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독서] 묵시록
제33주간 월요일 제1독서(묵시1,1~4.5ㄴ; 2,1~5ㄱ)
"요한이 아시아에 있는 일곱 교회에 이 글을 씁니다.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도 오실 분과 그분의 어좌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 (4~5)
사도 요한은 4절과 5절 상반절에서 '삼위일체적인 특징'을 지닌 인사말을 사도 바오로가 사용한 전형적인 서간 인사말(로마1,7; 1코린1,3; 2코린1,2; 갈라1,3; 에페1,2)과 함께 자유롭게 구사하고 있다. 그는 성부 하느님을 '지금도 계시고 전에도 계셨으며 또 앞으로도 오실 분'으로 언급한다. 이렇게 묘사된 성부 하느님께 대한 칭호는 탈출기 3장 14절, '나는 있는 나다'에 대한 일종의 해석이다.
후기 유대교의 해석이나 유대 출신 철학자 Philo(필로)의 해석에 의하면, '신적 영원성'이나 '그리스 철학 양식에 있어서의 영원한 존재'에 대한 묘사에서 나타난다. 여기서 영원한 존재인 하느님께서는 인간적인 측면에서 과거, 현재, 미래의 존재로서 투영될 수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앞으로도 오실 분'으로 번역된 '호 에르코메노스'(ho erchomenos)는 '오다'라는 뜻을 가진 동사 '에르코마이'(erchomai)의 현재 분사형으로서, 문자적으로는 '장차 오실 분'이라는 미래적 개념이 아니라 '오시고 계시는 분', 또는 '오시는 분'으로 번역된다.
그렇다면, 사도 요한은 여기서 하느님의 미래적 측면을 현재 진행적 의미로 변형하고 있는 것인가?
이것은 '단순한 미래적 실존'이 아닌, '구원과 심판을 위해 이 세상에 도래하시는 것으로서의 하느님의 미래'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하느님께서는 미래 뿐만 아니라 현재 속에 역동적으로 침투하고 계시는 미래의 힘이심을 나타낸다.
'그분의 어좌 앞에 계신 일곱 영에게서' 삼위일체적인 특징을 지닌 인사말은 성부 하느님께 대한 묘사에 이어서 여기서는 성령 하느님께 대한 묘사로 이어진다. 여기서 언급된 '일곱 영'으로 번역된 '톤 헵타 프뉴마톤'(ton hepta pneumaton; the seven spirits)는 즈카리야서 4장 1~14절에 근거한 성령께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사도 요한은 즈카리야서 4장 2절의, '온통 금으로 된 등잔대가 보입니다. 등잔대 머리에는 기름 그릇이 있고, 그 그릇에는 등잔이 일곱 개 있습니다. 그 머리에 등잔 부리(관)가 일곱 개 있는 것입니다'라는 문구로부터 일곱 영에 대한 상징을 끌어왔다. 일곱 영이 '하느님 어좌 앞에'(에노피온 투 트로누 아우투; enopion tu thronu autu; before his throne)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그가 하느님(성부)과 동등하다는 점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 다음 5절의 '또 성실한 증인이시고, 죽은 이들의 맏이이시며, 세상 임금들의 지배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은총과 평화가 여러분에게 내리기를 빕니다'에서 성자 예수 그리스도께 대한 언급이 나온다.
"에페소 교회의 천사에게 써 보내라.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가 이렇게 말한다.'" (2,1)
묵시록 2장과 3장에서는 묵시록의 형식적인 수신자인 소아시아 일곱 교회에 각각 보내는 칭찬과 책망의 메시지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서는 세말이 오기까지 이 지상의 교회들이 나타낼 여러 유형의 모델이라고 할 수 있는 일곱 교회에 대한 칭찬과 책망을 통해 지상 교회가 추구해야 할 바람직한 교회상과 더불어 피해야 할 잘못된 교회상을 제시하고 있다. 라서 2장과 3장에 나오는 각 교회에 대한 메시지는 모든 세대의 교회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거울로서의 역할을 한다. 본절 이하 7절은 일곱 교회를 향한 첫번째 메시지로서 에페소 교회에 보내는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요한이 기록한 것이다.
에페소는 B.C. 133년이래 로마의 행정 구역으로 편입된 자유 도시로서 소아시아의 수도이며 상업과 교통의 요지였다. 이곳은 에게해로 유입되는 카이스터 강 입구에 위치한 고지대의 도시로서 고대 7대 유물에 속하는 웅장한 건물이 두 개나 존재한다. 하나는 대극장이고, 다른 하나는 아르테미스 신전이다.
특히 웅장한 아르테미스 신전은 당시 에페소의 우상숭배가 얼마나 극에 달해 있었는지를 그 자체로 웅변한다(사도19,24~41). 또한 이 도시에는 황제숭배도 행해졌는데, 이 지역에 건축된 신전들은한결같이 Claudius나 Hadrian, 그리고 Severus에 바쳐진 것들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우상숭배와 황제숭배가 난무한 곳에 복음이 들어간 것은 사도행전 18장 18절~19장 20절을 감안할 때, 사도 바오로의 제3차 선교여행 덕분이었다.
사도 바오로는 약 3년 동안 눈물로 에페소 교회를 개척했다. 또한 죽음을 목전에 둔, 노 사도의 말년 저술에 나오는대로 그가 자리를 비운 동안 에페소 교회는 디모테오에게 맡겨졌다(1티모1,3). 그러나 이곳은 파트모스 섬에서 그다지 멀리 떨어져 있지 않은 도시로 사도 요한이 파트모스 섬에서 유배 생활 뒤 여생을 마친 곳이기도 하다. 이처럼 에페소는 사도 요한과 매우 밀접한 관련을 지닌 도시이다.
'오른 손에 일곱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말씀인데, 예수 그리스도와 묵시록 2장 1절~3장 22절에 언급된 일곱 교회가 얼마나 밀접한 관련이 있는지 보여준다. 여기서 '쥐고'(붙잡고)로 번역된 '크라톤'(kraton)은 본래 '지지하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크라테오'(krateo)의 현재 분사형으로서, 묵시록 1장 16절에 언급된 '쥐고 계셨으며'(에콘; echon)가 전달하는 뉘앙스와는 비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어조를 나타낸다.
이것은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계속적인 통치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표현이다. 또한 '거니는'으로 번역된 '페리파톤'(peripaton)의 현재 분사형으로서 교회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하여 계속하여 간섭하시며, 정확하고 면밀한 지식을 가지고 계신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오른손'으로 번역된 '덱시아 케이리'(dexia cheiri)는 구약에서 대표적으로 탈출기 15장 6절의 '주님, 권능으로 영광을 드러내신 당신의 오른손이, 주님, 당신의 오른손이 원수를 짓부수셨습니다'에서 등장하며, 시편 17장 7절의 '당신 자애의 기적을 베푸소서. 당신 오른쪽으로 피신하는 이들을 적에게서 구해 주시는 분이시여!'라는 문구와 시편 21장 9절의 '당신 손이 원수들을 모두 찾아내시리이다.
당신 오른손이 적들을 찾아내시리이다'라는 문구에서도 발견된다. 이러한 용례에서 드러나듯이 오른손은 단순히 왼손의 짝을 의미하지 않는다. 히브리인들의 사유 구조 속에서 오른손은 상징적으로 권능과 능력을 의미한다.(시편20,7; 44,4). 그런데, 그 능력과 권능의 손에 들려 있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일곱 별'(아스테라스 헵타; asteras hepta)이다.
묵시록 1장 20절에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일곱 교회의 천사들'이라고 설명하신다. 여기서 언급된 '일곱 교회의 천사들'은 '교회의 지배적인 정신(영)을 의인화' 한 것이며 실상 '교회 자체의 상징'이라고 본다. 말하자면, '~교회의 천사'가 실제로 '~교회' 자체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다.
'일곱 황금 등잔대' 여기서 '등잔대'(촛대)로 번역된 '뤼크니아'(lychnia)는 '빛나다'라는 의미의 동사 '뤼케'(lyke)에서 유래한 명사로서 '촛대', '등경', '등잔대' 등으로 번역된다. 이 등잔대는 하느님께서 모세에게 명하여 제작토록 한, 성소의 순금 등잔대에서 비롯된 상징이다(탈출25,31~40; 37,17~24; 민수8,4). 이것이 순금으로 제작된 것은 금이 지닌 속성, 즉 귀하고 아름답고 빛나고 불변하는 속성과 관련된 것 같다.
'일곱 황급 등잔대'는 묵시록 1장 20절에 언급된 대로, 명백히 '일곱 교회'를 상징하며, 암흑 세상에 빛으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하는 교회의 사명과 잘 결부된다(묵시2,5). "그러나 너에게 나무랄 것이 있다. 너는 처음에 지녔던 사랑을 저버린 것이다. 그러므로 네가 어디에서 추락했는지 생각해 내어 회개하고, 처음에 하던 일들을 다시 하여라. 네가 그렇게 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으면, 내가 가서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 (4)
여기서 '처음에 지녔던 사랑'으로 번역된 '아가펜 수 텐 프로텐'(agapen su ten proten; your first love)은 문자적으로는 '너의 그 첫 사랑'으로 번역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에페소 교회가 보이고 있는 '지금의 행위'와 교회가 세워질 당시의 '처음 행위'사이의 간격을 첨예하게 대조한다.
처음 교회가 세워질 때 그들은 '자발적으로 하느님께 가까이 가려는 마음, 모든 일에 주님을 기쁘게 하려는 마음, 항상 신선하고 새롭고 반짝이는 열성, 새로운 세계를 발견한 기쁨, 열정의 분출'을 지니고 있었지만, 지금은 이단들과의 오랜 투쟁으로 인해 그 모든 열정이 소모되었던 것이다.
오랜 내부의 문제, 곧 이단들과의 투쟁이라는 문제를 마무리하는 동안 신학적으로는 정확하고 엄격하며, 윤리적으로는 도덕적이며 준엄하기 그지없는 특성을 확립했을 지라도, 사랑이라는 추진력에 의해 살기를 멈추어버린 교회였다. 따라서 그들에게 요구되는 것은 믿음이나 신학적인 정통 교리가 아니고, '처음에 지녔던 사랑'이어야만 했던 것이다.
오늘 제1독서에 안 나오는 구절을 더 첨부했는데, '네 등잔대를 그 자리에서 치워 버리겠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여기서 '치워 버리겠다'로 번역된 '키네소'(kineso; will remove)는 본래 한 곳에서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의미라기보다 '제거해 버리다', '밀어 버리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키네오'(kineo)의 미래형이다. 에페소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처방을 수용하지 않을 경우에 그 교회(등잔대, 촛대)를 역사에서 아예 지워버리시겠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오른손에 일곱 별을 쥐고 일곱 황금 등잔대 사이를 거니는 이'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교회의 주인이요, 머리로서 그 교회를 제거해 버리시는 권한을 발휘할 수 있으니, 교회의 본질인 사랑을 회복하라는 말씀이다.
제33주간 화요일 제1독서(묵시3,1~6.14~22)
사르디스 교회 유적 사르디스 도시 유적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그럴 자격이 있기 때문이다." (4)
묵시록 3장 1~3절까지는 사르디스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책임과 권면의 내용인 반면에 3장 4절은 사르디스 교회 일부 신자들을 향한 그리스도의 격려의 말씀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미 2절에서 '아직 남아 있지만 죽어가는 것들'이란 언급을 통해 사르디스 교회의 영적 빈사 상태에도 불구하고 남은 자(remanant)가 있음을 표명했는데, 여기서 그들이 다시 거론되는 것이다.
1절에서도 '너는 살아 있다고 하지만 사실은 죽은 것이다'라는 말이 나온다. 사실 묵시록 2장과 3장에서 일곱 교회 중에서 오직 라오디케이아와 사르디스 교회에 보내는 메시지에서만 예외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칭찬이 배제된다. 여기서 '죽은 것이다'라고 번역된 '카이 네크로스 에이'(kai nekros ei; but you are dead)에서 '에이'(ei)는 본래 '이다', '있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에이미'(eimi)의 현재형으로서 이미 죽어버린 시체가 아니라 '현재 급속하게 죽어가고 있는 상태'를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는 살아 있다'고 되어 있다. 원문은 '오노마 에케이스 호티 제스'
특히 '이름'으로 번역된 '오노마'(onoma)는 통상 '명성'이나 '평판'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으므로 본문은 사르디스 교회가 살아 있다는 세간의 명성은 있지만, 실상은 영적으로 죽어가는 상태에 빠져있음을 시사한다. 전체적으로 사르디스 교회는 이단이나 황제 숭배, 우상 숭배에 대한 언질이 없는 것으로 보아서 이 교회의 문제는 무사안일주의, 즉 경건의 모양은 있지만 경건의 능력이 없는 교회였다(1티모3,5).
'그러나 사르디스에는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사람이 몇 있다' '몇'으로 번역된 '올리가 오노마타'(oliga onomata)는 직역하면, '소수의 이름들'(a few names)이다. 여기서 '이름'이란 표현이 사용된 것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히브리 사상에는 '이름'이 '사람의 존재 전체'를 나타내기 때문이다. 이러한 표현 방식은 희랍어에서도 전형적으로 나타난다. 여기서 '옷'으로 번역된 '히마티아'(himatia)는 사람들이 몸에 걸치는 의복을 뜻하지만, 그 옷을 입은 사람의 신분을 상징하기도 한다.
또한 '더럽히지'로 번역된 '에몰뤼난'(emollynan)은 '오염시키다'라는 뜻을 지닌 '몰뤼노'(mollyno)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여기서는 동사를 부정하는 부정어 '우크' (uk)와 더불어 사르디스 교회의 남은 자들이 소극적으로는 도시 자체가 제공하는 물질적 풍요, 무사 안일, 도덕적 부패와 야합하지 않았음을, 그리고 적극적으로는 최초에 복음을 전해 받았을 때의 열정적이고 순수한 신앙을 신실하게 고수했음을 의미한다. 따라서 옷을 더럽히지 않았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덧입은 자신들의 고귀한 신분을 이교적 상황 가운데서도 포기하지 않고, 잘 지켰다는 의미이다.
'그들은 흰옷을 입고' 여기서 '흰옷'으로 번역된 '류코이스'(lyukois)는 묵시록 3장 5절, 3장 18절, 4장 4절, 6장 11절, 7장 9절, 7장13절 등에도 나온다. 한마디로 이 흰옷은 땅에 기원을 둔 옷이 아니라 하늘에 기원을 둔 옷으로서 깨끗함, 순결함, 거룩함의 이미지와 결부된다. 따라서 '흰옷을 입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의로움을 입는 것', '구원을 받은 것'을 의미한다.
'나와 함께 다닐 것이다' 여기서 '다닐 것이다'로 번역된 '페리파테수신'(peripatesusin)은 '거닐다', '행동하다'라는 뜻을 지닌 원형 '페리파테오'(peripateo)의 미래형으로서 묵시록에서는 일관되게 천상의 존재를 묘사하는데 사용되는데(묵시2,1; 3,4; 16,15; 21,20), 사르디스 교회에 남은 자, 즉 자기 옷을 더럽히지 않은 자들에게 주어지는 구체적인 종말론적 축복의 약속이란 점을 환기시킨다.
'나는 네가 한 일을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으련만!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15~16) 묵시록 3장 15절부터 19절까지는 라오디케이아 교회를 향한 그리스도의 책임과 권면이 나와있다.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사르디스 교회와 함께 주님의 칭찬을 받지 못한 채 책망만 받고 있다.
여기서 '차지도'로 번역된 '프쉬크로스'(psychros; cold)는 본래 '차게 되다'라는 뜻을 지닌 '프쉬코'(psycho)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신약성경에서는 본절과 마태오 복음 10장 42절(시원한 물)에서만 사용되었다. 또한 '뜨겁지도'로 번역된 '제스토스'(zestos; hot)는 '끓어 오르다'라는 뜻을 지닌 '제오'(zeo)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끓어오르는 뜨거움'을 나타내며, 신약 성경에서는 본절에만 나온다.
물과 관계되는 비유는 라오디케이아 북쪽 약 11km 지점에 위치한 히에라폴리스 (Hierapolis)의 뜨거운 온천수와 리오디케이아 동쪽 약 16km 지점에 위치한 콜로새(Colosse)의 차가운 우물을 그 배경으로 하고 있다. 히에라폴리스에서 솟아난 온천수는 처음에는 매우 뜨겁지만, 흐르는 동안 미지근해진다.
