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경준(jeunerhino)
2012-02-23 먼저 가상칠언(架上七言)을 보자.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갚아주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실 때에 하셨다는 일곱가지 말씀이다. 이미 상식에 속하므로 그 구체적 내용은 생략하니 궁금한 분은 직접 찾으시길.
이 가상칠언에 대한 성경공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옳은 것일까? 묵상 차원만이 옳을까, 연구 차원만이 옳을까? 이런 우문(愚問)에 답을 주는 사람이 정작 우답(愚答)을 말한 꼴이 될 것이다. 둘 다 옳다. 틀린 게 아니고 그저 다를 뿐이다.
둘 다 옳기에 상대쪽 방법을 탓하는 것 자체가 '틀린' 것이다.
먼저 '묵상 차원'을 보자.
성경에 기록된 이 일곱가지 표현은 모두 우리 인류를 위해 예수님께서 쏟아내셨다는 마지막 말씀이다. 그 말들을 하나하나 마음 속으로 외면서 참 하느님이신 예수님의 사랑을 몸으로 마음으로 받아들이고 감사를 드린다.
참된 묵상이다. 살아계셨을 때의 여러 가르침도 되새기고, 살아계셨을 때의 여러 기적과 표징도 돌아보고, 살아계셨을 때의 여러 힘든 상황도 가슴아파하면서 최후의 예수님을 그려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잘 모르지만 이른바 '렉시오 디비나'가 그런게 아닐까 싶다. 내가 잘 모르니 아니라면 할 수 없고...
그럼 이번엔 '연구 차원'을 들여다 보자.
성경 연구가들 - 가톨릭 개신교 구분 없이 -은 이 가상칠언에 대해 아직 결론을 내리지 못한 것 같다.
각 복음서에는 이 일곱가지 말씀 중에 어떤 곳은 단 하나, 어떤 곳은 몇 개가 실려 있을 뿐 이 일곱 말씀이 다 들어 있는 복음서는 없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해서 성경 연구가들의 성향에 따라, 갖가지 연구 결과 - 또는 추측 -을 내 놓고 있으며 그걸 가지고 열띤 토론과 논쟁과 심지어 다툼까지 일어나고 있는 형국이겠다. 그 와중에서 어느 학자나 성직자도 '이 일곱가지를 모두 예수님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다 하셨다'라고 주장하는 사람은 아직 보지 못했다.
이게 연구다.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 기존의 것들을 '회의'하고 다시 들여다 보고, 고민하고, 기도하면서 그 '진실'을 향해 나아가는 것. 그것이 연구다.
그럼 이런 큰 흐름은 결국 서로 만나지 않고 끝까지 제 길만 걸어갈까? 나는 그렇게 생각지 않는다. 언젠가는 만난다. 아니 이미 만나 왔다. 줄곧...
묵상은 연구에 영향을 끼치고, 그 반대로 연구는 묵상에 영향을 미친다. 간혹 그 영향이 '부정적'일 때도 있었지만 그 보다는 '긍정적'일 때가 더 많았다.
치밀한 성경 연구는 묵상을 살찌웠으며, 영성 가득한 묵상은 성경 연구가 다른 길로 빠지지 않도록 충실한 등대 역할을 해 왔다.
간혹 성경공부에 대한 얘기를 꺼낼라 치면 흔히 나오는 얘기 중 하나가 '문자에 집착하지 말라'라는 것이다. 그건 어불성설이다.
아주 간단한 얘기부터 하자.
지금 보고 있는 성경이 어떻게 내 손에 들어왔는지만 보면 알 일이다. 성경 대부분이 히브리어와 헬라어로 쓰였다는데 성경 연구가 없이 묵상 만으로 우리말로 번역된 것인가? 또 중세 교회에서 썼다는 불가타가 지금 내 손에 쥐어져 있다면 어디 무서워서 한 장이라도 넘길 수 있을 것인가?
우리말 성경만 하더라도 그 내용이 꾸준히 바뀌어 - 큰 줄기와 내용은 같겠지만 일부는 여전히 그 개념과 표현이 바뀌었다 - 왔는데 그 변화가 치밀한 연구 없이 간절한 기도로만 이뤄졌던가?
