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동번역성서
(70)다섯은 망하고 하나는 있고 (묵시17,6-13)
(묵시17,6-13)
6 그리고 내가 보니 그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의 피에 취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여자를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7 그 때 그 천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놀라느냐? 내가이 여자의 비밀과 이 여자를 태우고 다니는,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 달린 그 짐승의 비밀을 말해 주마. 8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그것이 장차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올라 오겠지만 마침내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천지창조 때부터 생명의 책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 짐승이 나타나는 보고 놀랄 것이다.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고 후에야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그 짐승을 보기 때문이다. 9 이제는 지혜로운 이해력이 필요하다.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언덕이며 또 일곱 왕을 가리키기도 한다. 10 그 중의 다섯은 이미 넘어졌고 여섯째는 아직 살아 있으며 마지막 하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왕이 나타나더라도 잠시 동안밖에는 살지 못할 것이다. 11 또 전에 있다가 지금은 없는 그 짐승은 바로 그 여덟 번째 왕이다. 그 왕도 그 일곱 왕들과 동류로서 마침내는 멸망하고야 말 것이다. 12 그리고 네가 본 열 뿔은 열 왕이다. 그들은 아직 나라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그 짐승과 함께 한때 왕노릇할 권세를 받을 것이다. 13 그들은 모두 한 마음이 되어 자기들의 권력과 권세를 그 짐승에게 내어 줄 것이다.
우리는 지금 음녀 바벨론의 심판에 대해서 공부를 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지난 시간에 공부한 대로 음녀는 자주 빛과 붉은 빛의 화려한 옷을 입고 금과 진주와 보석으로 치장을 하고 손에는 금잔을 들고 세상을 미혹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겉으로는 그렇게 화려하고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그 음녀가 들고 있는 금잔 속에는 더러운 것과 가증한 것, 즉 우상 숭배라는 무서운 독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우리가 확인했지요.
하느님께서 17장과 18장에서 요한에게 바로 그 음녀가 받을 심판을 보이고 계신 것입니다. 1절에 보면 분명 그 일곱 대접을 가진 일곱 천사 중 하나가 요한에게 ‘내가 너에게 음녀의 받을 심판을 보이리라’고 말을 합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 6절을 보면 그 음녀가 심판을 받기는커녕 하느님의 백성들의 피와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있는 모습, 오히려 승리자의 모습으로 요한에게 보여 집니다.
(묵시17:6) 6 그리고 내가 보니 그 여자는 성도들의 피와 예수 때문에 순교한 사람들의 피에 취해 있었습니다. 나는 이 여자를 보고 무척 놀랐습니다.
이렇게 요한에게 보여진 음녀는 마치 승리 酒를 마시고 있는 성공적인 모습으로 보여 졌습니다. 그래서 요한은 그 모습을 크게 奇異히 여겼습니다. ‘이게 정말 음녀의 심판이 맞는가?’ ‘겉으로 보기에는 하느님의 백성들이 심판을 받고 있는 것 같고 세상 세력이 오히려 승리의 축배를 들며 우리를 조롱하는 것 같은데 이게 정말 음녀의 심판의 모습인가?’ 요한은 ‘따우마 메가, 크게 기이‘하게 여겼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본문 6절만 보더라도 후 천년 설 자들의 주장은 얼토당토 한 것입니다. 그들은 이 땅은 점점 정화될 것이고, 나아 질 것이고, 결국에는 지상 낙원이 될 것이라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곧 그리스도의 푸른 계절이 올 것이라 굳게 믿습니다. 아닙니다.