물이 부족해 히에라폴리스로부터 온천수를, 콜로새로부터 냉수를 파이프 관을 통해 공급받는 라오디케이아 사람이면 누구나 잘 알고 있는 이런 현상을 염두에 두고, 사도 요한은 본절에서 라오디케이아 교회가 보여주고 있는 신앙의 태도를 설명해 주고 있는 것이다.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그들이 누리고 있는 풍부한 물질로 인해서 태만하기 그지없는 신앙생활을 한 것 같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렇다고 해서 그들의 태도가 완전하게 세속적인 것도 아니었다는 점이다.그러나 신앙에 있어서는 이러한 어정쩡한 태도가 더 문제이다. 신앙에 있어서 중간 지대를 선택한 라오디케이아 교회가 믿음에 있어서는 회색지대가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망각했던 것이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미지근하여'로 번역된 '클리아로스'(chlliaros)는 '용해하다', '녹이다'라는 뜻을 지닌 '클리오'(chllio)에서 파생한 형용사로서 '열성이 없는'이라는 의미를 나타낸다. 신앙에 있어서는 결코 회색 지대나 중간 지대는 존재하지 않는다(마태6,24; 루카16,13). 이것이냐 저것이냐 중에서 양자택일만이 있을 뿐이다.
그러나 당시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신앙의 회색 지대에 머물러 있었고,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역겨움을 자아내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서 언급된 '입에서 뱉어 버리겠다'는 표현은 라오디케이아 교회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격앙된 감정을 나타낸다. 여기서 '~하겠다'는 뜻으로 번역된 '멜로'(mello)는 '내가 ~하려고 한다'는 의미로서, 말하는 사람의 최종적인 의향을 나타내는 동시에 강력한 경고의 뉘앙스를 전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준엄한 뉘앙스의 책망은 오로지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회개를 유도하기 위해 취해진 조치이다(묵시3,19). 또한 '입에서 뱉다'라는 의미로 번역된 '에메사이'(emesai)는 '구토하다'는 뜻과 더불어 '혐오하다' 라는 뜻도 지닌 '에메오'(emeo)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신약성경에서 여기만 나온다. 이것은 신앙의 특성이 뜨거움에 있기 때문에, 마치 뜨거워야 하는 음식이 미지근한 상태에 있을 경우, 비위를 상하게 하여 역겨움을 자아내는 것과 같다는 의미를 함축한다. 따라서 라오디케이아 교회를 향해 주님게서는 '열심을 내라','회개하라'고 촉구하시는 것이다(묵시3,19).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 하고 네가 말하지만,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깨닫지 못한다. 내가 너에게 권한다. 나에게서 불로 정련된 금을 사서 부자가 되고, 흰옷을 사 입어 너의 수치스러운 알몸이 드러나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제대로 볼 수 있게 하여라.' (17~18)
여기서 '부자'로 번역한 '플루시오스'(plusios)는 '부요함', '풍부함'이라는 뜻을 지닌 '플루토스'(plutos)에서 파생한 표현으로서 '풍족하여'로 번역된 '페플루테카' (pepllukeka)와 함께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자기 인식의 수준을 가늠케 한다. '페플루테카'(peplluteka)는 '부해지다','치부하다'라는 뜻을 지닌 '플루테오' (plluteo)의 완료형으로서 그들이 자신들은 이미 부자이고 부유한 상태에 있다고 생각하였음을 잘 드러낸다. 확실히 라오디케이아 도시는 다른 소아시아 도시들에 비해 부유했다. 따라서 그 안에 속해 있는 라오디케이아 교회 신자들 역시 물질적으로 풍족했을 것이다.
A.D. 60년에 발생한 대규모 지진 때에 다른 소아시아 지역의 도시들은 로마 황제의 원조를 받아 도시를 복구했지만, 그들은 그런 도움을 거절하고 자력으로 도시를 재건할 정도로 부유했고, 부족함이 없었다. 라오디케이아 교인들 각자는 아마도 물질적으로 매우 부유한 사람들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들은 자신이 소유한 재물의 일부를 흔쾌히 교회에 헌납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문제는 그들이 자신들의 이러한 행동을 온전한 신앙 생활로 치부하고 착각했던 것이다.
그들은 자신들의 막대한 재산을 교회에 바치는 것만으로 신앙 생활의 의무를 완수했다고 이해하고, 더 나아가 자신들의 신앙에 있어서도 '나는 부자로서 풍족하여 모자람이 없다'라고 자랑할 만큼 매우 교만한 자들이었다. 단적으로 말해서,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자신이 가진 물질을 영적 부요를 가늠하는 척도로 오해하고 착각했던 것이다.
물질적 풍요와 영적 풍요는 결코 상호 교환되거나 혼동될 수 없는 사항의 것이다. 역설적으로 라오디케이아 교회는 물질적 풍요에도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심각한 궁핍함에 직면해 있었다. 그러나 이 교회의 더 큰 문제는 그러한 영적인 가난함에 대한 무감각이었던 것이다.
'사실은 비참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멀고 벌거벗은 것을' 원문은 '쉬 에이'(sy ei; you are; 너는 ~이다)로 시작되는데, 주격으로 2인칭 대명사가 사용되었다. 희랍어 어법상 주격 인칭 대명사는 강조 요법 이외에는 사용되지 않는다. 라오디케이아 교회의 외적으로 드러나는 '물질적 풍요'이면에 숨겨진 그들의 '내면적 영적 현실'을 육체적 상황에 빗대어 묘사하고 있다.
제33주간 수요일 제1독서 (묵시4,1~11)
"그 어좌 둘레에는 또 다른 어좌 스물네 개가 있는데, 거기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에 금관을 쓴 원로 스물네 명이 앉아 있었습니다.(4) 그 어좌에서는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 터져 나왔습니다. 그리고 어좌 앞에서는 일곱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5) 또 그 어좌 앞에서는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 같은 것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어좌 한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습니다.(6)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둘째 생물은 황소 같았으며,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았습니다. (7) 그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습니다. 그리고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었습니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실 분!" (8)
어좌에 앉아 계시며 영원 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생물들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드릴 때마다 (9) 스물네 원로는 어좌에 앉아 계신 분 앞에 엎드려, 영원 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께 경배하였습니다. 그리고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 외쳤습니다." (10)
사도 요한의 시선은 이제 하느님의 어좌로부터 그 주변으로 이동한다. 그는 하느님의 어좌에 둘러 있는 24어좌와 그 위에 앉아 있는 24원로를 주목한다. 이것은 요한 묵시록을 해석하는 데 가장 논란이 되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데, 크게는 '인간'이라는 견해와 '천사'라는 견해로 양분된다. 여기에 언급된 24원로는 역대기 1권 24장 1~19절에 열거된 사제단 조직의 24반열에 근거하여 나온 표현인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여기에 언급된 24원로는 사제 역할을 수행할 뿐 아니라(묵시4,9~11; 5,8~11; 11,16~18; 19,4) '어좌'에 앉아 '금관' 까지 쓰고 있다. 이같은 묘사는 이들이 왕적 지위까지 겸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성경에서 '천사'가 어좌에 앉아 금관(금 면류관; crown of gold)을 쓰고 있는 것이 발견되지 않으므로, 여기에 언급된 24원로는 '사람'을 뜻함이 분명하다.
이들은 '임금의 사제단'(1베드2,9) 곧 '하느님의 백성'을 뜻한다. 여기서 24는 12와 12를 더한 수로서, '하느님의 백성'을 상징하는 숫자이다. 12라는 수는 '열두 성문'과 '열두 초석'으로 상징되는 '열두 지파'와 '열두 사도'에 직접적으로 대응된다(묵시21,12~14). 24원로는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하는데,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함으로써 하늘에 함께 앉게 된 '하느님의 백성 전체', 곧 지상 교회에 대응하는 천상 교회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리고 묵시록 4장 5절에서 번개와 요란한 소리와 천둥이 하느님의 어좌로부터 나온다는 언급은, 종말론적 신적 현현 및 심판 사건이 하늘 어좌로부터 비롯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것이다. 또한 묵시록 4장 5절의 '하느님의 일곱 영'에 해당하는 '타 헵타 프뉴마타 투 테우' (ta hepta pneumata tu theu; the seven Spirit of God)는 즈카르야서 4장 2절에 근거한 '성령'께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하느님의 일곱 영'이 하느님의 어좌 앞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은 그가 하느님과 동등하다는 점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어좌 앞에서는 일곱 횃불이 타고 있었습니다'라는 표현은 구약의 만남의 천막에서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를 상징하는 계약의 궤가 배치된 지성소 앞의 성소에서 일곱 가지를 가진 순금 등잔대가 불을 밝히고 있는 것과 관련이 있다(탈출25,31~40; 27,21).
이것은 하느님의 현존과 임재의 장소를 밝힐 뿐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말씀(시편119,105)을 상징하는 일곱 횃불이 성령을 나타내는 일곱 영과 관련되어 기록된 것은, 말씀과 성령께서 하느님의 영광을 드러낸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이제 묵시록 4장 6절의 '수정처럼 보이는 유리 바다'에 대해서 살펴본다. 이 관념은 에제키엘서 1장 22절의 '그 생물들 머리 위에는 빛나는 수정 같은 궁창의 형상이 무섭게 자리 잡았는데, 그들 머리 위로 펼쳐져 있었다'라는 말씀에서 비롯된 것으로 본다. 여기서 '수정'으로 번역된 '크리스탈로'(krystallo)는 '수정'을 가리키는 영어 crystal의 어원으로서 '얼음'이란 뜻을 지닌 '크뤼오스'(kryos)에서 파생한 고대어이다. 또한 '유리'로 번역된 '휘알리네'(hyaline; of glass)는 '비', '물방울'의 뜻을 지닌 '휘에토스'(hyetos)에서 유래하여 물방울처럼 투명한 것을 가리킨다. 둘 다 투명한 이미지를 강조적으로 드러내는 단어인데, 절대 티도 흠도 없으신 하느님의 거룩하고 높으신 정결을 암시한다.
이러한 이미지는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절대적 거리를 암시하면서, 하느님의 초월성과 지극한 위엄을 매우 시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하느님과 인간 사이에 바다같은 것이 놓여 있어서 인간이 함부로 접근할 수 없다는 의미와 더불어, 창조주 하느님과 피조물인 인간의 무한대에 가까운 질적 차이를 드러낸다.
한편, 묵시록 4장 6절에는 '어좌 한 가운데와 그 둘레에는 앞뒤로 눈이 가득 달린 네 생물이 있었다'는 표상이 나온다. 이것은 하느님의 어좌를 중심으로 주변을 사각형으로 나누고, 그 사각의 중심에 네 생물이 하나씩 있었다는 뜻으로 이해해야 한다. 그들은 원(inner circle)처럼 하느님의 어좌를 감싸고 있는데, 하느님의 어좌를 감싸고 있는 네 생물은 에제키엘서 1장 10절, 10장 8절, 10장 19~22절에 나오는 네 생물, 즉 '커룹'(Cherubim)들을 연상시킨다.
거기에 언급된 네 생물은 각각 사람, 사자, 황소, 독수리의 형상을 하고 있는데, 묵시록 4장 7절의 언급을 감안할 때 에제키엘서의 묘사는 상당히 유사하면서도 차이가 있다. 에제키엘서의 커룹은 각각 네 날개를 가졌지만, 묵시록의 네 생물은 각각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다. 또한 커룹은 하느님의 어좌를 운반하지만, 묵시록에 언급된 네 생물은 하느님의 어좌를 둘러싸고 있다. 그리고 커룹은 각각 네 얼굴을 가졌지만, 묵시록의 네 생물은 한 얼굴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네 생물은 '피조물의 대표'를 상징한다. 이것은 네 생물이 24원로와 함께 하느님을 예배하고 경배한다는 차원에서 타당한 해석이다.
그리고 '네 생물의 앞뒤로 눈이 가득 달려 있다'는 것은 에제키엘서 1장 18절을 배경으로 나온 것으로서, 네 생물이 끊임없이 깨어 있다는 뜻과 더불어, 하느님의 뜻을 하나도 놓치지 않으려는 열정과 탁월한 천상적 통찰력을 지니고 있음을 나타낸다. 이것은 하느님을 경배하고 찬양해야 하는 하느님의 백성이 어떤 자세를 지녀야 할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이제 네 생물의 등장을 보여준 묵시록 4장 6절에 이어 4장 7~9절은 네 생물의 모습과 하느님께 대한 그들의 찬양을 기록한다. 이들 네 생물은 4복음서로 이해되기도 하여, 사람은 마태오 복음, 사자는 마르코 복음, 황소는 루카 복음, 독수리는 요한 복음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아마도 복음서의 시작인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 마르코 복음은 사자처럼 포효하면서 회개의 메시지를 전하는 세례자 요한의 등장, 루카 복음은 사제 직무를 수행하는 세례자 요한의 아버지 즈카르야의 이야기, 요한 복음은 천지창조 이전부터 계시는 그리스도의 선재(先在) 사상을 펼치는 요한 복음사가의 하늘을 나는 독수리처럼 높은 신학이 전개되기 때문일 것이다. 어쨌든 네 생물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들이 존재한다.
보통 네 생물은 모든 동물계에서 가장 고상한 것(가축의 대표인 황소가 가진 힘, 충성, 인내를 상징),
가장 강력한 것(야생동물의 왕인 사자가 가진 권위와 존엄을 상징), 가장 지혜로운 것 (만물의 영장인 사람이 가진 지혜, 이성, 형제애를 상징), 가장 민첩한 것(날짐승의 왕인 독수리가 가진 활동성과 용맹성을 상징)을 상징하며, 사람을 포함한 자연계의 각 대표가 하느님의 어좌 앞에 앉아 하느님의 뜻을 성취하고, 하느님의 지극한 위엄을 예배한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좋다.
묵시록 4장 8절에서 '네 생물은 저마다 날개를 여섯 개씩 가졌는데, 사방으로 또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다'는 구절을 살펴볼 차례이다. 이것은 이사야 예언서 6장 2절의 '그분 위로는 사람들이 있는데, 저마다 날개를 여섯씩 가지고서, 둘로는 얼굴을 가리고 둘로는 발을 가리고 둘로는 날아다녔다'라는 구절을 연상시킨다.
사도 요한이 본 네 생물 역시 이사야 예언자가 목격한 '사랍'(Seraphim)들과 같이 '저마다' 여섯 날개를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날개는 하느님의 뜻을 신속히 수행하는 상징성을 지닌다. 네 생물이 하느님의 어좌 가까이 있는 매우 중요한 존재들이라는 점(묵시5,6; 14,3), 부단히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점(묵시5,8.14; 7,2; 19,4), 그들의 활동이 하느님의 진노를 쏟아붓는 것과 관련된다는 점(묵시6,1~7; 5,7)을 감안할 때, 그들은 하느님의 명령에 따라 신속하게 이를 집행하는 존재라는 점이 분명히 드러난다(시편18,11; 에제10,16).
그런데 '그 날개의 사방과 안으로 눈이 가득 달려 있었다'는 것은 네 생물이 저마다 예리한 천상적 통찰력을 가지고서 거룩하신 하느님을 보좌하고 있음을 상징한다. 네 생물은 '밤낮 쉬지 않고 외치고' 있는데, 이것은 네 생물의 존재의 목적이 오로지 하느님을 찬양하는 데 있음을 드러낸다. 이와 같은 표현이 묵시록 14장 11절에서 나오는데, 사도 요한은 짐승과 그 상에 경배하고 자기 이마나 손에 표를 받는 자를 향해서 '누구나 낮에도 밤에도 안식을 얻지 못할 것이다'라고 천명한다. 이렇게 사도 요한은 오로지 '밤낮 쉬지 않고' 하느님만을 찬양하는 네 생물과, 짐승과 그 상에게 경배하여 '낮에도 밤에도 안식을 얻지 못하는' 배교자들을 대조한다.
한편 '네 생물'이 천상적 존재들을 포함하여 우주 만물, 곧 피조물 전체를 상징한다면, 그들이 밤낮 쉬지 않고 불러야 하는 찬양은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전능하신 주 하느님, 전에도 계셨고 지금도 계시며 또 앞으로 오시는 분!'이라는 가르침이 나온다. 이것은 이사야서 6장 3절의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만군의 주님! 온 땅에 그분의 영광이 가득하다'라는 '사랍'(Seraphim)들의 찬양을 상기시킨다.
여기서 '거룩하시다'에 해당하는 '하기오스'(hagios; holy)는 원래 모든 피조물과 질적으로 완전히 구분되는 하느님의 속성을 의미하며, 세 차례 반복 표현된 것은 '하느님의 거룩하심'에 대한 최상급의 표현을 나타낸다. 히브리식 사고에 의하면, 동일한 표현을 두 번 반복하는 것은 강조를 의미하고, 세 번 반복하는 것은 최상급의 표현이다.
