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부활의 증인 (루카 24,35-48 )
불구자가 치유된 것을 보고 백성들이 몰려오자 베드로는,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그가 낫게 되었다고 말하며, 예언자들이 예고한 메시아가 예수님이라고 증언한다. (사도행전 3,11-26)
그 무렵 치유받은 불구자가 11 베드로와 요한 곁을 떠나지 않고 있는데, 온 백성이 크게 경탄하며 ‘솔로몬 주랑’이라고 하는 곳에 있는 그들에게 달려갔다. 12 베드로는 백성을 보고 말하였다.
“이스라엘인 여러분, 왜 이 일을 이상히 여깁니까? 또 우리의 힘이나 신심으로 이 사람을 걷게 만들기나 한 것처럼, 왜 우리를 유심히 바라봅니까? 13 여러분은 예수님을 빌라도에게 넘기고, 그분을 놓아주기로 결정한 빌라도 앞에서 그분을 배척하였습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의 하느님과 이사악의 하느님과 야곱의 하느님, 곧 우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 예수님을 영광스럽게 하셨습니다. 14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15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16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17 이제, 형제 여러분! 나는 여러분도 여러분의 지도자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한 탓으로 그렇게 하였음을 압니다. 18 하느님께서는 모든 예언자의 입을 통하여 당신의 메시아께서 고난을 겪으시리라고 예고하신 것을 그렇게 이루셨습니다. 19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20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21 물론 이 예수님께서는 하느님께서 예로부터 당신의 거룩한 예언자들의 입을 통하여 말씀하신 대로, 만물이 복원될 때까지 하늘에 계셔야 합니다.
22 모세는 이렇게 말하였습니다. ‘주 너희 하느님께서는 너희 동족 가운데에서 나와 같은 예언자를 일으켜 주실 것이니, 너희는 그가 하는 말은 무엇이든지 다 들어야 한다. 23 누구든지 그 예언자의 말을 듣지 않는 자는 백성에게서 잘려 나갈 것이다.’ 24 그리고 사무엘을 비롯하여 그 뒤를 이어 말씀을 전한 모든 예언자도 지금의 이때를 예고하였습니다.
25 여러분은 그 예언자들의 자손이고, 또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세상의 모든 종족들이 너희 후손을 통하여 복을 받을 것이다.’ 하시며 여러분의 조상들과 맺어 주신 계약의 자손입니다. 26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종을 일으키시고 먼저 여러분에게 보내시어, 여러분 하나하나를 악에서 돌아서도록 하여 여러분에게 복을 내리게 하셨습니다.”
시편 8,2ㄱ과 5.6-7.8-9(◎ 2ㄱㄴ)
◎ 주님, 저희 주님, 온 땅에 당신 이름, 이 얼마나 크시옵니까! (또는 ◎ 알렐루야.)
○ 주님, 저희 주님,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
○ 천사보다는 조금 못하게 만드셨어도,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셨나이다. 당신 손으로 지으신 작품들을 다스리게 하시고, 만물을 그 발아래 두셨나이다. ◎
○ 저 모든 양 떼와 소 떼, 들짐승하며, 하늘의 새와 바다의 물고기, 물속 길을 다니는 것들을 다스리게 하셨나이다. ◎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나타나시자 제자들은 유령을 보는 줄로 안다.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시고 부활의 증인이 되라고 이르신다. (루카복음 24,35-48)
그 무렵 예수님의 제자들은 35 길에서 겪은 일과 빵을 떼실 때에 그분을 알아보게 된 일을 이야기해 주었다.
36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37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 38 그러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39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40 이렇게 말씀하시고 나서 그들에게 손과 발을 보여 주셨다.
41 그들은 너무 기쁜 나머지 아직도 믿지 못하고 놀라워하는데,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여기에 먹을 것이 좀 있느냐?” 하고 물으셨다. 42 그들이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드리자, 43 예수님께서는 그것을 받아 그들 앞에서 잡수셨다.
44 그리고 그들에게 이르셨다. “내가 전에 너희와 함께 있을 때에 말한 것처럼, 나에 관하여 모세의 율법과 예언서와 시편에 기록된 모든 것이 다 이루어져야 한다.” 45 그때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여시어 성경을 깨닫게 해 주셨다.