그들의 바람은 허황된 꿈일 뿐입니다. 이 땅은 오히려 점점 악인들이 크게 승리하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될 것입니다. 성도들 은 세상과 맞서게 되면 겉으로는 손해보고, 피 흘리고, 지는 모습으로 보여 지게 됩니다. 바로 그 것이 이 땅을 살다 가신 예수 그리스도의 삶이었고 그 삶이 바로 하늘나라의 삶의 원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6절에 성도들을 ‘예수의 증인’ 헬라어로 하면 ‘말튀론 예수스’ ‘예수 그리스도로 인해 죽임을 당한 순교자’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지난시간에 확인한 것처럼 음녀와 그의 세력들이 예수의 증인들의 피에 취해서 거만하게 들고 있는 승리의 축배는 그 자체가 ‘가증하고 더러운 독이 들어있는 독배’이며 결국 그들은 그 금잔에 들어있는 더러운 것과 가증한 것에 취해서 영원한 멸망으로 떨어지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정확하게 깨닫고 있지 못했던 사도 요한은 ‘따우마 메가’ 크게 기이하게 여길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왜 저들이 저렇게 승리자의 모습으로 보이는가?’
그러니까 여러분은 얼마나 복 받은 분들이에요. 사도 요한도 몰랐던 그 성도의 신앙생활의 비밀을 이렇게 명확하게 보고 계시니 사도 요한이 지금 하늘에서 우리를 얼마나 부러워하고 있겠습니까? 계속해서 7절을 보면 천사가 음녀의 당당한 모습을 보고 기이(奇異)히 여기고 있는 요한에게 ‘왜 기이히 여기느냐? 내가 그 비밀을 알려 주마’하고 이야기를 합니다.
(묵시17:7) 7 그 때 그 천사가 나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왜 놀라느냐? 내가이 여자의 비밀과 이 여자를 태우고 다니는, 머리 일곱에 뿔이 열 개 달린 그 짐승의 비밀을 말해 주마.
그런데 그 여자가 타고 있는 짐승의 묘사를 보면 그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졌다고 합니다. 13장에서 바다에서 올라오는 짐승을 공부할 때 일곱 머리는 무엇이며 열 뿔은 무엇인지에 대해 자세하게 다루었었습니다. 오늘 조금 더 부연 설명을 해 드리겠습니다. 9절에 보면 그 일곱 머리가 일곱 산이라고 하고 그 일곱 산은 일곱 왕 이라고 합니다.
(묵시17:9-10) 9 이제는 지혜로운 이해력이 필요하다. 일곱 머리는 그 여자가 타고 앉은 일곱 언덕이며 또 일곱 왕을 가리키기도 한다. 10 그 중의 다섯은 이미 넘어졌고 여섯째는 아직 살아 있으며 마지막 하나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마지막 왕이 나타나더라도 잠시 동안밖에는 살지 못할 것이다.
제가 전에 설명해 드리길 혹자들이 이 ‘일곱 산’이라는 구절 때문에 일곱 머리를 로마라고 주장한다고 했지요? 로마가 원래 일곱 산 위에 세워진 나라이기 때문에 그렇게 추측을 한 것이지요. 그래서 로마는 ‘칠산절’이라는 명절을 절기로 지키기도 했다고 했지요. 그러나 그 해석은 너무 협의 적인 해석입니다.
물론 그 일곱 머리를 로마로 해석하는 것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가시적으로 구체화된 사탄의 대리자들은 역사를 통해 늘 있어왔습니다. 그 중 하나가 ‘로마’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요. 그렇지만 과거주의 해석자들의 주장처럼 그 일곱 머리는 ‘역사적 로마’만을 지칭하는 것이라는 것은 조금 가난한 해석인 것입니다. 구약 성경에서 ‘산’이라는 것은 항상 ‘세력, 힘, 통치’를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이사41:14-15) 14 두려워 말라, 벌레 같은 야곱아! 구더기 같은 이스라엘아, 내가 너를 도와 주리라. 야훼의 말이다.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자가 너를 구원하는 이다. 15 보아라, 내가 너를 날이 선 새 탈곡기로 만들리니 네가 모든 산을 짓부수어 뭉그러뜨리고 모든 언덕을 가루로 만들리라.