이제 묵시록 4장 9절을 보면, 네 생물이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어좌에 앉아 계시며 영원 무궁토록 살아 계신 하느님께 돌리는 것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여기서 '영광'에 해당하는 '독산'(doxan; glory)은 '명예'와 '명성'을 뜻하는 원형 '독사'(doxa)의 목적격이다. 그리고 '영예'에 해당하는 '티멘'(timen; honor)의 원형은 '티메'(time)인데, '값', '자격', '보배', '존귀'라는 뜻으로서, '존경하다', '공경하다'라는 뜻을 지닌 '티메오'(timeo)의 명사형이다. 보통 '영광'과 '영예'(존귀)는 모두 하느님의 속성인데, '감사'로 번역된 '유카리스티안'(eucharistian; thanks)과는 잘 부합되지 않는 것 같아도, 묵시록에는 이 세 가지가 함께 사용되는 경우가 적지 않다.(묵시5,12.13; 7,12; 11,17).
그런데 이러한 '영광과 영예와 감사'가 '영원 무궁토록 살아 계신 그분' (who lives for ever and ever)께 돌려진 것은, 사도 요한 당시 살아 있는 신(神)으로 간주되던 로마 황제에게 돌려졌던 그것과 대비를 이룬다. 지상에서 신(神)으로 군림하는 로마 황제가 마땅히 하느님께 돌려져야 할 '영광과 영예와 감사'를 가로채고 있지만, 천상에서는 유한한 이 지상의 존재와 구별되는, 영원무궁토록 살아 계신 하느님, 찬양받으실 자격이 계신 하느님께만 그것이 돌려진다.
마지막으로 묵시록 4장 10절의 24원로가 '자기들의 금관을 어좌 앞에 던지며'라는 표현이 나오는데, 이것은 24원로가 자신의 금면류관을 벗어 하느님 어좌 중앙에 '내려 놓는다'는 자발적 행위를 가리킨다. 고대 국가 간의 전쟁에서 패전국 임금이 승전국 임금 앞에 엎드려 자신의 왕관을 바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양도하는 의식을 취하듯이, '금관을 던진다'는 것은 그들이 누리는 권위가 '하느님으로부터 비롯되고 위임된 권위'라는 사실을 겸손하게 인정하면서 동시에 그것을 하느님께 환원하고 있음을 나타내는 것이다.
제33주간 목요일 제1독서(묵시5,1~10)
그런데 원로 가운데 하나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울지 마라. 보라,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 곧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다." (5)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6).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7)
여기서 원로는 묵시록 4장 4절과 10절에 언급된 '24원로'를 뜻한다. '24원로'는 역대기 1권 24장 1~19절에 열거된 사제들의 24반열에 근거하여 나온 표현이며, 12와 12를 더한 수로서 묵시록 21장 12~14절에 나오는 '열두 성문'과 '열두 초석'으로 상징되는 '열두 지파' 와 '열두 사도'에 직접적으로 대응한다. '24원로'는 '하느님 백성 전체'를 상징하면서, 지상 교회(묵시록 2장과 3장)와 천상 교회(묵시록 4장과 5장)의 대응 관계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원로 가운데 하나가 사도 요한에게 울지 마라고 명령한 뒤에 사도 요한이 울지 않아도 되는 이유를 설명한다. 그것은 곧 '유다지파에서 난 사자, 다윗의 뿌리가 승리하여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리를 펼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유다 지파에서 난 사자'에 해당하는 '호 레온 호 에크 테스 필레스 이우다' (ho leon ho ek tes phylles Iuda; the Lion of the tribe of Judah)라는 어구는 분명히 창세기 49장 9절에 언급된 야곱의 축복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거기서 야곱은 유다를 향해 '유다는 어린 사자, 내 아들아, 너는 네가 잡은 짐승을 먹고 컸다. 유다가 사자처럼, 암사자처럼 엎드리니 누가 감히 그를 건드리랴?'하고 축복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 이스라엘의 임금이 유다 지파에서 탄생할 것임을 예언한 것으로서, 실제로 에제키엘 예언서 19장 2절, 3절, 5절, 6절은 남부 유다의 왕실을 '사자'로 표현한다. 그러나 결정적으로 이것은 메시야에 대한 상징이다. '우리의 주님께서 유다 지파에서 나오신 것은 명확합니다'(히브7,15). 또한 본문에서 '다윗의 뿌리'로 번역된 '헤 리자 다위드'(he riza Dayid; the Root of David)라는 표현이 구약 성경에서는 발견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것은 명확히 이사야 예언서 11장 1절과 10절에 나오는 '이사이의 뿌리'라는 언급과 상관이 된다. '이사이의 그루터기에서 햇순이 돋아나고 그 뿌리에서 새싹이 움트리라'(이사야11,1). '그날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리라. 이사이의 뿌리가 민족들의 깃발로 세워져 겨레들이 그에게 찾아들고 그의 거처는 영광스럽게 되리라'(이사야11,10).
그래서 마태오 복음사가는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마태1,1)라는 언급으로 자신의 서술을 시작하고, 사도 바오로는 '그분께서는 육으로는 다윗의 후손으로 태어나셨고'(로마1,3) 라고 분명하게 언급함으로써 로마서의 서두를 열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묵시록의 결론 부문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이 다윗의 뿌리임을 분명하게 밝히신다. '나 예수가 나의 천사를 보내어 교회들에 관한 이 일들을 너희에게 증언하게 하였다. 나는 다윗의 뿌리이며 그의 자손이고 빛나는 샛별이다'(묵시22,16).
한편, 본문에서 '승리하여'로 번역된 '에니케센'(enikesen)은 '이기다','정복하다', '지우다', '격파하다'라는 뜻을 지닌 원형 '니카오'(nikao)의 부정 과거형으로서 과거에 있었던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승리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원문에서는 '승리하여'라는 술어가 문두에 등장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승리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분명하게 밝힌다. 따라서 이 승리는 과거 십자가상에서 이루신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 대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이다.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묵시록 1장 18절에서 '살아있는 자다. 나는 죽었었지만, 보라, 영원무궁토록 살아 있다. 나는 죽음과 저승의 열쇠를 쥐고 있다'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역사적 실재로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에 대해 승리하였음을 밝혔다. 그러므로 사도 요한은 울음을 멈추어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야말로 죄와 죽음과 사탄의 권세를 이기신 분으로서 하느님의 비밀스런 목적을 따라 세상에 그분의 통치를 세우는 것과 관련된 그 책을 펴며, 그 봉인을 떼기에 합당하시기 때문이다.
'일곱 봉인을 뜯고 두루마기를 펼 수 있게 되었다' 이미 묵시록 5장 1절에서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의 오른손에, 안팎으로 글이 적힌 두루마리 하나가 들려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 두루마리는 일곱 번 봉인된 것이었습니다'라고 나온다. 어좌에 앉아 계신 분이신 성부 하느님의 오른손 위에 들려 있는 것이 '두루마리' (책)이며, 또한 이 책이 안팎으로 쓰여졌고, 일곱 인으로 봉해졌음을 밝힌다. 여기서 '두루마리'로 번역된 '비블리온'(bibbllion)은 본래 '양피지나 파피루스(papyrus)로 만든 두루마리 책'(이사34,4; 예레36,2; 히브10,7)이란 뜻을 지닌 '비블로스'(bibllos)의 축소형이다.
이 책은 '안팎으로 글이 적힌'이라고 되어 있다. 동일한 표현이 에제키엘서 2장 10절에도 나오는데, '그분께서 그것을 내 앞에 펴 보이시는데, 앞뒤로 글이 적혀 있었다. 거기에는 비탄과 탄식과 한숨이 적혀 있었다'고 분명하게 언급하고 있다. 이처럼 안팍으로 쓰여진 것은 그 책의 내용에 어떤 것을 더하거나 뺄 수 없게 그 자체로 이미 완전함을 상징한다.
또한 이 책은 일곱 인으로 봉해졌다. 묵시록 5장 1절에서 '봉인'(인)으로 번역된 '스프라기신'(sphragisin)은 '증표나 확증, 증거'(1코린9,2; 로마4,11),'인장'(묵시7,2),'인장, 날인, 봉인'
(묵시9,4; 2티모2,19), '책 쓴 후에 찍는 봉인'(묵시5,1.2.5.9; 6,1.3.5.7.9.12; 8,1)이란 의미를 지닌 원형 '스프라기스'(sphragis)의 여격이다.
또한 '일곱'을 뜻하는 '헵타'(hepta)는 묵시록 전체에서 '신적 완전함'을 뜻하는 상징수이다. 알다시피 일곱은 창조, 안식일, 안식년, 희년 등과 관련된 '완성'의 숫자이다. 참고로 사도 요한은 '완성'의 숫자 '일곱'을 제시함으로써, 묵시록이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소아시아의 일곱 교회를 넘어 당시의 모든 교회, 심지어는 모든 세대의 모든 교회들에게 적용될 수 있도록 매우 독특한 방식으로 저술한 것이다.
여기서 '두루마리'(책)는 에제키엘서 2장 10절의 전통과 묵시 문학 특유의 상징으로 기술된 책이므로, '하느님의 비밀스런 목적을 따라 세상에 하느님의 통치를 세우는데, 어린 양의 승리가 어떻게 효력을 발휘하게 되는가를 드러내는 책'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완전수'인 '일곱'이란 숫자와 '봉인'(인)은 계시의 완전성과 비밀성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그 내용이 하느님께서 보여주시기 전에는,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알 수 없도록 철저하게 감추어져 있음을 나타낸다. 묵시록에 나타난 신비한 계시를 인간이 자의적으로 해석해서는 안되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나는 또 어좌와 네 생물과 원로들 사이에,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어린양이 서 계신 것을 보았습니다. 그 어린양은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6).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어떤 방식을 통해 이루어졌는지 드러낸다. 묵시록 5장 5절에서 사도 요한은 '사자'의 모습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의 면모를 그린 반면에, 여기서는 '어린양'을 제시함으로써 그의 승리가 매우 역설적인 방식, 곧 '죽음'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명확하게 드러낸다.
여기 '어좌'와 '네 생물', 그리고 '원로들'에 대해서는 묵시록 4장 2절과 6절에 이미 나왔다. '어좌'는 성부 하느님의 보좌(the throne)를 말하며, '네 생물'(four living creatures)은 피조물의 대표를 상징하고, '원로들'(elders)은 '하느님의 백성 전체'를 상징한다고 이미 말했다. 그리고 여기서 '어린양'이 '아르니온'(arnion)으로 표기되는데, 묵시록에서는 한결같이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하여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하기 위해 사용되었다.
그런데 이 '어린양'은 '살해된 것처럼'보인다고 묘사되어 있다. 여기서 '살해된 것'으로 번역된 '에스파그메논'(esphagmenon)은 '도살하다', '살육하다','죽이다'라는 뜻을 지닌 '스파조'(sphazo)의 현재 완료 수동형으로서, 신약 성경에서는 묵시록 5장 9절과 12절, 6장 4절과 9절, 13장 3절, 18장 24절과 요한1서 3장 12절에서만 사용되었다.
그리고 '~처럼 보이는'으로 번역된 '호스'(hos)는 많은 경우 추측의 의미를 나타내기도 하지만, 문장 속에 언급된 사람, 사물, 행위 등의 특징적인 면을 소개할 때 사용되기도 한다(로마3,7; 1베드1,19). 본문에서는 어린양의 모습속에 과거 십자가 희생의 흔적이 남아 있다는 의미가 된다. 아마 이것은 성도들로 하여금 영원토록 주님의 십자가상 구속 사업을 기억하도록 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한편, 동사가 수동태라는 점은 그리스도의 죽음이 유대의 종교 지도자들과 로마 관원들의 협잡에 의한 것이란 점을 드러내는 동시에, 그것이 인류를 구원하시려는 성부 하느님에 의해 집행된 속죄(대속)행위임을 암시한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어린양의 죽음은 유월절(빠스카절, 과월절, 해방절)의 희생 제사와 쉽게 결부된다(이사53,7).
'뿔이 일곱이고 눈이 일곱이셨습니다. 그 일곱 눈은 온 땅에 파견된 하느님의 일곱 영이십니다' 사도 요한의 환시에 따르면, 어린 양은 일곱 뿔과 일곱 눈이 있었다. 여기서 '뿔'에 해당하는 '케라타'(kerata)는 구약 성경에서 '능력'과 '권세'를 의미한다(민수23,22; 신명33,17; 1사무2,10; 1열왕22,11; 시편112,9; 다니엘7,7.20). 이것은 구약의 위경 에녹1서 90장 9절에 언급된 '뿔달린 양'의 면모를 상기시키는 동시에, '완전성', '충족성'을 상징하는 상징수 '일곱'과 더불어 사용되어 선택된 하느님의 백성을 구원하시기에 충분한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의 완전함과 충족성을 상징한다.
또한 '눈'에 해당하는 '옵탈무스'(ophthalmus)는 즈카리야서 4장 10절에 언급된 '이 일곱 눈은 바로 온 세상을 두루 살피시는 주님의 눈이시다'는 말씀 및 역대기 하권 16장 9절의 '주님께서는 당신께 한결같은 마음을 지닌 사람들에게 슬기를 주시려고, 온 세상을 두루 살펴보고 계십니다'라는 말씀과 연결되어 있다. '눈'의 수 역시 '일곱'으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 및 그의 '전지'를 상징한다. '하느님의 일곱 영'은 묵시록 1장 4절과 5절에 나오는대로 즈카르야서 4장 1절에서 14절에 근거한 '성령'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여기서 '하느님의 일곱 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통찰력 및 전지성을 더욱 두드러지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 어린양이 나오시어, 어좌에 앉아계신 분의 오른손에서 두루마리를 받으셨습니다'(7). '받으셨습니다'로 번역된 '에일레펜'(eilephen)은 '손에 들다', '쥐다', '잡다' 라는 뜻을 지닌 '람바노'(lambano)의 미완료 능동형으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능동적으로 책을 집어들었음을 의미한다. 이것은 묵시록 10장 8절에서 사도 요한이 천사의 명령을 듣고 수동적으로 책을 받아든 것과 확연히 대조된다. 아울러 미완료 시제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책을 잡고 계시는 행위를 눈에 보이듯 회화적으로 드러낸다.
이처럼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오른손 위에 있는 책을 집어드는 행위는 다니엘서 7장 13절과 14절에 나오는 것처럼, 그리스도께서 온 우주에 대한 권세를 부여받았음을 나타내는 동시에, 하느님 나라의 종말론적 도래가 이미 하늘 어좌에서부터 실현되고 있음을 예시한다.
11월 1일 모든 성인 대축일 제1독서 (요한묵시7,2-4.9-14)
오늘은 천국에 있는 모든 성인들을 모두 합쳐서 기념하고 축하하는 날이다. 이 축일의 유래는 이러하다. 로마에는 예수님께서 강생하시기 전에 이미 여러 신들에게 바쳐진 웅대한 신전이 있었다. 고대 로마인들은 가지각색의 신들을 숭배하며, 더욱이 자신들이 정복한 다른 민족의 신까지 숭배했다. 그래서 이러한 무수한 신들에게 일일이 제사를 지낸다는 것이 어려운 일이므로 그들은 하나의 원형 신전을 세우고 그곳에서 모든 신들을 합사(合祀)했다.
로마인의 소위 판테온(pantheon)은 이 신전을 말하는데, 현재도 남아 있어 로마를 방문하는 여행자들의 빼놓을 수 없는 관광지가 되어 있다. 로마가 가톨릭의 혜택을 받자 이 신전은 성당으로 개조되었으며, 전에 잡신들의 상이 있는 곳에 성인들의 성상이 들어섰을 뿐 아니라 성인 순교자들의 유해가 카타콤바에서 그곳으로 옮겨졌다.
609년 5월 13일 성 보니파시오 4세 교황님이 로마의 판테온 신전을 교회에서 사용하도록 허락하시고, 성모 마리아께 봉헌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835년 그레고리오 4세 교황님이 이 성당을 우리가 알지 못하는 모든 성인들께 봉헌하시고 11월 1일을 기해 그들을 기념하는 날로 정하고 온 교회에 전파하였다.
그래서 오늘 묵시록의 7장 4절의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144,000명'이라는 말씀과 묵시록 7장 9절의 '모든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권에서 나온,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라는 말씀을 묵상하게 된다.
인장(표; stigma)을 찍는다는 것은 소유물로 삼는 것을 상징하는데(에제9,4참조), 하느님께서 당신 종들에게 인간의 능력의 한계를 넘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참아낼 수 있도록 어떤 초자연적인 힘을 주시며, 동시에 악인들이 받는 벌의 판결에서부터 보호되리라는 것을 가르쳐 준다.
