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목 : 거룩한 씨로 낳은 하나님의 아들들
본 문 : 약1:18절 : “그가 그 조물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가족은 부모가 육신적인 씨를 통해 자녀를 낳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영적인 가족도 하나님의 씨로 출생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씨로 태어나는 영적인 가족이 하나님의 아들들입니다. 하나님은 가장 귀한 자신의 종자씨인 독생자를 희생시키시는 댓가를 지불하고, 당신의 아들들을 낳으셨습니다. 이 아들들은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의 목표는 종자씨되시는 예수님의 거룩한 형상을 닮는 데까지 구원을 이루어가야 하는 것입니다.
1. 종자씨의 특성은 종자씨와 같은 본성을 낳는다
식물이나 나무의 씨나 묘종은, 묘종이나 씨가 자라서 열매를 맺을 때, 종자씨와 동일한 본질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시골에서 고구마 농사를 합니다. 고구마를 가을에 수확하면, 일부 고구마를 내년에 심기 위하여 남겨둡니다. 그 남겨둔 고구마가 종자씨 고구마입니다. 다음해 봄이 와서 움이 돋고 순이 나오기 시작하여, 고구마 순이 적당하게 자라면, 고구마 순을 잘라서 고구마 밭고랑에 줄기를 적당하게 파묻습니다.
그리고 여름내내 고구마가 자라고, 밑이 들기 시작하여, 늦가을에 수확하게 됩니다. 그러면 고구마를 호미로 캐내어 집으로 실어 나릅니다. 그런데 그 고구마가 본래 심었던 종자씨 고구마와 크기도 같고, 모양도 같고, 맛도 같습니다. 왜 그러냐면 같은 종자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벼도 마찬기지이지요! 벼농사를 하면 벼가 수확할 때, 종자씨와 같은 벼를 수확하는 것입니다.
사람도 그와 같다는 것입니다. 육으로 살아가는 사람과 영으로 살아가는 사람은 외적인 것만을 보면 비슷해 보입니다. 먹고, 학교 다니고, 결혼하고, 직장에 다니고, 여가 생활하는 것, 화초를 가꾸고, 운동을 하는 것 등 겉으로만 보면 비슷합니다. 그러나 육적인 출생과 영적인 출생은 내면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달라지는 것입니다. 정반대인 것입니다.
씨가 다르기 때문입니다. 육적인 출생은 땅의 썩어질 씨를 받았고, 영적인 출생은 썩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씨를 받았기 때문에 정반대로 갈 수 밖에 없습니다.
벧전1:23 ;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육신적인 출생을 이어주는 아담으로부터 온 육신적인 아버지의 씨와 하나님의 씨는 하늘과 땅, 사망과 생명, 지옥과 천국의 차이를 불러오는 것입니다.
마24:40-41절에 “그 때에 두 사람이 밭에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요 두 여자가 매를 갈고 있으매 하나는 데려감을 당하고 하나는 버려둠을 당할 것이라”
똑 같은 사람이, 똑 같은 생업에 종사합니다. 겉으로 보면 어떤 차이가 없습니다. 그런데 한 사람은 하늘로 올라가고, 한 사람은 땅에 남아있습니다.
왜 그럴가요? 씨 때문입니다. 씨가 이렇게 중요합니다. 씨는 씨 안에 들어있는 본성을 나타내고, 전달합니다.썩어질 씨는 썩어질 본성을 전달합니다.썩지 않는 씨는 썩지 않는 본성을 전달합니다.
2. 성도는 하나님이 썩지 않는 씨로 낳으셨습니다
약1:18절에 “그가 그 조물중에 우리로 한 첫 열매가 되게 하시려고 자기의 뜻을 좇아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느니라”
여기서 '낳으셨느니라' 에 주목하시기 바랍니다. 자녀는 부모가 낳습니다.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이 낳으셨습니다. 그래서 그 분이 성도의 아버지가 되시는 것입니다. 한 번은 예수님께 찾아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 '사람이 천국에 들어가려면 거듭나야한다' 고 말씀하셨을 때, 니고데모가 이 말씀을 잘 이해하지 못하여, '사람이 어떻게 모태에 들어갔다 나올 수 있습니까?' 라고 물었을 때, 예수님은 '육으로 난 것은 육이요 영으로 난 것은 영이니'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육으로 난 것은 혈통적인 출생을 말하는 데, 혈통적인 출생은 썩어질 씨로 된 것이기 때문에 사망을 낳는다는 말입니다. 혈통적인 출생은 죄의 씨, 사단의 씨, 육적인 씨입니다. 사망의 씨, 죽음의 씨, 멸망의 씨를 받은 것입니다. 혈통적인 출생을 가지고서는, 아무리 명문 가문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사단이 뿌려놓은 죄의 종자씨이기 때문에, 죄인으로 출생하는 것입니다.
