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순 제5주간 수요일] 진리가 자유롭게 (요한 8,31-42)

2016. 3. 16. 오전 5:3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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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순 제5주간 수요일] 진리가 자유롭게 (요한 8,31-42)


바빌론 임금의 신들을 섬기지 않고 금 상에 절하지 않은 세 젊은이가 불가마 속에 던져진다. 하느님을 신뢰하여 임금의 명을 어긴 이들을 하느님께서는 천사를 보내시어 구해 내신다.(다니엘 3,14-20.91-92.95)
그 무렵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14 물었다.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 너희가 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또 내가 세운 금 상에 절하지도 않는다니, 그것이 사실이냐? 15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16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에게 대답하였다. “이 일을 두고 저희는 임금님께 응답할 필요가 없습니다. 17 임금님, 저희가 섬기는 하느님께서 저희를 구해 내실 수 있다면, 그분께서는 타오르는 불가마와 임금님의 손에서 저희를 구해 내실 것입니다. 18 임금님,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저희는 임금님의 신들을 섬기지도 않고, 임금님께서 세우신 금 상에 절하지도 않을 터이니 그리 아시기 바랍니다.”
19 그러자 네부카드네자르는 노기로 가득 찼다. 그리고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보며 얼굴 표정이 일그러지더니, 가마를 여느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 20 또 군사들 가운데에서 힘센 장정 몇 사람에게,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를 묶어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지라고 분부하였다.
91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92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5 네부카드네자르가 말하였다.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 느고의 하느님께서는 찬미받으소서. 그분께서는 당신의 천사를 보내시어, 자기들의 하느님을 신뢰하여 몸을 바치면서까지 임금의 명령을 어기고, 자기들의 하느님 말고는 다른 어떠한 신도 섬기거나 절하지 않은 당신의 종들을 구해 내셨다.”


다니 3,52.53.54.55.56
◎ 세세 대대에 찬송과 영광을 받으소서.
○ 주님, 저희 조상들의 하느님, 찬미받으소서. ◎
○ 영광스럽고 거룩하신 당신 이름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영광의 성전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거룩한 어좌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커룹 위에 앉으시어 깊은 곳을 살피시는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 하늘의 궁창에서 당신은 찬미받으소서. ◎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자부하는 이들에게 예수님께서는 죄를 지으면 죄의 종이 된다며, 당신 안에 머무르면 진리를 깨닫게 되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라고 하신다. (요한 8,31-42)
그때에 31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32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33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34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35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36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37 나는 너희가 아브라함의 후손임을 알고 있다. 그런데 너희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38 나는 내 아버지에게서 본 것을 이야기하고, 너희는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실천한다.”
39 그들이 “우리 조상은 아브라함이오.” 하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면 아브라함이 한 일을 따라 해야 할 것이다. 40 그런데 너희는 지금,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이야기해 준 사람인 나를 죽이려고 한다. 아브라함은 그런 짓을 하지 않았다. 41 그러니 너희는 너희 아비가 한 일을 따라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사생아가 아니오. 우리 아버지는 오직 한 분, 하느님이시오.”
42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셨다. “하느님께서 너희 아버지시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할 것이다. 내가 하느님에게서 나와 여기에 와 있기 때문이다. 나는 나 스스로 온 것이 아니라 그분께서 나를 보내신 것이다.”





사순 제5주간 수요일 제1독서 (다니3,14-20.92-92.95)


불 속의 다니엘의 세친구(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와 주님의 천사 

그때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이 깜짝 놀라 급히 일어서서 자문관들에게 물었다. "우리가 묶어서 불 속으로 던진 사람은 세 명이 아니더냐?"  그들이 "그렇습니다, 임금님." 하고 대답하자, 임금이 말을 이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만 아니라, 다친 곳 하나 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다니3, 91~92)  

히브리어로 '다니엘''하느님께서 나의 심판관이시다' 뜻이다. 다니엘서의 작중 연대(글 안의 이야기가 전개되는 시기)는  네부카드네자르바빌론 왕좌에 오른 B.C.605년 이후 부터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통치 시절예루살렘 공략과 바빌론 유배가  크게 B.C.597년과 B.C.587년에 두 번 있었는데, 그때가 여호야킨이  남부 유다를 다스리던 때였다(2열왕24,10-16; 에제1,2). 

다니엘이란 한 인물을 통해 이민족의 지배 아래에서 유다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이 이 책의 중요한 목표이다.  