144,000 은 상징적 숫자인데,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를 표시하는 12 와 민족들과 연관하여 충만을 의미하거나 신약의 12사도를 의미하는 12 , 그리고 하느님의 영역에 속하는 완전수 1,000 이 결합된 숫자(12x12x1000)다.
셀 수 없이 많은 백성이 하느님의 구원을 얻을 것임을 상징적으로 표시한다. 아무도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는 하느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약속하신 말씀이 (창세15,5; 32,12) 살아 있으며, 참 이스라엘인 교회를 통해 실현됨을 말한다.
"민족과 종족과 백성과 언어"이라는 표현은 묵시록의 전형적인 표현으로서 세상에 있는 모든 백성을 가리킨다.
야자나무 가지를 들고서 어좌 앞에 서 있는 사람들은 많은 어려움을 이겨내고 하늘 나라에 개선한 사람들임을 가리킨다. 구약에서 종려나무 가지를 흔든다는 것은 승전의 기쁨을 표시하기 때문이다.
모든 천사가 어좌와 원로들과 네 생물 둘레에 서 있다는 말씀이 나온다. 흰 옷을 입고 금관을 쓴 원로 24명이란 말이 묵시록 4,4절에도 나오는데, 이 사람들이 누구인지 확실하지 않다.
천사들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 선택받은 사람들, 지상에서 고생하고 승리의 월계관을 쓴 위대한 사람들을 상징한다고 보는 견해, 하느님께서 재판하실 때 배심원 역할을 하면서 도와드리는 원로 천사라는 견해(다니10,9; 시편89,8; 이사24,23), 역데기 1서 25장 1~35절에서 말하는 하느님 궁전 성가대처럼 하느님 앞에서 찬양하는 24명의 선택된 사람들이라고 말하는 견해들도 있다.
24는 12+12로서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와 신약의 새 이스라엘의 시초인 12사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며, 흰옷은 초월적인 것을, 어좌 혹은 옥좌는 권위를, 금관은 그들이 받을 상급을 나타낸다고 볼 때, 24원로는 천상 하느님 백성의 상징적 존재일 거라고 본다.
네 생물이란 표현이 묵시록4,14절에 나오는데, 이미 에제키엘서 1장 5~14절에 언급되어 있는 '사자, 송아지, 사람의 얼굴, 독수리처럼 생겼다.'는 말씀에서 유래한다.
이 넷은 짐승도 사람도 아닌 천사를 가리킨다. 이들이 눈들이 많다는 것은 세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것을 전부 다 본다는 의미이고 눈은 성령을 상징한다. 네 생물의 기능은 하느님의 옥좌 앞에서 끊임없이 창조주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창조물 중 가장 강하고 가장 고귀한 존재들을 표현한 것 같다.
교부들은 영성적으로 재해석하여 네 복음사가를 가리켰다. 마태오 복음은 예수님의 족보로 시작되므로 사람 모습, 마르코 복음은 광야에서 외치는 이의 사자후 소리로 시작하므로 사자 모습, 루카 복음은 즈가리야 사제의 제사 이야기로 시작하므로 제물로 바쳐지는 송아지 모습, 요한 복음은 한 처음에 하느님의 말씀이 저 높은 곳에서 떠돌다가 말씀에 의해서 세상이 창조되었다고 하므로 독수리 모습으로 상징된다는 것이다.
묵시록 7장 14절의 큰 환난은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세 말년(A.D.81~96년)의 대박해를 암시하는 것으로 보이며, 예수님께서 종말론적인 담화에서 인용하신 다니엘서 12장 1절의 '큰 환난'을 가리킨다고 본다. 그리고 종말론적 예언의 차원에서 모든 시기의 교회가 감당해야 할 모든 투쟁과 박해를 암시한다고 이해할 수 있다.
어린 양의 피로 자기들의 긴 겉옷을 깨끗이 빨아 희게 했다는 말씀이 묵시록 7장 14절의 끝에 나온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많은 사람들이 더럽혀진 생활을 깨끗이 청산하고 용서받게 되었다는 것을 말한다. 즉 어린양이 겪은 시련과 고통의 결과로서 의인들이 나타난다(이사1,18; 64,5; 즈가3,3~5참조).
묵시록에서도 흰옷 입은 사람들이란, 하느님의 자비로 용서받고 구원받은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 사람들이 자기 예복을 어린양의 피로 희게 빨았다는 것은 인류 구원 사업은 인간이 아니라 바로 그리스도께서 하신 것임을 말한다.
그러나 또한 무죄하신 그리스도께서 보배로운 피를 흘리시고 죽으심으로써 얻은 선(善)과 그 효과(구속 성혈의 공로)가 자동적이고 피동적인 것은 아니며, 인간이 그리스도의 피의 효과를 자기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뜻도 포함된다.
오늘 우리는 모든 성인 대축일을 맞이해서 천국(개선지회; 凱旋之會; 개선한 교회; Ecclesia triumphans)의 성인 성녀들을 바라보면서 발은 땅에 딛고 있지만, 천상의 영원한 생명과 복락을 희망해야 한다.
지극히 거룩하시고 존엄하신 천주성삼께서 계시는 천국에 가지 못한다면, 우리의 믿음 생활과 지상의 나그네 삶이 무슨 가치가 있는가? 한마디로 구원받지 못한다면, 이 땅에서 숨쉬고 산다는 것이 무슨 소용이 있는가?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씀대로 우리 믿음의 선배들이 이미 그 목적을 달성했으니 우리도 힘과 용기를 내어야 한다. "성인 성녀들이 인간이었고 나도 인간이기 때문에, 그들이 성인이 되었다면 나도 성인이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여러분은 그리스도와 함께 다시 살아났으니 저 위에 있는 것을 추구하십시오. 거기에는 그리스도께서 하느님 오른쪽에 앉아 계십니다. 위에 있는 것을 생각하고 땅에 있는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골로3,1~2)
연중 제33주간 금요일 제1독서 (묵시록10,8-11)
< 그래서 내가 그 천사에게 가서 작은 두루마리를 달라고 하자, 그가 나에게 말하였습니다. "이것을 받아 삼켜라. 이것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천사의 손에서 작은 두루마리를 받아 삼켰습니다. 과연 그것이 입에는 꿀같이 달았지만 먹고 나니 배가 쓰렸습니다.> (9-10)본문에서 '받아 삼키다' 로 번역된 '카타파게'(kataphage)는 본래 '삼키다', '먹어 치우다' 라는 일차적인 뜻으로부터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다', '내용을 깊이 깨닫다' 라는 뜻으로 아우르는 '카테스티오'(katesthio)의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이것이 부정 과거 명령형이라는 것은 요한 사도에 대한 천사의 명령이 매우 단호하며 준엄함을 암시한다.
동시에 '삼키다', '먹어 치우라'는 명령은 천사의 손에 펴놓인 두루마리(책)의 내용을 '완전히 그리고 철저하게 습득하라'는 의미이다.
이처럼 책을 받아 삼키라고 명령한 천사는, 먹고 난 이후에 결과에 대해 '네 배를 쓰리게 하겠지만 입에는 꿀같이 달 것이다' 라고 언급한다.
본문에서 '달것이다' 로 번역된 '에스타이 글뤼퀴'(estai glyky)는 '이다', '있다' 라는 뜻을 지닌 '에이미'(eimi)의 미래형 '에스타이'(estai)와 '달콤한' 이란 뜻을 지닌 '글뤼퀴스'(glykys)의 중성 단수형 '글뤼퀴'(glyky)가 함께 사용된 것이다.
천사가 요한 사도에게 책을 건네주고 그것을 먹으라고 요구한 것이나 그것을 먹고 입에는 꿀같이 달았다는 언급은 에제키엘서 2장 8절에서 3장 3절의 묘사와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거기서도 에제키엘이 두루마리를 먹으니 꿀처럼 입에 달았다고 묘사되어 있다.
예레미야 역시 "당신 말씀을 발견하고 그것을 받아먹었더니 그 말씀이 제게 기쁨이 되고 제 마음에 즐거움이 되었습니다. 주 만군의 하느님 제가 당신의 것이라 불리기 때문입니다" (예레15,16)라고 말한다. 나아가 시편 저자는 "당신 말씀이 제 혀에 얼마나 감미롭습니까! 그 말씀 제 입에 꿑보다도 답니다"(시편119,10) 라고 노래한다.
예언자들이나 시편 저자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말씀이 달았던 것 같이, 요한 사도에게도 그 책은 꿀과 같이 단 하느님의 말씀이었다.
그러나 천사는 그것이 배에는 쓰다고 말한다. '쓰리게 하겠지만' 으로 번역된 '피크라네이'(pikranei)는 '쓰라리게 하다', '가혹하게 하다','비참하게 하다' 라는 뜻을 지닌 '피크라이노'(pikraino)의 미래형이다. 요한 사도가 이 책을 먹었을 때, 입에서는 달았으나 배에서는 쓰게 된 것은 그 책의 내용과 관련된다.
즉 요한 사도가 하느님의 계시를 받을 때는 기쁨으로 받았지만, 그 계시의 내용이 종말의 날에 이 세상에 닥치게 될 참혹한 대환난과 심판임을 깨닫고, 그 마음에 큰 근심이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하느님의 말씀이 꿀처럼 달다는 표현은 하느님 말씀의 유익성과 더불어 그 말씀을 받는 자의 기쁨을 미각적 이미지를 동원하여 잘 보여준다. 그러나 하느님의 말씀이 항상 기쁨만을 주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사실은 '배가 쓰렸습니다' 는 표현이 잘 보여준다. 특별히 본문에서는 요한 사도가 받은 말씀 가운데는, 쓰디쓴 심판의 내용이 포함되어 있는 곳에 이러한 표현이 사용되었다.
한편, 요한 사도는 입에는 다나 배에는 쓰리라는 천사의 예고에도 불구하고, 천사의 명령에 순종하여 그 책을 갖다 먹는다. 10절에서 '나는 ~ 받아'로 번역된 '엘라본'(elabon)은 본래 '취하다'라는 뜻을 지닌 '람바노'(lambano)의 부정 과거 능동태이다.
그리고 '삼켰습니다'로 번역된 '카테파곤'(katephagon) 역시 '삼키다', '먹어 치우다' 라는 뜻을 지닌 '카테스티오'(katesthio)의 부정 과거 능동태이다. 이와같은 부정 과거 능동태는 하느님의 계시를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신속하게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요한 사도의 모습을 잘 드러내고 있다.
제33주간토요일 제1독서(묵시11,4~12)
"여기 나의 두 증인이 있다. 그들은 땅의 주님 앞에 서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입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3~5)
하느님께서 권세를 부여하신 '두 증인'(토이스 뒤신 마르튀신; tois dysin martysin; two witnesses)는 누구인가? 묵시록 11장 3절 이하 13절에서 두 증인이 지니고 있다고 묘사된 권세는 명백히 모세와 엘리야의 행적을 상기시킨다. 그런 의미에서 두 증인에 대한 언급은 모세와 엘리야 예언자를 염두에 둔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5절과 6절). 두 증인은 엘리야와 같이 원수를 불로 사르고(2열왕1,10 이하), 하늘을 닫아 비가 오지 못하게 한다(1열왕17,1). 또한 모세처럼 물을 피로 변하게 만들고(탈출7,14~18), 모든 재앙으로 땅을 칠 수 있는 권세를 지니고 있다(탈출8,12). 타볼산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나타난 이들도 역시 모세와 엘리야였다(마르9,4).
실제로 구약 시대 유다인들은 모세와 엘리야가 세상의 종말이라는 파국에 치닫기 전에 다시 나타날 것으로 기대하였다(말라4,5; 신명18,18).말라키 예언자의 예언 가운데 언급된 엘리야는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에 앞서 그의 길을 준비했던 세례자 요한에 의해 성취되었고, 신명기 18장 18절의 '너(모세)와 같은 예언자'는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성취되었다.
아울러 묵시록 11장 12절에 나오는 두 증인의 승천에 대한 묘사는 열왕기 2권 2장 11절에 묘사된 엘리야의 승천 장면을 상기시키는 동시에, 구약의 위경 '모세의 승천기'에 묘사된 모세의 면모와 결부된다. 따라서 모세와 엘리야는 본문의 두 증인의 모티브의 기초가 된다. 즉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의 면모를 갖춘 또 다른 존재를 상징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두 증인'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묵시록 11장 4절에 의하면, 이 두 증인은 '두 등잔대'(촛대)이다. 묵시록에서 등잔대(촛대)는 오로지 교회를 상징한다(묵시1,12.20; 2,1). 이것은 묵시록 2장과 3장에 언급된 일곱 교회를 나타내는 일곱 등잔대를 상기시킨다. 일곱 등잔대가 전체로서의 교회를 상징한다면, 두 등잔대는 증거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신실한 교회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둘은 증거의 신실성을 입증하기 위해 채택되는 상징적 숫자이기 때문이다 (민수35,30; 신명17,6; 19,15; 마태18,16; 요한5,31; 8,17; 15,26.27). 따라서 두 증인은 모세와 엘리야와 같은 권세를 지니고 복음을 증거하는 신실한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신실한 하느님의 종들을 상징한다.
묵시록 11장 3절에 이 두 증인이 자루옷을 걸치고 천이백육십일 동안 예언한다고 되어 있다. '자루옷'(굵은 베옷)으로 번역된 '삭쿠스'(sakkus)는 히브리어 '사크' (sak)에서 유래한 '사코스'(sakkos)의 복수형이다. 여기서는 '슬퍼하는 자가 입는 옷' 곧 '상복'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는 구약 시대에 상복을 입는 것은 애곡과 참회의 상징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이 옷은 회개를 촉구하는 그들의 메시지에 부합하는 것이다(예레4,8; 마태11,21). 두 증인이 전하는 예언적 메시지는 '많은 백성과 민족과 언어와 임금들'(묵시10,11)의 종말론적 운명에 대한 것으로서, 궁극적으로는 그들의 회개를 목적으로 한다.
한편 두 증인이 회개를 촉구하는 기간은 1,260 일이다. 이것은 묵시록 11장 2절에 언급된 마흔두 달과 같은 기간이다. 종말의 때에 교회가 비그리스도인들의 핍박에 시달릴 기간으로 상징된 '마흔두 달'은
묵시록 11장 2절을 제외하고, 묵시록 13장 5절에 다시 한번 언급된다. 그런데 창세기 7장 11절~8장 4절에서 5개월이 150일로 계산된 것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한 달을 30일로 계산한다. 그러므로 42개월은 3년 반이며, 1,260일이다.
