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사야서] 49장 12절에 "시님 땅에서 오리라"
본문성경에 나타난 북방과 서방은 이미 언급되어 있기 때문에 시님땅은 남방이나동방이나 혹은 원방의 어느땅으로 추정됩니다. 시님을 확인하려는 많은 시도가 있었지만 아무곳도 결정적인곳은 못되는 것 같습니다.
시님이 중국일것이라는 정통적인 해석은 히브리어 시님이 BC3세기말에 중국을 다스린 왕조인"친"과 발음이 비슷하기 때문입니다.
아주고대부터 중국은 서방세계와 상업적 거래를 해 왔습니다.
한문글자 명각이 새겨진 도자기가 고대애굽의 테배에서 발견되었습니다.
바사에 살던 유대인들이 중국의 비단장사와 거래를 한듯합니다.
그러나 이사야 시대보다 수세기 이후까지 시님 혹은 친이 중국을 지칭했다는 증거는 없습니다.
시님이 중국을 지칭했다는 역사적 증거가 없기때문에 일부학자들은 시님이 애굽의 나일강상류의 "스웬임" 혹은"시에네" 일것이라고 제안합니다. 아람어 용례는 이 제안을 지지하는듯 합니다. 사해두루마리에는 스웨나임으로 해석이 있어 시앤이라는 해석이 가깝다고 볼수도 있습니다.
70인역에는 바사로 번역되어 있습니다.
또 다른 학자들은 신광야에 있는 시내 또는 베니게 혹은 북 아라비아 사막일것이라고 제안하기도 합니다.
그정도만 이해하고 있어도 이 장소에 대하여서는 큰 문제가 없을줄 압니다.

백투예루살렘과 ‘시님의 군대’
‘시님의 군대’란 없다!
일부 지나(支那) 교회가 펼치고 있는 ‘백투예루살렘(Back To Jerusalem)’이라는 복음전파운동이 있다. 복음을 지나 북서부 및 중동 등지를 거쳐 예루살렘까지 전하자는 운동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 향후 20년 내에 10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려는 목표를 세워놓았다고 한다. 선교사 100만 명! 실로 엄청난 숫자다. 한 나라가 100만 선교사를 파송한다면 그것은 2천년 교회사에 유례가 없는 경이적 사건이 될 것이다. 그게 가능할까?
지금 인구대국 지나에는 약 8천만 명에 달하는 기독교인이 있다(1억 2천만 명이라는 설도 있는데 그것은 과장된 숫자다). 따라서 실현 가능성 여부는 차치하고 수적으로 아주 많은 기독교인이 있는 지나 교회는 얼마든지 “선교사 100만 명 파송”이라는 목표를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어쨌든 박해 가운데 있는 지나 교회가 주님의 지상명령을 성취하기 위해 그렇게 놀라운 일을 계획하고 있다는 것은 대견한 일이다.
그런데 지나 교회의 백투예루살렘 운동을 이사야 49장 12절에 기록된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는 성경 예언의 성취라고 가르치는 국내 선교단체의 지도자가 있다. I선교회의 대표 C형제는 그의 책 「백투예루살렘」130쪽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교회의 백투예루살렘 비전은 이미 성경에서 예언한 말씀의 성취입니다. 이사야서 49장 11~12절에 기록된 것처럼 하나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 마지막 시대 중국교회에서 시님의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일어날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지금까지는 소수의 선교사들이 마치 산골짜기를 따라 어렵게 선교사역을 감당하는 듯 했지만 마지막 시대는 다릅니다. 허다한 성도들이 일어나 대로를 따라 복음의 행진을 하게 될 것입니다. 원방에서, 서방에서 세계 곳곳에서 대로를 따라 성도들이 몰려올 것입니다. 그러나 이 가운데 마지막 역사를 감당할 주의 백성들은 중국에서 일어날 시님의 군대가 될 것입니다. 마지막 시대의 거룩한 100만 대군입니다.”(「백 투 예루살렘」, 도서출판 펴내기, 2005, p.130)
그리고 같은 책 158쪽에서는 이렇게 설명한다:
“또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마지막 때에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시님의 군대에 관한 예언의 말씀으로, 대로를 따라 시님 군대가 예루살렘을 향해 몰려올 것인데 여기서 시님은 곧 중국을 말한다(사 49:11~13).”