제 여동생이 하나 있습니다. 7여년 전에 일본 사람과 결혼하였습니다. 그 집안이 불교 집안입니다. 그런데 일본에서 최고의 명문 가문 중에 하나라고 합니다. 한국 여성으로는 최고의 명문가로 시집을 간 첫 번 째 여성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무리 혈통적으로 명문가문 출신이라고 할지라도, 이 땅의 육으로 난 것은 육일 뿐입니다. 육으로는 하늘의 기업을 얻을 수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늘의 생명을 받으려면, 썩지 않는 씨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썩지 않는 씨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남이고, 영적인 출생입니다.
3. 종자씨를 심는 목적
벧전1:23 “너희가 거듭난 것이 썩어질 씨로 된 것이 아니요 썩지 아니할 씨로 된 것이니 하나님의 살아 있고 항상 있는 말씀으로 되었느니라”
그리스도인은 썩지 않는 씨로 하나님이 낳으셨습니다. 낳았다는 말은 출생했다는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썩지 않는 씨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기 위해, 하나님의 아들들을 모으기 위해, 세상이라는 밭에 종자 씨를 뿌렸습니다. 그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살아있고 항상 있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은 태초부터 말씀으로 계셨고, 말씀 중의 말씀이시고, 항상 살아있는 말씀이십니다.
예수님이 썩지 않는 종자 씨이시고, 종자가 되는 묘종입니다. 농부는 왜 종자씨를 밭에다 뿌립니까? 종자와 똑같은 품종의 씨앗이나 열매를 얻기위해서입니다. 종자 씨를 심으면 종자와 똑같은 씨를 수확하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이 종자씨인 예수 그리스도를 심는 이유는 종자씨인 예수님과 같은 성품과 특성을 가진 열매를 얻기위해서입니다.
히2:11절에 “거룩하게 하시는 자와 거룩함을 입은 자들이 다 하나에서 난지라 ...”
예수님이 종자씨 곧 썩지 않는 거룩한 씨이므로, 그로부터 낳은 자들도 거룩한 씨의 생명을 입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죽으심으로 종자씨를 심었고, 부활하심으로 종자씨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고전 15:20절에 “이러므로....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라고 증거하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종자씨인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하심으로 낳은 하나님의 아들들 중에서 주님이 거룩한 하나님 가족의 첫 열매입니다.주님이 하나님의 맏아들이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뒤를 따라 그를 믿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동생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종자씨의 열매들이 될 것입니다.
롬8:29절에 “...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 이는 그로 많은 형제 중에서 맏아들이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께서는 맏아들이신 예수님을 닮은 많은 아들들을 모으시고 계십니다. 여기서 우리는 구원에 관한 중요한 계시를 얻을 수 있습니다.
4. 종자씨와 구원에 관한 계시
그렇다면 종자씨와 구원이 어떤 관계에 있는 것입니까? 구원은 얻었습니까? 구원을 얻을 것입니까? 성경은 구원을 얻었다고도 말하고,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하고, 또 구원을 이루라고도 말하기도 합니다. 이것을 혼동하는 분들이 많이 있습니다. 이제 이것을 바로 정립하시기 바랍니다. 부분적으로 보면 구원을 얻었다도 맞는 말이고, 구원을 얻을 것이다 라는 말도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성경전체의 문맥으로 보면 구원을 이루어간다는 말이 가장 맞는 말입니다.
우리는 구원을 이미 얻었고, 얻은 구원을 완성하기 위하여 현재 이루어간다 고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리는 누구나 구원을 받은 이후 구원의 완성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구원을 이루어가는 과정인 것입니다. 종자씨의 비유가 이 문제에 대한 빛을 던져줄 수 있을 것입니다.
