겠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지 않는다.(요한8,23)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주님을 만나기 위하여 마음과 열성을 다하여 천상의 것을 추구하는 것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이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계시고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신다. 내가 언제나 그분 마음에 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요한8,29) 하심으로써 아버지와 하나 되는 방법을 제시 하셨습니다. 아버지 마음에 드는 일을 함으로써 아버지와 하나가 된 예수님처럼 우리도 주님의 말씀을 듣고 행함으로써 그분 마음에 들어야겠습니다. 사실 사람의 길이 제 눈에는 모두 바르게 보여도 마음을 살피시는 분은 주님이십니다.(잠언 21,2) 따라서 우리의 행동 하나하나에 소홀함이 없어야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주님의 눈에 들어야 합니다. 


예수님을 믿고 그분이 원하는 일을 함으로써 마침내 그분과 하나 된 바오로는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입니다(갈라2,20). 라고 고백 하였습니다. 이미 세례를 통하여 우리가 그분처럼 죽어 그분과 결합되었다면, 부활 때에도 분명히 그리될 것입니다(로마6,5). 그러므로 주님이 기뻐하시는 일에 마음을 두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분은 언제나 나를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것에 감사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나 너와 함께 있으니 두려워하지 마라. 내가 너희 하느님이니 겁내지 마라. 내가 너의 힘을 북돋우고 너를 도와주리라(이사41,10).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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