다니엘서의 저작 연대(저자가 기록한 시점)는 마카베오 항쟁을 불러 일으킨 안티오코스 4세(BC175-164년)의 박해때이다. 본문 자체가 기원전 167년 안티오코스 4세가 성전을 모독하고 유린한 사건을 암시하기 때문이다(다니엘8,9-13; 9,27 ;11,31참조). 그런데 기원전 164년에 있었던 성전 정화는 언급하면서도  같은 해에 있었던 박해자 안티오코스 4세의 죽음은 언급하지 않은 것으로 미루어 이 책의 저작 연대 기원전 164년으로 비교적 정확하게 추정하고 있다. 그런데 다니엘서 1~6장에 나오는 여섯 가지 이야기는  박해 상황에 걸맞지 않게 유머스럽고 긴장감이 덜하다. 

이 이야기들은 이스라엘의 출중한 인물들이 고대 근동의 궁정안에서 벌인 활약상을 전하는 3인칭 궁정 설화 전형적 예들이다. 이 궁전 설화들은 마카베오 항쟁 훨씬 이전에 디아스포라(본국이 아닌 곳에서 흩어져 사는 이스라엘 공동체를 지칭하는 말)유다인들이 이방인 왕궁에서 겪었던 갈등과 성공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다니엘서 저자는 이 궁정 설화들을 입수해서 마카베오의 박해 상황에 맞게 편집했을 것이다. 다니엘서 3장은 다니엘의 세 동료가 우상 숭배를 거절한 탓으로 불가마에 던져졌다가 기적적으로 살아난 이야기이다. 

다니엘서 2장과는 달리 3장에서 네부카드네자르  현명한 군주가 아니라 어리석고 잔인한 폭군이다. 그는 금신상(아마도 자기 자신의 상)을 만들어 놓고 문무대신들에게 거기다가 절을 하라고 명령한다. 

네부카드네자르는 자신의 권능과 위엄을 만천하에 드러낼 뿐 아니라 이를 신격화하고자 하는 욕망 있었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욕망을 성취하고자 하는 목적과 함께 자신의 제국 내에 있는 모든 신하들의 충성심을 끌어내 제국의 힘을 하나로 합치기 위한 실용적 목적을 이루기 위해 거대한 금 신상을 세워 숭배하게 했던 것이다. 

이에 대해 다니엘의 세 친구가 거절하자 네부카드네자르는 그들을 활활 타는 불가마에 던지게 한다. 그때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불길을 가마 밖으로 내몰아 세 젊은이를 보호한다. 

그때 불가마속에서 세 젊은이는 하느님을 찬양하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 노래가 그리스어 역본에만 나오는 '아자르야의 노래''세 젊은이의 노래'이다(다니3,24-90). 

"이제라도 뿔 나팔, 피리, 비파, 삼각금, 수금, 풍적 등 모든 악기 소리가 날 때에  너희가 엎드려, 내가 만든 상에 절할 준비가 되어 있다면 몰라도,  그렇지 않으면 곧바로 타오르는 불가마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 낼 수 있겠느냐? " (15)

본절 서두에 나오는 '이제라도' 해당하는 '케안 헨'(kean hen)은  '만약 지금이라도'로 직역되며, 이미 늦었지만 마지막으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네부카드네자르 임금 자신이 직권으로 부여하겠다는 뉘앙스를 나타내는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는 그 세 유다인들의 탁월한 능력을 잘 알고 있었고(다니1,19.20), 과거 그들의 간절한 중재 기도로 인해 자신의 꿈에 관한 모든 비밀을 알 수 있다는  사실도 잘 알고 있었다(다니2,49). 이와 같은 과거가 있었기 때문에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으로서는  그들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다른 한편,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여 금신상에 절하는 상황에서 그것을 거부하는 세 사람이 남는다는 것은 왕으로서 상당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을 것이다. 

때문에 그들의 마음을 돌려 다시 주어진 기회에 금신상에 절한다면, 네부카드네자르는 이렇게 한 번 그들에게 은혜를 베풂으로써 천하의 모든 사람들이 예외없이 자신의 권위에 복종하는 것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네부카드네자르임금이 그들에게 자신들의 결정을 돌이킬 수 있도록 상당히 이례적인 한 번의 기회를 더 부여한 이유라고 볼 수 있다.

본문에서 '악기소리가 날 때에'에서 '날 때에' 해당하는 '베잇따나 띠 티쉬메운'(beiddana di tishmeun)은 문자적으로 '너희가 듣는 바로 그 때에'(at the time you hear) 라는 의미이다. 이는 음악 소리가 울려 퍼질 때 조금도 지체함이 없이 곧바로 절해야 한다는 즉각성을 강조한다. 