구원이란 씨가 땅에 떨어져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의 전과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구원이란 일회적인 사건이 아니고 일련의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씨를 뿌려 자라는 과정을 예로 들어 봅시다. 씨가 땅에 떨어지면 썩어지면서 발아하여 싹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조금있으면 연한 이삭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이것을 구원을 얻었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 이삭은 여물어서 익어야 하는 과정이 남아 있습니다. 이 과정을 구원을 이루어간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최후에 낫을 대어 수확을 하게 되는 데, 이것을 구원의 완성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씨의 비유로 생각해 볼 때, 구원이란 단회적인 하나의 사건이 아니라, 일련의 연속적인 과정이라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구원이란 씨를 뿌려서 열매를 맺을 때까지의 전 과정인 것입니다. 이것을 예수님께서 막4:28-29절에서 비유로 잘 설명하고 있습니다.
막4:28-29절:“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씨가 심기어져서 바로 열매를 맺는 것이 아니라, 일련의 과정, 즉, 싹이 나고, 이삭이 나고,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 되고, 익게 되고, 추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도 이처럼 씨를 뿌려서 자라고 수확하는 것과 똑같다는 것입니다. 구원은 이루어가는 과정입니다. 진행형입니다. 어떤 사람은 공사중이라고 합니다. 왜요? 공사는 시작하여 끝날 때까지 하나의 시간적인 과정이 필요한 것입니다. 시작만 하고 끝내지 않으면 준공검사를 맡을 수 없듯이, 우리의 구원도 구원을 얻은 시작이 있고, 과정이 있고, 완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의 구원의 최종 목표인 구원의 완성은 무엇입니가? 첫 열매이시며, 구원의 종자씨이신 예수그리스도와 같아지기 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여러분은 예수 그리스도와 같아졌습니까? 직 아닙니까? 그러니까 우리는 지금 자라고 있는 것입니다. 공사중인 것입니다. 우리 구원의 최종 목적은 종자씨와 동일한 본성, 동일한 품종을 가진 열매를 얻기 까지 부단히 변화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어 죄사함을 받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성령세례 받는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능력받고 병고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장로되고 목사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기도만 하는 데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임재 임재 영광 영광 부흥 부흥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고, 구원의 첫 열매이고 하나님의 맏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품질이 같아져야 하는 것입니다. 지속적으로 종자씨 되신 거룩하신 예수님의 형상인 그 분의 아름다운 성품을 이루기까지 자라가는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목회의 사명을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것이라고 합니다.
갈4:19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
우리 구원의 목적은 하나님의 맏아들이시고, 우리들의 맏형님 되신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그 분과 똑같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종자씨의 열매입니다. 베드로는 우리들이 예수님 형상을 이루어 그 분과 같아짐으로 신의 성품에 참예할 자들이라고 말했습니다.
벧후1:4절에 “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로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으니”
보배롭고 큰 약속은 예수님을 그대로 빼 닮은 예수님의 동생들, 즉 하나님의 아들들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영생입니다. 영생을 얻은 자들은 신의 성품, 즉 예수님과 같은 성품을 입은 자들입니다. 그런데 영생인 예수님과 같아지려면 저절로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무던히 자기를 부인하는 영적 싸움, 즉 대가지불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빌2:12절에 “그러므로 나의 사랑하는 자들아 ...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구원이란 결코 쉬운 것이 아니기 때문에 두렵고 떨리는 자세를 가져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구원을 등한히 하기 쉽기 때문입니다.
종자씨의 비유에서 구원에 관한 또하나의 계시가 있습니다. 것은 종자씨가 다 열매에 이르지 못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5. 그렇다면 구원을 상실할 수도 있는가?
예! 구원을 상실할 수 있습니다. 마가복음 4장 28-29절 말씀을 다시 읽겠습니다.
“처음에는 싹이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다음에는 이삭에 충실한 곡식이라 열매가 익으면 곧 낫을 대나니 이는 추수 때가 이르렀음이니라”
곡식 줄기가 싹이 나고 이삭이 나왔는 데, 말라 죽으면 끝나는 것입니다. 쭉정이가 되도 끝나는 것입니다.
제가 시골에서 보니까 콩을 심었습니다. 그런데 까치들이 콩을 심어 놓은 자리를 알고, 흙을 헤치고 심어논 콩을 파먹습니다. 또 다 여물어가는 옥수수를 너구리들이 용케 알고 나타나서 옥수수를 갉아서 먹습니다. 시골에서 허수아비를 세워놓은 목적이 무엇입니까? 참새들이 익은 벼들을 까먹기 때문입니다. 우리 구원도 이와 같은 것입니다. 지막 열매가 다 익어서 추수꾼이 낫을 대어 수확을 하여야 구원의 완성에 이르는 것입니다.