그래서 C대표는 ‘마지막 전쟁’은 하느님(하나님)께서 지나 교회를 통하여 ‘순식간’에 이루실 것이라고 주장한다(같은 책 158쪽).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 지나 교회가 100만 명 선교사를 파송할 것이니까 ‘순식간’에 마지막 대추수가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우리 한국 교회에 부여된 역사적, 시대적 사명이란 장차 지나 교회가 감당할 그 마지막 주님의 위대한 역사 앞에 약 10만 명 정도의 선교사를 내보내어 시님의 군대 100만 대군의 ‘첨병’ 역할을 감당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같은 책 158쪽). 그는 촛대는 이미 지나 교회로 옮겨졌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과연 장차 지나에서 소위 ‘시님의 군대’ 100만 대군이 일어나 ‘마지막 주자’의 사명을 감당할 것인가? 우리 한국 교회에 주어진 소임이란 그 위대한 ‘시님의 군대’ 앞에 나아가 첨병 역할을 수행하는 것인가? 국어사전은 ‘첨병(尖兵)’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군대가 행군할 때, 부대의 맨 앞에서 경계, 수색을 하는 임무를 맡은 병사나 소부대.”
한국 교회의 지위가 지나 교회의 ‘소부대’란 말인가? 참으로 지나 교회의 소부대로서 그들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 우리 겨레의 시대적, 역사적 사명인 것인가? 정녕 그것이 우리 한국 교회 젊은이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비전이란 말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애석하게도 그것은 그릇된 성경해석과 사대주의 정신이 결합되어 나온 억설이다.
‘시님’이 지나(China)로 간주되는 근거
먼저 ‘시님’이 왜 ‘지나(支那)’인지 그 근거부터 확인해 보자. 지나 사람을 부를 때 ‘시노(Sino)’ 족이라고 한다. ‘시노’ 족이 사는 땅이 바로 ‘시님(Sinim)’인 것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시노’는 함의 후손 ‘신(Sin)’ 족속에 해당 된다(창 10:17). ‘시노’의 어원이 ‘신’이다(강해설교의 대가인 미국 갈보리교회의 척 스미스 목사도 그의 창세기 강해서인 ‘천지창조’에서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신’은 가나안의 아들이요, 가나안은 함의 넷째 아들이다(창 10:6; 15). 지나의 기원은 함의 가계, 그 중에서도 가나안의 아들 ‘신’이 지나 민족의 고대 선조이다(창 10:17하). 그러니까 지나 사람은 셈의 자손이 아니라 함의 후손인 것이다.
지나인이 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뒷받침 해주는 과학적 증거도 있다. 2005년 1월 윈난(雲南)성 쿤밍(昆明) 소재 동물연구소 유전생물학 실험실의 장야핑(張亞平) 원사는 현재의 지나인들은 아프리카인과 조상이 같다는 연구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지나인의 유전자본체(DNA)에서 Y염색체를 추출해본 결과 아프리카 흑인들의 선조에서 나타나는 특징이 대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지나인의 조상이 고대 아프리카인이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것이다(문화일보 2005년 1월 15일자 기사).
지나 사람이 셈족이 아닌 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고대로부터 용(龍)을 숭배하는 그들의 유별난 문화에 의해서도 입증이 된다. 용은 지나의 상징이다. 지나는 용으로 대표되는 나라다. 바로 이것이 지나인이 함의 자손이라는 사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객관적 증거이다. 왜냐하면 용의 고향이 함의 손자 니므롯이 세운 바벨론이기 때문이다. 용은 바벨론의 성수(聖獸)였다. 이 용을 바벨론에 살던 지나인의 조상들이 고대에 동양으로 갖고 들어온 것이다. 당시 그들은 곤륜산을 넘어서 동쪽으로 이동하여 중원(中原)으로 들어왔다. 곤륜산은 일명 ‘화토(華土)’라고도 한다. ‘화토’를 지나왔다는 뜻에서 그 종족을 ‘화족(華族)’이라 하게 된 것이다.
