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제2주간 월요일]물과 성령 (요한3,1-8)

베드로와 요한이 풀려나 동료들이 한마음으로 하느님께 기도하자, 그들은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한다. (사도 4,23-31)
그 무렵 23 풀려난 베드로와 요한은 동료들에게 가서, 수석 사제들과 원로들이 자기들에게 한 말을 그대로 전하였다.
24 동료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뢰었다. “주님, 주님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드신 분이십니다.
25 주님께서는 성령으로 주님의 종인 저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어찌하여 민족들이 술렁거리며 겨레들이 헛일을 꾸미는가?
26 주님을 거슬러, 그분의 기름부음받은이를 거슬러 세상의 임금들이 들고일어나며 군주들이 함께 모였구나.’
27 과연 헤로데와 본시오 빌라도는 주님께서 기름을 부으신 분, 곧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을 없애려고, 다른 민족들은 물론 이스라엘 백성과도 함께 이 도성에 모여,
28 그렇게 되도록 주님의 손과 주님의 뜻으로 예정하신 일들을 다 실행하였습니다.
29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30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31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예수님께서는 니코데모에게,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고 하신다. (요한3,1-8)
1 바리사이 가운데 니코데모라는 사람이 있었다. 그는 유다인들의 최고 의회 의원이었다.
2 그 사람이 밤에 예수님께 와서 말하였다. “스승님, 저희는 스승님이 하느님에게서 오신 스승이심을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으면, 당신께서 일으키시는 그러한 표징들을 아무도 일으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3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
4 니코데모가 예수님께 말하였다. “이미 늙은 사람이 어떻게 또 태어날 수 있겠습니까? 어머니 배 속에 다시 들어갔다가 태어날 수야 없지 않습니까?”
5 예수님께서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6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7 ‘너희는 위로부터 태어나야 한다.’고 내가 말하였다고 놀라지 마라.
8 바람은 불고 싶은 데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들어도 어디에서 와 어디로 가는지 모른다. 영에서 태어난 이도 다 이와 같다.”
부활 제2주간 월요일 (사도4,23-31)
"동료들은 그 말을 듣고 한마음으로 목소리를 높여 하느님께 아뢰었다." (24)
사도행전 4장 24절부터 30절까지는 베드로와 요한의 말을 들은 신도들의 반응이
공동(합심)기도로 나타났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초대 교회가 무엇보다 기도에 힘쓰는 공동체였음을 잘 보여준다.
특히 본문에서는 그들의 기도드리는 모습의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그들의 기도는 '한마음으로' 드리는 기도였다.
이에 해당하는 희랍어 '호모튀마돈'(homothimadon)은 '함께', '동시에' 등의 뜻을 지닌
'호무'(homu)와 '열정', '열망'등의 뜻을 지닌 '튀모스'(thimos)의 합성어에서 유래하며
'하나의 열정으로', '일치된 마음으로' 란 뜻을 지닌다.
당시 기도를 드리는 사람의 수효가 얼마나 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성령 충만한 신도들이 하나의 지향(intention)을 갖고 기도를 드린 것 만큼은 분명하다.
이것은 공동기도를 명령하신 예수님의 권고와도 조화를 이룬다.(마태18,19)
그리고 '목소리를 높여'(eran phonen ; 에란 포넨)는 열정적으로 했음을 보여 준다.
이것 역시 전심 전력으로 기도하라는 성경의 명령과 조화를 이룬다.
"너희가 나를 찾으면 나를 만나게 될 것이다. 온 마음으로 나를 구하면
내가 너희를 만나 주겠다." (에페29,13-14ㄱ)
이런 기도는 사도행전 4장 31절에 나오는 바와 같이, 하느님의 가시적 응답을
받을 수 있었고 또한 말씀 전파와 직접적으로 연결되었다.
부활 제2주간 월요일 복음(요한3,1~6)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물과 성령으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영에서 태어난 것은 영이다." (5ㄴ~6)
요한 복음 3장 3절에서 '누구든지 위로부터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이미 밝혔다.
'위로부터'에 해당되는 '아노텐'(anothen; again)은 장소를 가리키는 부사로서
가장 기본적인 의미인 '위로부터'로 번역되었고, 또한 시간을 나타내는 부사로서 쓰여
'일찍부터', '처음 혹은 근원부터', '새로'라는 뜻을 가지며, '다시'(again)라는
뜻으로도 사용된다.