46 이어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47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48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제1독서 (사도3,11-26)
"여러분은 거룩하고 의로우신 분을 배척하고 살인자를 풀어 달라고 청한 것입니다. 여러분은 생명의 영도자를 죽였습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그분을 다시 일으키셨고, 우리는 그 증인입니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여러분이 지금 보고 또 아는 이 사람을 튼튼하게 하였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 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14~16)
사도행전 3장 11절부터 26절까지는 예루살렘 성전 '아름다운 문'에 앉아 구걸하던 앉은뱅이 치유 사건으로 인하여 놀라서 모여든 사람들을 대상으로 행한 사도 베드로의 솔로몬 행각에서의 설교가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앞서 오순절 성령 강림의 현장에서 행한 첫번째 설교(사도2,14~36)에 이어 사도 베드로의 두번째 행하여진 설교이며, 첫번째 설교와 마찬가지로 구약성경을 인용하여 예수님의 구세주 되심을 선포하고, 모여든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할 것을 촉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도 베드로는 생명을 기준으로 즉 바라빠는 생명을 죽이는 자로, 예수님은 생명을 살리는 분으로 대조한다.
사도 베드로가 두 인물을 대조하여 강조하는 것은 유다인들이 생명을 살리는 예수님을 거절하고 생명을 죽이는 바라빠를 선택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생명을 포기하고 영원한 죽음을 취한 어리석은 민족이요, 미련한 백성임을 드러내는 것이다.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거룩하다'는 표현은 죄와는 전혀 상관없이 존재하시는 하느님께만 사용될 수 있는 문자 그대로의 거룩한 표현이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 '거룩하다'('하기온'; hagion)는 것은 예수님께서 하느님의 속성을 지니신 하느님과 동일한 분이라는 의미이다. 또한 '의롭다'('디카이온'; dikaion)는 단어는 하느님의 공의(公義)를 대변한다.
'거룩하다'와의 차이점을 살펴보면, 거룩함이 하느님과의 관계를 대변한다면, 의로움은 인간과의 관계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다.
거룩하다는 것은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의 신분의 성격을 규명하고(사도4,27.30), 의롭다는 것은 예수님의 의로운 성품과 삶을 대변한다(사도7,52; 22,14). 결론적으로, 베드로가 유다인들이 생명의 주이신 메시아를 거부하고 살인자를 선택한 사실을 상기, 부각시킴으로써 궁극적으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그들 역시 살인자라는 것이다.
'생명의 영도자'로 번역된 희랍어는 '퀴리오스'(kyrios)가 아니고 '아르케고스'(archegos)이다. '아르케고스'는 '어떤 분야의 길에 가장 먼저 들어서는 인도자나 선구자'라는 의미이다(히브2,10).
또한 어떤 일의 기원자라는 의미도 있다. 따라서 '생명의 영도자'는 '생명의 근원자' 혹은 '생명의 부여자'라는 뜻이다.
실로 예수님께서는 생명을 얻게 하시고 풍성하게 얻게 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에 생명의 근원자란 이름이 적합하며(요한10,10), 더 나아가서 예수님께서 주시는 생명은 한계를 갖는 육체적 생명이 아니고 영원토록 죽지 않는 영적 생명이다(요한17,1.2).
그리고 '여러분은 ~죽였습니다'에 해당하는 '아펙테이나테'(apekteinate)에서 '여러분'은 사도행전 3장 14절의 주어 '휘메이스'(hymeis)와 같다.
실제로 예수님께 사형 선고를 내린 법정은 로마의 법정이요, 예수님께 십자가형을 직접 시행한 자들은 로마의 군인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 베드로가 강조형 주어(인칭대명사)까지 사용하여 예수님을 죽인 장본인을 유다인으로 지목하여 단죄하는 이유는 이 죄가 법률적인 죄가 아니고, 신앙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증인'으로 번역된 '마르튀레스'(martyres)는 피고의 죄를 변호하거나 고발하기 위해 세워지는 사람을 가리키는 법정 용어이다.
제자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사실을 실제로 본 목격자일 뿐만 아니라 이 사실을 다른 이들 앞에서 알리기까지 하는 증인이었다.
증인들이 증거하는 것은 유다인들이 예수님을 죽였고,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다시 살리셨다는 사실이다.
한편, 역설적인 의미에서 사도 베드로는 바른 증인으로서 빌라도의 법정에서 살인자를 놓아 주게 하고 무죄한 자를 죽이라는 불의한 증언을 한, 잘못된 증인이었던 유다인들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예수님의 이름에 대한 믿음 때문에, 바로 그분의 이름이' 고대 세계에서 이름은 단순히 명칭으로서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이 아니라 그 이름을 지닌 사람의 인격과 존재 자체를 의미한다.