바벨론의 용
용은 ‘옛 뱀’이요 ‘마귀’요 ‘사단’이다(계 12:9, 19:2). 실제로 용은 신비감을 자극하는 뱀의 형상을 하고 있다. 이것은 지나의 기원이 함이라는 사실을 뒷받침해 준다. 고대로부터 뱀을 지극히 숭배하는 족속이라면 그들은 결코 셈의 후손이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나 사람이 함의 후손이라는 사실은 자명한 것이다. 가나안의 아들 ‘신(Sin)’ 족속이 바로 ‘시노(Sino)’ 족이라 일컫는 지나인이며, ‘시노(Sino)’ 족의 땅이 ‘시님(Sinim)’인 것이다. ‘시님’이 ‘지나’로 간주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2009년 8월 차이나 건국 60주년 퍼레이드에 등장한 용
이사야 49장 12절의 진정한 의미 이제 문제의 구절인 이사야 49장 12절을 바로 해석해 보자.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사 49:12). C대표는 이 구절을 이방 교회들의 이스라엘 선교에 대한 예언으로 이해하고 있다. 즉 허다한 성도들이 원방, 북방과 서방, 그리고 시님, 곧 지나 대륙 등 세계 곳곳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몰려올 것을 예언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마지막 역사를 감당할 주의 백성들은 지나에서 일어날 시님의 군대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이 구절은 이방 교회들의 이스라엘 선교에 대한 예언이 아니라,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의 고토 귀환에 관한 예언이다. 그것은 12절 앞에 있는 8~11절 말씀을 보면 의문의 여지가 없다. 8. 여호와께서 또 가라사대 은혜의 때에 내가 네게 응답하였고 구원의 날에 내가 너를 도왔도다. 내가 장차 너를 보호하여 너로 백성의 언약을 삼으며 나라를 일으켜 그들로 그 황무하였던 땅을 기업으로 상속케 하리라 9. 내가 잡혀 있는 자에게 이르기를 나오라 하며 흑암에 있는 자에게 나타나라 하리라 그들이 길에서 먹겠고 모든 자산에도 그들의 풀밭이 있을 것인즉 10. 그들이 주리거나 목마르지 아니할 것이며 더위와 볕이 그들을 상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을 긍휼히 여기는 자가 그들을 이끌되 샘물 근원으로 인도 할 것임이니라 11. 내가 나의 모든 산을 길로 삼고 나의 대로를 돋우리니 여기 8절 말씀 가운데 있는 “너”와 “그들”은 이스라엘 백성을 말한다. 또한 9절에 있는 “잡혀 있는 자”와 “흑암에 있는 자”도 의문의 여지없이 이스라엘 백성인 것이다. 물론 10절에 나오는 “그들”도 이스라엘 민족이다. 그러니까 “혹자는 원방에서, 혹자는 북방과 서방에서,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는 12절 말씀은 어디까지나 8절에서 계속되는 “이스라엘 백성”에 대한 예언인 것이다. 그러면 12절이 의미하는 바는 무엇인가? 그것은 세계 곳곳에 흩어져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말세에 그들의 고토로 귀환할 것이라는 예언인 것이다. ‘북방’은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 주로 러시아의 유대인을 뜻한다. ‘서방’은 주로 북남미, 특히 유대인이 가장 많이 살고 있는 미국을 가리킨다. ‘시님’은 ‘지나’를 뜻한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유대인들은 나치 학살을 피해 세계 각지로 탈출을 시도하였다. 그때 일부 유대인들은 지나 땅까지 도피했는데, 상해에 25,000명(당시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상해만 비자 없이 입국이 가능했다), 북경에 5,000명의 유대인이 거주하였다. 1948년 이스라엘 국가 재건 이후 이사야 49장 12절의 예언은 명확히 성취되었다. 그리고 장차 주님의 재림이 임박할 때에 이 예언은 더욱 온전히 이루어질 것이다. 이처럼 성경의 예언에 따라 말세에 세계에 흩어져 있던 유대인들이 팔레스틴의 고토로 되돌아가는 것(신 30:3~6; 사 11:12; 렘 32;37; 겔 37:21), 바로 이것이 ‘백 투 예루살렘’의 진정한 의미이다. 가령 ‘대전으로 돌아가자’는 말은 충남 대전이 고향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이방인들이 이스라엘로 복음을 전하러 가는 것, 혹은 이방 기독교인들이 이스라엘로 성지순례를 가는 행위 등을 ‘백 투 예루살렘’이라고 부르는 것은 언어의 오용이다. 한국 교회 성도들은 일부 지나 교회가 만들어 낸 이치에 안 맞는 ‘백 투 예루살렘’이라는 용어를 무분별하게 답습해 쓰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겠다. 이사야 49장 12절과 동일한 예언의 말씀이 이사야 43장 5~6절에도 있다. 5. 두려워 말라 내가 너와 함께하여 네 자손을 동방에서부터 오게 하며 서방에서부터 너를 모을 것이며 6. 