따라서 '겐네테 아노텐'(gennethen anothen; be born again)은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 '다시 태어나는 것'을 가리킨다.
'위로부터'(above)란 '하느님으로부터'라는 의미가 될 수 있으며,
이것은 '새로남'의 전과정이 하느님의 은총과 능력에서 오는 것이고,
인간의 업적이 아니라는 점을 생각할 때 맞는 말이다.
더 나아가 이 부사가 장소와 시간을 나타내는 것이므로, 장소의 '위로부터'와
시간의 '새로'를 결합하면, '위로부터 새로'로 이해될 수 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 복음 3장 5절에서 '위로부터 새로 태어나는' 방법에 대해서
보다 구체적으로 설명하신다.
그리고 이 말씀이 너무나 중요함을 밝히기 위해 요한 복음 3장 3절에 이어서
또다시 예수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에게 말한다'는 말씀을 사용해서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신다.
여기서 '않으면'으로 번역된 '에안 메'(ean me; unless)는
'만일~아니면'이라는 뜻으로 하느님 나라를 갈 수 없는 사람이
누구인지 분명하게 제시한다.
그리고 '물과 성령으로'에서 '으로'에 해당하는 전치사 '엑스'(eks; of)는
여기서처럼 출생, 생산 등과 관계되어 사용되면, '~에게서'(from),
'~로 말미암아'(of) 라는 뜻이 있다.
여기서 물의 의미는 무엇인가?
'물'에 해당하는 '휘다토스'(hydatos)는 말 그대로 일반적인 '물'(water)를 가리킨다.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죄를 씻는 물은 정화의 수단이 되었는데(요한2,6),
예수님 역시 이러한 사실을 염두에 두었을 것이다.
그래서 이 물을 세례와 동일시하는 이들이 많다
(성 아우구스티노, 성 요한 금구 등등).
분명한 사실은 사람들이 새로나는 과정에서 물은 성령과 함께 필수적인 요소라는 점이다.
우리는 이것을 오순절에 베드로가 행한 설교에서 확인할 수 있다.
'회개하십시오. 그리고 저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아
여러분의 죄를 용서받으십시오. 그러면 성령을 선물로 받을 것입니다.'(사도2,38)
요한 복음 3장 5절에서 언급된 '물'을 베드로가 '회개'와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받는 세례를 통한 죄의 용서'로 나타낸 것이 다를 뿐이다.
바오로도 '당신 자비에 따라, 성령을 통하여 거듭나고 새로워지도록
물로 씻어 구원하신 것'(티토3,5)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따라서 '물'을 '세례'로 보는 것은 성경의 다른 증거들과 잘 조화된다.
다만 문제가 되는 것은 이 '세례'가 예수님을 믿는 믿음 위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성사의 사효성과 인효성), 죄의 용서와 성령의 현존은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조건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
'육에서'에 해당하는 '엑 테스 사르코스'(ek tes sarkos)는 '그 육(肉)에게서'
(fromt the flesh), '그 육(肉)으로 말미암아'(of the flesh)라는 뜻으로
발생의 기원을 나타낸다.
'사르코스'(sarkos)의 원형 '사륵스'(sarks)의 가장 기본적인 뜻은 '살'(flesh)이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흔히 이 단어가 '성령' 혹은 '영'으로 번역되는 '프뉴마'
(pneuma)와 대립되는 추상적인 의미로 사용된다.
즉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하느님의 은총을 떠나 있는 인생의 타락한 본성을 가리킨다.
요한 복음에서는 하느님께 대한 지식의 없음과 더불어 죽음으로부터 구원해 줄
아무것도 없는 세속적인 영역이 바로 '사륵스'(sarks)가 의미하는 것이다.
인간의 자연적 출생의 원리를 보여 주는 '육에서 태어난 것은 육이고'라는 표현은
모든 인간이 전적으로 은총이 결핍된 상태에서 태어남으로 말미암아 하느님과
분리된 인간성을 가질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 준다(요한1,13).
그리고 이것은 사람이 자신의 삶의 뿌리를 자연인의 죄악된 상태를 보여 주는
육(肉)에 두었을 때 결국 육체와 같이 소멸되고 말 것을 보여 준다.
