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이 땅바닥에 쓴 글씨 (간음녀로 말미암아 시험을 받으신 예수)
글/착한이
이 구절만큼 소설화(?)된 구절은 없을 것이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이 구절은 좋은 안주거리가 되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은 주로 예수가 땅에 무어라고 썼을까에 대한 것이거나 여기 등장하는 여인이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인가에 달려 있었다. 어떤 사람들은 예수가 생각을 정리하는 차원에서 무의미한 글씨를 쓰고 있었다고 보는 사람도 있고 돌을 들고 있었던 사람들의 죄명을 쓰고 있었다는 사람들도 있고 또 어떤 사람들은 이 일과 관련된 성경구절을 쓰고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상상에 지나지 않는다. 본문은 단순히 모호할 뿐이다. 이 여인의 정체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그녀가 ‘막달라 출신의 마리아’는 아닌 것 같다. 이와 같은 동일시는 후대에 등장할 뿐이다. 게다가 ‘모이큐에인’(간음하다)이라는 단어가 지칭하듯이 그녀는 기혼녀였을 것이다.
이와 같은 본문상의 혼란과 아울러 이 단락의 문체적 특징은 요한복음의 문체보다는 공관복음서와 더 잘 어울린다. 그렇기 때문에 이것은 학자들도 인정하듯이 일종의 고아단락(orphan passage)으로 여겨야 할 필요가 있다. 결과적으로 이 부분은 후대에 현재의 요한복음의 이 자리에 삽입되게 되었다고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단락이 고대 전통의 지지를 받는다는 점에서 이 본문의 역사성과 진정성이 부인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어떤 사람들은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예수에게 난해한 사례를 제시하여 그를 궁지에 몰아넣으려고 했다고 생각한다. 즉 이들의 논리에 따르면, 예수가 지금까지 전했던 사랑과 용서의 교훈과 기존에 유대인들이 금지옥엽으로 믿어왔고 지켜왔던 모세율법의 준수 여부와 관련하여 예수를 곤궁에 빠뜨리려고 했다고 보았다. 정의냐 사랑이냐. 독자들 중에서 이런 식의 설교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해석은 적합하지 않은 것 같다. 예수는 공관복음에서 바리새인들과 사두개인들이 제기한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마 16:1, 막 8:11, 눅 11:16), 바리새인들이 제기한 “모세의 규례와 이혼문제”(마 19:3), 바리새인들과 헤롯당원들이 제기한 “가이사의 초상이 새겨져 있는 데나리온”(마 22:18), 바리새인이 제기한 “십계명의 준수”(마 22:35, 눅 10:25) 등과 같은 내용으로 시험을 당했다. 물론 공관복음서에 이와 유사한 시험들이 등장하지만, 시험이라는 말이 사용된 것은 위에서 언급한 것들뿐이다.
그러나 문제는 로마법에는 간음이 사형집행의 대상이 아니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사도행전에 나타난 스데반의 투석에 의한 즉결처형이나 사울이 돌아다니면서 기독교인들을 붙잡아 감옥에 가두거나 예루살렘으로 압송하는 등의 행동은 로마법상 정상적인 행위가 될 수 없었고 이것은 로마당국이 그러한 행위들을 몰랐거나 태만하게 행동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는 가이사의 모습이 새겨져 있었던 데나리온 동전의 경우에서처럼 이번 기회에도 그와 같은 시험을 벗어날 수 있었던 재치를 발휘하였다. 사실 율법에 따르면, 간음녀에 대한 즉결처분의 경우에는 증인들이 먼저 돌을 들어서 그녀에게 던져야 했던 것이다.
한동안 흙바닥에 무언가를 쓰고 있었던 예수는 대답하기를 재촉하는 자들에게 일어나서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그녀를 쳐라”고 말하였다. 만약에 예수가 “법대로 현장을 발견했던 자들이 먼저 돌로 그녀를 쳐라”고 말했더라면 간음녀도 죽었을 테지만 예수도 더 큰 위험에 처하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죄 없는 자”라는 말을 하였다.
유효한 증인들이 없는 경우에는 즉결처분이 가능하지 못했다. 율법의 한계는 거기에 있었다. 증인이 없다면…. 우리 모두가 죄인인 이유는 증인이 있기 때문이 아니다. 물론 하나님이 지켜보시고 나와 상대방이 알고 있기는 하지만 말이다. 이제 예수 앞에 있던 사람들은 현장에서 잡힌 간음녀와 현장에서 잡히지 아니한 죄인들로 나눌 수 있었다.
예수는 마지막으로 “여자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않는다”라고 말한다. 이 말은 예수도 그녀를 “간음죄를 지은 죄인”이 아니라고 생각한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인간적인 측면에서의 정죄의 취소가 아니라, 신적인 측면에서의 정죄의 유예(일종의 용서와 자비)다. 그러나 예수는 그녀에게 “네 길을 가라. 지금부터는 죄를 짓지 말라”고 말한다. 이 말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 습관적인 행위의 금지를 의미한다.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서 예수는 로마법이나 모세의 법도 위반하지 않았으며, 간음녀도 살려내고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책략도 수포로 끝나버리게 만들었다. 게다가 예수는 아직 밝혀지지 못했지만 죄를 범하고 있었던 서기관과 바리새인들과 군중의 양심을 깨우쳤으며 간음죄를 범한 여인에게 새로운 삶의 방식을 교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