(예레51:25) 25 온 세상을 짓부수던 멧부리야, 이제 내가 너를 멸하리라. 나 야훼가 선언한다. 팔을 뻗어 너를 움켜 잡고 바위 꼭대기에서 내려 굴리며 산에 불을 지르리라.
(즈카4:7) 7 '산아, 네 아무리 크다 하여도 즈루빠벨 앞에서는 평지에 지나지 않는다. 그가 산에서 머릿돌을 떼어 올 때, 사람들은 '멋지다, 멋지다.' 하며 환성을 올리리라.'
하느님께서 당신께서 쳐서 부스러기를 만들어 버리실 악의 세력을 가리켜 ‘산’이라고 부르시지요? 그래서 바벨론도 큰 산 바벨론 이라고 부르지 않습니까? 바로 그 산이 일곱이라는 말입니다. 그 ‘산’이 일곱이라는 것은 ‘7’은 완전수라고 했지요. 그러니 ‘일곱 산’ 은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구체화되어 등장하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악한 세력들을 총칭하는 말인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그 일곱 산은 일곱 왕이라고 합니다. 제가 전에 설명해 드리기를 ‘왕’은 ‘왕국’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했지요. 그러니 그 일곱 머리는 ‘역사적으로 끊임없이 구체화되어 등장하는 하느님과 하느님의 백성들을 대적하는 정치적인 악한 세력들을 총칭하는 것’이 맞는 해석인 것입니다. 열 뿔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지난번에 다니엘서에서 다니엘의 꿈속에 나타난 짐승에 대해 공부를 하면서 그 열 뿔이 무엇인지 공부했지요?
(다니7:3,20,24) 3 바다에서 모양이 다른 큰 짐승 네 마리가 올라 왔다. 20 머리에는 뿔이 열 개나 돋아 있었고 새로 뿔 하나가 나오자 뿔 셋이 떨어져 나갔는데 그 뿔은 눈도 있고 입도 있어서 건방진 소리를 하고 있었다. 또 그 뿔이 다른 뿔보다 커졌는데, 그것들이 모두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24 뿔 열 개는 그 나라에 일어날 열 임금을 말한다. 이들 임금 다음에 다른 임금 하나가 일어날 터인데 그 임금은 먼저 일어난 임금들과는 달라 그 중 세 임금을 눌러 버릴 것이다.
그 열 뿔도 역시 열 왕, 왕국, 세력, 힘을 상징하는 것이었지요? 그게 10개라는 것은 엄청난 힘, 엄청난 권세를 상징하는 것입니다. 마귀의 세력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러니 사탄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받은 짐승의 세력은 역사 속에서 끊임없이 엄청난 세력으로 등장해서 우리 성도들을 핍박하고 미혹하고 있다는 것을 우리는 짐승의 일곱 머리와 열 뿔이라는 단어 속에서 읽어 낼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10절에 보면 그 일곱 왕 중에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구절이 나옵니다. 이 구절 때문에 과거주의 해석을 하는 분들이 한 때 힘을 받았었지요. 그 분들이 주장하기를 이 일곱 왕은 로마 황제 일곱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아우구스투스, 티베리우스, 칼리큘라, 클라우디우스, 네로까지가 다섯이고 여섯째가 베스파시안이고 일곱째가 예루살렘 성전을 함락시킨 타이터스라고 해석을 합니다. 어떤 학자들은 ‘아니다, 베스 파시안은 그리스도인들을 핍박한 적이 없으니까 빼야 한다. 대신에 네로의 환생이라 불릴만큼 지독하게 그리스도교인들을 핍박했던 도미티안을 넣어야 한다.’라고 주장하기도 합니다.
과거주의적 해석은 이렇게 일관성이 없습니다. 정확하게 따진다면 역사가들이 공식 적인 로마의 첫 번째 황제로 인정하는 아우구스투스 (옥타비아누스) 바로 전에 로마를 통일했던 줄리어스 시이저가 비록 BC44년에 부르터스에 의해 암살되기는 했지만 이미 황제의 칭호 인 imperator를 받았던 사람입니다.