묵시록에서는 마흔두 달과 동일한 기간인 1,260일이 묵시록 11장 3절과 12장 6절에 나타난다. 역시 동일한 기간을 나타내는 표현인 '일년과 이년과 반년'은 묵시록 12장 14절에 언급된다. 따라서 '마흔두 달'은 다니엘 7장 25절과 12장 7절에 언급된 '일년, 이년, 반년'과 병행한다. 그러니 이 기간은 실제 기간을 나타내는 것이라기 보다는, 다니엘이나 사도 요한이 이방인들이나 비그리스도인들에 의해 거룩한 예루살렘이나 교회가 짓밟히는 시기를 예언하기 위해 사용된 '묵시적 수'로 보아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실제 이 기간은 B.C.168년 6월부터 B.C.165년 12월까지 자행되었던 안티오쿠스 에파파네스의 예루살렘 압제 기간과 일치한다. 이 때문에 이후로 '마흔두 달'은 악이 마음대로 활개치도록 허락된 짧은 기간을 상징하는 전통적인 수가 되었다. 그리고 숫자 42는 이스라엘이 시나이 광야에서 진을 쳤던 날 수와 일치한다는 점에서(민수33,5) 이스라엘 민족이 경험한 광야에서의 시련기를 상기할 수도 있다. 사도 요한은 이런 방식으로 하느님의 백성들이 겪는 환난의 기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것과, 그 짧은 기간이 지난 후에는 결국 구원에 이르게 된다는 사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즉 42개월, 1,260일, 일년 이년 반년<전(前) 삼년 반>은 묵시록 11장 7~13절에 기술된 후(後) 삼년 반의 기간과 더불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있을 종말론적 환난의 시기가 제한되어 있음을 상징적으로 나타내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기간은 교회의 핍박기인 동시에 예언의 기간, 즉 교회의 복음 증거 기간이기도 하다.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이전에 있을 7년 대환난기 가운데, 전(前) 삼년 반에 해당하는 이 기간동안 두 증인이 계속하여 예언할 수 있었던 것은, 그 핍박의 정도가 묵시록 11장 7절 이하에 나오는 후(後) 삼년 반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덜한 온건한 핍박기였기 때문이다.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 두 증인은 '땅의 주님 앞에 서 있는 두 올리브 나무이며 두 등잔대'로 묘사된다. 이와같은 묘사는 즈카르야 예언자의 환시와 관련된 것이 분명하다. '등잔대 곁에는 올리브 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하나는 기름 그릇 오른쪽에 있고 다른 하나는 그 왼쪽에 있습니다' (즈카4,3). '이것들은 온 세상의 주님 곁에 서 있는 성별된 두 사람을 뜻한다' (즈카4,14). 본래 즈카르야 예언자가 목격한 환시에서 등잔이난 등잔대는 '이스라엘'을 상징하며 (즈카4,2.3.14), 두 올리브 나무는 '예수아'(3장)와 '즈루빠벨'(4장)을 가리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서는 그러한 구체적 대응 관계에 상관없이 즈카르야 예언자의 환시와 유사한 환시가 등장하며, 여기서 두 올리브 나무와 두 등잔대는 모두 교회에 대한 상징이다. 신실한 교회에 속하는 신실한 성도들은 하느님의 빛을 비추는 자들이란 의미에서 등잔대로 상징된다. 또한 올리브 기름이 등잔의 불을 계속 밝혀주듯이, 신실한 성도들이 생명을 주는 복음의 빛을 계속 비춘다는 점에서 올리브 나무 역시 교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한편 즈카르야서 4장 6절은, 즈카르야가 목격한 환시를 '권력으로도 힘으로도 되지 않고 나의 영으로만 될 수 있다. 만군의 주님께서 말씀하신다'라고 해석한다. 이것은 오직 하느님의 영만이 하느님께서 기름부은 '예수아'와 '즈루빠벨'을 통해 그의 성전을 완공하실 것이라는 의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오직 하느님의 영이신 성령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때까지 교회의 복음 증거를 위한 권능을 제공하신다. 또한 '땅의 주님 앞에'라는 어구는 '온 세상의 주님 앞에'라는 의미로서 온 세상에 대한 하느님의 통치권과 지배권을 나타낸다. 따라서 세말의 교회는 성령의 충만함으로 무장하고서 세상 만물에 대한 주권을 소유하신 하느님 앞에서 복음의 증인으로서의 사명을 감당할 수 있는 존재이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삼켜 버립니다. 누가 그들을 해치려고 하면 그는 반드시 이렇게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 (5). 세상의 어떤 존재도 성령 충만함으로 무장하고 온 세상 우주 만물을 통치하시는 하느님 앞에 서 있는 존재를 해치지 못한다. 만약 누구든지 신실한 교회 및 그 교회에 속한 신실한 하느님의 종들로 상징되는 두 증인을 해치려 한다면, 그들의 입에서 불이 나와 그 원수들을 소멸할 것이다.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오는 광경은 열왕기 2권 1장 10절,12절에서 엘리야의 적대자였던 아하즈야 왕의 50명의 부하가 두 번이나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삼켜진 사건을 연상시킨다.
또한 민수기 4장 35절에서는 하느님의 종 모세를 대적하는 자들이 하늘에서 내려온 불로 심판받았던 역사가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불'(퓌르; pyr)은 종말의 대환난기에 하느님의 교회가 하느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보호될 것임을 암시한다. 두 증인의 입에서 불이 나오는 것 역시 상징적인 표현이라면, 이것은 "그러므로 주 만군의 하느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그들이 이런 말을 했으니 나 이제, 내 말이 너의 입에서 불이 되게 하고 이 백성은 장작이 되게 하여 그 불이 그들을 삼키게 하리라'"(예레5,14)는 표현과 관련될 것이다.
그렇다면, 두 증인의 입에서부터 나오는 불은 예언자의 말씀 선포를 비유한 것으로 이해할 수도 있다. 두 증인의 활동이 물리적인 살인 행위와 전혀 관련이 없다는 점은 이와같은 견해를 지지한다. '두 증인의 입에서 나오는 불은 그 원수들을 소멸할 것이다.' '삼켜 버립니다'로 번역된 '카테스티에이'(katesthiei)는 '먹어버리다'라는 뜻을 지닌 '카테스티오'(katestio)의 현재형으로서, 신실한 교회나 이 교회에 속한 신실한 하느님의 종들을 상징하는 두 증인을 해치려는 원수가, 하느님의 소멸하는 불, 곧 초자연적인 하느님의 능력이나 교회가 전하는 말씀의 능력으로 파괴될 것임을 드러낸다.
'또한 그들은 반드시 죽임을 당할 것이다.' 여기서 '반드시 ~죽임을 당하고 맙니다'로 번역된 '데이~아폭탄테나이'(dei~apoktanthenai)는 필연이나 의무의 뜻을 함축하는 '데이'(dei; must)와'살해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폭테이노'(apokteino)의 부정 과거 수동태 부정사가 상관적으로 사용된 것으로서 그들의 죽음이 필연적임을 보여준다. 이것은 지상에서 전투하는 교회의 복음 선포 능력이 얼마나 막강한 것인지를 잘 보여준다.
성모 승천 대축일(묵시록 11,19ㄱ;12,1-6ㄱ,10ㄱㄴ)
요한 묵시록의 집필 연대를 비교적 정확하게 언급한 인물은 성 이레네우스이다. 그는 도미티아누스 황제 치세 말년(AD81-96년), 그러니까 95년경에 이 책이 쓰였다고 밝혔다.(반이단론5,30.3)
요한 묵시록에 나오는 일곱 도시 가운데(소아시아지방:지금의 터어키) 스미르나, 페르가몬, 에페소가 황제 숭배경쟁을 주도했다. 시민들은 모두 신격화된 황제의 숭배에 열성을 보여야 했고, 이를 거부하면 로마 제국의 적이기 전에, 자기 도시의 적으로 간주되어 박해를 받았다.
묵시 13장에 나오는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짐승들은 황제나 황제 숭배를 강요하는 지방 행정관들이다. 지방 행정관들은 황제 숭배를 통해 식민지 백성을 효과적으로 통제할 수 있었다. 아우구스투스 황제 이래 소아시아 지역에 만연한 황제 숭배 관습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커다란 위협이었다. 일곱 도시 가운데, 티아디라를 빼고는 모두 황제 숭배 신전을 갖고 있었다. 오로지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로서는 황제 숭배를 도저히 용인할 수 없었다. 더구나 신전에서 황제에게 바치는 제사 자체도 문제였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유일하고 결정적인 제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상 희생 제사 뿐이었다.
로마 제국은 황제 숭배를 제국의 안녕과 번영에 연결시켰다. 네로시대부터 제국에 닥친 악과 불행을, 로마 황제와 제국의 신들을 경배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의 탓으로 돌렸다. 따라서 황제 숭배가 성행할수록, 그것을 거부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점점 더 심각한 위협에 직면하기 마련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리스도인들이 박해를 받고 안받고는 오로지 지방 행정관과 여론의 향방에 달려 있었다.
요한은 당시 로마 제국의 정치 질서를 완전히 부패한 것으로 본다. 그 질서는 사탄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을 이 부패한 사탄의 세력에서 떼어 놓고자 하였다. 전체적으로 소아시아의 그리스도인들은 여느 시민들처럼 로마 질서에 순응하며 살았다. 요한의 눈에 이것은 악의 세력과 타협하는 것이었다.
요한은 로마 제국과 교회 사이를 타협하거나 양립할 수 없는 질서의 대립 관계로 보았고, 예언자적 안목으로 로마 제국이 근본적으로 부패한 집단임을 간파했다. 그의 안목은 이원론적이다. 한쪽에는 하느님이 계시고, 다른 쪽에는 악이 도사리고 있다. 로마 제국은 사탄의 도구요, 악 자체이다. 하느님과 그 분이 보내신 그리스도를 섬기는 일은 황제 숭배와 정면으로 충돌하므로, 피할 수 없는 박해가 임박해 있다.
묵시록의 집필 목적은 로마 세계에서 박해받고, 그 세계의 질서에 순응하지 못하여 스스로 소외된 그리스도인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며 권면하기 위한 것이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가지 메세지를 전한다. 1) 자신의 목숨까지도 바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느님께 가는 길을 발견하고, 그 분과 그 길의 충실한 증언이 된 그리스도인들은 복된 지위를 얻게 될 것이라고 한다. 2) 그리스도인들을 박해하는 자들은 반드시 하느님께 심판을 받을 것이며, 그 심판의 때가 가까이 다가왔다고 선언한다. 로마 제국은 반드시 망한다. 3) 요한은 그리스도인들이 로마 제국의 질서에 순응하는 온갖 형태의 문화의 수용을 단죄하고, 이제 곧 멸망하게 될 악의 세력에 동조하거나 영합하지 말라고 권고한다.
요한 묵시록에서 박해자들의 심판을 알리는 장이 12-22장 이다. 묵시록의 심장부와 같은 12장은 태양을 입은 여인에 관한 환시로 시작된다. 이 여인은 일반적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나타낼 수도 있고, 하느님의 새로운 백성인 교회를 상징하기도 하고, 구세주의 어머니이신 성모 마리아의 표상으로 보기도 한다. 그리고 용은 사탄을 가리키는데, 사탄의 힘이 비록 거세지만 결국 정복 당하고야 말 하찮은 적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려는데 환시의 의도가 있다.
사탄의 하수인인 바다와 땅에서 올라온 두 마리 짐승은 로마 황제와 황제숭배를 강요하며 교회를 박해하는 지방 행정관들이다.(13장) 666이란 숫자를 놓고 어떤 구체적인 인물을 찾아 내려 해서는 안되고, 66이 상징하는 인물은 네로와 같이 교회를 박해하는 역사상의 모든 박해자들로 보면 된다.(13,18)
두 짐승이 사탄의 편이라면, 교회는 살해된 어린양을 자기 편으로 모시고 있다.
희생 제물이며 믿는 이의 우두머리이신 어린양은 최후의 승리를 거둔다.이 어린양에게 바쳐진 144,000명(12x12x1,000)은 순수하게 신앙을 보존한 모든 사람들을 상징한다. 여기서 앞의 12는 구약의 이스라엘의 기초인 12지파를, 뒤에 12는신약의 교회의 기초인 12사도를, 1,000은 많은 수를 의미한다.(14,1)
성경의 첫 기쁜 소식이라 할 수 있는 창세기 3장 15절의 뱀으로 상징되는 사탄에 대한 하느님의 저주의 말씀이 우리 그리스도인들에겐 축복의 말씀이 되는데, 바로 하와의 후손인 성모 마리아를 통해 구원자로 오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예고되었다.
이제 성경의 마지막 장인 묵시록 12장에도 여인인 성모 마리아를 통한, 용으로 상징되는 사탄에 대한 승리로 마무리된다. 우주를 몸에 두른(태양과 달의 표상) 성모님 머리의 열두 개 별로 된 관을 쓰신 것은, 성모님이 구약의 이스라엘 12지파와 신약의 교회의 구성의 기초인 12사도를 의미하는 교회의 어머니임을 드러내고 있다.
이 세상과 우주는 교회를 통해 구원받는데, 교회의 어머니로 성모님이 부각되고, 12개 별은 성모님이 받으신 성령의 은사 즉 특은을 말한다. 이 특은은 성모 호칭 기도에 잘 나타나 있다. 성모님안에 아기(예수 그리스도)가 있다.
한편 크고 붉은 용은 사탄인데, 일곱 머리는 소아시아의 일곱 도시를, 신격화된 황제숭배로 지배하고자 하는 것을 의미하고, 열 뿔과 일곱 머리의 일곱 작은 관들과 용 꼬리의 표상은 나름대로의 무시못할 권세와 힘을 갖고, 영향력을 교회와 세상에 미친다는 뜻이다. 특히 12장 4절의 용의 꼬리가 하늘의 별 삼분의 일을 휩쓸어 땅으로 내던져지는 것은 실제로 사탄의 공격으로 교회 구성원의 삼분의 일이 신앙을 잃고 구원받지 못함을 의미한다. 사탄은 성모님과 그안의 예수 그리스도를 대적하기 위해 서 있고, 사탄의 방해에도 불구하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 모든 민족들을 쇠지팡이, 강력한 통치력으로 다스리는 권세를 가지고, 모든 비뚤어진 질서를 바로 잡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오늘 독서의 11장 19절에 하늘의 하느님 성전안에 있는 하느님의 계약 궤와 12장의 태양을 입은 여인이 바로 연결된다. 이 계약 궤는 예수님을 모신 성모 마리아를 의미하고, 교회의 영혼인 성령께서 활동하시는 이 시대의 교회의 시간안에, 성령의 정배이신 성모님,사탄과 적대 관계이신 성모님도 강력하게 활동하셔서, 온갖 유물론적 무신론적 사고 방식,극도의 인본주의와 세속주의,향락주의,배금주의,소비주의로 사람들의 영혼들을 주님께로부터 멀어지게 하는 악의 세력들을 몰아내고, 잃어버린 예수님의 실질적인 권위를, 강력한 통치력의 쇠지팡이 권위를 찾아 드리고 있다는 의미로 해석하면 된다.
연중34주 월요일제1독서(묵시14,1~3.4ㄴ~5)
"어린양이 시온 산 위에 서 계셨습니다.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1)
그리스도의 재림 직전에 있을 7년 대환난을 다루고 있는 내용(묵시록 12장과 13장)과 부조화를 이루는 듯한 내용들이 묵시록 14장의 초두에 등장한다. 묵시록 14장에서는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의 영광을 노래하는 내용이 제일 먼저 등장한다(묵시록14,1~5). 그러나 이와같은 의외의 도입은 묵시록 6장 17절에서 '그분들의 진노가 드러나는 중대한 날이 닥쳐왔는데, 누가 견디어 낼 수 있겠느냐?'라고 물은 후, 묵시록 7장 1~17절에서 인장을 받은 십사만 사천 명을 묘사하고,그들의 영광을 노래하는 패턴의 반복이다.
즉 사도 요한은 이와 동일한 패턴으로 묵시록 12장, 13장에서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과 두 짐승의 교회에 대한 핍박을 묘사한 후, 14장에서 그토록 철저한 사탄의 핍박 가운데 하느님께서 어떻게 당신의 교회를 보호하시는지 분명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묵시록을 일관되게 관통하는 사도 요한의 관심은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교회는 영원히 승리한다는 것이다.
묵시록 14장은 하느님의 인장으로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명이 시온산에서 부르는 노래를 다룬 1~5절, 세 천사가 전하는 대바빌론의 멸망 및 우상 숭배자들에 대한 진노의 심판 경고를 다룬 6~13절, 또 다른 세 천사가 보여주는 그리스도와 천사에 의한 마지막 수확(추수)과 심판을 다룬 14~20절로 구분한다.
본문에서 '어린양'으로 번역된 '토 아르니온'(to arnion; the Lamb)은 묵시록 13장 11절에서 '어린양'으로 번역된 '아르니오'(arnio) 즉 '땅에서 나온 뿔이 둘인 짐승'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본문에 언급된 어린양은 명백히 묵시록 5장 6절에서 '살해된 것처럼 보이는' 바로 그 어린양, 즉 십자가상에서 죽으시고 부활 승천하심으로써 사탄에 대한 승리를 쟁취하신 바로 그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시라는 점은 '아르니온'(arnion) 앞에 정관사 '토'(to)가 선행하고 있다는 점 뿐 아니라, 그가 서있는(헤스토스; hestos; stood) 곳이 바닷가 모래 위가 아닌(묵시록12,18), 시온산이라는 점에서 더욱 분명하게 입증된다.
'시온산'('토 오로스 시온'; to oros Sion)은 본래 예루살렘 동남쪽 산등성이 즉 키드론과 티로페이온(tyropeion) 골짜기 사이에 솟아 있는 봉우리를 가리키지만, 솔로몬이 거기에 성전을 세우고 예루살렘 성을 지배해 온 후로는 예루살렘 도성이 있는 곳을 지칭하는 명칭이 되었으며, 상징적으로는 하느님께서 계신 곳을 나타낸다.(시편2,6; 50,2). 따라서 구약의 묵시 문학의 전통 속에서 이것을 새 예루살렘의 상징으로 이해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요엘3,5; 이사24,23; 미카4,7). 여기서도 사도 요한은 승리하신 어린 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새 하늘과 새 땅, 곧 새 예루살렘에 서 있는 종말론적인 모습을 목격했던 것이다(히브12,22).
