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로데 안티파스

2012. 1. 19. 오전 7:18:47

글자

 헤로데 대왕


  헤로데의 등극을 이해하려면, 팔레스틴은 이탈리아에서 있었던 내전의 혼란에 영향을 받고 있었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만 했다. 로마에서 일어났던 모든 사건들은 지중해의 모든 나라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모든 군주들은 로마에서 누가 승리를 거둘 것인지를 추측하려 하였다.


1. 뒤섞인 혈통


  헤로데는 순수 유대인이 아니었다. 그는 왕이 될 자격이 없었으나 매우 복잡하게 얽힌 상황으로 인해 왕이 되었다. 그는 전 생애 동안 자신으로서는 결코 요구할 수 없었던 그러한 권력에 완전히 밀착되어 있었다.

  바로 그 점 때문에 그가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로마에서 평화를 이루고 정권을 장악하기 위하여 로마 장군인 폼페이는 첫번째로 동쪽에 있는 로마의 적들을 분쇄하려 하였다. 그는 기원전 63년에 예루살렘을 장악하여 유대인들의 독립적인 삶에 종지부를 찍었다. 그 나라를 통치하기 위하여 폼페이는 2세기에 유대인의 독립을 위해 투쟁해왔던 마카베 가문의 후손을 임명하였다. 임명된 지도자는 대사제였다. 그는 시리아에 있는 로마 총독에 종속되어 있었으며, 로마에 십일조를 바쳤는데 매우 과중한 십일조였다. 이러한 유대인 지도자를 감시하기 위하여 폼페이는 보조자로 이두메아인의 지도자인 안티파터를 임명하였다(이두메아인들은 팔레스틴의 남쪽에 살고 있는 구성원의 절반이 유대인들로 이루어진 작은 부족이고, 안티파터는 로마인들에 대해 협조적이었다).

  안티파터는 아랍 족장의 딸과 결혼하여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두 아들의 이름은 파사엘과 헤로데였으며, 헤로데는 폼페이가 예루살렘을 장악했을 당시 10살이었다. 안티파터의 영향력은 계속 증대해 갔다.


2. 권력에로의 진입


  카이사르는 그런 상황에서 기원전 47년에 히르카누스 2세를 대사제로 인준하였고 유다의 행정장관으로 로마 시민이 된 안티파터를 임명하였다. 그는 또한 파사엘을 예루살렘의 총독으로, 헤로데는 갈릴래아의 총독으로 세웠다. 헤로데는 반대자들과 강도들을 제거하였고 갈릴래아에서의 모든 반란을 진압하였다.

  안티파터는 기원 전 43년에 독살당했는데 히르카누스가 그 독살의 공모자였음이 거의 확실하다. 헤로데는 그의 손녀(그의 10명의 아내들 중의 하나)와 결혼함으로써 대사제의 가문과 결연하게 되었다. 헤로데의 환심을 사기 위해 동쪽 제국의 로마 소왕(小王)이었던 마르코 안토니우스는 그를 갈릴래아와 사마리아의 소왕으로 임명하였고, 또한 유다의 소왕으로는 파사엘을 임명하였다. 유다인들은 이에 분개하여 반란을 일으켰으나 그들은 모두 처형되었다.

  기원전 40년에 로마에 적대적이었던 파르티아 사람들은 팔레스틴을 침략하였다. 그들은 히르카누스의 조카인 안티곤을 유데아 왕으로 임명하였고 헤로데의 형인 파사엘은 그들의 손에 살해당했다. 헤로데는 그의 가족과 함께 마싸다로 그 다음은 알렉산드리아로, 마지막으로 로마로 도망갔다.

  파르티아 사람들로부터 자체 방어를 하기 위해 로마 원로원은 마르코-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카이사르의 의견을 받아들여 헤로데를 유데아의 왕으로 임명하였다. 로마 백성의 친구요 협력자인 헤로데는 왕이 되어 팔레스틴으로 돌아갔다. 그는 안티곤(기원전 39-37년)과 싸웠고, 37년 여름에는 로마 군대의 도움으로 예루살렘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그의 행정장관인 안토니우스는 31년에 악티움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에게 패하였다. 헤로데는 자신을 지지해 주었던 승리자인 옥타비아누스가 아우구스또 황제가 되자 서둘러 그를 만나러 갔으며 돌아와서는 그에게 충성을 다 바쳤다.