그래서 로마의 공식적인 황제는 줄리어스 시이저부터 계수 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일각에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네로가 죽은 후에 비록 잠깐이지만 ‘갈바, 오토, 피텔리우스’같은 사람들이 공식적인 로마의 황제로 몇 개월씩을 다스렸었습니다. ‘그 사람들은 왜 빼나?’라고 했을 때 설명할 방법이 없습니다.
그러니까 요한 묵시록은 역사적 사건이나 역사적 인물들을 대입해서 풀게 되면 나중에는 억지와 추측과 짐작을 동원할 수밖에 없게 되는 것입니다.
또 이런 해석도 있습니다. ‘다섯은 망하였고‘에서 다섯은 역사적으로 이스라엘을 괴롭혀 왔던 다섯 왕국 애굽, 바벨론, 아시리아, 페르시아, 헬라(그리스)를 지칭하는 것이고 ’하나는 있고‘의 하나는 로마이며(요한묵시록이 기록된 때가 로마시대이므로)’“하나는 아직 오 지 않았다‘의 하나는 로마 뒤에 올 성도들을 핍박하며 미혹하는 또 다른 정치세력을 말한다는 해석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강성해 보이지만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는 것이지요.
그러나 지금은 로마도 없고 이 요한묵시록이 기록 된지도 2,000년이 지났습니다. 그러면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는 구절을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가? 거기에 대한 바른 답을 얻기 위해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천사로부터 ‘요한이 奇異히 여기고 있는 것”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는 것입니다.
요한이 무엇을 크게 기이히 여겼지요? “왜 음녀가 오히려 승리의 축배를 들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가?‘에 대한 기이함이었습니다. 천사는 지금 거기에 대해 요한에게, 그리고 우리 성도들에게 설명을 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 음녀는 무서운 짐승을 타고 그 짐승을 조종하고 있는데 그 짐승은 일곱 머리와 열 뿔을 가지고 있는 사탄의 대리자로, 사탄으로부터 엄청난 힘을 받아 이 땅을 핍박하고 미혹하며 승승장구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이미 그 세력의 일곱 중에 다섯은 망했고 하나만 겨우 남아 있는 상태이고 마지막에 최후의 발악을 하다가 결국에는 멸망할 것이라는 것을 보여 주는 것이 바로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라는 구절의 바른 해석인 것입니다.
사탄의 세력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완전히 무장 해제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그 세력은 여전히 하느님의 백성들을 우는 사자처럼 공격을 하고 있습니다. 이 이율배반적인 상황을 여러분이 잘 이해하고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히브2:14) 14 자녀들은 다 같이 피와 살을 가지고 있으므로 예수께서도 그들과 같은 피와 살을 가지고 오셨다가 죽으심으로써 죽음의 세력을 잡은자 곧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여기서 ‘악마를 멸망시키시고’ ‘카탈게오’는 ‘완전히 쓸모없게 하다, 무장 해제 시키다’라는 뜻입니다. 2,000년 전 예수 그리 스도께서는 십자가에서 그 마귀의 허리를 꺾어 버리신 것입니다. 마귀가 갖고 있는 유일한 무기가 뭐지요? ‘死亡’입니다. 죄인들을 죽음(死亡)으로 끌고 들어가는 것이 마귀의 가장 궁극적이며 커다란 무기입니다. 그런데 그 ‘사망’은 ‘죄’아래에서만 그 효력을 발휘합니다. 死亡은 무죄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가두어 둘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 주님은 사망을 이기고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냥 혼자 부활하신 것이 아니라 맏아들이신 그 분이 그 품안에다가 동생들을 줄줄이 품고 부활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그 동생들은 전부 사망을 이긴 자들이 되어 버린 것입니다. 이제 죽음(死亡)은 그 예수 그리스도의 동생들을 어쩌지 못 합니다.
