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금요일]하느님 독 (요한10,31-42)

2019. 4. 12. 오전 4:33: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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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금요일]하느님 독 (요한10,31-42)



예레미야 예언자는,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그의 곁에 계시니, 그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리라고 한다. (예레 20,10-13)
10 군중이 수군대는 소리가 들립니다. “저기 마고르 미싸빕이 지나간다! 그를 고발하여라. 우리도 그를 고발하겠다.” 가까운 친구들마저 모두 제가 쓰러지기만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가 속아 넘어가고 우리가 그보다 우세하여  그에게 복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11 그러나 주님께서 힘센 용사처럼 제 곁에 계시니  저를 박해하는 자들이 비틀거리고 우세하지 못하리이다. 그들은 성공하지 못하여 크게 부끄러운 일을 당하고  그들의 수치는 영원히 잊히지 않으리이다.
12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3 주님께 노래 불러라! 주님을 찬양하여라! 그분께서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지셨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을 모독하였다고 유다인들이 돌로 치려 하자, 당신을 믿지 않더라도 당신의 일들은 믿으라고 하신다. (요한10,31-42)
그때에 31 유다인들이 돌을 집어 예수님께 던지려고 하였다.
3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33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좋은 일을 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하느님을 모독하였기 때문에 당신에게 돌을 던지려는 것이오. 당신은 사람이면서 하느님으로 자처하고 있소.” 하고 대답하자,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으냐?
35 폐기될 수 없는 성경에서, 하느님의 말씀을 받은 이들을 신이라고 하였는데,
36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내가 ‘나는 하느님의 아들이다.’ 하였다 해서, ‘당신은 하느님을 모독하고 있소.’ 하고 말할 수 있느냐?
37 내가 내 아버지의 일들을 하고 있지 않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38 그러나 내가 그 일들을 하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더라도 그 일들은 믿어라. 그러면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아버지 안에 있다는 것을 너희가 깨달아 알게 될 것이다.”
39 그러자 유다인들이 다시 예수님을 잡으려고 하였지만,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손을 벗어나셨다.
40 예수님께서는 다시 요르단 강 건너편, 요한이 전에 세례를 주던 곳으로 물러가시어 그곳에 머무르셨다.
41 그러자 많은 사람이 그분께 몰려와 서로 말하였다. “요한은 표징을 하나도 일으키지 않았지만,
그가 저분에 관하여 한 말은 모두 사실이었다.” 42 그곳에서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믿었다.


 


 

 사순 제5주간 금요일 제1독서(예레20,10-13)

 

"의로운 이를 시험하시고, 마음과 속을 꿰뚫어 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 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12)

 


앞의 예레미야서 20장 11절에서 자신과 동행하시고 지켜주시는 주님으로 말미암아 적대자(원수)가 패망하고 자신이 승리할 것이란 예레미야의 선언이 소개되었다.


이제 예레미야서 20장 12절과 13절에서는 적대자에 대한 복수를 간구하고 이것의 실현을 통한 구원을 확신하는 예레미야의 선언이 소개된다.



예레미야 17장 10절에는 "내가 바로 마음을 살피고 속을 떠보는 주님이다. 나는 사람마다 제 일에 따라, 제 행실에 결과에 따라 갚는다." 라고 소개하면서 주님께서는 모든 인간의 심장을 살피시며 폐부를 시험하시고, 각각 그의 행실대로 보상하시는 분으로 말씀하신다.


그러나 여기 본문에서는 특별히 '의인'(의로운 이) 곧 예레미야 자신에게만 그러한 주님의 보살피심을 적용하고 있다.

하지만 본절과 병행 구절인 예레미야 11장 20절 표현을 감안할 때 실제로 그 적대자들의 마음까지도 주님께서 꿰뚫고 계심을 염두에 두고 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정의롭게 판단하시고 마음과 속을 떠보시는 만군의 주님  당신께 제 송사를 맡겨드렸으니  당신께서 저들에게 복수하시는 것을 보게 해 주소서." (예레11,20)


이처럼 본절은 사실상 예레미야 11장 20절의 반복으로 볼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꿰뚫어 보심의 대상을 '의인'인 예레미야 자신에게만 한정시키는 것'제 곁에 계시니'(예레20,11)란 표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듯이 특별히 주 하느님과 예레미야 자신과의 관계성에 촛점 맞추어져 있기 때문이다.


주님께서는 예레미야의 심장(마음)과 속(폐부)를 보셨다.


다시는 하느님을 선포하지 아니하며 그의 이름으로 말하지 아니하리라 하면, 그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골수에 사무쳐 견딜 수 없었던 예레미야의 마음을 보셨던 것이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 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20,9)


따라서 그는 자신의 마음을 살피시는 하느님께서 자신을 구원하시고 악인들에게서 건지실 것임을 기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아울러 이것이 악인들의 속(중심)까지 살피시는 하느님으로 말미암아 악인들은 패망을 당하게 되는 주님의 복수를 겪게 될 것이다.


'복수','보복' 뜻하는 '네카마'(neqamah)는 구약 성경에서  인간의 복수를 언급하는 경우는 드물다. 종종 인간은 복수의 이차적 원인이고, 반면에 하느님께서 그 일차적 원인자 계신다.