3. 유일한 왕으로서의 헤로데


  빈틈없는 외교관이며, 용감한 군인이고 훌륭한 행정가였던 헤로데는 대단히 성공했다. 그는 외교 정책에 있어서는 로마에 종속되어 있었지만 로마인들과 유대인들 모두에 관하여 자기 나라에서는 자신의 뜻대로 했다. 그는 그리스식으로, 넓은 왕실과 상당수의 외국인 용병들을 거느리고 있는 다른 나라의 왕들처럼 군림하였다. 그리스어는 왕실의 공식 언어였고, 그의 1년 소득은 900달란트에 달하였다.

  그의 정책은 원대했다. 그는 도시들을 재건하고 새로운 도시들을 찾아내어 그곳에 외국인들을 거주하게 함으로써 왕국의 광활한 국경을 원상 복귀시켰다. 종교적인 문제에 있어서 그는 성전 정면에 로마의 독수리를 부착시켜 놓을 정도로 유대인 율법을 어느 정도 경멸했다.

  그는 모든 반대자들을 처형했다. 그는 자신의 가족들과도 끊임없이 투쟁을 했다. 기원전 35년에는 그의 처남을 죽였고, 29년에는 아내 중 한 명을 죽였다. 18년에는 형수를 죽였으며, 7년에는 그의 두 명의 아들들이 로마에서 모반죄로 사형당했다. 또한 그는 기원전 4년 자살하기 며칠 전에 그의 후계자인 안티파터 3세를 죽였다.

  그는 예루살렘에 체육관과 궁궐 그리고 요새를 건설했다. 그가 한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성전을 복원시킨 일이었다. 기원전 19년에 착수된 성전 건립은 비록 그것이 기원후 64년까지도 완전하게 완성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빨리 앞당겨 종교 의식을 다시 거행할 수 있게 해주었다.

  헤로데는 비유대인이며 옛사제 가문의 살인자라는 이유로 그리고 로마와의 결속과 유대인 관습에 대한 존경심의 결여 때문에 유대인들로부터 미움을 받았다. 그는 기원전 4세기에 예리고에서 사망했다.

 헤로데의 아들들


  헤로데와 그의 아들들에 관한 이야기는 복잡하다. 헤로데의 권련은 로마를 불편하게 만들었으며 사실상 노왕(老王) 헤로데는 로마 황제와의 합의 하에 그의 왕국을 그의 아들들인 아르켈라우스, 안티파스, 필립보를 위해 세 지역으로 나누었다. 로마는 이를 수락하였으나 그들이 왕의 호칭을 사용하지는 못하게 하였으며 그 세 지역의 영토를 시리아의 총독 관리 하에 두었다.


  아르켈라우스는 요빠, 가이사리아, 얌니아와 아조토 연안에 위치한 유데아와 사마리아, 이두메아를 받았다. 그는 예루살렘에서 반란을 가라앉히고 왕위를 찬탈하려는 자들을 제거하는 것으로부터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왕의 호칭을 얻기 위하여 로마에 갔다.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은 그에 대하여 불평을 하였다. 아르켈라우스는 해임되었고, 그가 기원후 18년에 죽은 곳인 프랑스의 리용에 가까운 지금의 비엔나 마을로 추방되었다. 그의 영토는 로마의 행정장관인 아그리빠 1세에 의하여 통치되었다.


  안티파스는 갈릴래아와 뻬레를 받았다. 그는 자기 영토에서 많은 건설 사업에 착수하였고, 갈릴래아에 티베리아를 세웠다. 그는 필립보의 전처인 그의 질녀와 결혼하길 원하였다(비교:마태14,4). 그의 아내는 그가 왕이 되라고 그에게 강요하였다. 그는 기원후 6년에 헤로데 안티파스라는 이름으로 다시 취임하였는데 그 시기는 그리스도와 같은 시대였다. 기원후 39년에 가리굴라는 그를 해임하였고, 현재 피레네 산맥의 성 베르트랑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는 곳으로 추방하였다. 그의 후임자는 헤로디아의 동생이며 헤로데 대왕의 손자인 아그리빠 1세가 되었다.


