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은이 들을 위한 세례 /최종우
+찬미예수님
고린도 전서 15장 29절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세례 라는 말씀이 나오는데,
죽은이들을 위한 세례 는 무엇인 가요???
"죽은 이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이들"이란 말은 신약성경에 이곳에만 나오는 말로 수많은 해석을 자아내게 합니다.
여기에 나오는 그리이스어 전치사 (휘페르+2격)가 갖고 있는 기본적인 뜻은 "위하여"인데 때에 따라 "대신하여"의 뜻을 가지기도 하고, "때문에"라는 뜻도 가집니다.
세세한 점에 있어서는 여러가지 견해가 있으나 두 가지 예만 들면 다음과 같습니다.
(1) 대부분의 경우 "대신하여"라고 위 전치사를 번역하여 29절에서 언급되는 세례를 "대리세례"라고 부릅니다.
"대리세례"로 이해하는 사람들은 고린도 공동체 안에 일부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관습이 있었다고 추정합니다.즉, 일부 그리스도 신자들이 (세례를 준비하다가) 세례를 받지 못하고 죽은 친척이나 친구들을 위하여 그들을 대신하여 또 다시 세례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대리세례를 통하여 그들은 그 죽은 사람에게 "세례의 효과"가 추가적으로 주어진다고 기대했다는 것입니다.
요한 크리소스토무스는 이와 비슷한 관습을 마르키온의 추종자들이 행했다고 전하는데 카르타고 공의회에서 이 관습은 금지되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들은 죽은 이들을 위하여 대신 세례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2마카 12,42-45에서 증언되는 죽은 이들을 위한 속죄제사와 기도의 배경에서 이해될 수 있다고 봅니다.
(2) 또 다른 견해는 위 전치사를 "때문에"라고 번역하는 견해입니다.
이 견해를 위하여는 그리스도를 믿지 않던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신앙인으로 죽은 자신의 친지(들) "때문에"(죽은 그리스도인 친지의 "훌륭한 삶"이나 "부탁말씀" "때문에") 세례를 받게 되는 경우를 가정해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바오로의 세례관을 알아보는 데 있어서, 29절의 "죽은 이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이들"이라는 표현은 너무나 단편적이 불분명합니다.
29절 만을 근거로 삼아 "죽은 이들을 위한 세례"를 바오로가 긍정하였다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29절의 전후 문맥을 고려하여 보면, 바오로는 "죽은 이들의 부활"을 거부하는 주장을 반박하기 위한 하나의 논증으로 "죽은 이들을 위하여 세례를 받는 이들"을 예로 삼고 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이 고린도 교회내에 대다수였는지, 극소수 였는지, 그리고 어떤 의도를 가지고 행하였는지는 모두 불분명합니다.
위에 제시된 견해들도 추정에 불과합니다.
따라서 세례에 관한 바오로의 견해를 알아 보려면 다른 본문들을 더 보아야 합니다.
바오로의 세례관이 가장 깊이 다루어져 있는 로마 6,1-11(갈라 3,26-28 ; 1고린 1,13-17 ; 6,11 ; 12,13 참조)과 바오로의 신학 전반을 고려하여 보면, 바오로에게 있어서 세례는 마술적인 힘을 기계적으로 발휘하는 의식으로 이해되지 않고, 그리스도와의 인격적 결합을 의미하는 신앙을 실행(완수)하는 예식으로 이해되고 있다는 점이 분명합니다. 따라서 "죽은 이들을 대신하여 세례를 받는다"는 생각은 (문제가 되는 29절을 제외한) 바오로적인 세례관이 아니다라고 할 수 있다할 것입니다.
(박상래, 김남주 역, 한국 천주교회 200주년 신약성서 고린도 전서 분도출판사 에서 옮깁니다. )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
고전 15:29 - 고전 15:34
(29)만일 죽은 자들이 도무지 다시 살지 못하면 죽은 자들을 위하여 세례받는 자들이 무엇을 하겠느냐 어찌하여 저희를 위하여 세례를 받느뇨 (30)또 어찌하여 우리가 때마다 위험을 무릅쓰리요 (31)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게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32)내가 범인처럼 에베소에서 맹수로 더불어 싸웠으면 내게 무슨 유익이 있느뇨 죽은 자가 다시 살지 못할 것이면 내일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 하리라 (33)속지 말라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을 더럽히나니 (34)깨어 의를 행하고 죄를 짓지 말라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가 있기로 내가 너희를 부끄럽게 하기 위하여 말하노라
죽은 자들을 위한 세례는 난해한 구절로서 해석이 40여가지가 된다.