(고전15:54-57) 54 이 썩을 몸이 불멸의 옷을 입고 이 죽을 몸이 불사의 옷을 입게 될 때에는, '승리가 죽음을 삼켜 버렸다. 55 죽음아, 네 승리는 어디 갔느냐? 죽음아, 네 독침은 어디 있느냐?'라는 성서 말씀이 이루어질 것입니다. 56 죽음의 독침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입니다. 57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신 하느님께 감사합시다.
이렇게 사탄은 하느님의 백성들에 대해서 이제 그 허리가 꺾여 버린 것입니다. 이것이 ‘다섯은 망하였고’입니다. 우리는 여전히 예전의 그 악한 습관과 성품에 젖어 살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사탄의 미혹에 빠져 허우적대고 심지어 구원의 확신까지도 흔들리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게 바로 ‘하나는 있고’입니다.
왜 하느님은 여전히 그 사탄의 세력에게 우리를 미혹하도록 놔두고 계실까요? 왜 하나를 남겨 두셨을까요?
(묵시17:12) 12 그리고 네가 본 열 뿔은 열 왕이다. 그들은 아직 나라를 차지하지는 못했지만 그 짐승과 함께 한때 왕노릇할 권세를 받을 것이다.
그 짐승이 임금처럼 권세를 일시 동안 받게 된다고 합니다. 그 권세는 누가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하느님이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묵시17:17) 17 그것은 하느님께서 그들의 마음 속에 당신의 뜻을 이루려는 욕망을 심어 주셨고 뜻을 모아 그들의 왕권을 그 짐승에게 넘겨 주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결국 하느님의 말씀이 이루어질 것이다
왜 하느님은 이미 허리가 꺾인 마귀의 세력에게 잠시 동안 힘을 주십니까? 하느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해 그렇게 하신답니다. 하느님의 뜻이 뭐였지요?
(데살전4:3) 3 하느님께서 여러분에게 원하시는 것은 여러분이 거룩한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은 성도들의 거룩을 위해, 성도들의 양육을 위해 사탄의 세력이 성도들을 미혹하도록 허락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미혹은 절대 ‘사죽음으로 우리를 끌고 갈 수 없는’ 미혹입니다. 그것이 ‘다섯은 망하였고 하나는 있고’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 마귀의 세력은 최후의 발악을 하게 될 것이고 그 결과로 그들의 심판을 자초하게 될 것입니다. 그게 ‘하나는 아직 오지 않았다’입니다. 이해하시겠지요?
그들은 지금도 우리를 미혹하고 공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공격과 미혹은 우리의 양육에 필요한 미혹인 것입니다. 그래서 그 미혹은 우리에게 치명타를 가할 수가 없습니다. 어떤 면에서 그 미혹은 우리의 성숙을 위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익인 것입니다. 그래서 8절에 보면 그 짐승이 전에는 있었다가 이제는 없고, 다시 무저갱에서 올라 올 것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묵시17:8) 8 네가 본 그 짐승은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다. 그것이 장차 끝없이 깊은 구렁에서 올라 오겠지만 마침내는 멸망하고 말 것이다. 땅 위에 사는 사람들 중에서 천지창조 때부터 생명의 책에 이름이 적혀 있지 않은 사람들은 그 짐승이 나타나는 보고 놀랄 것이다. 전에는 있었지만 지금은 없고 후에야 나타나기로 되어 있는 그 짐승을 보기 때문이다.
보세요. 10절에서는 ‘하나는 있고’라고 하면서 8절에는 ‘지금은 없으나’라고 표기가 되어 있다고요. 어찌 보면 모순처럼 보이지요? 그렇지만 지금까지 설명해 드린 그 내용만 잘 숙지한다면 그 해석에 전혀 어려울 것이 없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신분과 운명을 뒤 집을 수 없다는 의미에서 그는 지금은 없는 것이고 , 우리의 영적 성숙과 거룩으로 경주를 위해 우리를 미혹하고 핍박 하는 것이 사탄에게 허락되었다는 점에서 ‘하나는 있고’인 것입니다.