  필립보는 그 나라의 북쪽 지역을 받았다(골란, 아우라니티스, 바타네아, 이두레아, 트라코니티드). 그는 필립비의 가이사리아(마태 15장)를 건설했으며 평화롭게 통치했다. 그는 헤로디아의 딸린 살로메와 결혼하였다. 그는 기원후 34년에 자식 없이 죽었으며 티베리아스는 그의 영토를 시리아의 지방에 다시 배속시켰다. 기원후 37년에 가리굴라는 이 영토를 아빌레나와 함께 아그리빠 1세에게 주었다.


아그리빠 1세는 로마에 살았다. 그는 가리굴라와 클라우디오의 친구였는데, 그들이 황제가 되는 것을 도와 주었다. 클라우디오 황제는 그에게 왕이라는 이름을 붙여주었으며, 41년에는 헤로데 대왕이 다스리던 모든 영토를 그에게 주었다. 아그리빠는 예루살렘에서 야고보를 죽이는 등(사도 12,2), 바리사이들과 평화스러운 관계를 유지했다. 그는 유대인 관습들에 무관심하지 않았고 많은 건축물을 지었으며 평화를 추구했다. 그는 팔레스틴 밖에서는 아주 활발하게 움직였고 유대인 관습을 무시했다. 그는 예루살렘의 성벽들을 다시 세우기를 원했지만 클라우디오 황제가 못하게 막았다. 그는 44년에 가이사리아에서 죽었다(사도12,20-23). 이리하여 44녕에 팔레스틴은 로마의 단일 속주가 되었다.


  아그리빠 2세(50-108년 재위)는 아그리빠 1세의 아들로서, 로마에 충성을 바쳤다. 클라우디오 황제는 그에게 필립보의 영토를 주었고(53년), 네로의 영토와 헤로데 안티파스의 영토 일부를 주었다. 그는 성전 공사를 마무리지었다. 그래서 18,000명의 노동자들이 일자리를 잃었다. 아그리빠는 그들에게 거리를 포장하는 일을 시켰다.


* 헤로데 당원들

  이 그룹은 예수에 적대적이었다(마르 3,6; 12,13; 마태 22,16). 그들이 어떤 집단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대강 아래와 같다.

1) 헤로데 대왕을 지지하며 그의 통치 초기에 매우 활정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유대인들로서 열혈당원들과 대립하고 있었던 자들.

2) 아니면, 헤로데 대왕을 거의 메시아로 생각하여 칭송했던 그룹으로서 헤로데의 정치에 순응했던 덜 엄격했던 엣세네파 사람들.

3) 또는, 헤로데 안티파스의 지지자들과 앞잡이들.

 

4) 더욱 개연성이 있는 것으로서, 헤로데가 자기의 측근으로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에 헤로데 가문에 충성하는 모습을 안직해 왓으며 헤로데의 지지자들이었던 사두가이들.



헤로데 안티파스

[위키백과, 우리 모두의 백과사전.]

헤로데 안티파스 또는 헤롯 안디바(기원전 20년 - 39년)는 예수시대의 갈릴리페레아의 통치자였다.

 생애

헤로데 안티파스는 기원전 20년 유대의 왕인 헤로데 대왕사마리아출신의 말타체의 아들로 태어났다. 형제로는 헤로데 아르켈라오스헤로데 빌립보 1세를 비롯한 다수의 이복형제가 있다. 그는 로마제국이 세운 지방권력자인 아버지 헤로데 대왕과 아우구스투스의 동맹을 유지하는 상징으로, 일종의 인질로서 로마에서 자랐고 교육받았다.

기원전 4년 헤로데 대왕이 죽자 그의 형제들과 함께 왕국을 분할하여 물려받았는데 안티파스에게 분할된 지역은 갈릴리와 [[페레아]였다.

안티파스가 처음으로 한일은 아버지의 죽음을 틈타 이 지역에서 발생한 오순절 반란을 제압하고 질서를 회복하는 일이었다. 이후 그는 아버지의 전철을 따라 영토내에 수많은 도시를 건축했는데 가장 유명한 것은 갈릴리 호수 서쪽 해변에 세운 티베리아스로 갈릴리의 수도였다. 이 도시의 이름은 안티파스의 보호자였던 로마 황제티베리우스를 기리기 위해 그의 이름을 따서 지어졌는데 무덤자리에 세워졌기 때문에 처음에는 유대인들이 살기를 거부하기도 하였다.