따라서 앉은뱅이였던 사람의 다리를 낫게 한 주체가 그 사람이 믿은 이름이라는 사도 베드로의 주장은 그 이름의 주인이신 예수님께서 아직 살아 계시며 병조차 복종시키는 능력과 권세를 지녔음을 간접적으로 주장하는 표현이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 여러분 모두 앞에서 이 사람을 완전히 낫게 해 주었습니다.'
'그분에게서 오는 믿음'이란 표현에서도 나오지만, 믿는 행위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 믿음의 대상이다. 믿음의 대상은 믿음의 주이신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리고 앉은뱅이를 낫게 한 믿음의 주체를 사도 베드로로 보는 경우와 앉은뱅이였던 사람으로 보는 두 가지가 있는데,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치실 때마다 그들의 믿음이 그들을 낫게 하셨다고 병자들을 칭찬하셨던 것에 근거해서 (마태9,22; 마르10,52), 사도 베드로를 통해서 예수님의 이름을 듣고 믿은 앉은뱅이였던 사람 자신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회개하고 하느님께 돌아와 여러분의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 그러면 다시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올 것이며, 주님께서는 여러분을 위하여 정하신 메시아 곧 예수님을 보내 주실 것입니다.' (19~20)
베드로의 설교의 목적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청중들의 회개에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회개하고'에 해당하는 '메타노에사테'의 원형 '메타노에오'(metanoeo)는 '생각을 바꾸다'(change thought)라는 의미인데, 이것은 자기가 옳다고 여겨왔던 모든 가치관과 생활 습관들을 버리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하는 전인격적인 변화를 뜻한다.
그리고 19절과 20절에서 찾아볼 수 있는 회개하고 돌이키는 자에게 주어지는 보상은 세 가지이다.
첫째, 죄가 지워진다는 것이다. '죄가 지워지게 하십시오'에 해당하는 '엑살레입테나이'(eksaleipthenai)는 '지우다'(묵시3,5), '씻어 내리다'(묵시7,17)는 뜻을 지닌 '엑살레이포' (eksaleipho)의 수동태 부정사로서 전치사 '에이스'(eis)와 함께 '죄가 지워짐을 받으려면'(씻기움을 받으려면)이라는 뜻이다.
따라서 '죄가 지워짐을 받는 것'은 회개하고 돌이키는 결과로 오는 보상이다.
고대 근동 사회에서는 글을 양피지나 파피루스에 썼다. 그런데 당시의 잉크는 오늘날처럼 산이 섞이지 않은 잉크였기 때문에 한번 쓰여진 글이라도 고치고 싶으면 물묻은 스펀지로 한 번 닦으면 말끔히 지워졌다.
어떤 죄를 지었든지간에 심지어 하느님께서 보내신 메시아를 죽인 죄를 지었을지라도, 일단 회개하면 그 모든 죄는 기억도 되지 않을 정도로 말끔하게 사라지게 된다는 의미이다(이사43,25).
둘째, 생기를 찾을 때가 주님에게서 온다. '생기를 찾을'에 해당하는 '아납쉭세오스'(anapsikseos)는 '원기 회복', '유쾌하게 되는'이라는 의미를 갖는다(refreshment).
'때'로 번역된 '카이로이'(kairoi)의 원형 '카이로스'(kairos)는 여기서는 종말론적 날에 국한되지 않는, 하느님이 정하신 시간을 가리킨다. '죄사함'이 회개의 소극적 결과라면, '원기회복'은 회개가 갖는 적극적인 결과라고 할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회개하는 자의 죄를 용서하실 뿐 아니라 자신의 원기(생기)를 그에게 더하여 주심으로써 그를 새로운 피조물로 만들어 가시고(2코린5,17), 하느님의 자녀로서 영생을 선물로 얻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로마6,23).
세째, 정하신 메시아를 보내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죽인 죄를 회개한 자들이 받게 되는 세번째 보상이다.
처음 두가지, 즉 죄사함과 원기 회복으로 영적으로 새롭게 됨이 예수님의 강생과 재림 사이의 긴장 상태에서 살아가는 이 세상에서 얻는 보상이라면, 세번째 보상은 그리스도의 재림이 이루어지는 때 만유가 회복된 완성된 하느님의 나라에서 누리게 될 미래의 혜택이다(사도3,21절).
<믿어라.