그런데 그 미혹의 세력이 얼마나 강한지 창세 이후로 생명책에 기록 되지 못한 사람들은 그 세력을 보고 크게 놀랍니다. 과학, 문명, 사상, 철학, 자고 일어나면 변하지요? 놀랍습니다. 그러나 우리 성도들은 그런 것에 별로 마음을 두지 않습니다. 놀랍기는 하지만 그런 것을 의지하거나 희망을 두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생명책에 기록되지 못한 세상 사람들은 그러한 과학과 문명과 철학과 사상 에 엄청난 기대를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확신도 가지지요.
조금 더 이해하기 쉽게 설명해 드리겠습니다. 로마서 7장에 가면 왜 하느님께서 우리의 인생 가운데 그 ‘하나’를 남겨 놓으셨는지 그 이유가 정확하게 묘사가 되어 있습니다.
(로마7:18-25) 18 내 속에 곧 내 육체 속에는 선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습니다. 마음으로는 선을 행하려고 하면서도 나에게는 그것을 실천할 힘이 없습니다. 19 나는 내가 해야 하겠다고 생각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는 악을 행하고 있습니다. 20 그런 일을 하면서도 그것을 해서는 안 되겠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결국 그런 일을 하는 것은 내가 아니라 내 속에 들어 있는 죄입니다. 21 여기에서 나는 한 법칙을 발견했습니다. 곧 내가 선을 행하려 할 때에는 언제나 바로 곁에 악이 도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22 나는 내 마음 속으로는 하느님의 율법을 반기지만 23 내 몸 속에는 내 이성의 법과 대결하여 싸우고 있는 다른 법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법은 나를 사로잡아 내 몸 속에 있는 죄의 법의 종이 되게 합니다. 24 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의 육체에서 나를 구해 줄 것입니까? 25 고맙게도 하느님께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를 구해 주십니다. 나는 과연 이성으로는 하느님의 법을 따르지만 육체로는 죄의 법을 따르는 인간입니다.
어떠세요? 전혀 달라진 것이 없지요? ‘거기서 건져 주신 하느님께 감사하다’ 그래놓고 또 ‘여전히 나는 육신으로는 죄의 법을 섬긴다.’ 라고 합니다. 우리는 이렇게 구원을 받고 나서도 여전히 그 죄의 세력 앞에 노출이 됩니다. 노출이 될 뿐 아니라 자칫 절망 까지 느낄 정도로 그 앞에서 무력함을 느끼게 됩니다. 영적으로 눈을 뜨게 된 사람들은 바로 그러한 자신의 실존을 바라보며 복음의 위대함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로가 그렇게 자신에 대해 절망하면서 어떤 결론으로 끌고 가는지 보세요.
(로마8:1-4) 1 그러므로 이제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사는 사람들은 결코 단죄 받는 일이 없습니다. 2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와 함께 생명을 누리게 하는 성령의 법이 나를 죄와 죽음의 법에서 해방시켜 주었기 때문입니다. 3 인간의 본성이 약하기 때문에 율법이 이룩할 수 없었던 것을 하느님께서 이룩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죄 많은 인간의 모습으로 보내어 그 육체를 죽이심으로써 이 세상의 죄를 없이 하셨습니다. 4 이렇게 해서 육체를 따라 살지 않고 성령을 따라 사는 우리 속에서 율법의 요구가 모두 이루어졌습니다.
