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자보다 더한 탕자

2010. 2. 26. 오후 4:3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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탕자보다 더한 탕자
 

제목: 아버지와 탕자  (성경: 눅 15:11-32)  설교: 백남철 목사


 1. 탕자의 비유
예수님은 천국의 복음을 비유로 많이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비유가운데 탕자의 비유는 인간의 죄 성과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가장 잘 묘사한 가장 유명하고 가장 많이 알려지고 가장 짧고 가장 감동적이고 가장 극적이며 거기에 천국의 비밀을 바르게 이해하게 하는 문자 그대로 드라마틱한 복음적 단편 소설입니다. 그래서 이 비유는 신 불신 간에 모두 잘 아는 내용입니다.  특히 이 비유는 중심인물을 누구로 보느냐에 따라 다양한 해석이 나올 수 있는 심도 깊은 교훈의 소설입니다.

첫째로 문맥으로 보면 누가복음 15장의 탕자비유는 잃었던 양 한 마리의 비유와 잃은 은전의 비유 다음에 나옵니다. 그러므로 본문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그렇게 상스럽게 취급하는 이방인에 대한 하나님의 돌보심과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것이 중심 주제라고 말할 수 있고 둘째로 집을 나간 아들을 중심 내용으로 본다면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 회개하고 돌아올 때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죄인이 어떻게 용서를 받을 수 있으며 용서받을 때의 기쁨이 어떤 것인지가 중심 주제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또 세 번째로 맡 아들을 중심 주제로 보면 가장 착하고 성실하게 사는 자라고 자칭하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도 은혜도 죄도 용서도 모르는 탕자 중에 제일 큰 탕자라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 중심 주제일 것입니다.  나만 의롭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의 허물을 서슴없이 비판하고 정죄하는 대부분의 우리를 깨우치려는 것이 중심 내용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문제는 우리는 누구나 아버지로 혹은 첫째나 둘째아들들의 위치에서 살아가는 극중 인물들입니다. 나아가 죄인인 모든 인간이 하나님을 상징하는 아버지를 통해 하나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 용서와 사랑을 깨닫고 그렇게 살지 못한 죄인임을 깨닫고 하나님께 회개하고 돌아와 용서받고 새로운 산 소망을 갖게 하는 구원의 복음이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면으로 보나 본문은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큽니다.

2. 둘째아들의 교훈
먼저 탕자 둘째아들을 봅니다. 둘째아들은 우리가 공히 인정하는 탕자입니다. 그는 아버지를 두고 형제를 두고 자기 분깃을 받아가지고 집을 나갔습니다. 누구나 청소년시절 꿈을 가지고 집을 떠나기를 소원합니다. 여기서, 이런 촌에서, 이런 집에서 내가 어떤 소망을 가질 수 있겠는가? 넓은 곳으로 가자 가서 배우고 고생이 되더라도 출세하고 성공해서 금의환향 하자 이것은 다 갖는 마음이고 어떤 면에서 훌륭한 마음이라고 여깁니다. 그것을 나쁘다고 예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집을 나간 탕자는 다릅니다. 13절을 보겠습니다. “그 후 며칠이 안 되어 둘째 아들이 재물을 다 모아 가지고 먼 나라에 가 거기서 허랑방탕하여 그 재산을 낭비하더니(눅15:13).” 의도가 성공하려는 것보다 아버지의 품안에서 형의 그늘에서 자유하지 못한 자기를 생각하면서 자기의 분깃을 요구하고 받아가지고 나가서 허랑방탕했습니다. 돈을 쓰러나가고 속칭 쾌락을 즐기고 싶어서 집을 나갔습니다. 동기가 좋질 못했습니다.

유대의 법에는 유산은 부모가 죽고 나서 받는 것입니다. 장자는 차자의 배를 받습니다. 그러나 본문의 탕자처럼 생전에 받는 경우가 있습니다. 아버지가 허락하면 됩니다. 아버지가 허락하지 않으면 절대로 안 됩니다. 그런데 생전에 받는 유산은 장자의 1/9정도 밖에 안 됩니다. 그래도 그는 그것을 요구했고 아버지는 아시면서 허락했습니다. 탕자는 그것을 받아가지고 집을 나가 쾌락에 탕진해 버렸습니다. 참 조급하고 규모 없고 성실하지 못하고 앞을 보지 못하는 애물단지 같은 아들입니다. 이런 아들을 가진 아버지는 얼마나 속이 상하겠습니까?