선포하여라.> 송영진 모세 신부
"그들이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을 때 예수님께서 그들 가운데에 서시어,
'평화가 너희와 함께!' 하고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그들은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하였다(루카 24,36-37)."
'이러한 이야기'는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직접 만났다는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아마도 평소에 예수님께서 사용하시던 인사말일 것입니다.
사도들이 너무나 무섭고 두려워서 유령을 보는 줄로 생각한
것은,
예수님께서 유령이 나타나듯이 갑자기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아직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에 대해서 반신반의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반신반의'는 사실상 안 믿는 것입니다.
그런 상태에 있는 사도들 앞에
예수님께서 갑자기 유령처럼 나타나셨으니 무서워하는 것은 당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그렇게
나타나셨을까?
사도들이 무서워하지 않게 나타나실 수는 없었나?" 라고 물을 사람이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해서 "그러면
예수님께서 어떻게 나타나셔야 했나?" 라고 반문할 수 있습니다.
"밖에서 문을 두드린다든지
하시면 되지 않나?" 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텐데, 그래도 마찬가지입니다.
천사의 도움으로 감옥에서 기적적으로 풀려난 베드로
사도가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을 때, 문지기 하녀는 베드로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사람들에게 알렸는데(사도
12,14), 그때 사람들은 그 하녀에게 "너 정신 나갔구나." 라고 말했습니다(사도 12,15).
사람들은 베드로 사도가 감옥에서
풀려날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문을 두드리는 사람을 베드로 사도라고 생각하지 않은 것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부활하셨다는 소식을 믿지 않았기 때문에 자기들 앞에 나타나신 분이 예수님이라는 것을 믿지 못했고, 또 예수님께서 유령처럼 나타나셨기
때문에 유령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결국 이것은 믿음에 관한 문제가 됩니다.
예수님께서 살아 계신다는 것을 믿고
있었다면, 갑자기 나타나셨을 때 놀라기는 해도 유령이라고 생각하면서 무서워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 사도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십니다.
"왜 놀라느냐? 어찌하여 너희 마음에 여러 가지 의혹이
이느냐?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루카 24,38-39)."
이 말씀은 믿지 못하는 제자들을 꾸짖으시는 말씀이긴 하지만, '엄하게' 꾸짖으시는 말씀은
아닙니다. 예수님께서 당신의 손과 발을 보여주시면서 만져 보라고 하시는 것은 제자들에게 '믿음'을 주기 위해 애쓰시는 '자상한'
모습입니다.
또 예수님의 말씀은 당신의
손과 발에 있는 상처를 보라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것은 그들 앞에 나타나신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돌아가신 바로 그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일이고, 그분이 그 몸으로 다시 살아나셨음을 믿게 하기 위한 일입니다.
사도들은 예수님께서
그렇게까지 하시는데도 믿지 못하고 놀라기만 합니다.
복음서 저자는 그들이 '너무 기쁜 나머지' 믿지 못하고 놀라기만 했다고 설명하고
있는데(루카 24,41),
사도들은 처음에는 예수님의 부활 자체를 안 믿었고, 그 다음에는 믿기는 했지만 너무 기뻐서 예수님의
부활을 실감하지 못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런 사도들을 위해서 예수님께서는 다시 그들 앞에서 음식을 잡수시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이것도 당신이 유령이 아니라 진짜로 살아 계신 분이라는 것을 확인시켜 주기 위한 일입니다.
제자들이 부활을 믿게 되자
예수님께서는 그들에게 '빠스카의 신비'는, 즉 당신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계획에 의한 일이었음을 가르쳐 주시고, 또
그들에게 복음 선포 임무를 맡기십니다.
"성경에 기록된 대로, 그리스도는 고난을 겪고 사흘 만에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
그리고 예루살렘에서부터 시작하여,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루카 24,46-48)."
"성경에 기록된 대로" 라는
말씀과 "다시 살아나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은 하느님의 계획대로 된 일이라는 것을 뜻합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예수님을 죽이셨다는 뜻은 아닙니다.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은 하느님의 계획을 방해하는 인간들의 범죄였습니다.
부활은
하느님께서 인간들의 방해를 극복하신 일이고, 모든 것에서(인간들의 악에서) 선을 이루신 일입니다(로마 8,28).
우리는 세부적인
과정에서 하느님의 계획이 어떻게 작용하는지는 모르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모든 일은 항상 하느님의 계획대로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
"죄의 용서를 위한 회개가
그의 이름으로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되어야 한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회개하면 구원받을 수 있다고 모든 민족들에게
선포하여라." 라는 명령입니다.