"내 백성 이스라엘의 손으로 에돔에게 원수를 갚겠다. 내 분노와 내 화에 따라 에돔에게 보복하겠다. 그러면 그들이 나의 복수를 알게 될 것이다. 주 하느님의 말이다."(에제 20,14)


"내가 번뜩이는 칼을 갈아 내 손으로 재판을 주관할 때 나의 적대자들에게 복수하고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 되갚으리라."(신명32,41)


본문의 복수의 요청은 예레미야 개인의 원한에 찬 복수의 요청이 아니다.  하느님께 범죄한 자들을 심판하심으로써 하느님의 공의가 실현되기를 염원하는 신실한 예언자로서의 기원이다.


그래서 예레미야는 복수의 주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당신께서~복수하시는 것을'(주님께서~보복하심을)로 번역된 '니크마테 카'(niqmatheka)'네카마'2인칭 남성 접미어가 결합된 형태 '당신의 복수' 뜻이다.


이처럼 '나의 복수' 아니라 '당신의 복수'라고 예레미야가 언급함으로써 하느님의 공의(정의)에 호소하고 있다.


 

 사순 제5주간 금요일 복음(요한10,31~42)


"너희 율법에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 (34)


본문은 시편 82장 6절을 70인역(LXX)에서 정확하게 인용한 말씀이기에 따옴표 역할을 하는 '호티'(hoti)라는 단어를 사용했다.


시편 82장 6절은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 모두 지극히 높으신 분의 아들이다.'인데, 여기서 '내가 이르건대 너희는 신이며'(I have said you are gods)이 인용되었는데, 시편 82장 6절의 문맥은 원래 '신'에 관한 것이 아니라 재판장들에 관한 것이다.


이스라엘에서 사제들 및 재판장들은 하느님의 권한을 대행하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말하자면 하느님의 백성들과 관련된 그들의 공적 업무에 신적(神的) 권위가 부여되어 있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재판장들은 백성들을 다스리고 재판을 진행함에 있어서 사사로운 감정이나 임의성이 개입되어서는 안되고 철저하게 하느님께서 명하신 기준을 따라야 했다.


여기서 '신'으로 번역된 '테오이'(theoi)는 문자적으로 '신들'(gods)로 번역된다. '신'을 의미하는 '테오스'(theos)복수형이기 때문이다.


히브리어 성경에는 이것이 '엘로아'(eloa)복수로 간주되는 '엘로힘'(elohim)인데,

'엘로힘'(elohim)이 하느님의 고유 명사가 아닌 일반 명사로 쓰일 때에는 '재판관들'(judges), '천사들'(angels)과 같은 복수형의 의미로 번역된다.


이같은 용어가 사용되는 것은 그들이 하느님을 대신하여 직무를 수행하는 자들임을 나타낸다.


그들은 자신들의 직무를 하느님을 대신하여 수행하는 것이므로 모든 일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도 자기 중심적으로 처리해서는 안된다.

따라서 여기에서 언급된 '신'하느님 자신을 가리키기 보다는 하느님을 대신하여 하느님의 일을 대신 수행하는 자를 가리킨다.


이러한 예수님의 말씀을 요한 복음 10장 35절, 36절과 더불어 생각해 볼 때, 하느님의 대리자를 신이라고 부른다면, 하느님께서 몸소 거룩하게 하시어 이 세상에 보내신 당신 자신을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칭하는 것은 조금도 하느님을 모독하는 일이 아니시라는 주장이다.


예수님께서 유대인들이 절대시하는 성경 말씀을 인용하여 그들의 경직되고 잘못된 생각을 지적하신 것이다.





예레미야의 ‘다섯 번째 고백’으로 알려진 오늘 독서는 종교 지도자들의 악의적인 박해와 백성의 멸시로 말미암아 고통을 겪는 예언자의 위기를 들려줍니다. 그들은 폭력을 고발하고 예루살렘 성전의 파괴를 예언하는 예레미야를 배척합니다. 예레미야는 임금들과 권력자들, 성전의 사제들과 백성에게 아첨하는 신탁을 하였던 공적 예언자들에게 동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런 사명을 포기하였습니다.
예언자는 군중의 이해 부족, 사회 차별, 치욕과 비웃음, 투옥과 죽음까지도 받아들여야 합니다. 그러나 이야기의 분위기는 비탄에서 곧바로, 힘센 용사처럼 그의 곁에 계시고 가난한 이들의 목숨을 악인들의 손에서 건져 주시는 주님께 승리와 찬미를 바치는 노래로 변합니다.
복음에서 예수님의 운명은 그 예언자와 비슷합니다. 성전 봉헌 축제 때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당신이 메시아라면 분명히 말해 주시오.” 하고 묻자 “내가 이미 말하였는데도 너희는 믿지 않는다.”(요한 10,24-25 참조)라고 대답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나는 하나다.”(요한 10,30)라고 하시자, 그들은 하느님을 모독하였다고 그분께 돌을 던지려고 합니다. 그들은 인간에 불과한 예수님이 감히 하느님으로 자처한다고 보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유다인들에게 하신 예수님의 질문은 우리에게도 의미심장합니다. “나는 아버지의 분부에 따라 너희에게 좋은 일을 많이 보여 주었다. 그 가운데에서 어떤 일로 나에게 돌을 던지려고 하느냐?” 그들이 예수님을 배척하는 것은, 그분에 대한 믿음이 부족하고 참된 진리를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신앙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며 복음에 따라 살고 있는가요?

(안봉환 스테파노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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