교리서도 마찬가지이다. 성경과 전승에 대한 끊임 없는 관심과 연구의 총합이 바로 교리서다. 교회의 성직자 뿐만 아니라 신학자들이 일생을 통해 얻어낸 결과물이 그 교리서 안에 들어 있는 것이다. 성경 연구를 배제한 채 골방에 틀어 박혀 오로지 성령의 감동만 기다리면서 써 내려간 글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런 연구 결과를 무시한 채, 또는 그런 결과물이 있는지도 모른 채, 그저 성경책에 쓰여 있는 몇 줄을 놓고 혼자서 이리 궁리하고 저리 돌려 보다가 느껴진 '자신만의 생각'을 드러내는 것이야 말로 정말 위험한 묵상일지도 모른다.
지금껏 그런 위험한 행동들이 우리 교회사에 어떤 해악을 끼쳐 왔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가 없다. 굳이 통일교 문선명을 얘기할 필요가 없고, 굳이 박태선이를 욕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이런 묵상 - 대개는 충분히 가치가 있고 또 그걸 통해 믿음을 한층 공고히 할 수 있지만-에 대해 조금이라도 다른 의견을 제시하면 곧바로 '하느님의 저주'를 쏟아내는 행위는 절대 '올바른 묵상'으로 볼 수가 없다.
성경 연구에서 간혹 비그리스도교적인 해석의 방법론이나 결과물이 튀어나올 수도 있지만, 그건 교회의 가르침과 충분한 '계속 연구'를 통해서 결과적으로는 교회 안으로 흡수될 수 있고, 또 지금껏 그렇게 되어 왔다. 성경 연구의 결과물 - 그것도 비합리적이면서 비그리스도교적인- 만을 무기로 신앙을 저버리고 교회를 뛰쳐 나간 사례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구더기 무서워 장 못 담그는' 우(愚)는 범할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된다.
묵상과 성경 연구...
이는 따로 또 같이 손잡고 걸어야 하는 성경 공부의 두 갈래이다.
이 중 어떤 건 맞고 어떤 건 틀렸다고 얘기하는 그 자체가 틀린 것이다.
누차 얘기하지만 다른 것은 다른 것이지 틀린 게 아니다.
다른 것은 그 보는 각도에서 달라 보일 뿐 그 둘이 같은 지점에서 함께 손잡는 경우가 더 많다. 그래서 그 둘은 각각 옳은 것이며 또 그 둘은 서로 같다고까지 말할 수는 없어도 어느 하나가 틀렸다고 말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묵상은 성경 연구에 힘을 얻고,성경 연구는 묵상의 도움을 받는다.
그게 성경공부다.
저주는 그 둘을 모두 해친다.
정진 ( (2012/02/23) : 가상칠언의 예가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을 여러각도로 연구함으로써, 당시의 언어,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서의 이해를 통해 복음서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더 정확히 전달되지요. 그리고 그 저자가 속한 공동체의 신학과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고 급기야는 유릴신을 믿는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까지 부르게 되는 상황들을 더 잘 알게되지요.
유일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면서 유일신 사상과의 대립을 신학적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지요. 물론 그리스도인 들은 대립되어 보이는 성부하느님과 성자하느님 그리고 성령, 유일신의 문제를 그냥 받아들였지요.
이런 모든 상황들을 성경과 초대그리스도인들의 편지와 글들을 연구함으로써 삼위일체 신앙에 대해서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19세기 이전에는 그런 문헌학적, 주석학적인 연구방법을 배척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그런 방법의 연구성과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가톨릭교회의 성경연구의 토대를 새로 쓸 정도로 변화되어 왔고 교회가 그 성과를 당연히 활용하고 연구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데...
그 몇 몇 사람들은 자기만의 주장이 옳다고 하고 다른 주장을 욕하고 저주하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교회의 신학을 욕하고 교도권을 욕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편협한 생각으로 자신이 잘 모르는 이야기만 나오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난리를 치니 참 한심한 상황입니다.
김용창 ( (2012/02/23) : 묵상과 성경연구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똑같이 손잡고 가야하는 성경공부라는 문경준님의 글에 공감하며 정진님 답글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런데 뒷 부분은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될 말씀 같습니다. 성경 자체가 비판적인 연구를 견딜만큼 안정적이지 못하고 비합리적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성경의 허구를 드러낼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많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경각심을 편협한 생각이라고 했어도 안 될 것같습니다.