‘이렇게 죄를 떨어버리는 것은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이기에 하느님께서 직접 개입하셔야 했구나.’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에 오셔서 우리를 위해 죽으실 수밖에 없었구나.’하고 하느님을 알게 되고 나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 성도들에게는 죄 조차도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우구스티노를 비롯한 여러 분의 초대 교부들이 ‘오 거룩한 죄여’라고 고백을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잘 이해해야 됩니다. ‘죄를 지어도 된다.’라고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그렇게 우리가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은혜로 선물로 우리에 게 허락해 주신 그 하느님을 알아 가면 알아갈수록 우리는 그 하느님의 자녀로 성숙되어지고 양육되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은혜의 복음을 제대로 알게 된 사람들은 이런 고백을 하게 되겠지요.
(로마6:1-2) 1 그러면 '은총을 풍성히 받기 위하여 계속해서 죄를 짓자' 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2 절대로 그럴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이미 죽어서 죄의 권세에서 벗어난 이상 어떻게 그대로 죄를 지으며 살 수 있겠습니까?
이러한 고백과 함께 그 엄청난 선물을 주신 하느님 앞에서 자신을 쳐가며 열심히 하느님의 뜻을 향해 정진하는 삶을 우리가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세력은 참 불쌍합니다. 지금 우리 때문에 하느님한테 열심히 사용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치 이 우주가 우리 성도들을 위해 존재하고 있듯이 마귀들도 성도들을 위해 잠시 권세를 부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부한 일곱 교회 중에 스미르나 교회에 관한 내용을 읽어보면 좀 더 확실해 지실 거예요.
(묵시2:8-11) 8 또 스미르나 교회의 천사에게 이 글을 써서 보내어라. 처음이고 마지막이며 죽었었지만 살아 계신 분이 말씀하신다. 9 '나는 네가 겪은 환난과 궁핍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사실 너는 부요하다. 네가 유다인으로 자칭하는 자들에게 비방을 당하고 있는 것도 나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유다인이 아니라 사탄의 무리이다. 10 네가 장차 당할 고통을 조금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제 악마가 너희를 시험하기 위하여 너희 중 몇 사람을 감옥에 가두려 하고 있다. 너희는 열흘 동안 환난을 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너는 죽기까지 충성을 다하여라. 그러면 내가 생명의 월계관을 너에게 씌워 주겠다. 11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여러 교회에 하시는 말씀을 들어야 한다. 승리하는 자는 결코 두 번째 죽음의 화를 입지 않을 것이다.'
보세요. 이미 마귀는 십자가에서 disarmed되었는데 하느님은 마귀가 교회를 시험하게 놔 두세요. 우리를 거룩한 자로 양육시키기 위해서입니다. ‘이기는 자는 둘째 죽음의 해를 받지 아니하리라’ 바로 우리를 ‘이기는 자’로 만들어 내시기 위해 마귀의 세력을 다섯은 망하게 하셨지만 ‘하나는 있게’만드신 것입니다.
하느님은 그 마귀가 주는 환난과 핍박 속에서도 우리 聖徒들이 우리 아버지이신 ‘하느님과 영생의 희망‘으로 말미암아 흔들리지 않는 평화 속에 있을 수 있는 용사들로 만드시기 위해 ’마귀‘를 사용하고 계시는 것뿐입니다. 그래서 우리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고난과 평화를 동시에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요한16:33) 33 나는 너희가 내게서 평화를 얻게 하려고 이 말을 한 것이다. 너희는 세상에서 고난을 당하겠지만 용기를 내어라. 내가 세상을 이겼다' 하고 말씀하셨다.
보세요. 우리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평화를 약속하시는데 ‘세상에서는 너희가 고난을 당한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이왕에 평화를 약속하실 거면 ‘세상에서는 너희가 부자가 될 것이고 만사형통하게 될 것이다‘라고 말씀하시면 좀 좋습니까? 그런데 평화를 약속하시면서 ’고난의 필연‘을 말씀하십니다.