내가 북방에게 이르기를 놓으라 남방에게 이르기를 구류하지 말라 내 아 들을 원방에서 이끌며 내 딸들을 땅 끝에서 오게 하라 여기에서 ‘동방’은 아시아를 의미하고, ‘서방’은 주로 북남미, 특히 유대인이 가장 많은 미국을 뜻한다. ‘북방’은 이스라엘의 북쪽 지역을 말한다. 거기에는 독일, 폴란드, 러시아가 있다. 오늘날 러시아는 이들 중 가장 큰 나라로서 유대인들이 가장 많이 남아 있다. 여기서 ‘남방’이라고 하는 것은 히브리어로 예멘을 지칭한다. 이스라엘 국가 재건 이후 예멘에서는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이스라엘로 귀환했다. 이상 살펴본 바처럼 이사야 49장 12절은 흩어진 유대인들의 고토 귀환에 대한 예언이다. 따라서 이 구절에 나오는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는 문구를 지나 교회의 백투예루살렘 운동을 예언한 것이라고 설명하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성경에는 어디에도 마지막 주의 위대한 역사를 수행할 이른바 ‘시님의 군대’가 일어나리라고 예언한 말씀은 없다. 「하늘에 속한 사람」을 저술한 지나 교회의 지도자 폴 해터웨이도 “혹자는 시님 땅에서 오리라”라는 구절을 지나 교회의 백투예루살렘 운동과 연계시킨다. 아전인수(我田引水)격 해석인 것이다(2005년 2월 한국을 방문했던 폴 해터웨이의 동역자 수 형제는 영동제일교회 주최 부흥성회에서「하늘에 속한 사람」은 약 50%가 과장된 것이라고 고백했다). 2008년 북경올림픽 이후 향후 20년 내에 10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겠다는 일부 지나교회의 이른바 백투예루살렘 운동은 성경 예언의 성취가 아니다. 그것은 다만 사람의 계획일 뿐이다. 따라서 그대로 이루어질지는 두고 볼 일이다. 결국 C대표는 실현 여부가 불확실한 인간의 계획을 성경 예언의 성취라고 잘못 해석하여, 마지막 전쟁을 수행할 ‘마지막 주자’는 '지나 교회'라고 단정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그렇게 예언을 곡해한 것을 성경적 교훈인 양 한국 교회 청년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게다가 더 어처구니없는 것은 우리 한국 교회에 부여된 역사적, 시대적 사명이란 그 위대한 시님의 군대 100만 대군 앞에 약 10만 명 정도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지나 교회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라고 교훈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이없는 일이다. 그는 전혀 성경적 근거도 없이 한국 교회의 지위를 함부로 지나 교회의 첨병, 곧 소부대로 격하시키고 말았다. 이렇게 성경을 잘못 해석하면 아주 엉뚱한 주장을 하게 된다. 그리하여 사도 바울은 다음과 같이 권면했다: “네가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변하여 부끄러울 것이 없는 일군으로 인정된 자로 자신을 하나님 앞에 드리기를 힘쓰라”(딤후 2:15). 사대주의자가 아니신 하느님 C대표는 잘못된 성경 해석을 토대로 우리 한국 교회 청년들이 가슴에 품어야 할 비전을 “열방과 예루살렘 땅끝까지”가 아니라 “지나 교회의 첨병 되기”로 축소시켰다. 개탄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지나 사람들은 우리나라를 속국 취급을 하고 있다(지나인들의 이러한 대한(對韓) 인식은 기독교인도 예외가 아니다). 이런 현실에서 단순히 지나 교회의 숫자에 위압당해 아무 성경적 근거도 없는 ‘첨병론’을 들고 나와 소위 ‘시님의 군대’의 소부대를 자처하고 나서는 것은 슬픈 일이다. 이러한 사상은 마치 지나(支那)를 대국으로 숭배하던 조선시대의 사대주의자들이 조선을 소중화라고 자처하며 만족해했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러므로 이러한 교훈은 필연 한국 교회 청년들의 의식 속에 은연중 사대모화(事大慕華) 정신을 부추길 것이며, 결국 한국 기독교인들을 잠재적 사대주의자가 되게 될 것이다. 2005년 4월 10일, 한기총과 한국세계선교협의회는 현재 1만 3000명인 정규 선교사 수를 5만 명으로 대폭 늘리고 이르면 2020년까지 100만 명 자비량 선교사를 배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선교활성화 운동을 시작한다고 발표했다(국민일보 4월 11일자 기사). 그러니까 10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겠다는 계획은 인구대국 지나 교회만 세울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한국 교회도 얼마든지 그러한 계획을 세울 수 있으며, 또한 한국 교회는 충분히 이 목표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분단의 고통을 겪고 있는 아시아 변방의 작은 나라 한국, 더욱이 복음을 수용한지 120년이라는 일천(日淺)한 역사를 가진 나라, 그러면서도 오늘날 우리나라는 세계 제2위의 선교대국으로 부상했다. 아주 놀라운 사실 아닌가? 이러한 사실을 감안한다면 한국 교회의 100만 명 선교사 배출 비전은 결코 과대망상이 아닌 것이다. 