사람은 삶의 뿌리를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서 육(肉)에 속한 사람이 되기도 하고
영(靈)에 속한 사람이 되기도 한다.
즉 성령으로 거듭나고 새로나지 못한 사람은 언제나 육(肉)에 속한 것이며,
따라서 영적으로 죽음에 머물러 있는 존재일 뿐이다.
이러한 사실은 '육이고'로 번역된 '사륵스 에스틴'(sarks estin)에서 '에스틴'
(estin; is)이 계속과 반복을 나타내는 현재형으로 쓰였다는 사실에서 잘 나타난다.
"이제, 주님!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 주님의 종들이 주님의 말씀을
아주 담대히 전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저희가 그렇게 할 때, 주님께서는 손을 뻗으시어 병자들을 고치시고,
주님의 거룩한 종 예수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일어나게 해 주십시오." (29-30)
사도행전 4장 24-28절이 하느님께 대한 찬양과 역사적 사건을 근거로 한, 과거를 회상하는 기도였다면,
29-30절은 현실과 밀접한 관련을 갖는 구체적인 간구의 내용이다.
이 간구의 내용은 모두 세 가지이다.
첫째는, 본문에 나타난 대로, 수석 사제들을 주축으로 하는 유다교 세력의 위협을 간과하지 말고,
감시해 달라는 간구이다.
둘째는, 29절 하반절의 내용으로 담대히 주님의 말씀을 전하게 해달라는 간구이다.
셋째는, 예수의 이름으로 표징과 이적들이 계속 일어나게 해달라는 내용이다.
여기서 '저들의 위협을 보시고'에서 '보시고'는 희랍어로 '에피데'(ephide)인데,
'에페이돈'(epheidon)의 명령법으로서, 기원을 나타낸다.
'에페이돈'은 '위에서', 또는 '어떤 것을 향하여'라는 의미가 있는 '에피'(ephi)와
'보다'란 의미를 지닌 '에이도'(eido)의 합성어에서 유래한 단어로서,
'위에서 보다' 또는 '어떤 대상에 대하여 관심을 가지고 보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에피데'는 그리스도교인을 핍박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을 주목해서 보시고
그들의 손으로부터 건져 달라는 의미가 있는 표현이다.
"이렇게 기도를 마치자 그들이 모여 있는 곳이 흔들리면서 모두 성령으로 가득 차
하느님의 말씀을 담대히 전하였다." (31)
사도행전 4장 24-30절에 기독된 신도들의 기도가 끝나자, 그들이 모인 기도의 장소가 진동하였다.
여기서 '흔들리면서'에 해당하는 '에살류테'(esaliuthe)의 원형 '살류오'(saliuo)는
바람에 의해 갈대와 같은 물체가 흔들리는 상태를 묘사하거나(마태11,7)
감옥의 문을 열게 할 만한 큰 지진을 묘사하는데도 사용된(사도16,26) 동사이다.
따라서 제자들이 모인 곳이 흔들인 이유는 지진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이러한 현상은 신도들의 간절한 공동기도가 하느님께 가납되었다는 가시적 증거이며,
동시에 곧 이어지는 성령의 강한 임재와 연결이 된다.
땅이 흔들리는 현상은 거룩하신 하느님의 임재로,
인간의 오감을 통해 알게 하시는 방법이기도 했다.(탈출19,19 ;이사6,4)
한편, 본절에서 공동으로 기도한 신도들이 '모두' 성령이 충만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이는 초대 예루살렘 교회의 일체성을 잘 보여준다.
그러나 이때 이들이 경험한 성령충만은 사도행전 2장 4절에 나오는 오순절 성령 강림때
이들이 경험한 성령 체험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다.
오순절에 있었던 일은 성령세례와 성령충만이 동시에 일어난 일이다.
오순절의 성령 세례는 이를 경험하는 자의 입장에서는 일회적으로 이루어지는 사건이다.
반면에,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령충만은 성령세례로 인하여 구원을 경험한 사람들이
더욱 영적으로 충만한 역동적인 삶을 살게 하기 위하여 반복적으로 주어지는 현상이다.
특히 본절의 성령 충만은 말씀을 담대히 전하기 위한 성령의 특별한 임재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