예루살렘은 복음 선포의 출발지입니다.
"왜 예루살렘인가?" 라고 묻는다면, "하느님께서
그렇게 정하셨다." 라는 대답 외에는 할 말이 없습니다.
"너희는 이 일의
증인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는 이 모든 일의 증인이 되어라." 라는 명령입니다.
'이 모든 일'은 예수님과 삶과 죽음과
부활, 그리고 예수님의 가르침들과 행적들을 모두 가리키는 말입니다.
사도들뿐만 아니라 모든 신앙인은 예수님의 일을 증언하고
선포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사도들에게 하신 말씀들을 "믿어라. 선포하여라." 라고 줄여서 표현할 수 있습니다. 믿는 것은 자기 자신이 구원받기 위한 일이고, 선포하는 일은 인류 모두를 구원하기 위한 일입니다.
부활 팔일 축제 내 목요일 복음 (루카24,35-48)
"내 손과 내 발을 보아라. 바로 나다. 나를 만져 보아라. 유령은 살과 뼈가 없지만, 나는 너희도 보다시피 살과 뼈가 있다." (39)
루카 복음 24장 36~49절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주는 인지(認知) 발현사화와(24,36~43) 제자들을 교육하여 당신 고난과 부활의 증인들로 삼으시는 사명 발현사화(24,44~49)로 되어 있다.
예수님께서 당신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사실을 보여 주시고, 죽기 전 역사의 예수님과 부활하신 그리스도가 동일 인물이심을 보이신다.
여기서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사기지은'(四奇之恩)을 입으셔서, 몸이 빛나고, 손상되지 않으며,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으시는 신속함과 투철함을 가지고 계신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신은 자연적으로는 영혼의 요소를 가지고 있는 '영적인 몸'('영광스러운 몸'; 필리3,21)이시다.
부활하신 예수님의 발현을 유령이 나타난 것으로 곡해할 수 있기 때문에, 예수님께서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에서, 루카 복음사가는 인지(認知) 발현사화에서 육체성을 강조하고 있고, 요한 복음사가도 인지 발현사화에서 육체성을 강조하고 있다(요한20,20.25.27).
그러나 부활하신 예수님의 육체는 이승의 속박을 완전히 벗어나 있으며, 장차 부활할 성도들의 육체도 '영적인 몸'으로서 이 모습을 닮을 것이다(1코린15,44).
루카 복음 24장 42~43절에서 예수님께서 구운 물고기 한 토막을 잡수셨다는 것도 그분이 참으로 부활하셨다는 뜻이며, 그 육체성을 또 한번 강조한 것이다.
"그분께서 죽은 이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신 뒤에 우리는 그분과 함께 먹기도 하고 마시기도 하였습니다." (사도10,41; 요한21,1~14참조).

사도들의 공동체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실체’를 확인합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과 부활하신 분은 같은 분이면서 동시에 다른 분입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인간적인 만남을 통해서 당신이 진정 살아 계심을 보여 주십니다. 제자들은 그분을 뵙고, 만지며, 그분과 함께 음식을 먹습니다. 환상이 아닙니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이 살아 계시는 것이고 함께 소통하시는 것입니다.
또한 그분은 자유로운 분이셔서 당신이 원하시는 때에 오시고, 원하시는 곳에 나타나시며, 당신의 가르침을 되새겨 주시고, 성경 말씀도 해석해 주십니다. 그래서 그분이 누리시는 자유는 또한 그분이 완전히 다른 분이라는 것을 보여 줍니다.
그분은 그 영혼뿐 아니라 존재 전체가 살아 계시므로 같은 분이시지만, 더 이상 우리와 같은 조건에 묶여 계시지 않기에 다른 분입니다.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평화가 너희와 함께!”라고 인사하십니다. 평화를 위한 주님의 인사는 또한 두려움과 죄책감에 빠진 제자들에게 새로운 삶을 선물해 주십니다.
주님의 부활은 저 멀리 동떨어진 곳에서 일어난 사건이 아니고, 우리의 삶 한가운데서 충만히 체험해야 하는 기쁨과 희망의 선물입니다.
우리 삶의 깊은 곳에 부활이 있고, 충만한 부활의 세계는 우리 신앙의 삶으로 완성됩니다.
베드로의 설교
부활하신 예수님의 가르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