안티파스는 이웃나라인 나바테아의 공주 파샬리스와 결혼 했으나 이혼하고 그의 이복동생인 헤로데 빌립보 2세의 아내이자 또 다른 이복동생 아리스토부루스 4세의 딸인 헤로디아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결국 그는 파멸하게 되는데 나중에 파샬리스의 아버지인 나바테아의 왕 아레타스 4세가 쳐들어 왔기 때문이다. 세례자 요한은 이 부도덕한 결혼을 강하게 비판했고 결국 안티파스에 의해 투옥되고 처형되었다.

36년 헤로데 안티파스는 로마와 파르티아사이의 협상의 중재역을 맡아 성공적으로 임무를 완수했지만 당시 시리아의 총독이던 비텔리우스와 사이가 나빠졌다. 37년경 안티파스의 첫 번째 부인의 아버지인 나바테아 왕 아레타스 4세가 침입하였고 이에 로마에 구원을 요청하자 황제는 비텔리우스를 파견했으나, 일부러 느리게 이동했다고 한다. 칼리굴라가 로마의 황제가 되자 안티파스의 아내 헤로디아는 오빠 헤로데 아그리파 1세의 성공을 시기하여 제거하려고 했으나, 오히려 아그리파 1세의 역공을 받아 칼리굴라 황제는 안티파스와 헤로디아를 갈리아로 추방했고 두사람은 그 곳에서 죽었다.

 성서와 헤로데 안티파스

 세례자 요한과 헤로데 안티파스

신약성서마르코 복음서 6:14-29에 따르면 안티파스의 아내 헤로디아가 그를 부추겨 세례자 요한을 잡아 가두게 했으며 자신의 딸을 시켜 안티파스에세 세례자 요한의 목을 가져오도록 하게 했다고 한다. 이 딸의 이름은 성서에는 나오지 않으나 전통적으로 살로메로 알려져 있다.(이 사건은 수많은 예술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이유에 대해, 마르코 복음서에는 간단하게 예언자인 세례자 요한이 헤로데 안티파스와 헤로디아간의 불륜(헤로디아는 안티파스 동생의 아내이다.)을 비판했기 때문이라고만 나와 있다. 하지만 역사가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에 의하면, 헤로데 안티파스가 세례자 요한을 죽인 진짜 이유는 세례자 요한의 민중들에 대한 영향력이 자신에 대한 반란으로 이어질 것을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요한 복음서에 의하면, 세례자 요한은 예루살렘의 대사제들과 레위인들이 사람을 보내어 그리스도를 사칭하는 자가 아닌지 확인할 정도로 유대 민중들에게 존경받는 예언자(預言者)였으니, 헤로데 안티파스의 입장에서는 그를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예수와 헤로데 안티파스

안티파스는 루가 복음서에 다시 등장하는데 예수의 수난과 재판에 관여한 것으로 되어있다. 예수가 붙잡혀 수난을 받을 당시 안티파스는 과월절을 지키러 예루살렘에 머물고 있었다. 폰티우스 필라투스는 체포되어 자기 앞에 끌려온 예수가 갈릴래아 사람이라는 것을 알자 그를 관할인 안티파스에게 보내어 재판을 받게 했다. 안티파스는 예수가 기적을 일으킨다는 소식을 전부터 듣고 있어서 예수를 만나자 기적을 일으켜보라고 요구했다. 예수가 침묵으로 일관하고 아무 일도 하지 않자, 안티파스는 그를 조롱하며 다시 필라투스에게 보냈다고 한다. 이러한 내용은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고 루가 복음서에만 거론되고 있다. 외경베드로의 복음서에는 예수의 십자가 처형의 명령을 내린 것은 필라투스가 아닌 헤로데라고 말한다. 베드로 복음서에는 필라투스와는 달리 '손을 씻기'를 거부한 것은 분명히 헤로데 안티파스와 "유대인들" 이라고 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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