 여러분! 학교를 다녀야 할 때 가출하고 나가서 또래 이성과 혼숙하고 다닌다면 얼마나 가슴이 아프겠습니까? 공부할 시기를 놓치면 안 되는데 시기를 노치고 방탕하면 부모의 마음은 천 갈래 만 갈래 찢어질 것입니다. 안 그렇습니까? 이런 자식 어떻게 해야 합니까?  결국 형편없이 됐습니다. 14-16절입니다. “다 없앤 후 그 나라에 크게 흉년이 들어 그가 비로소 궁핍한지라 가서 그 나라 백성 중 한 사람에게 붙여 사니 그가 그를 들로 보내어 돼지를 치게 하였는데 그가 돼지 먹는 쥐엄 열매로 배를 채우고자 하되 주는 자가 없는지라 (눅15:14-6).” 다 망하고 돈이 떨어져 입에 풀칠을 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이 가장 천하게 여기는 돼지를 키우는 집에 들어가 돼지가 먹는 쥐엄 열매를 주어먹고 있습니다. 상상해 보시기 바랍니다. 다 떨어진 옷에 얼굴은 파리하고 추한 모습에 돼지우리에서 돼지 먹는 먹이를 움켜쥐고 먹는 탕자의 모습을 말입니다. 얼마나 비참하고 가련합니까? 인간에게는 지켜야 할 법도가 있고 때가 있습니다. 그 법도를 지켜야 하고 절제가 필요하고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 그 법도는 자유가 없는 것 같지만 거기에 평안이 있고 행복이 있습니다. 준비 없이 성급하게 서둘러 되는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린나이에 방종하고 쾌락에만 빠져있으면 결과가 이렇게 됩니다. 심는 대로 거둡니다. 좋은 나무에 좋은 열매가 열립니다. 모든 것이 자기의 죄 값입니다.

 그런데 이때 이 탕자는 깊이 후회합니다. 자기가 하나님께 죄를 지었고 아버지께 죄를 범했다는 자기의 실존을 깨닫습니다. 즉 인간의 법도대로 살지 못해서 결과가 이렇게 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자기가 죄인인 것을 진심으로 깨닫는 것은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리고 어떻게 하면 살 수 있을까 살길을 생각합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다 자기가 죄인 줄 알고 살길이 없는 것도 아는데 그냥 그대로 자포자기 하고 자학하고 더 악하게 사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회개하고 살길을 찾아 다시 일어날 줄 아는 것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그러나 이 탕자는 자기의 죄를 압니다. 살길을 찾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실천에 옮깁니다. 17-20절 상반을 읽겠습니다. “이에 스스로 돌이켜 이르되 내 아버지에게는 양식이 풍족한 품꾼이 얼마나 많은가 나는 여기서 주려 죽는구나  내가 일어나 아버지께 가서 이르기를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나를 품꾼의 하나로 보소서 하리라 하고 이에 일어나서 아버지께로 돌아가니라(눅15:17-20상). 이제 아버지 집에 가면 이런 형편은 면하고 살수는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가서 죄를 고백하고 아들이아니라 종으로 살겠다는 다는 것입니다. 이런 회개와 이런 삶의 자세로 아버지께로 일어나 돌아옵니다. 본문의 비유는 우리에게 이런 탕자 같은 선택을 하기를 원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됐습니까?

20하-24절까지 읽겠습니다. “아직도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측은히 여겨 달려가 목을 안고 입을 맞추니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눅15: 20하-24).” 이 마음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성삼위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우리 예수님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탕자의 비유는 이렇게 누구든지 돌아오기만 하면 용서한다는 것입니다. 과거를 묻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제발 그 악한 죄의 길에서 돌아서라는 것입니다. 그러면 모든 것을 없는 것으로 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오래전에 제 한 후배 목사가 긴급전화가 왔습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왜요 제 딸애가 집을 나갔습니다. 왜요 제가 이놈이 사춘기가 와서 방황하기에 제가 좀 혼을 내고 때려주었더니 그만 집을 나갔습니다. 어떻게 하면 좋지요? 나쁜 길로 빠지면 안 됩니다. 목사님 기도해 주세요. 사람들은 자존심 때문에 가정얘기 잘 안합니다. 그런데 자식 문제로 다급하니까 기도부탁 전화가 온 것입니다. 기도비상을 건 것입니다. 제가 볼 때 기도비상을 걸면 잘 해결되는 것을 많이 경험했습니다. 여러분도 급한 일 생기면 기도비상을 거십시오.