'그와 함께 십사만 사천 명이 서 있는데' 본문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 명은 묵시록 7장 4절에서 하느님께 속해 있음을 보증하는 인장받은 자들의 수효이다. 이들은 결코 실수 차원에서 언급된 144,000 명이 아니다. 묵시록 7장 5~8절에 의하면, 이 수는 이스라엘 각 지파에서 12,000명씩 뽑혀 12,000 × 12 = 144,000 이 된 것이다.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로부터 산출된 144,000이란 수는 민수기 1장 19~46절에서 전투를 위해 시나이 광야에서 이스라엘 백성을 계수한 것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이스라엘 백성의 수가 도합 603,550 명으로, 본문에 언급된 144,000 명과는 현격한 차이를 이룬다.
아울러 묵시록 7장 5~8절에 언급된 열두 지파에서 뽑힌 각각의 수는 12,000 명으로 모두 통일되어 있는데, 이것은 사도 요한이 특별히 정한 의미를 전달해 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만든 상징적인 수라는 점을 분명하게 드런내다. 실제로 144,000 은 12 × 12 ×1000 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것은 구약의 백성(12)과 그 성취로서의 신약의 백성(12)의 수를 곱하고, 거기에 완전성과 무한성을 나타내는 수(1000)를 곱한 것으로서, 전체 하느님의 백성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것은 묵시록 7장 9절의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와 분리되지 않는다. 사도 요한은 144,000이라는 '무제한의 제한'의 수를 통해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가 내포한 동일한 개념, 즉 전체로서의 하느님의 교회를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말하자면, 묵시록 14장 1절에서 이들은 승리한 천상 교회의 상징 곧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을 뜻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묵시록 14장 1절에 언급된 144,000은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과 각각 세말에 맹위를 떨칠 적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를 상징하는 두 짐승의 악랄하고도 흉포한 핍박에도 불구하고, 종국적으로 하느님의 교회가 승리함을 분명하게 천명한다. 하느님의 교회는 종국적으로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새 하늘과 새 땅, 새 예루살렘에 서고야 마는 것이다.
'그들의 이마에는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었습니다' 본문과 관련된 묵시록 7장 3절, 4절은 '우리가 우리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장을 찍을 때까지 땅도 바다도 나무도 해치지 마라. 나는 인장을 받은 이들의 수가 십사만 사천 명이라고 들었습니다'라고 언급한다. 따라서 거기에 언급된 하느님의 종들의 이마에 찍힌 인장은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다.
히브리 관념에 의하면, 본문에서 '이름'으로 번역한 '오노마'(onoma)는 존재와 인격이란 의미를 창출한다.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십사만 사천명은 창조주 하느님과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존재와 인격에 동참한 자들, 곧 그로 말미암아 구속받은 자들이다(묵시록14,3). '적혀'로 번역된 '게그람메논'(gegrammenon; written)은 '기록하다'라는 뜻을 지닌 '그라포'(grapho)의 수동태 완료 분사이다. 여기서 수동태는 하느님의 백성이 자력으로 스스로 인을 친 것이 아니라, 창조주 하느님께서 구속주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을 보증으로 해서 그들에게 인(印)을 치셨음을 암시한다. 그리고 완료 시제가 사용된 것은 과거에 이루어진 이와같은 인장 받음의 효력이 소멸되지 않고 계속 유지될 것을 명백하게 보여준다.
그런데 묵시록 7장 2절을 보면, 직접적으로 하느님의 인장을 가진 주체가 천사임에 틀림없다. 그러나 이 천사가 궁극적으로 하느님의 권위에 순명하고, 그분의 권위를 대행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십사만 사천명, 곧 천상의 승리한 교회는 궁극적으로 하느님에 의해 인장을 받은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하다.
본절에서 '있었습니다'로 번역된 '에쿠사이'(echusai)는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 have)의 현재 분사형이란 점 역시, 천상의 승리한 교회가 어린양과 하느님의 이름을 현재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낸다. 어린양의 이름과 하느님의 이름을 받은 십사만 사천명과 짐승의 표를 받고 그에게 경배하는 땅에 머무는 자들의 운명은 완전히 상반되게 갈라진다(묵시13,16.17).
즉 이마에 어린양의 이름과 그 아버지의 이름이 적혀 있는 십사만 사천명은 창조주 하느님과 구속주 어린양의 소유로서 시온산 위에 서 있지만, 오른손이나 이마에 짐승의 표를 받은 자들은 거룩한 천사들과 어린양 앞에서 불과 유황으로 고통을 받는다(묵시14.10).
제34주간 화요일 제1독서(묵시14,14~19)
"흰구름이 있고 그 구름 위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셨는데,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14)
새 성경은 '흰 구름'과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신 구름'이 분리된 별개의 구름을 지칭하듯 번역했지만, 원문에는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신 '구름' (nephelen) 앞에 정관사 '텐'(ten)이 동반되어 나온다. 그러므로 '흰 구름 그 위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신 것이다. 그리고 '앉아 계셨는데'로 번역된 '카테메논'(kathemenon)는 '자리에 앉다','좌정하다' 라는 뜻을 지닌 '카테마이'(kathemai)의 현재 분사로서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앉아 계신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그가 앉아 있는 '흰 구름'(nephele leuke; 네펠레 류케)이나 '사람의 아들과 같은 분'은 '사람의 아들 같은 이가 하늘의 구름을 타고 나타나 연로하신 분께 가자 그분 앞으로 인도되었다. 그분께 통치권과 영광과 나라가 주어져 모든 민족들과 나라들, 언어가 다른 모든 사람들이 그를 섬기게 되었다. 그의 통치는 영원한 통치로서 사라지지 않고 그의 나라는 멸망하지 않는다'(다니 7,13~14)는 다니엘의 예언과 관련된다. 그렇다면, 본문에 언급된 '사람의 아들 같은 분'(homoin hyon anthropu)는 틀림없이 예수 그리스도를 지칭한다.
실제로 묵시록 1장 13절에서도 사도 요한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곧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면모를 소개하면서 '그 등잔대 한가운데에 사람의 아들 같은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께서는 발까지 내려오는 긴 옷을 입고 가슴에는 금 띠를 두르고 계셨습니다'라고 묘사한 바 있다. 실제로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공생활을 하시는 동안 자신을 '사람의 아들'(인자)로 소개하셨다.
'인자'(人子) 라는 표현은 예수 그리스도의 지상에서의 삶(인생)을 강조하는 말이다. 그런데 이것은 단순히 예수님께서 사람에게서 태어났다는 의미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인자(人子)로 소개하심으로서 자신이 바로 다니엘이 예언한 '사람의 아들 같은 이'임을 천명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공생활 기간 동안 스스로 하느님의 아들이시며 인류의 메시아라는 사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시기 보다는, 이 칭호로서 당신 자신이 바로 하느님이시며 인류의 구원을 위해 오신 분임을 드러내신 것이다.
'머리에는 금관을 쓰고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습니다' 사도 요한의 환시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는 금관이 있었다. 여기에서 '쓰고'로 번역된 '에콘'(echon)은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 분사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머리에 계속해서 얹혀 있는 금관의 면모를 더욱 생생하게 부각시킨다. 금관(스테파논 크뤼순; stephanon chrysun; a crown of gold)에는 통치와 왕권, 그리고 승리의 개념이 함축되어 있다. 이것은 종말에 심판주로 재림하실 예수 그리스도의 면모를 더욱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 머리에 쓰고 계신 이 금관은 묵시록 9장 7절에서 지하에서 올라온 메뚜기가 그 머리에 쓰고 있던 것을 연상시킨다. '머리에는 금관 같은 것을 쓰고 있었습니다' 이것은 곧 메뚜기가 예수 그리스도를 모방한 존재로서 거짓 그 자체임을 분명하게 드러낸다(요한8,44). 즉 메뚜기(황충)가 '금관 같은 것'을 쓰고 있는 반면에, 진정한 승리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금관을 쓰고 계신 것이다.
한편, 승리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머리에 금관을 쓰고 계시지만, 동시에 손에는 날카로운 낫을 들고 계셨다. 본문에서 '낫'으로 번역된 '드레파논'(drepanon)은 본래 '뜯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드레포'(drepo)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나뭇가지를 치거나 풀이나 낟알을 베는 데 사용하는 농기구이다(신명16,9; 이사18,5). 그런데 신약 성경에서는 본장에서와 마르코 복음 4장 29절의 '곡식이 익으면 그 사람은 곧 낫을 댄다. 수학 때가 되었기 때문이다'는 언급에서만 등장한다. '날카로운'으로 번역된 '옥쉬'(oksy)는 '날카로운'(sharp)이라는 뜻을 지닌 형용사로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소유하고 계신 낫이 시퍼렇게 날이 선 매우 날카로운 것임을 선명하게 부각시킨다.
여기서 특별히 이 표현을 사용한 것은 그리스도께서 수행하시는 최후의 심판이 신속하고 엄중하게 이루어질 것임을 암시한다. 종말의 심판을 추수(수확)와 관련시키는 이러한 상징적 묘사는 요한 복음 4장 35절과 마태오 복음 9장 37~38절에도 발견된다. '그는 불에 대한 권한을 지닌 천사였습니다' '그 날카로운 낫을 대어 땅의 포도나무에서 포도송이들을 거두어 들이십시오. 포도가 다 익었습니다' (18)
본문에 언급된 '불'(투 퓌로스; tu pyros)에 대한 권한을 지닌 천사는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과 관련된다. 왜냐하면, 여기서 '불'은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마태18,8; 루카9,54; 2테살1,7).
한편, 종말론적인 하느님의 심판을 상징하는 이 천사는 묵시록 8장 3~5절에서 '향로를 가져다가 제단의 숯불을 가득 담아 땅에 던지는' 천사를 연상시킨다. 또한 여기서 '거두어 들이십시오'로 번역된 '트뤼게손'(trygeson)은 '따다','모으다'라는 뜻을 지닌 '트뤼가오'(trygao)의 부정 과거 명령형이다. 그리고 '익었습니다'로 번역된 '에크마산'(ekmasan) 역시 '성숙해지다','절정에 다다르다'라는 뜻을 지닌 '아크마조'(akmazo)의 부정 과거이다.
이것은 포도송이가 이미 익었기 떄문에, 즉 죄인들의 죄가 절정에 다다랐기 때문에 빨리 거두어야만 한다는 매우 시급하면서도 준엄한 뉘앙스를 함축한다. 여기서 '포도송이'로 번역된 '투스 보트뤼아스'(tus botryas)는 '보트뤼스'(botrys)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짐승과 그의 우상에게 경배하고, 이마나 손에 표를 받은 자들이 '하느님의 분노의 술을 마실 것이다. 하느님의 진노의 잔에 물을 섞지 않고 부은 술이다'는 묵시록 14장 10절의 언급과 밀접하게 관련된다(묵시14,19.20). 따라서 포도 추수에 대한 천사의 명령은 땅에 거주하는 악한 세력들에 대한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을 상징하는 것이 분명하다.
'하느님의 분노의 큰 포도확에다 던져 넣었습니다' 여기서 '큰'이라는 표현이 나오는 것은 하느님의 진노가 그만큼 크며, 심판받을 악인이 그만큼 많다는 것을 보여준다.
제34주간 수요일 제1독서(묵시1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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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요한은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이 나타난 것을 보았습니다. 일곱 천사가 마지막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1~3ㄱ) 요한 묵시록의 핵심 내용은 한마디로 대종말의 전개 과정을 보여주는 묵시이다. 이것은 묵시록의 거의 대부분의 분량에 해당하는 묵시록 4장1절에서 22장 5절에 기록되어 있다. 그 가운데 묵시록 4장에서 18장은 재림 이전의 세말의 대환난을 다루고, 19장 1절에서 22장 5절은 재림 이후의 심판 및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다룬다. 한편, 묵시록 4장에서 18장은 대환난 관련 묵시들을 일곱 봉인(묵시 6장,8장), 일곱 나팔(묵시 8장,9장,11장), 일곱 대접 재앙(묵시16장) 등 삼대 칠중 재앙과 7년 대환난(묵시 12장 5절,14절; 7년 대환난의 전(前)삼년 반/ 묵시록 13장 5절 ; 7년 대환난의 후(後)삼년 반)이라는 두 가지 관점 내지 양식으로 제시하고 있다. 크게 보자면, 묵시록 4장에서 18장 전체가 삼대 칠중 재앙 기사들이고, 그 사이인 묵시록 12장 ~14장에 7년 대환난 묵시들이 중간 계시 형태로 삽입되어 있다. 묵시록 15장은 이러한 7년 대환난 관련 묵시가 끝나고, 묵시록 15장과 16장에 걸쳐 이어지는 세번 째 칠중 재앙인 일곱 대접 재앙 기사의 전반부이다. 여기에는 일곱 대접 재앙의 개시 직전의 준비 상황이 기록되어 있다. 일곱 대접 재앙은 이제 일곱 봉인 환시와 일곱 나팔 환시에서 시작되었던 하느님의 종말론적 심판이 마무리되는 마지막 심판임을 보여준다. 본문에서 '가지고 있었는데'로 번역된 '에콘타스'(echontas)는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 분사로 일곱 천사가 일곱 재앙을 가지고 있는 모습을 생생하게 드러내는 한편, 사도 요한이 목격한 하늘의 '크고 놀라운 다른 표징'이 꾸며낸 이야기나 상상의 산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더욱 실감나게 나타낸다.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 '하느님의 분노'로 번역된 '호 튀모스 투 테우'(ho thymos tu theu; the wrath of God)는 묵시록 14장 10절과 19절에도 나오는데, 거기서 하느님의 분노는 포도주 잔과 포도 확과 짝을 이루어 비유적으로 등장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것으로 하느님의 분노가 끝나게 될 것입니다'라는 본문의 언급은 '마지막 일곱 재앙'에 대한 단순한 부연이 아니다. 왜냐하면, 본문에서 '끝나게 될 것입니다'로 번역된 '에텔레스테'(etelesthe)는 '이루다', '성취하다', '채우다', '충만하다'라는 뜻을 지닌 '텔레오'(teleo)의예언적 부정 과거이기 때문이다. 즉 이것은 향후 쏟아질 일곱 재앙이 하느님의 분노를 종식시킨다는 의미 이전에 마지막 일곱 재앙 안에 하느님의 분노가 가득히, 충만하게, 완전하게 담겨 있다는 의미이다. 다시 말해서 본문에 언급된 일곱 재앙이 마지막 재앙인 까닭은 일곱 재앙 안에 하느님의 분노가 충만하게 담겨져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 일곱 재앙이, 악마와 짐승과 거짓 예언자와 그 이름이 생명의 책에 기록되지 않은 사람들은 모두 불 못에 던져지는 하느님의 최후의 심판으로 묘사되고 있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묵시록19,20; 20,10.15). 이러한 견지에서 본절에 언급된 '일곱'(헵타; hepta) 재앙은 과거 하느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내린 '일곱 배나 더한 재앙'(레위 26,21)의 이미지와 밀접하게 관련된다. '7'이란 숫자가 '완전'을 상징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이것은 하느님께서 말씀하시는 진노의 철저함과 극렬함을 넘어 완전함으로 나아간다. 이처럼 이제 보여질 일곱 재앙(묵시 16장)이 완전한 재앙이라면, 이것이 마지막 재앙인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나는 또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 유리 바다 위에는 짐승과 그 상과 그 이름을 뜻하는 숫자를 무찌르고 승리한 이들이 서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의 수금을 들고, 하느님의 종 모세와 어린양의 노래를 부르고 있었습니다." (2~3ㄱ) 구문상 묵시록 15장 1절과 직접 연결 되고 있는 것은 묵시록 15장 2절이 아니라 일곱 재앙이 쏟아질 것을 서론적으로 언급하고 있는 묵시록 15장 5절이다. 그렇다면, 묵시록 15장 2~4절은 묵시록 15장 1절과 15장 5~8절 사이에 특별한 신학적 목적을 의도하기 위해 끼어든 삽입으로 간주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삽입 기사의 기능은 무엇인가? 이것은 마치 여섯 봉인과 일곱째 봉인 환시 가운데 삽입된 묵시록 7장 1~17절의 기능과 유사하다. 즉 묵시록 15장 2~4절은 일곱 재앙이 쏟아질 때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은 어떻게 되는지에 대한 대답이다. 그것은 묵시록 12장 1절~14장 20절에 묘사된,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 및 적 그리스도와 거짓 예언자를 상징하는 두 짐승이 주도하는 환난과 핍박에도 불구하고, 하느님의 구원을 받은 자들이 철저한 하느님의 보호를 통해 결국 승리하고, 궁극적으로는 하느님을 찬양한다는 의미를 나타낸다. 따라서 묵시록 15장 2~4절의 삽입 단락은 전술된 여섯 봉인과 일곱째 봉인 및 나팔 재앙 사이에 삽입된 단락이 그러하듯이,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의 운명에 대해 어떠한 악의 세력도 궁극적 의미에서 그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다는 의미를 전달한다. 묵시록이 용과 두 짐승에 의해 환난과 핍박, 또는 유혹을 당하고 있는 자들을 일차 독자로 한다는 점을 감안할 경우, 이러한 삽입 단락은 그들에게 더 없이 용기와 위로를 주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묵시록 15장 2~4절의 삽입 단락은 일곱 대접 재앙 가운데 외치는 교회의 승전보이다. 한편, 묵시록 4장 6절이나 본문에 언급된 '유리 바다'는 홍해 바다를 상징적으로 변환한 것이다. 특히 본문이 홍해 바다와 관련된다는 점은 묵시록 15장 3, 4절에 언급된 찬양이 '하느님의 종 모세의 노래'란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말하자면, 묵시록 15장 2~4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후 불렀던 감격적인 모세의 노래를 상기시킨다(탈출15,1~8). 본문에 언급된 불이 섞인 유리 바다 같은 것은 사탄을 상징하는 붉은 용과 용의 하수인인 두 짐승의 핍박 가운데서 구원받은 하느님의 백성을, 파라오의 학정에서부터 출애굽한 이스라엘에 대입하여 묘사하고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런 견지에서 보면, 과거 이스라엘이 경험했던 홍해 도하 사건은 종말에 하느님의 백성이 경험할 최종적 구원의 예표이다. 따라서 현재 용과 두 짐승의 핍박으로 고난당하고 있는 성도들은 결코 낙담하거나 좌절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과거 이스라엘 백성을 홍해의 위협으로부터 구원하신 하느님께서는 성도들을 최종 구원에 이르도록 이끄시는 바로 그 하느님이시기 때문이다. |
제34주간 목요일 제1독서(묵시18,1~2.21~23; 19,1~3.9ㄱㄴ)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 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18,2)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천사(묵시18,1)가 외치는 내용이다. 특히 '무너졌다. 무너졌다. 대바빌론이!'라는 외침은 이미 묵시록 14장 8절에서 언급된 다른 두 번째 천사가 외쳤던 바로 그것이다. 즉 대바빌론(큰 성 바빌론)의 멸망은 이미 14장 8절에 암시되었고, 16장 19절에 묘사된 일곱째 대접 재앙에서 본격적인 멸망에 이른 것으로 묘사된 것이다.