'그렇지 않으면'(즉시)에 해당하는 '빠흐 샤아타'(bah shaatha)가  문자적으로는 '바로 그 순간에'라는 의미의 단어인데, 그들이 자기들의 신념을 굽히지 않고 임금인 자신의 명령에 거역하면 조금의 가차도 없이 즉각 불가마(풀무불)가운데 던질 것임을 경고하고 있다. 또한 이것은 당시 불가마가 금 신상 가까이에 있었고, 그 세 사람을 그 곳에 던져 넣을 만반의 준비가 다 갖추어졌단 사실을 암시한다.

"그러면 어느 신이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수 있겠느냐?" (15)

네부카드네자르의 이 발언은 실상 유다인들이 믿던 하느님께 대한 도전을 의미한다. 그는 사드락, 메삭, 아벳 느고가 절대적으로 신뢰하고 있는 이스라엘의 주 하느님을 대적하고 경멸하는 말을 내뱉고 있다. 

'너희를 내 손에서 구해낼 신'이라는 말은 분명 '하느님'을 염두에 둔 말이다. 달리 말하면 하느님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손에서 이들 유다 사람들을 건져 낼 수 없다고 장담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신'에 해당하는 '엘라흐'(elah)는 아람어에서 '하느님'을 지칭하는 단수형 명사이다.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에 의하면, 그 하느님은 일전에 자신에게 꿈을 계시해 주시고 그 꿈의 모든 비밀을 명확하게 설명해주신 전지(全知)하신 신이셨지만, 지금은 자신의 권한 하에서 불가마에

떨어진 사람들을 안전하게 건져낼 능력이 없는 신이었다. 

이스라엘의 하느님께 대한 네부카드네자르의 판단은 부분적이었고 불완전했으므로, 자신의 권력이 이스라엘의 하느님의 능력보다 더 크다고 확신했던 것이다. 만일 이 세 사람이 네부카드네자르의 명령을 따른다면, 그들은 스스로 하느님의 무능함을 시인하는 것이 되고 만다. 

이같은 임금의 제안이 담긴 이면의 의미를 그들이 알고 있었기에 이들 세 명의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은 목숨을 내놓고 금신상 앞에 절하는 것을 극구 거부하는 것이다. 본문에서 '내 손'에 해당하는 '예다이'(yedai)는 사실상  네부카드네자르 자신의 무소불위의 능력을 나타내는 은유적 표현이다. 

네부카드네자르자신의 위치 이스라엘의 하느님을 포함한 다른 모든 신보다 높은 최고의 신적 위치에 올려 놓고 있다. 이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뿐 아니라 타인과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큰 업적을 이루어낸 다른 인간들이 흔히 빠질 수 있는 교만의 함정이다. 

세상에서 크게 성공한 자는 자신의 근본과 한계를 쉽게 망각해 버리고 자신의 능력이 무한한 것인 양 착각하며, 자신의 존재를 종종 신격화하려는 욕망에 사로잡히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네부카드네자르의 그러한 오만방자한 신성모독적 언행 세 젊은이들이 소유한 하느님께 대한 굳은 신앙을 무너뜨릴 수 없었다. 

"가마를 여는 때에 달구는 것보다 일곱 배나 더 달구라고 분부하였다."(19) 

'일곱 배' 해당하는 '하드 쉬봐'(had shibah) '칠 배'를 의미하지만 본문에서는 '가능한 한 최상으로'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고 볼 수 있다. 

평소에 불가마(풀무불)은 벽돌을 굽거나 금속을 녹이는 등의 용도에 맞게 일정한 온도로 가열을 했지만, 그날 만큼은 이러한 용도와 관계없이 온도를 극대화해야 했던 것이다. 따라서 여기서 '일곱 배' 하느님께 대한 신앙을 굳게 지킨 세 사람이 당할 혹독한 시련의 강도를 묘사한 것이며, 동시에 네부카드네자르의 내면에 불타오르는 극한 분노가 어떤 것인지를 묘사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 역시도 자기 내면조차 다스리지 못하고 오히려 분노한 파격적인 감정의 지배를 받는 네부카드네자르를 신격화하고, 그가 가진 권세와 권력을 통하여 그를 숭배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것인지를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런데 내가 보기에는 네 사람이 결박이 풀렸을 뿐 아니라,  다친 곳 하나없이 불 속을 거닐고 있다.  그리고 넷째 사람의 모습은 신의 아들 같구나." (92)  