원어로 영어로 무엇으로 보아도 명쾌한 답이 나오지 않는 곳이다.
현재 깨달은 만큼만 말하겠으니 더 명쾌한 답이 있으신 분은 가르쳐 주기 바랍니다.
이곳은 부활장으로 바울이 부활에 대해서 말을 하다가 갑자기 이런 말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부활과 연관이 된 것은 분명하다.
이곳을 풀기 위해서는 먼저 세례에 대해서 알아야 하는데
이방인에게도 세례가 있는데 그들의 세례는 천주교처럼 연옥에 있는 자를 좋은 곳으로 보낸다는 것이 아니라 무조건 죽은 자를 위해서 세례를 받으면 그들이 좋은 곳으로 간다는 것이다. 이것을 빗대어서 가르치기 위한 것으로 쓴 것처럼 보이지만 30절을 보면 위험을 무릎 쓰면서 산다는 것을 보면 이방인의 세례와는 성질이 다른 것이다.
*세례가 무엇인가?
세례는 물세례, 불세례, 성령 세례가 있는데 불세례는 심판을 말하고 성령세례는 목사님들이 주시는 것이 아니고 성령이 우리에게 직접 주시는 것이며 물세례는 교회에서 행하는 세례로서 침례세례도 되며 이것을 통해서 우리는 깨긋함을 받았다고 한다. 물론 세상과 구별되어 깨끗한 자가 된 것도 있지만
사실 세례는 죽으므로 주님과의 연합이 된다. 하나 되는 것이다.
롬6:4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니라
--세례는 주의 죽으심과 합하는 것인데 세례를 통해서 우리가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하기 위함이라고 한다. 성령세례를 받으므로 우리는 새 생명 가운데서 살게 된다.
성령세례가 없으므로 그는 불세례만 있는 자이다.
*주님이 받으신 세례
막10:38예수께서 가라사대 너희 구하는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너희가 나의 마시는 잔을 마시며 나의 받는 세례를 받을 수 있느냐
--주님이 받는 세례는 십자가 죽음의 세례이다,
주님은 십자가 죽음의 세례를 위해서 이 땅에 오신 것이다. 그 죽음의 세례를 통과해야 부활의 영광이 있게 되는 것이다.
*세례는 깨끗하여 지는 것도 있지만 이것은 좋은 것만 말한 것이고 성경의 세례 목적은 우리에게 십자가의 죽음을 가르치기 위함이다. 죽음을 말하는 것은 그 후에 부활이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본문을 보면 죽은 자들을 위해서 세례를 받는 것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자신이 죽는 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이곳에서 죽은 자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이다.
예수님도 영적으로 죽은 자들을 위해서 죽으신 것처럼 바울도 영적으로 죽은 저들을 위해서 자신이 죽어야 함을 말하고 있다. 이것이 자기 십자가이다.
*자신이 세례를 받아야 하는 이유[자신이 죽어야 하는 이유?]
저들을 위해서이다. 그들은 영적으로 죽은 자들로서 부활의 소망이 없는 자들이다.
그런데 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내세에 대한 소망이 없는 자들은 죽음을 두려워하며 살게 된다.
그들은 육신의 삶에 대한 것이 전부가 되어 있다.
그러나 바울은 내세가 있기에 세상 것을 배설물로 여기는 자이다.
뒤 문장을 보면 이제 연결이 된다.
바울은 부활의 소망이 있기에 저들을 위해서 죽음의 세례를 두려워하지 않고 받기에
맹수에게도 가고 채찍질에도 기꺼이 가게 되는 것이다.
자신이 죽음으로 저들에게 부활의 소망이 전달 된다면 기꺼이 죽음을 택한 것이다.