오래전에 요한 웨슬레가 루터의 개혁에 대하여 쓴 소리를 하였습니다. 그것이 뭐냐하면 루터의 종교개혁은 하다만 개혁이다 고 말하였습니다. 루터는 카톨릭의 행위 구원론에 반기를 들고, 행함이 아니고, 오직 믿음으로 구원을 받는다 고 주장하였습니다. 그는 구원의 한 부분만을 보았습니다. 즉 구원의 시작만을 말하였습니다. 그것도 회개가 빠진 불완전한 구원론을 외쳤습니다. 루터는 구원에 관한 계시를 달빛정도로만 깨달았습니다.
요한 웨슬레와 찰스피니는 구원의 계시를 제대로 깨달은 하나님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구원의 진리에 대한 계시가 햊빛처럼 빛났습니다. 그들은 회개없이 구원이 없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들은 참된 믿음은 행함이 있어야 하며,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는 야고보서의 말씀을 지지하였습니다.
또 우리들이 얻은 구원은 구원의 완성이신 그리스도의 거룩한 형상을 이루기까지 변화되어야 한다는 구원의 과정을 말하였습니다. 또 한 번 얻은 구원도, 우리가 구원을 등한히 할 때, 상실할 수 있다는 성경 말씀을 지지하였습니다. 이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에서 불순종하여 구원에서 탈락한 사실은 오늘을 사는 모든 성도들에게 거울과 경계가 되기 위하여 기록하였다고 하고 있습니다.
고전10:11-12절에 “저희에게 당한 이런 일이 거울이 되고 또한 말세를 만난 우리의 경계로 기록하였느니라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마태복음 22장에는 한 임금이 아들의 결혼 잔치를 열고 손님을 청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임금이 아들의 결혼식에 여러 사람들을 초청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참석하지 않았습니다. 그러자 임금이 그들을 진멸하고 종들을 시켜 바깥 들로 산으로 가서 아무든지 사람들을 손님으로 청하여 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많은 사람들이 손님으로 초청되어 왔습니다. 임금이 손을 보러 들어왔습니다.
그 때 예복을 입지 않은 한 사람이 있었습니다. 임금은 예복을 입지 않은 이 사람을 종을 시켜 바깥 어두운데로 쫒아내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러면서 결론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마22:14절에 “청함을 받은 자는 많되 택함을 입은 자는 적으니라”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이후로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 나라로 초청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극히 적은 수만이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이유는 무엇이겠습니까? 이유는 구원을 이루기 위한 대가지불이 너무 크기 때문에 대가지불을 거절하였기 때문입니다. 또 하나는 하나님의 구원의 선물의 가치가 얼마나 큰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6. 구원을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대가지불
자녀를 출생할 때 어머니는 엄청난 고통을 당합니다. '낳으셨다' 라는 말속에는 굉장한 고통이 있다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습니다. 제가 백사모가 엊그제 중보기도 말씀을 전하는 시간에 잠깐 간증을 들어보니, 큰 아들 이레를 출산할 때, 목숨을 잃을 뻔했다는 사실을 알고, 엄마가 자녀를 낳는다는 것이 너무나 큰 고통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백사모가 이레를 낳을 때, 저는 서울에서 영어 강사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아내 홀로 출산을 하기 위하여 친정집에 내려갔었습니다. 친정집에서 하루 이틀 기다린 후에 진통이 오기 시작하여 병원에 갔습니다. 병원에서 아이를 출산하여야 하는 데, 힘이 부족하여서 아이를 자궁에서 밀어내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머리만 삐쭉 나오는 데, 힘이 부족하여 태아의 몸이 자궁밖으로 빠져나오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전 9시부터 오후 3시까지 생명을 건 씨름을 한 끝에 이레를 낳았다는 말을 들었습니다.저는 남자이기 때문에 해산하는 고통을 잘 몰랐는 데, 아내의 간증을 통해 여자의 해산의 수고와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영적인 출산과정도 이와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도 엄청난 수고와 고통을 통해서 하나님의 아들들을 낳으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영적인 자녀들을 출생시키는 데, 자기의 가장 사랑하시는 아들을 죽이셔야했습니다.