우리의 상황이 좋고 모든 일이 잘 될 때는 누구나 평화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느님이 말씀하시는 진짜 평화는 외부의 상황이나 조건, 나의 감정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평화입니다. 나의 상황이나 조건에 의해 왔다 갔다 하는 평화는 가짜 평화입니다. 성경이 우리에게 약속하시는 평화는 어떠한 상황과 환경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평화입니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그 평화를 훈련하시기 위해 마귀의 세력 중 ’하나는 있게‘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하느님께서는 우리에게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을 알게 하시기 위해 우리 인생에 ‘하나는 있게’ 남겨 두신 것입니다. 여 분, 진짜 부모는 자식이 잘못했을 때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습니다.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그 사랑하는 자식을 바른 사람으로 키워야 하기 때문에 그 아이를 징계합니다. 잔소리를 하고 매를 들지요. 그렇지만 그 잔소리와 매는 사랑에서 나온 것입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절대 자식을 못 때립니다. 괴롭고 피곤한 일이거든요. 부모가 제일 못 견뎌 하는 것이 뭐지요? 자식 눈에 눈물 이 흐르는 것입니다. 그 것을 감수하고 매를 드는 부모가 진짜 사랑이 있는 부모인 것입니다.
(사무하7:14) 14 내가 친히 그의 아비가 되고 그는 내 아들이 되리라. 만일 그가 죄를 지으면 나는 사람이 제 자식을 매와 채찍으로 징계하듯 치리라.
(호세2:8-9) 8 내가 그 앞을 가시로 막고, 담을 둘러쳐 빠져 나가지 못하게 하리라. 9 정부들을 찾아 다녀 보아야 만나지도 못하고 허탕만 치리라. 그제야 제 정신이 들어 '남편에게 돌아 가야겠다. 그때의 내 신세가 지금보다 나았지.' 하리라.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맞다면 우리가 그 마귀의 미혹에 빠져 엉뚱한 길로 가려할 때 하느님께서 우리의 삶에 적극적인 개입을 하심으로 우리에게 하느님의 사랑과 아버지 되심을 깨닫게 해주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 이분이 정말 나를 죽도록 사랑하시는 내 아버지가 맞구나”하고 그 하느님의 아버지 되심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 일을 위해 하느님께서는 마귀의 세력이 잠시 우리를 미혹하게 놔두시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자녀들에게 있어서 마귀의 핍박과 공격은 어떤 식으로든 유익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사실을 아는 우리는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凡事에’ 감사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삶이 많이 힘들어집니다. 사탄이 미혹하지요, 하느님이 징계하시지요, 양수 겹장입니다. 그래서 힘듭니다. 왜 그렇게 놔두신다고요? 하느님의 목적은 우리의 거룩이기 때문입니다. 어떻게 만사형통과 일사천리, 소원성취만으로 우리의 거룩이 영글어가 겠습니까? 사람들은 예수를 믿으면 자기의 손이 마이더스의 손이 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뭐든지 만지면 금으로 변하는 마이더스의 손, 아닙니다. 하느님은 오히려 예수를 믿는 성도들의 손을 마이너스의 손으로 만드실 때가 더 많습니다. 만지면 줄어들고 실패하는 그런 삶이 오히려 허락 될 수가 있습니다. 그렇게 망하고 실패하면서 우리가 하느님을 배우고 삶을 배우고 천국의 희망을 확고하게 새길 수 있다면 그것은 복이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지금 여러분을 가로막고 있는 대적들이 너무 커 보여서 혹시 낙심하고 계시지는 않으셨습니까? 아닙니다. 그들은 이미 다섯은 망하였고 하느님께서 우리의 양육을 위해 남겨 놓으신 겨우 하나 남은 힘을 가지고 우리의 훈련에 동참하고 있는 것일 뿐입니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심판을 받아 멸망하게 될 것이고 영원한 승리의 면류관은 여러분에게 주어질 것입니다. 그러니까 어떤 상황 속에서도 희망을 놓지 마시고 힘을 내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