맹수는 짐승이 아니라 바울을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자들을 말한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저들에게 내가 괴롭힘 당한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내가 먹고 마시는 것으로 끝났을 것인데
하나님은 이땅에서의 보상이 아니라 하늘 세계의 것으로 보상해 준다는 것을 알기에 그는 소망을 가지고 순교도 저들을 위해서[죽은 자들을 위해서] 기꺼이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는 날마다 죽는 다고 하는데 이것도 저들을 위해서 날마다 죽은 것이다.
저들이 나의 모습을 통해서 생명을 가질 수 잇다면 이렇게 산다는 것이다.
세상 것을 등지면 날마다 죽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가 우리는 이것이 싫고 두려워서 이길을 가지 못한다
맹수들이 나의 자존심을 뭉개 뜨리는데 그것을 견디기 힘든 것이다.
바울은 과거의 자신을 알고 다메섹에서 자신을 만나주신 하나님에게 감사하며 과거의 삶은 모두 꽝인 인생이기에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음을 알고 깨어서 죽음으로 저들에게 생명을 주고자 하는 마음인 것이다
자신의 부활신앙을 저들에게 전수하는 방법은 오직 죽음 뿐임을 그는 잘 안다. 주님도 오직 죽음으로만 전달이 되기에 십자가에 죽은 것이다. 이것을 주님은 자신의 세례라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눅12:50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 --물세례는 이미 받았지만 죽음의 세례가 남아 있기 때문이다.
*악한 동무들은 선한 행실인 하나님을 알지 못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십일조 하면 복 받고 믿음 생활 잘하는 자들은 세상 적으로 잘되는 것이며 세상 적으로 잘 되지 못하는 자들은 하나님을 잘 믿지 못한 자들이라고 말하는 자들이다.
지금 고린도 사람들이 바울의 괴롭힘 당하는 것을 보고 사도가 아니라고 한다.
네가 사는 모습을 보니 믿음이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도라면 하나님이 그렇게 살지 않게 할 것이라는 것이다.
대통령이 되었든지 장관이 되었든지 할 것인데 지지리도 못나게 사는 것이 사도가 아니든지 믿음이 없는 자이든지 한다고 하는데 이들이 바로 악한 동무들이다.
영적으로 죽은 자들인 것이다.
우리는 믿음의 삶을 살기 위해서 영적으로 죽은 저들을 위해서 내가 십자가 삶으로 저들에게 부활의 소망과 내세의 소망을 보여주어야 한다,. 주님이 그리했고 바울이 그리했으며 우리가 그렇게 되어야 한다.
십자가 죽음으로 세례를 받으면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죽음과 합한 자가 되는 것이다.
11월, 위령성월
교회는 오곡백과를 추수하는 11월에 하느님께서 연옥의 고통 중에 있는 영혼들을
빨리 당신 나라에 데려가 주시기를 간구한다.
“오늘은 나의 것, 내일은 너의 것(Hodie mihi, Cras tibi)”.
이 말은 무덤들이 살아 있는 우리에게 외치는 소리이다.
“너도 우리와 같은 처지가 될 터이니 너무 잘난 체하지 말고,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며 잘 살아라”는 뜻일 것이다.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와 선행의 의미
‘모든 성인의 통공’에서 죽은 이들을 위한 기도가 가능해진다. 우리[巡禮敎會]는
연옥에서 단련을 받고 있는 죽은 이들[淨化敎會]과
천국의 성인들[勝利敎會]과 예수 그리스도를 머리로 하여 한 몸을 이루며 서로
도움으로써 하느님께 영광을 드린다.
즉 세 교회는 거룩한 것들을 공유하고 부족함을 서로 채우면서 친교를 이루고
있다(교리서 948 참고).
이러한 통공 때문에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대신 기도하고 속죄함으로써 그들이
죄벌을 용서받을 수 있게 된다.
이것은 구약시대부터 있던 일이다.
“경건하게 죽은 사람들을 위한 훌륭한 상이 마련되어 있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으니
그것이야말로 갸륵하고 경건한 생각이었다.