'결박이 풀려서' 해당하는 '셰라인'(sherain)은 원래 '자유롭게 하다', '풀어주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셰레'(shere)수동태 분사형으로 '자유롭게 된'이라는 의미이다. 당시 불 속에 떨어진 세 사람에게 가해진 단단한 결박이 풀렸다는 것은 참으로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에 대해서 하나는 불에 그 결박이 완전히 탔을 것이라는 설명 다른 하나는 네번 째 하느님의 아들 같은 존재가 풀어 주었을 것이라는 설명이 있다. 또한 '네 사람' 해당하는 '꾸브린 아르베아'(gubrin arbeah)'네 명의 남자들'이라는 의미이다. 불 속에 떨어진 사람의 숫자는 셋이었으며, 그들을 붙들고 던진 군사들마저  모두 용광로 밖에서 타 죽었기 때문에 이 역시 놀라운 광경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거닐고 있는데'에 해당하는 '마흘레킨'(mahlekin) '걸어 다니다'라는 의미를 지닌 동사 '할라크'(halak)능동태 분사형으로서 불 속을 계속해서 이리저리 활보하고 있는 그 네 사람의 동작을 나타낸다. 그들이 이렇게 힘차게 걸어 다니고 있었다는 것은 불 속에서 아무런 해도 당하지 않았다 사실을 암시한다. 주 하느님의 전능하신 역사가 아니고서는 이 광경을 설명할 길이 없다.

 

'다친 곳 하나 없이'에 해당하는 '와하발 라 이타이'(wahabal la ithai)'상처가 전혀 없었다' 의미이다. 불 속의 네 사람의 상태에 대해 그 정도로 정확히 볼 수 있었다는 것은 네부카드네자르 임금의 위치가 그 용광로에서 상당히 가까운 거리였음을 나타낸 것이라 할 수 있었다. 

'신(들)의 아들'에 해당하는 '레바르 엘라힌'(lebar elahin)은  다신론(多神論)적 세계관에 익숙해 있던 당시 네부카드네자르의 이교적 인지 능력을 넘어서 그 자신도 명확하게 인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영적 진리를 나타내는 표현을 했다고 볼 수 있다. 

먼저 이 표현을 천사 혹은 천사들 가운데서도 대천사 미카엘 보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많은 경우에 이를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으로 번역하여 신약의 관점에서 육화(강생) 이전의 그리스도의 형상이거나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신다' 뜻을 가진 제2위 천주 성자이신 임마누엘의 반영이라고 본다.

제2위 천주 성자 하느님께서 당신을 경외하는 신실한 종들과 함께 친히 고난을 함께 하시고, 그들로 하여금 고난을 견뎌내게 하셨으며 그들을 안전하게 지키셨던 것이다. 

천주 성자 하느님의 그와 같은 임재와 보호하심은 사실상 당시 바빌론 치하에서 고난을 당하던 모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들을 보호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을 대표하는 사건이라 할 수 있으며, 더 나아가서는 시대와 장소가 변해도 모든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에 대해 여전히 베푸시는 은혜를 암시하는 예표적 사건이라고 볼 수 있다.



오늘의 묵상

하느님의 보호는 오늘 독서의 세 젊은이 이야기에서 보는 것처럼 언제나 화려하거나 경이롭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의 섭리 전체를 보려면 그분의 계획이 실현되도록 기다릴 줄 알아야 합니다. 그래야 때로는 우연한 것, 되풀이되는 것, 실패처럼 보이는 것들이 제자리를 잡고 가치를 드러내기 시작합니다. 그분은 마치 안 계신 것처럼 보이고 의미 없다고 느껴질 때에도, 언제나 존재하셨고, 일하셨으며, 우리를 해방시키셨습니다. 언제나 어디서나 모든 사건은 그분에게서 오고, 놀라운 길로 우리를 그분께 이끌어 줍니다. 이것이 바로 세 젊은이의 신앙이고, 모든 순교자의 신앙입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는 것은 그분에 대한, 또는 그분의 가르침에 대한 단순한 호감을 갖는 것이나, 한순간 어떤 특별한 환경에서 그분을 위해 불사르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평상시에 늘 그분께 삶을 의탁함으로써, 자신의 온 행동을 그분께 지향해야 합니다. 진리를 존중하는 마음, 빛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리고 세상의 온갖 악의 유혹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이 세 가지가 요한 복음의 신비에 따른 영성 생활의 세 단계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자유는 우리가 늘 아버지의 집에 머물도록 허락하는 자유입니다. 아버지에게서 오셨고, 아버지께 돌아가시는 예수님께서 아버지와 자신의 소명에 마지막까지 충실하시는 그 희생을 드러내는 자유입니다.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8:32)


<자유> 송영진 모세 신부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요한 8,31-32)."