정진 ( (2012/02/23) : 악의적으로 성경의 허구를 드러낼려고 하는 것은 예전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습니다. 과거 가톨릭에서도 그런 면 때문에 연구방법에 제한을 가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러한 연구방법을 통해 성경형성과정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모습등을 잘알게되고 그로 인해 우리가 믿는 신앙에 대해 더 공고한 이해와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지금 교회에서는 기본적인 연구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쉬쉬하면서 뭔가 숨기려고하는 교회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그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연구방법의 채택에 대해 격려하고 옹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근간에 우리가 믿는 신앙에 대한 신뢰가 깔려있음은 당연할 것입니다. 제가 그분들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교회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경연구결과들 조차도 마치 배격해야할 것인 양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리서에 없다는 것이지요.
문경준 (jeunerhino) (2012/02/24) : 정진님, 소중한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묵상과 연구가 서로 균형을 잡는다면 우리의 성경은 그만큼 더 살이 찌고 받아먹을 게 많아질 겁니다. 지금 게시판에서의 '문제성 묵상'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 '광신적 묵상'으로 성경과 교리서에서 오직 저주의 근거만을 찾아내려는 심리적 강박과 상대에 대한 '공포(?)'라 할 수 있고, 두번째 갈래는 '독선'에 의한 유아독존식 성경읽기로서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과학적 또는 합리적인 연구결과를 애써 배척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유일한 방어무기는 바로 '성령의 감도'이지요. 전가의 보도로 쓰이다 보니 성령이 마치 어느 무당이 모시는 잡귀처럼 여겨지더군요. 세번째 갈래는 바로 '무지'입니다. 평생 성경에 대해 관심도 두지 않던 이가 갑자기 선생 행세를 하려니 이곳 저곳을 뒤지긴 하는데 그 각각이 전혀 연결되지도 않은 채 입으로 글로 먼저 튀어나오면서 횡설수설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런 엉터리 글이 거의 A4지 수십 장 분량이 되다 보니 일반 교우들은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박수만 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세가지가 각각의 필요성 때문에 '연합'이라는 결과를 낳고 이곳에서 '균형적 사고와 글쓰기'를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김용창님, 제 글에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읽기는 정말 어려운 점이 많이 있지요. 님이 말씀하신 대로 각 항목별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 많으니까요.
그러나 정진님께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교회는 그런 부분에 대해 '배척'으로 해결하지 않고 '수용과 탐구'를 통해 답을 구하고 있다는 게 우리의 자랑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지금까지 일부 인사들이 보여준 '연구에 대한 거부감'이 과연 '경각심'이었을까는 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들은 거의 병적으로 이런 방향을 거부했고, 또 저주했습니다. 그 원인은 제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고 봅니다.
저주는 그 둘을 모두 해친다.
정진 ( (2012/02/23) : 가상칠언의 예가 적절한 지는 모르겠지만, 성경을 여러각도로 연구함으로써, 당시의 언어, 문화적, 역사적 배경에서의 이해를 통해 복음서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고자 하는 메세지가 더 정확히 전달되지요. 그리고 그 저자가 속한 공동체의 신학과 서로 다른 공동체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부르고 하느님의 아들이라 부르고 급기야는 유릴신을 믿는 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이라고 까지 부르게 되는 상황들을 더 잘 알게되지요.
유일신,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님을 하느님으로 고백하면서 유일신 사상과의 대립을 신학적으로 해결해야 할 필요성이 생기지요. 물론 그리스도인 들은 대립되어 보이는 성부하느님과 성자하느님 그리고 성령, 유일신의 문제를 그냥 받아들였지요.
이런 모든 상황들을 성경과 초대그리스도인들의 편지와 글들을 연구함으로써 삼위일체 신앙에 대해서도 더 이해할 수 있게 되기도 합니다.
가톨릭 교회에서도 19세기 이전에는 그런 문헌학적, 주석학적인 연구방법을 배척했지만 20세기에 들어와 그런 방법의 연구성과가 정말 중요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가톨릭교회의 성경연구의 토대를 새로 쓸 정도로 변화되어 왔고 교회가 그 성과를 당연히 활용하고 연구를 적극적으로 장려하는데...
그 몇 몇 사람들은 자기만의 주장이 옳다고 하고 다른 주장을 욕하고 저주하니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자신들이 교회의 신학을 욕하고 교도권을 욕하는 것인지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편협한 생각으로 자신이 잘 모르는 이야기만 나오면, 무슨 큰일이나 난 것처럼 난리를 치니 참 한심한 상황입니다.