여기서 '무너졌다'로 번역된 '에페센'(epesen;fallen)은 '무너지다', '떨어지다' 라는 뜻을 지닌 '핍토'(pipto)의 예언적 부정 과거로서, 이것이 이중으로 언급되어 향후 반드시 도래할 대바빌론의 완전한 멸망을 확신에 찬 어조로 드러낸다. 그런데 본문에서 선언된 바빌론의 멸망은 명백히 '무너졌습니다. 무너졌습니다. 바빌론이!'(이사21,9)라고 말한 이사야의 언급과 연관되는 것이다.
그리고 '대'(큰)로 번역된 '메갈레'(megalle)가 '바빌론'과 함께 사용된 용례가 자주 발견되는데, 이것은 그 성의 실제 크기나 위대함을 가리킨다기보다는, 네부카드네자르처럼 스스로를 과대 평가하는 교만함에 대한 상징적 묘사이다. 묵시록에서 바빌론은 문자적 의미의 고대 바빌론이 아니라, 일차적으로 사도 요한 당시 로마 제국을 염두에 둔 표현이다.
따라서 대바빌론은 일차적으로 네부카드네자르와 같이 스스로를 과대평가하는 교만한 로마 제국의 정치 권력을 암시한다고 할 수 있다(1베드5,13). 그럼에도 불구하고 로마 제국이 바빌론의 궁극적인 상징은 아니다. 왜냐하면 묵시록은 단순히 로마의 멸망을 예언하는 예언서가 아니기 때문이다.
사도 요한은 단순히 로마를 거점으로 하여 종교적, 도덕적 타락의 극치를 바빌론으로 형상화한 것일 뿐이다. 다시말해서 사도 요한이 바빌론으로 상징하고 있는 것은 종말에 드러날 '악의 총체'이다. 따라서 대바빌론의 멸망은 곧 사탄에 의해 통제되던 악의 총체가 완전히 무너질 것이라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대바빌론은 '땅의 탕녀들과 역겨운 것들의 어미'(묵시17,5)로서, 이 탕녀에게 내려질 심판은 묵시록 17장에, 그것의 패망은 묵시록 18장에 더욱 확대되어 자세하게 묘사된다. '바빌론의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 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
하느님의 영광을 반사하는 천사는 힘찬 소리로 바빌론의 함락을 선포하고, 그 결과 그곳이 마귀들의 거처와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과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고 언급한다.
묵시록 16장 13절과 14절에서 사도 요한은 '그때에 나는 용의 입과 짐승의 입과 거짓 예언자의 입에서 개구리같이 생긴 더러운 영 셋이 나오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마귀들의 영으로서 표징을 일으키는 자들입니다'고 언급한다.
즉 사도 요한의 어법에서 '더러운 영'과 '마귀들의 영'은 상호 교환이 가능한 표현으로서 '마귀'(다이모니온; daimonion)는 곧 '더러운 영'(프뉴마토스 아카타르투;pneumatos akathartu)과 동격 관계를 형성한다.
따라서 바빌론이 '온갖 더러운 영들의 소굴, 온갖 더러운 새들의 소굴, 더럽고 미움받는 온갖 짐승들의 소굴이 되고 말았다'라는 언급은 '바빌론이 마귀들의 거처가 되었다'라는 언급을 더욱 풍부하게 부연 설명한 것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서 '거처'로 번역된 '카토이케테리온'(katoiketerion)과 세 차례나 '소굴'로 번역된 '퓔라케'(phyllake)는 언어적으로 병행한다.
그런데 '퓔라케'는 단순히 삶의 근거지(dwelling place)나 모이는 곳만이 아니라 '감옥','소굴'이란 부정적 의미도 지닌다(묵시20,7). 이런 의미에 유의할 경우, 본문은 틀림없이 바빌론의 과거의 화려했던 모습과는 대조되는 황폐하고 불결하기 짝이 없는 모습을 부각시킴으로써, 멸망한 바빌론의 참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되고 말았다'로 번역된 '에게네토'(egeneto)는 '발생하다', '일어나다'라는 뜻을 지닌 '기노마이'(ginomai)의 부정 과거로서 이러한 발생을 동적 이미지로 드러낸다.
영적 차원에서 보면, 바빌론은 이미 이전에도 마귀들의 '거처'였지만(에이미; eimi),본문에서는 그것을 마귀들의 거처가 '되고 말았다'(기노마이; ginomai)라고 묘사하여 멸망당한 바빌론의 폐허를 더욱 선명하게 연상시킨다. 그러나 다른 한편, '퓔라케'(phyllake)는 '감시하는 곳' (watching place)이라는 의미도 나타낸다.
이럴 경우, 이것은 하바쿡서 2장 1절의 '나는 내 초소에 서서, 성벽 위에 자리 잡고서 살펴보리라'라는 어구와 병행한다. 즉 반신(半神)적 세력들은 마치 먹이를 기다리는 더러운 새들처럼,멸망해 가는 그들의 파수대를 구축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더럽고 미움 받는'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투 카이 메미세메누'(akathartu kai memisemenu)는 묵시록 17장 4절에 언급된 '손에는 자기가 저지른 불륜의 그 역겹고 더러운 것이 가득 담긴 금잔을 들고 있었습니다'에도 나온다.
여기서 '더러운 것'으로 번역된 '아카타르타'(akathartu; 묵시17,4)는 부정 접두어'아'(a)와 '깨끗한','정결한'이란 뜻을 가진 형용사 '카타로스'(katharos)에서 파생한 명사 '카타로테스'(katharotes)의 합성어로서 탕녀가 자행한 불륜 때문에 역겹고 더러운 것들이 금잔 속에 담겨져 있음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불륜의 역겹고 더러운 것'이란 우상 숭배로 인한 도덕적, 영적 타락의 일체를 형상화한 것이다(마태23,25참조).
그리고 신명기 14장 12~20절에는 먹을 수 없는 부정한 새의 목록이 언급되고 있으며, 구약 성경은 도처에서 동물과 사람의 썩은 시체를 먹이로 찾는 새들에 대해 언급하고 있으므로(신명 28,26; 1열왕14,11; 21,24; 예레7,33; 15,3; 16,4; 19,7; 34,20; 에제29,5; 32,4),'온갖 더러운 새들'은 이러한 새들을 염두에 둔 표현이며, 앞에 나온 '마귀들','더러운 영들'등 악령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제34주간 금요일 제1독서(묵시20,1~4.11~21,2)
"나는 또 어좌들을 보았는데, 그 위에 앉은 이들에게 심판할 권한이 주어졌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그 짐승이나 그의 상에 경배하지도 않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않은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살아서 그리스도와 함께 천 년 동안 다스렸습니다." (20,4)
여기서 하느님과 예수 그리스도께서 어좌에 좌정하시고 다스리시는 것과 같이 임금으로서 심판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은 존재들은 바로 종말론적인 왕적 통치를 수행하고 있는 하느님의 백성들이다.
이것은 전투하는 지상 교회(신전지회; 神戰之會; Ecclesia militans; the military church) 본연의 모습니다. 이 지상에서는 이들이 세속 권력자들의 핌박에 고초를 당하며, 심판당하는 피의자의 신분을 지니고 있지만, 이러한 일시적인 곤경과 환난들을 이 땅에서 당하면서도 이들의 시선이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를 바라본다.
그리고는 이들도 하느님과 어린양이 앉은 것과 같이 같은 어좌에 앉아 이제는 자신을 심판했던 권세자들을 심판하는 재판장의 입장에 선다. 이 놀라운 역전극은 오늘날 사탄의 유혹과 핍박에 노출된, 전투하는 지상 교회가 지니고 있는 엄청난 영적 실존인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목이 잘린 이들의 영혼'은 '순교자들'을 말하며, 이들은 동시에 '그 짐승이나 그의 상에 경배하지도 않고 이마와 손에 표를 받지도 않은 사람들'과 동일한 신실한 하느님의 백성 모두를(묵시13,15; 13,1~18; 19,20참조) 포괄한다.
한편, 묵시록 20장 4절에서는 예수님에 대한 증언과 하느님의 말씀 때문에 죽임을 당한 모든 하느님의 백성들의 궁극적인 모습을 묘사한다.
여기서 '살아나서'에 해당하는 '에제산'(ezesan; they lived; they came to life)은 육체적 부활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이 '에제산'(ezesan)은 '살다','생존하다'라는 뜻을 지닌 '자오'(zao)의 부정 과거 능동태로서, 역사상 두 짐승에 의해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지만, 실상은 그들이 살아있다는 놀라운 선언이다.
죽음의 힘을 무력화시킴 그리스도와 일치한 성도들에게 있어서 육체적 죽음은 실제로 아무런 의미가 없기에, 그들은 육은 죽었으나 오히려 영은 하늘에 살아 있다는 뜻이다. 마지막 날에는 하느님의 백성을 죽음으로 내몰았던 짐승과 거짓 예언자는 '산 채로' 유황이 타오르는 불못에 던져지지만(묵시19,20), 그들에 의해 죽임을 당했던 하느님의 백성은 '살아나서' 하늘 어좌에 앉아 있게 된다는 말인 것이다.
여기서 '다스렸습니다'에 해당하는 '에바실류산'(ebasileusan; reigned)은 '다스리다','통치하다'라는 뜻을 지닌 '바실류오'(basileuo)의 부정 과거 능동태로서 모든 하느님의 백성이 임금으로 통치할 것임을 보여준다.
이러한 그리스도와 더불어 왕 노릇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통해 그의 백성을 피로 사서 하느님 아버지께 드린 순간부터 이미 시작되어 주님의 재림 시간까지 계속 되는데, 그것이 천년이라는 상징적인 숫자로 나타나는 것이다.
1000은 완전한 통치를 상징하는 수인 10의 세 번 곱해진 것이고, 통치수 10과 하느님의 수 3이 결부된 것이다. 사도 요한은 예수 그리스도의 강생(육화)와 재림 사이의 시간, 즉 교회의 시간을 하느님의 백성이 임금으로 통치하는 천년 왕국(천년 통치)으로 표헌했다.
*천년 왕국(통치)에 대한 몇 가지 설이 있는데, 그중에 무천년설(Amillennialism)을 소개한다. 이것은 앞에서도 설명했지만, '천년'을 문자적으로가 아니고, 예수님의 강생(육화)부터 재림까지의 전(全) 기간을 상징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다.
*무천년설(천년을 숫자로 계산하지 않기 때문에 無天年說이라고 한다)에 의한 종말 사건의 순서
1) 천년 왕국(통치)의 기간; 이 기간동안 이 세상 권세를 쥐었던 사탄이 결박되어 지하에 갇히고, (묵시20,3), 첫 번째 부활에 참여한 자, 즉 물과 성령으로 세례을 받아 거듭난(새로난) 자들이 그리스도와 함께 영적으로 왕 노릇한다(묵시5,10).
2) 대환난; 천년 왕국(통치)이 끝날 무렵, 성경에 묘사된 7년 대환난이 일어난다. 이같은 일이 일어나는 것은 저승에 갇혀 있던 사탄이 잠시 풀려 난 결과이다(묵시20,3). 이때 거짓 예언자와 적 그리스도의 출현이 있고, 성도들은 환난을 당하며, 일부는 배교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는 하르마게돈 전쟁, 곧 곡과 마곡의 전쟁을 결정적 기점으로 해서 끝을 맺고, 사탄은 영원한 형벌에 처해진다.
3) 재림; 거의 끝이 없이 무한정 이어질 것처럼 보이던 천년 왕국(통치)은 성도의 구원을 위한 그리스도의 재림으로 끝을 맺는다.
4) 부활과 성도의 들어올림;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고 신앙의 정절을 꾸준히 지켜온 성도는 생명의 부활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로 영접하지 않은 불신앙자들은 심판의 부활을 한다. 그후 성도는 신령한 몸을 입고 공중으로 들려 올라가 재림하시는 그리스도를 영접한다(1테살4,17).
5) 마지막 심판; 성도들이 공중에 들려 올려진 상태에서 '생명의 책에 기록되어 있지 않은 사람' (부활한 악인들과 생존한 악인들)이 형벌을 받아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진다. 이것을 가리켜 '두 번째 죽음"이라고 한다(묵시20,14). 여기에 던져진 자는 영원한 벌을 받는다.
6) 새 하늘과 새 땅; 악인들이 불 못에 던져진 후, 이 땅은 새롭게 변화되어 '새 하늘과 새 땅', 즉 이제까지와는 전혀 다른 새로운 세상이 되고, 성도들은 그리스도와 더불어 여기서 영원토록 산다(묵시21장).
성 바르톨로메오 사도 축일 제1독서(묵시21,9ㄴ~14)
"그 도성은 하느님의 영광으로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 같았고 수정처럼 맑은 벽옥 같았습니다. (11) 그 도성에는 크고 높은 성벽과 열두 성문이 있었습니다.
그 열두 성문에는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었는데,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 이름이 하나씩 적혀 있었습니다." (12)
묵시록 21장 11절부터 14절까지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 도성의 아름다운 모습과 열두 성문과 열두 초석에 대하여 묘사한다. 특히 묵시록 21장 11절은 새 예루살렘의 시각적 이미지를 사용하여 아름답게 표현한다.
'있었습니다'로 번역된 '에쿠산'(echusan; having)은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분사로 묵시록 21장 10절에 언급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관련된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을 가지고 있다. 여기서 '영광'으로 번역된 '텐 독산'(ten doksan; the glory)은 '에쿠산'(echusan)의 목적어인데, 이것의 원형 '호 독사'(ho doksa)는 '하느님의 거룩한 임재' 곧 '셰키나'(shekinah)를 뜻한다.
'그때 영이 나를 들어 올려 안뜰로 데리고 가셨는데, 주님의 집이 주님의 영광으로 가득 차 있었다.'(에제43,5). 새 성경에는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지만, 원문에는 '하느님의 영광'에 해당하는 '텐 독산 투 테우'(ten doksan tu theu) 다음에 바로 '광채'로 번역된 '호 포스테르'(ho poster)가 언급되어 있다. 여기서 광채는 하느님의 영광을 달리 표현한 것으로 양자가 동격 관계임을 암시한다(이사60,1.2.19).