우리는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라는 말씀을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되려면 내 말 안에 머물러라."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의 참 제자가 된다는 것은
충실하게 신앙생활을 해서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된다는 것을 뜻합니다.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을 제대로 믿고, 그 믿음을 '삶으로' 실천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참 포도나무'에 관한 말씀에서
'머무르다.' 라는 말을 집중적으로 강조하셨습니다.
"내 안에 머물러라. 나도 너희 안에 머무르겠다.
가지가 포도나무에 붙어 있지 않으면 스스로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처럼,
너희도 내 안에 머무르지 않으면 열매를 맺지 못한다(요한 15,4)."
예수님 안에 머무르는 것은 예수님의 생명력을 받는 것입니다.
살고 싶다면 그 생명력을 잘 받아야 합니다.
즉 영원한 생명을 얻기를 바란다면 예수님 안에 잘 머물러야 합니다.


'진리'는 우리를 구원과 생명으로 인도하는
예수님의 말씀들, 가르침들, 계명들을 가리킵니다.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될 것이다." 라는 뜻입니다.


'자유'는 구원과 생명을 얻은 상태를 뜻합니다.
그래서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라는 말씀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의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잘 실천하면
구원과 생명을 얻게 될 것이라는 뜻입니다.
그 자유를 얻지 못하는 것은 구원받지 못하고 멸망하는 것입니다.
앞의 8장 21절에 "너희는 자기 죄 속에서 죽을 것이다." 라는 말씀이 있는데,
예수님을 믿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은 참 자유를 얻지 못하고,
죄의 억압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로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말하고 있는 자유는
하느님 나라에서 얻게 되는 자유만을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지금'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면서 참 신앙인이 된다면,
누구든지 '지금' 해방과 자유를 얻을 수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참 자유를 얻기 위한 생활이기도 하고,
'지금' 그 자유를 미리 누리는 생활이기도 합니다.
어떻든 중요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무르는 일은 나중으로 미뤄도 되는 일이 아니라
지금 당장 해야 하는 일이라는 점입니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요한 8,34-36)."


'죄' 라는 것에는 '악의 힘'이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죄를 짓는 것은
자기 스스로 그 '악의 힘'의 억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 됩니다.
죄의 억압 속으로 들어가는 것이니 죄의 종이 되는 것입니다.
반대로 죄를 안 지으려고 노력하는 것은
그 '악의 힘'과 맞서 싸우는 것이고, 자유를 지키려고 노력하는 것입니다.


죄를 지었더라도 회개하면 자유를 되찾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회개하지 않으면 죄의 노예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점점 더 깊이 '악의 힘' 속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한다." 라는 말씀은
"죄의 노예 상태가 되어 있는 사람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 라는 뜻입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모두 당신의 집에 들어오기를 바라시는 분입니다.
그래서 죄인은 하느님의 집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말은,
사실은 하느님께서 못 들어오시게 하신다는 뜻이 아니라
자기가 안 들어간다는 뜻입니다.
(안 들어가서 못 들어가는 것입니다.)
여기서 '종은 언제까지나' 라는 말에는
'죄를 지었으면서도 회개하지 않는다면 결코' 라는 뜻이 들어 있습니다.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라는 말씀은,
"하느님의 참 자녀들은 영원히 하느님의 집에서 살게 된다."로 해석할 수 있습니다.
여기서 '언제까지나'는 '영원히'입니다.


루카복음에 있는 '되찾은 아들의 비유'를 보면,
아버지는 두 아들이 모두 집으로 들어오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지었지만 회개한 작은 아들은
집에 들어가서 잔치 음식을 먹고 있고(루카 15,24),
자기는 종처럼 일만 했다고 불평하는 큰아들은
집에 들어가기를 거부하면서 밖에 있습니다(루카 15,28).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라는 말씀은,
"너희가 참으로 자유롭게 되기를 바란다면 아들이(내가) 주는 자유를 받아라."
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은 앞에서 말한 "내 안에 머물러라(요한 15,4)." 라는 말씀과
사실상 같은 말씀입니다.


'죄의 종'이라는 말에서 바오로 사도가 한 말이 연상됩니다.
"내 지체 안에는 다른 법이 있어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고 있음을 나는 봅니다.
그 다른 법이 나를 내 지체 안에 있는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합니다.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몸에서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23-24)"
이 말은, 죄를 지으면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자꾸만 죄를 짓게 되는
인간들의 현실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죄의 법'에 사로잡히게 한다는 말은, '죄의 종'으로 만들어버린다는 뜻입니다.
'비참한 인간'이라는 말은,
인간의 힘만으로는 그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그 싸움에서 이기려면 예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예수님의 도움을 받으려면 예수님의 말씀 안에 머물러야 합니다.
즉 예수님의 계명들과 가르침들을 충실하게 실천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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