 결국 그 딸이 부산역에 내렸는데 경찰이 보니까 이상해요 그래서 파출소에 데려다가 물어보니 집을 나온 여학생입니다. 그래서 파출소에서 연락이 와 잡혀있는 아이를 다행스럽게 아빠가 데려왔습니다. 이것이 아버지마음입니다. 잘되라고 혼도 내고 때리기도 하지만 다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생명을 대신 할 수만 있으면 생명이라도 주고 싶은 것이 아버지의 마음입니다. 이보다 더 큰마음 더 큰 사랑의 마음이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여러분! 자식들은 이것을 이해 못해요. 마찬가지로 용서와 사랑을 모르는 인간세상은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 못해요. 인간의 마음과 현실의 정서와 성경의 복음과 맞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하늘의 법입니다. 오직 현재입니다. 지금 돌아오기만 하면 살길이 열립니다. 그러면 하나님이 돌아온 그에게 하나님의 아들의 권세를 주셔서 그 권세를 누리게 하십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1:12).”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3:16).” 우리가 믿는 복음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래서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이 하나님의 용서와 사랑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것입니다. 하나님의 그 크신 은혜인 것입니다. 일만 달란트 탕감을 받았으니 탕자의 앞으로의 인생은 오직 감사일 것입니다.

 오직 은혜일뿐입니다. 누구를 탓하고 판단할 수 있겠습니까? 본문의 비유는 하나님은 우리를 이렇게 사랑하셔서 구원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을 잘 가르쳐 주셨습니다. 복음 중에 복음입니다. 그리고 우리에게 이렇게 사랑하는 아버지가 되고 이렇게 회개하고 이렇게 살길을 찾아 하나님께 돌아오라는 메세지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서로 용서하고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 세상을 바라보면 무섭습니다. 과거를 들춥니다. 폭로합니다. 그리고 아니면 그만입니다. 이것은 결과가 뻔합니다. 사랑과 용서가 없는 사회는 더 큰 악을 만들어갈 뿐입니다. 믿음이 조금이라도 있으면 이 사랑과 용서를 흉내라도 내야 합니다. 이것이 살길이고 이것이 살리는 길입니다.

3. 탕자보다 더한 탕자
여러분 본문에서 본받고 싶은 사람이 누구입니까? 아버지와 둘째 탕자와 맏아들, 이 세 사람 중에 가장 으뜸은 아마 아버지의 마음을 닮고 싶을 것이요 둘째는 맏아들 일 것입니다. 그리고 가장 본받고 싶지 않은 것은 집을 나갔다 돌아온 탕자일 것입니다. 그러나 본문을 깊이 보면 맏아들은 집을 나간 탕자보다 더 큰 탕자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집에 있는 탕자는 성실합니다.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집을 나가 허랑방탕하지도 안 했습니다. 재산도 열심히 일해 더 늘렸습니다. 본문에 보면 저녁 늦게 돌아옵니다. 이렇게 성실하고 정직하고 근면한 아들이 어디 있습니까? 모범생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은 분이 가득합니다.

 본문을 보겠습니다. 25-32절을 같이 읽겠습니다. “맏아들은 밭에 있다가 돌아와 집에 가까이 왔을 때에 풍악과 춤추는 소리를 듣고  한 종을 불러 이 무슨 일인가 물은대  대답하되 당신의 동생이 돌아왔으매 당신의 아버지가 건강한 그를 다시 맞아 들이게 됨으로 인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았나이다 하니 그가 노하여 들어가고자 하지 아니하거늘 아버지가 나와서 권한대 아버지께 대답하여 이르되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아버지가 이르되 얘 너는 항상 나와 함께 있으니 내 것이 다 네 것이로되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이 마땅하다 하니라(눅15: 25-32).”

집을 나간 동생이 돌아와서 아버지가 기뻐하시고 잔치를 한다. 하면 기뻐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28절에 그가 노했다고 합니다. 동생에게 노한 것이고 아버지에게 노한 것입니다. 그리고 집에 들어가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버지가 그 소리를 듣고 맏아들에게 설득하고 통사정합니다. 29절 이하에 그가 아버지께 포악을 합니다. 여러 해 동안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긴 적이 없거늘 즉 나는 모범적인 아들이었고 한마디로 죄가 없거늘 나에게는 염소새끼라도 주어 나와 벗으로 즐기게 하신일이 없는데 창기와 허랑방탕한 아들이 돌아오니 그 못된 놈을 위해서 송아지를 잡습니까?