그가 죽은 자들을 위해서 속죄의 제물을 바친 것은 그 죽은 자들이 죄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하려는 것이었다”(2마카 12,46).
마치 감옥에 갇힌 사람이 스스로 사면을 받을 수 없기 때문에 형벌을 마치고
출옥의 날만 기다리듯, 육체를 벗어난 연옥영혼들은 더 이상 아무 것도 못하고,
다만 연옥에서 되도록 빨리 벗어날 희망만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연옥영혼들을 대신하는 우리의 기도와 속죄 행위를 하느님께서는
받아 주신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속죄하는 것은 그들이 진 빚을
대신 갚아 주는 것과 같다.
그들이 살아 있었을 때 우리 때문에 하느님께 범죄하였는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아직 지상에 있는 우리가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속죄함은
당연한 일이다.
우리 때문에 하느님께 진 그들의 빚을 대신 갚음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또한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고 속죄할 수 있음은 참으로
다행한 일이다.
우리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함은 우리 자신을 위하여 기도하는 것과 같다.
사도 요한의 말대로 우리는 죄 없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1요한 1,8 참고), 남의 도움이 필요하지 않다고 장담할 수도 없다.
우리도 연옥에 갈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는 것이다.
우리가 연옥영혼들을 위해서 기도한다면 그들이 천국에 갔을 때,
우리의 기도와 희생을 잊지 않고 우리에게 필요한 은총을 빌어 줄 것이다.
사랑 자체이신 하느님께서는 인간이 사랑으로 서로 돕는 것을 즐겨하시기
때문에, 서로 공(功)을 통할 수 있도록 섭리하시어 우리의 기도와 성인들의
기도를 받아 주시는 것이다.
〈 우리의 생활 〉
○ 교회는 11월 1일에 ‘모든 성인 대축일’을 지내고, 다음날 ‘위령의 날’을 지낸다.
이날 모든 사제에게 미사 3대[모든 연옥영혼을 위하여, 교황의 지향에 따라,
미사를 봉헌하는 사제의 지향에 따라]를 드릴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11월 1일부터 8일까지 열심한 마음으로 묘지를 방문하고 병자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날마다 한 번씩 연령들에게만 양도할 수 있는 전대사(全大赦)를
받을 수 있다.
위령의 날이나 교구장이 허락한 그 전 주일이나 다음 주일에 성당을 참배하고
기도함으로써 연령들을 위한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전대사를 얻기 위해서는 위의 조건 외에 고해성사와 영성체를 하고
교황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주님의 기도와 사도신경을 해야 한다.
한 번 고해성사를 받음으로써 여러 번 전대사를 받을 수 있으나,
한 번 영성체하고 한 번 교황의 뜻대로 기도함으로써는 한 번만 전대사를 받을 수 있다.
전대사란 예수 그리스도의 무한한 공로와 성인 성녀들의 많은 공로에 힘입어,
교회가 어떤 기회에 산 사람들과 죽은 사람들에게 어떤 조건하에서 죄벌
[죄에 따르는 벌]을 용서받게 하는 것이다.
죄벌을 모두 사해 주는 것이면 전대사라 하고 일부만 사해 주는 것은
한대사(限大赦)라 한다.
교회는 이렇게 죽은 이들에게 되도록 많은 은총을 베풀고자 한다.
우리는 교회의 뜻에 따라 열심히 기도해야 하겠다.
○ 우리는 죽은 이들이 살아 계실 때 좀더 잘 해 드리지 못한 아쉬움을 안고,
못다한 효성이나 우정을 채우기 위한 방법으로 그들을 대신하여 기도하고
속죄해야 한다. 기일 뿐만 아니라 생각날 때마다 기도하고,
특별히 위령의 달에 열심히 기도함이 좋다.
○ 위령의 달에 죽은 이들을 위해서 기도함은 우리 자신의 성화에도 크게
도움이 된다.
죽은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면 자연히 하느님 나라에 대해 묵상하게 되고,
따라서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여 성실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 죽은 이들을 위해 기도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미사이다.
미사를 봉헌하거나 평일미사에 되도록 자주 참례하여 기도함이 좋다.
- 가톨릭 신자생활 안내-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