히5:7절에“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을 인하여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댁의 반차를 좇은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았느니라”
우리가 썩지 않을 씨로 구원을 얻은 것은 하나님 아들의 죽음이라는 댓가가 지불되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사랑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주어진 썩지 않는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는 데는 우리 역시 대가지불이 없이는 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생명을 빼앗으려는 원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7.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한 우리들의 대가지불
많은 사람들이 그리스도를 따르겠다고 헌신하지만, 중도에 포기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입니다. 그 이유는 복음이 얼마나 위대하고 가치있는 것인지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고, 또 하나는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많은 희생과 댓가지불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따르기 위하여 예수님은 어떤 대가지불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일주일에 하루는 주일을 잘 지키는 것입니까? 당신의 수입의 십분일과 주정헌금과 감사헌금을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교회에서 직분을 맡아서 충성을 하라고 요구하시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일주일에 한 번이 아니라, 당신의 모든 시간을 요구하십니다.하나님은 수입의 십분의 일이 아니라, 당신의 재정의 전부를 자기 것이라고 주장하십니다. 당신의 삶의 일부를 충성하라는 것이 아니라, 당신의 목숨을 다 바쳐 주님께 충성하라고 하시는 것입니다.주님은 당신의 모든 것을 요구하십니다. 시간도, 재정도, 관계도, 목숨도 다 주님 것이라고 주장하시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일부분만 주님이 되시기를 원하시지 않고, 우리 삶의 온전한 주님이 되시기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는 영생의 댓가는 쉽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완전한 자아의 죽음을 요구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구원은 너무나 가치있는 것이기에, 그 분의 구원보다 더 가치있는 것은 이 지구상에 아무 것도 없기에, 그 분이 가져오신 영생의 가치를 안다면, 이런 것들을 포기하고 주님을 따르는 것은, 오히려 고난이 아니라 기쁨이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우리가 어떤 상태에서 구원을 받았습
마4:16절에 “흑암에 앉은 백성이 큰 빛을 보았고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은 자들에게 빛이 비취었도다 하였느니라”
우리는 이전에 진리가 없는 깊은 흑암 속에 살았고, 사망의 땅에서, 사망의 그늘에 앉아 사망의 세력에 붙들려, 아무 소망 없이 죽기를 두려워하고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망에서 생명을 주시는 분이 오셨는 데, 영원한 멸망을 피할 수 있는 분이 오셔서 멸망을 피할 수 있는 생명의 길을 가르쳐주셨는 데, 그것을 위해서라면, 우리가 지불하지 못할 댓가가 어떤 것이 있겠습니까?
우리 앞서갔던 믿음의 선진들은 이 댓가를 다 지불하였기에,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어 지금은 하늘에서 큰 자가 되어 하나님의 생명에 참예한 자들이 되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어떤 대가를 치루었습니까?
히11:17절에 “아브라함은 시험을 받을 때에 믿음으로 이삭을 드렸으니 저는 약속을 받은 자로되 그 독생자를 드렸느니라”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을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주심을 바라봄이라”
초대교회 성도들이 당한 댓가는 어떤 것입니
히11:35이하에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하였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갖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란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왜 이들이 이런 고난을 감수하였습니까? 그들이 얻은 구원의 가치가 너무 크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우리의 일생이 길어야 한 뼘과 같습니다.
시39:5-7절에
“주께서 나의 날을 손 넓이만큼 되게 하시매 나의 일생이 주의 앞에는 없는 것 같사오니 사람마다 그 든든히 선 때도 진실로 허서 뿐이니이다 ... 주여 내가 무엇을 바라리요 나의 소망은 주께 있나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겨우 한 뼘밖에 않되는 삶을 붙들려다가,영원한 실재를 놓치고 말았다는 사실을 명심하십시요! 이 세상의 부귀 공명은 그것이 아무리 좋아도, 영원한 세월 속에서 보면, 한 평도 아닌 겨우 한 뼘 인생이고, 점 하나 찍는 시간입니다.
순식간에 사라질 헛된 세상에 우리들의 인생을 투자하지 말고, 영원히 썩지 않는 구원인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어가는 데, 모든 댓가를 지불하며,여러분과 저의 일생을 투자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