 아버지도 그럴 수가 없고 동생도 그럴 수가 없다고 포악합니다. 이때 아버지가 뭐라고 합니까? 아들아 너는 나와 항상 함께 있었고 내 것이 다 네 것이 아니냐? 내가 이 제산 가지고 가냐 다 너에게 주고 갈 텐데 말이다. 그런데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았고 잃었다가 다시 얻었는데 즐겁고 기쁘지 아니하냐고 달랩니다. 본문은 이것으로 끝이 납니다.  우리는 대게 맏아들처럼 생각합니다. 나는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정죄하고 판단합니다. 마치 바리세인들처럼 자기들은 죄인이 아니고 금식기도를 하고 율법을 지키는데 세리 같은 죄인들과 같지 않다고 하는 것과 같습니다.

 본문을 묵상하면서 저는 제가 바로 이 맏아들과 같은 죄인이었구나 생각이 들었습니다. 여러분! 이래봬도 저는 모범생이었습니다. 자수성가, 공부, 촌사람이 꽤 출세를 했었습니다. 그래서 조카들에게나 공부안하고 좀 성실하지 못한 사람에게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을 가졌던 죄인이었습니다. 이런 마음으로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불편을 주고 제 딸에게도 스트레스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왜 공부를 못하냐? 이해가 안 간다. 그 것 외우고 이해하고 조금 신경 쓰면 되지 않느냐? 말은 안 해도 얼마나 무시하고 말로 상처를 주었는지 모릅니다. 시골 조카들이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입니다. 가난한 조카들이 서울에 오면 못사는 누님 집에는 가지만 배우고 똑똑한 우리 집에는 안 옵니다. 가면 불편합니다.

우리 기성세대 가운데 조금 공부하고 힘 꽤나 쓰고 성실하고 열심히 살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의식이 다 이렇습니다. 바리새인의식 말입니다. 자기가 죄인인지 모릅니다. 자기 의에 사로 잡혀 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어떻게 해야 사는 길인지 모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습니다. 이런 자야 말로 성서가 말하는 탕자중의 탕자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 독사의 새끼, 저도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고 남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 자, 더 지옥자식 만드는 자, 화있을 진저, 저주까지 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나는 용서 받을 필요도 없고 용서할 필요도 없다. 누구에게 도움을 필요하지도 않고 누구에게 도움을 줄 필요도 느끼지 못하는 사람 스스로 완벽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맏아들과 같이 탕자 중에 탕자입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하나님을 찾지 못합니다. 인생이 무엇인지 죄가 무엇인지 어떻게 해야 영생을 얻는 것이지 모릅니다.

4. 아버지의 마음
그러나 집에 돌아온 탕자는 자기가 죄인인 것을 압니다. 아버지께 돌아와야 살길이 있음을 압니다. 아버지 마음을 압니다. 그래도 용서해주시는 그 사랑과 용서를 알았습니다. 자기의 허물 때문에 집에서 푸대접을 받고 일생 죄로 인해서 부끄러움을 기억하며 안타깝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탕자는 아버지의 사랑을 알았습니다. 아버지의 용서를 알았습니다. 진정 아버지의 말씀이 사랑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다시는 아버지를 떠날 수 없는 사랑과 용서 안에 아버지와 하나가 됐습니다. 얼마나 위대한 구원받은 죄인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무엇을 얻으셨습니까? 여러분은 부모가 되십니까? 어떤 교훈을 받으셨습니까? 이렇게 자식을 대했습니까? 집을 나간 탕자입니까? 죄를 인식하고 집에 돌아갈 결심을 했습니까? 돌아오기만 하면 그냥 과거를 묻지 않고 그냥 하나가 됩니다. 그 사랑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아니면 맏아들과 같이 나는 의롭다고 생각하고 죄가 없다고 정죄하고 판단하는 분이 계십니까? 정말 그렇습니까? 그게 바로 집을 나간 탕자보다 더 탕자가 아닙니까? 온가족이 하나 되려면 아버지처럼 과거를 묻지 안해야 합니다.

 온가족이 하나 되려면 아버지처럼 사랑과 용서가 있어야 합니다. 온가족이 하나 되려면 둘째도 맏아들도 끌어안아야 합니다. 온가족이 하나 되려면 아버지처럼 살찐 송아지를 잡고 돌아 온 것을 기뻐하고 감사해야 합니다. 서로 주지 않고 희생이 없으면, 용서와 사랑과 수용이 없으면 하나가 될 수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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