장차 통일 대한민국은 미국을 추월하고 능히 세계 제1위의 선교강국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한국 교회는 아무리 잘해도 10만 명 이상의 선교사는 내보낼 수 없을 것이다. 한국은 작은 나라이기 때문이다. 100만 명 선교사를 배출할 수 있는 나라는 인구대국 지나뿐이다. 따라서 한국 교회의 시대적, 역사적 사명은 지나 교회의 ‘첨병’ 역할을 하는 것이다. 촛대는 지나 교회로 넘어 갔다. 마지막 전쟁은 선교사 100만 대군을 파송할 나라 지나의 몫이다”라고 예단한다면 그것은 메뚜기 콤플렉스(민 13:33)요, 사대주의의 부활이다. 지나는 인구대국이요 기독교인도 8천만 명이기 때문에 장차 10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하여 마지막 전쟁을 수행할 나라라고 단정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지나와 비슷한 인구대국 인도는 기독교인이 1억300만 명이니, 인도 교회는 적어도 150만 명의 선교사를 파송할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마지막 전쟁을 수행할 나라는 지나가 아니라 인도라고 해야 옳지 않을까? 더욱이 약 20년 후면 인도의 인구가 지나 인구를 앞지를 것이라고 한다. 지나는 국가가 하나만 낳아 기르도록 산아제한을 하고 있지만 인도는 그게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형제자매여, 우리 하느님이 숫자와 덩치의 크기를 보고 일하시는 분이란 말인가? 그것은 아주 비성경적인 발상이다. 전능하신 하느님은 어떤 전쟁이든 ‘인해전술(人海戰術)’을 의지하는 분이 아니시기 때문에 마지막 전쟁에 꼭 100만이라는 수의 선교사가 필요한지 의문이다. 그러나 마지막 대추수를 위해 100만 명의 선교사가 필요하다면, 하느님은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 교회를 통해 그 일을 행하실 것이라고 나는 확신한다. 왜 나는 그렇다고 믿는가? 성경을 관찰해 보니 우리 하느님은 골리앗처럼 덩치 크다고 특별하게 쓰시는 사대주의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작고 약한 것을 선택하여 크고 강한 것을 부끄럽게 하신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고전 1:27~28). 성경은 하느님이 어린아이와 젖먹이의 입으로 말미암아 권능을 세우시는 분이라고 말한다(시 8:2). 즉 세상의 약한 자와 어리석은 자를 영적 현자와 강자로 만드셔서 잘난 체 하는 자들의 허위와 교만을 격파시키는 분이 여호와 하느님이시라는 것이다. 그리하여 하느님은 항상 ‘소수’로 하여금 ‘다수’를 압도하게 하신다. 그는 “너희 다섯이 백을 쫓고 너희 백이 만을 쫓으리니”(레 26:8)라고 말씀하셨다. 기드온이 미디안, 아말렉을 비롯한 여러 이방족속의 연합 공격에 대비하려고 32,000명의 군사를 모집했을 때, 하느님은 31,700명을 집으로 돌려보내셨다. 그분은 단 300명으로 승리를 주시고자 했다(삿 6:33; 7:1~8). 약한 것들을 선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없는 것들을 선택하사 있는 것들을 쓸모없게 만들려는 것이 자비하신 하느님의 성품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마지막 전쟁을 위해 100만의 선교사가 꼭 필요하다면 하느님은 그들을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 교회에서 부르실 것이라고 얼마든지 단언할 수 있다. 이것은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을 선택하신 이유도 그들의 수효가 작기 때문이라고 말씀하신 신명기 7:6~7 말씀에 의해서도 보증된다. “너는 여호와 네 하나님의 성민이라.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지상 만민 중에서 너를 기업의 백성으로 택하셨으니 여호와께서 너희를 기뻐하시고 너희를 택하심은 너희가 다른 민족보다 수효가 많은 연고가 아니라 너희는 모든 민족 중에 가장 작으니라”(신 7:6~7). 그렇다! 수효가 많지 않은 작은 나라를 선택하셔서 구원의 계획을 이루시는 것이 자비로운 하느님의 성품이다. 따라서 우리나라는 ‘작은 나라’임으로 오히려 큰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하느님은 사대주의(事大主義)자가 아니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수효가 13억이 넘는 지나(支那)와 같은 영토대국, 인구대국은 ‘마지막 주자’로 쓰실 백성이 아니라고 얼마든지 단정할 수 있다(이 글의 논지를 잘 이해해 주기를 바란다. 나는 지금 하느님이 우리나라만 쓰신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며, 지나 교회는 선교를 할 수 없다고 말하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선교활동 영역에서 이웃 나라들과의 파트너십을 부정하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