김용창 ( (2012/02/23) : 묵상과 성경연구는 발전적인 방향으로 똑같이 손잡고 가야하는 성경공부라는 문경준님의 글에 공감하며 정진님 답글에서 많은 걸 배웠습니다. 그런데 뒷 부분은 굳이 하지 않으셔도 될 말씀 같습니다. 성경 자체가 비판적인 연구를 견딜만큼 안정적이지 못하고 비합리적인 것 또한 사실입니다. 누군가 악의적으로 성경의 허구를 드러낼려고 한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많은 것을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그에 대한 경각심을 편협한 생각이라고 했어도 안 될 것같습니다.
정진 ( (2012/02/23) : 악의적으로 성경의 허구를 드러낼려고 하는 것은 예전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습니다. 과거 가톨릭에서도 그런 면 때문에 연구방법에 제한을 가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러한 연구방법을 통해 성경형성과정에 나타난 초대 교회의 모습등을 잘알게되고 그로 인해 우리가 믿는 신앙에 대해 더 공고한 이해와 확신을 갖게 된다는 것을 인정하게 되면서 지금 교회에서는 기본적인 연구방법으로 받아들여지고 있습니다.
그렇게 쉬쉬하면서 뭔가 숨기려고하는 교회가 아니라 진리에 대한 확신으로 그 진리를 드러낼 수 있는 다양한 연구방법의 채택에 대해 격려하고 옹호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 근간에 우리가 믿는 신앙에 대한 신뢰가 깔려있음은 당연할 것입니다. 제가 그분들에 대해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교회에서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성경연구결과들 조차도 마치 배격해야할 것인 양 주장하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교리서에 없다는 것이지요.
문경준 (jeunerhino) (2012/02/24) : 정진님, 소중한 의견 주셔서 감사합니다. 묵상과 연구가 서로 균형을 잡는다면 우리의 성경은 그만큼 더 살이 찌고 받아먹을 게 많아질 겁니다. 지금 게시판에서의 '문제성 묵상'은 크게 세 갈래로 나뉘어 있습니다.
하나는 지금 가장 큰 문제를 일으키는 '광신적 묵상'으로 성경과 교리서에서 오직 저주의 근거만을 찾아내려는 심리적 강박과 상대에 대한 '공포(?)'라 할 수 있고, 두번째 갈래는 '독선'에 의한 유아독존식 성경읽기로서 자신이 이전에 가졌던 고정관념이 무너지는 것이 두려워 과학적 또는 합리적인 연구결과를 애써 배척하는 태도라 할 수 있습니다. 이들에게 유일한 방어무기는 바로 '성령의 감도'이지요. 전가의 보도로 쓰이다 보니 성령이 마치 어느 무당이 모시는 잡귀처럼 여겨지더군요. 세번째 갈래는 바로 '무지'입니다. 평생 성경에 대해 관심도 두지 않던 이가 갑자기 선생 행세를 하려니 이곳 저곳을 뒤지긴 하는데 그 각각이 전혀 연결되지도 않은 채 입으로 글로 먼저 튀어나오면서 횡설수설로 변질되는 것입니다.
그런 엉터리 글이 거의 A4지 수십 장 분량이 되다 보니 일반 교우들은 읽을 엄두도 내지 못한 채 그저 박수만 치고 있는 형국입니다. 이런 세가지가 각각의 필요성 때문에 '연합'이라는 결과를 낳고 이곳에서 '균형적 사고와 글쓰기'를 방해하고 있다는 생각입니다... 김용창님, 제 글에 공감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성경읽기는 정말 어려운 점이 많이 있지요. 님이 말씀하신 대로 각 항목별로 모순되는 것'처럼' 보이는 곳이 많으니까요.
그러나 정진님께서도 말씀하신 바와 같이 교회는 그런 부분에 대해 '배척'으로 해결하지 않고 '수용과 탐구'를 통해 답을 구하고 있다는 게 우리의 자랑이라 생각합니다.
한편, 지금까지 일부 인사들이 보여준 '연구에 대한 거부감'이 과연 '경각심'이었을까는 좀 받아들이기 힘듭니다. 그들은 거의 병적으로 이런 방향을 거부했고, 또 저주했습니다. 그 원인은 제가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과 같다고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