한편 '광채'에 해당하는 '포스테르'(poster)는 신약 성경에서 73회 사용되어 빛 자체를 나타내는 '포스'(pos)와는 달리, 외부의 빛을 투영하는 것을 나타내는 단어로 신약 성경에서 2회(필리2,15; 묵시21,11) 밖에 쓰이지 않았다. 말하자면, 하늘에서 내려오는 새 예루살렘은 스스로 광채를 발하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의 영광을 받아 광채를 반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새 예루살렘이 투사하는 광채는 '매우 값진 보석'과 '수정처럼 맑은 벽옥'이 발하는 광채(빛) 두 가지로 비유되고 있다.
'크고 높은 성벽이 있었습니다' '있었습니다'로 번역된 '에쿠사'(echusa)는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분사로 묵시록 21장 10절에 언급된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관련됨을 보여준다. 즉 거룩한 도성 새 예루살렘은 하느님의 영광을 지니고 있을(묵시21,11)뿐만 아니라 크고 높은 성벽도 가지고 있다. '성벽'으로 번역된 '테이코스'(teichos)는 '성곽'을 지칭하는데, 이와 같이 '크고 높은 성벽'은 묵시록 21장 13~20절에서 더 자세하게 설명된다.
그런데 성벽을 수식하는 '크고 높은'(mega kai hypsellon; 메가 카이 휩셀론; great and high) 이라는 형용사는 묵시록 21장 10절에서 사도 요한이 성령의 압도적인 감동 속에서 올라갔었던 '산'을 묘사하는 데 적용되었던 바로 그 표현이다. 이것은 일차적으로는 문자적으로 '크고 높다'는 것을 의미하겠지만, 하느님의 천주성(神性)과 관련된 묵시적 의미를 함축하고 있는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실제로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규모가 묵시록 21장 16절과 17절에 묘사되고 있지만, 본문에 언급된 '크고 높은 성벽'은 하느님의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얼마나 견고한지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있다.즉 '크고 높은 성벽'은 새 도성 예루살렘이 완전하고 완결(완성)되어졌으며, 안전하고 웅장하다는 사실을 내포하고 있다.
따라서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이 위험이나 불안, 위협이나 침략, 부정하고 불순한 세력들에 의해 노출된 것으로 이해해서는 안된다. 이미 악은 두 번째 죽음 곧 불못에 던져졌다(묵시19,20; 20,10; 20,14-15).
이것은 이사야서의 예언을 연상시킨다. '다시는 너의 땅 안에서 폭력이라는 말이, 너의 영토 안에서
파멸과 파괴라는 말이 들리지 않으리라. 너는 너의 성벽을 '구원'이라, 너의 성문을 '찬미'라 부르리라.'(이사60,18)
'열두 성문이 ~ 열두 천사가 지키고 있는데 ~열두 지파 이름이'(12) '있는데'로 번역된 '에쿠사'(echusa)는 '소유하다'라는 뜻을 지닌 '에코'(echo)의 현재분사로 전체적으로는 묵시록 21장 10절에 언급된 '하늘로부터 하느님에게서 내려오는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과 연결되지만, 문맥상으로는 앞서 언급된 '성벽'(teichos; 테이코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이 좋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의 성벽은 '열두 성문'(퓔로나스 도데카; pyllonas dodeka)을 가지고 있다. 묵시록 21장 13절은 '동쪽에 성문이 셋, 북쪽에 성문이 셋, 남쪽에 성문이 셋, 서쪽에 성문이 셋'의 이 열두 성문이 균형적으로 분배되어 있음을 보여 준다. 땅의 임금들이 자기들의 보화를 가지고 이 문을 통해 들어오며(묵시21,24), 그것은 항상 닫히지 않고 열려져 있다(묵시21,25).
따라서 이 성문 역시 성벽과 같이 단순히 외적의 방어와 적대 세력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고안되고 제작된 문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 성문에는 열두 천사('앙겔루스 도데카'; anggellus dodeka)가 있다. 이 천사들은 열두 성문 각각을 지키고 있는 하느님의 천사이다.
'예루살렘아, 너의 성벽 위에 내가 파수꾼을 세웠다. 그들은 낮이고 밤이고 잠시도 잠잠하지 않으리라. 주님의 기억을 일깨우는 자들아 너희는 쉬지 마라.'(이사62,6)
이들은 악한 세력들과 싸우기 위해 성문을 지키는 천사들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모든 이들이 다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서 등장한 것이다. 거기에는 오직 어린양의 생명의 책에 그 이름이 기록된 이들만이 들어갈 수 있다(묵시21,27참조).
이와 같은 점은 그 성문 들위에 적힌 것이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도데카 필론'; dodeka pyllon)의 이름이라는 사실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 여기서 언급된 '이스라엘 자손들의 열두 지파'의 의미는 이미 묵시록 7장 5~8절에서 언급된 것과 깊이 관련된다.
즉 각 지파에 속하는 일만 이천 명씩 도합 십사만 사천 명, 곧 '아무도 수를 셀 수 없을 만큼 큰 무리'(묵시7,9)만이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에 입성한다. 그런 의미에서 '성문'과 '천사'와 '지파'가 각각 '열둘'인 것은 명백히 이 도성 예루살렘이 승리한 하느님의 백성들만을 위한 도시임을 시사한다.
그런데 여기서 더 주목할 것은 이러한 사도 요한의 묘사가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와 밀접하게 병행된다는 점이다(에제48,30~34).
에제키엘 예언자는 종말에 이스라엘의 모든 지파가 각자의 땅을 분배할 때 자신들에게 할당된 충분한 상속 재산(기업)을 취하며, 회복된 도성 예루살렘으로 출입할 수 있는 각 지파 소유의 대문을 가지게 될 것이라고 선포한다.
이것은 종말에 하느님의 백성 전체가 한 명의 예외도 없이 하느님의 임재와 현존 가운데 들어갈 동등한 권리와 축복을 누릴 것이라는 원대한 비전인 것이다.
사도 요한은 에제키엘 예언자의 이러한 종말론적 비전을, 자신이 본 거룩한 도성 예루살렘 도래의 환시가 내포하고 있는 명확한 의미를 전달하기 위해 자유롭게 끌어 들인다. 이로써 사도 요한은 하느님과 그의 모든 백성들이 영광스럽고 놀라운 완전한 종말론적 친교와 일치 가운데 들어갈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제34주간 토요일 제1독서(묵시22,1~7)
"주님의 천사가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나 요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 그 강은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나와, 도성의 거리 한 가운데를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1~2)
묵시록 19장 1절~22장 5절은 대종말을 핵심 내용으로 하는 예언 중에서도 예수님의 재림과 어좌 심판 및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로 이어지는, 예수님 재림 이후에 이루어질 일들에 대한 예언이다.
그 가운데서도 묵시록 21장 1절~22장 5절은 현 우주와 역사의 종결이요, 영원히 지속될 천국 역사의 시작이기도 한, 대종말 사건의 절정인 영원한 새 하늘과 새 땅의 도래(묵시21,1~8)와 새 하늘과 새 땅의 중심이 될 예루살렘의 황홀한 정경(묵시21,9~27), 그리고 새 예루살렘 중심을 관통하는 생명수의 강의 정경(묵시22,1~5)으로 점차 그 범위를 좁혀가면서 모든 성도들이 그토록 대망하는 천국의 공간적 배경을 묘사한다.
'주님의 천사가 ~ 나 요한에게 보여 주었습니다'에서 '~ 보여 주었습니다'로 번역된 '에데익센'(edeiksen)은 '지시하다','설명하다','지적하다'라는 뜻을 지닌 '데익뉘오'(deiknyo)의 3인칭 단수 부정 과거 능동태로서 사도 요한에게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을 보여준 존재가 묵시록 21장 9절에 언급된 '마지막 일곱 재앙이 가득 담긴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가운데 하나'임을 암시한다. 그런데 그가 사도 요한에게 보여준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은 이미 묵시록 7장 17절과 묵시록 21장 6절, 22장 17절에서도 언급되고 있다.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 어린양이 목자처럼 그들을 돌보시고 생명의 샘으로 그들을 이끌어 주실 것이며'(묵시7,17) '나는 알파이며 오메가이고 시작이며 마침이다. 나는 목마른 사람에게 생명의 샘에서 솟는 물을 거져 주겠다'(묵시21,6) '원하는 사람은 생명수를 거저 받아라'(묵시22,17)
묵시록 7장 17절을 보면, 어린양이 창조주 하느님과 존재론적으로 동등한 분이심을 암시하는 표현이 '어좌 한가운데에 계신'이다. 그런데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께서 목자처럼 하느님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인도하시는데, 인도하시는 최종 목적지가 '생명의 샘'이다. '생명의 샘'으로 번역된 '에피 조에스 페가스 휘다톤; epi zoes pegas hydaton; to living ountains of waters)에서 주목할 것은, '생명'이란 뜻을 지닌 '조에스'(zoes)가 어군상 먼저 등장하여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즉 그리스어에서 단어의 어순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이 경우는 '조에스'(zoes)를 '휘다톤'(hydaton) 뒤에 두는 것이 더 일반적임에도 불구하고, 사도 요한은 이것을 서두에 둠으로써 '생명'이란 의미를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이와같은 생명의 샘에 관한 언급은 묵시록의 결론부인 21장 6절, 22장1절,17절에서 다시 등장한다. 그런데 구약 성경의 경우, 이러한 표현은 통상 생명의 근원이신 '하느님 자신'을 가리켰다(시편36,10; 예레2,13;17,13). 따라서 본문에 언급된 생명의 샘(생명수의 강)이란 결국 하느님의직접적인 현존과 임재를 함축하고 있는 것이다. 즉 하느님의 완전한 현존과 임재는 인간의 영적 갈망을 완벽하게 해소하는 것이다. 한편, 새 예루살렘의 모티브는 에덴 동산의 모티브 및 성전 모티브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묵시21,19.20).
묵시록 21장 16절, 22절 등이 새 예루살렘의 성전 모티브와 관련된다면, 묵시록 22장 1절은 명백히 에덴 동산 모티브와 관련된다. 실제로 에덴 동산에도 생명의 샘의 근원이 있었다. '강 하나가 에덴에서 흘러나와 동산을 적시고 그 곳에서 갈라져 네 줄기를 이루었다'(창세2,10). 이와 마찬가지로 수정처럼 빛나는 생명수의 강이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로부터 흘러나온다. 사도 요한은 이같은 방식으로 새 예루살렘이 첫 창조, 곧 에덴 동산의 회복이자 완성임을 분명히 한다.
본문에서 '~로부터'로 번역된 전치사 '에크'(ek)는 기원이나 출처를 나타내는 소유격 지배 전치사로서, 생명수의 강의 근원이 본질이 같으신 창조주 하느님과 구원자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의 어좌(투 트로누; tu thronu; the throne)임을 뚜렷하게 드러낸다. 그런데 에제키엘 예언자는 자신의 환시에서 생명수의 강의 발원을 '주님의 집'(성전)으로 언급한다(에제47,1.2). 즉 에덴 동산에서는 강이 동산 꼭대기에서 흐른다면, 에제키엘 예언자의 환시에서는 성전에서 발원하고, 새 예루살렘에서는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를 그 기원으로 한다.
새 예루살렘이 에덴 동산과 성전의 궁극적 실재이자 종말론적 완성이라는 점은, 그 생명수의 강의 기원이 영원한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성부 하느님과 성자 그리스도에게 있다는 것을 명시적으로 밝힌 본절에서도 분명하게 나타난다. 새 성경에서는 '나와'가 1절에 번역되어 있고, '흐르고 있었습니다'가 2절에 번역되어 있다. 그러나 원문에서는 '나와 ~흐르고 있었습니다'에 해당하는 단어가 두 개의 단어가 아니라 '엑포류오메논'(ekporeuomenon) 하나로 1절에 포함되어 있다.
'엑포류오메논'은 본래 '~로부터'라는 뜻을 지닌 접두어 '에크'(ek)와 '오다', '가다'라는 뜻을 지닌 '포류오마이'(poreuomai)의 합성어로서 주로 액체가 흐르는 것을 나타낸다. 그런데 본절에서는 현재분사로 쓰여 마치 생명수의 강이 하느님과 어린양의 어좌에서 발원하여 계속 흐르고 있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전달한다. 이같은 생명수의 강은 '성령'이나 '불멸에 대한 약속'이나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들에게 주시는 풍성한 삶'을 뜻할 수도 있다. 이런 견해들은 서로 상호 보완적이다. 즉 생명수의 강은 그 모든 것을 아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든 견해들은 궁극적으로 새 예루살렘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된 '하느님 나라의 영원한 생명'이 계속해서 유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드러낸다. 즉 생명수의 강은 묵시록 21장 3절에 언급된 하느님의 약속을 회화적 이미지로 형상화한 것이다.
'도성의 거리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었습니다' 강 이쪽저쪽에는 열두 번 열매를 맺는 생명나무가 있어서 다달이 열매를 내놓습니다' 묵시록 22장 1절에서 '생명수의 강'에 대해 언급한 사도 요한은 이제 2절에서 '생명나무'에 대해 묘사한다. 생명수의 강이 새 예루살렘의 대로 한가운데로 흐르고 있다. 그리고 이 강물이 강 좌우에 있는 생명나무에 생명수를 공급하며, 하느님 나라에 생명력을 충만케 한다는 본 단락의 전반적인 문맥을 살려준다.
한편 에덴 동산의 궁극적인 성취인 새 예루살렘에는 타락한 인간에게 절대 금지되었던 에덴동산에서와는 달리, 결코 생명나무의 열매를 따먹는 것이 금지되지 않는다(창세3,24). 오히려 그것은 대로상에 자리하여 인간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아울러 새 예루살렘에는 첫 창조 당시 에덴 동산에 있었던 '선과 악을 알게 하는 나무'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창세2,9). 따라서 새 예루살렘에는 더 이상 죄가 침입하지 못한다. 즉 새 창조로서 새 예루살렘은 단순히 첫 창조때의 에덴 동산을 회복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이상을 성취한 것이다. 새 예루살렘에서 누릴 풍성한 영적 생명은 '열두 번 열매를 맺으며, 다달이 열매를 내놓는다'는 진술로 더욱 명백해진다.
본절에서 '맺는'과 '내놓습니다'로 번역된 '포이운'(poiun)과 '아포디둔' (apodidun)은 각각 '만들다','행동하다' 라는 뜻을 지닌 '포이에오'(poieo)와 '완수하다','이룩하다'라는 뜻을 지닌 '아포디도미'(apodidomi)의 현재분사로서 생명나무의 열매가 현재 계속해서 열리고 맺히는 것과 같은 뉘앙스를 전달한다. 그리고 생명나무의 열매가 '열두 번' 맺히고, 또는 '열두 가지 열매' (karpous dodeka)로 번역되고 있는데, 이것은 성도들이 새 예루살렘에서 누릴 영적 생명의 풍성함과 다양함을 상징한다.
'그리고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 묵시록 22장 2절은 무엇보다도 에제키엘서 47장 12절과 밀접하게 병행한다. '이 강가 이쪽저쪽에는 온갖 과일나무가 자라는데, 잎도 시들지 않으며 과일도 끊이지 않고 다달이 새 과일을 내놓는다. 이 물이 성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그 과일은 양식이 되고 잎은 약이 된다.'
이 중에서 생명수의 강의 근원에 대해서는 1절에, 그리고 생명나무와 그 열매에 대해서는 2절 상반절에 언급한 사도 요한은, 이제 본문에서 '그 나뭇잎은 민족들을 치료하는 데에 쓰입니다'는 언급으로부터
자신이 본 생명나무 나뭇잎 환시의 의미를 해석한다.
여기서 '치료하는'으로 번역된 '테라페이안'(therapeian)은 '치료하다','봉사하다'라는 뜻을 지닌 '테라퓨오'(therapeuo)에서 파생한 명사로서 목적을 표시하는 목적격 전치사 '에이스'(eis)와 더불어, 생명나무의 나뭇잎 (타 필라; ta phylla; the leaves)이 민족들을 치료하기 위한 용도로 사용되는 것임을 분명하게 밝힌다.
본문에 언급된 치유의 대상은 '민족들'(톤 에트논; ton ethnon; of the nation)은 모든 인류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새 예루살렘의 거주민이 된 구원받은 성도를 가리킨다(묵시21,24). 즉 '민족들을 치료하는 나뭇잎'은 요엘기 1장 14절, 2장 15절에 의하면, '이방인의 개종'을 의미한다.
그러나 사도 요한은 민족들의 회심에 대한 우주론적이며 보편적인 전망을 가지면서도 묵시록 21장 8절, 27절, 22장 15절과 같은 분명한 제한 장치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치료한다는 의미는 어떤 병든 상태를 고쳐준다는 의미가 아니라, 영육간의 건강이 계속 유지되도록 끊임없이 새로운 생명력을 공급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종말의 하느님 나라가 죽음이 다시 발붙이지 못하는 영생의 나라가 될 것임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