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샬롬(그리스도의 평화)
억울해? 그래서...
처음에는 가해자와 피해자가 엄연히 있었다.
그런데 피해자가 너무 억울해서 가해자의 신상을 공개했다.
이로부터 둘은 서로 가해자와 피해자가 되었다...
피해자가 너무 억울하다며 공격을 했기에...
그래서 예수님께서 특단의 해결책을 주셨다.
가해자와 피해자!
누가 칼자루를 쥐고 있을까?
알고보면 피해자가 칼자루를 쥐고 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칼자루를 쥐고 있는 피해자에게 그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가보다.
가해자는 처음에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실수일 수도 있고, 감정처리가 되지 않아서 그랬을 수도 있고...
그런데 피해자가 저지르는 이후의 일들은 모두 계획적이고 의도적이다.
그러므로 만약 심판을 한다면 누구의 죄가 더 크고 무겁겠는가?
우리는 이것을 보지 못한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셨는가보다.
그가 가해자보다 더 큰 죄를 지을 수 있기에 그러셨나보다.
원수를 사랑하는 일이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란다.
완전한 사람이 되는 길이 쉽겠는가?
그래서 그것이 내 힘과 노력만으로 되지 않기에 우리는 예수님 앞에
모였다. 주님께 의지하고 완전으로 이끌어 주시길 소망하며 교회로
모였다.
가해자든 피해자든 둘 다 사랑하시는 주님께서는 이렇게 부탁하셨다.
"복수는 내가 할 일, 내가 보복하리라."(히브 10,30)
그러니 지금 내가 할 일은 성체 앞에 나아가 엎드리는 일뿐이다.
주님께서 하실 일을 내가 하려고 하는 것이 바로 내가 하느님의 역활을
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샬롬(그리스도의 평화) 한 형제가 서로에게 칼을 휘두리고 있는 모습을 지켜보는 아버지의 마음은 어떠실까? 나의 억울함만 보지 말고 내가 이러고 있을 때에 나를 바라보시는 아버지의 마음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참으로 아버지라고 느끼고 산다면...
가해자의 입에서 하나의 칼이 나와 내 심장을 찔렀다면 피해자의 입에서는 쌍칼이 나와 가해자의 심장을 찌를 수도 있기에 피해자에게 네가 직접 원수갚으려 하지 말고 당신께 맡기라고 하셨나보다. 주님께 맡기면 어떻게 될까? 나도 살고 그도 살게 해 주신다. 주님께 맡기지 않으면 서로가 찌르는 칼에 의해 두 자녀가 다 죽는다. ㅠㅠㅠ
이 세상에 예수님처럼 아무 죄 없이 억울하게 당했다고 자신 있게 손들고 나올 사람이 있는가? 예수님, 아무 죄 없이 당하셨다. 왜 그렇게 비참하게 당하셨을까? 그것밖에 살릴 길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사랑밖에 다른 길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우린 예수님의 이 모습을 닮겠다고 철석같이 세례받으며 약속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그 엄위하신 하느님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지키지 않고 살면서 누리는 용서하시는 사랑은 보지 않는다.
내가 주님 앞에서 저지른 그동안의 모든 일들을 지금 이자리에서 셈하자고 하신다면 감당할 자 어디 있겠는가? 이것저것 다 용서하시며 내가 사람되길 기다려 주시는 그 사랑을 볼 마음은 있는가?
"너희들 가운데 죄 없는 자가 먼저 저 여자에게 돌을 던져라."(요한 8,7) 하신 말씀을 한번쯤은 새겨 보았는가? 성경 말씀 중에서 어느 한가지라도 붙들고 살고자 기도했는가? 나는 그동안 주님의 기도를 어떻게 했는가? 주님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길 기도했는가? 내 뜻이 이루어지길 기도했는가? 나는 누구인가? 바오로 사도의 고백이 들려온다. "나는 내가 하는 것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나는 내가 바라는 것을 하지 않고 오히려 내가 싫어하는 것을 합니다...나는 과연 비참한 인간입니다. 누가 이 죽음에 빠진 나를 구해 줄 수 있습니까?"(로마 7,15 이하 참조)
예수님께서는 죄의 종노릇을 하는 나를 불쌍히 여기시어 부르셨다. 그리고 그동안의 모든 죄를 용서해 주셨다. 간음한 여인에게 하셨던 그 용서를 나도 받았다. 그리고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는 부탁도 들었다. 나는 이 말씀에 심하게 저항했다. 아니, 모든 것을 다 아시는 하느님께서 내가 어떤 놈인지 잘 아심시렁 다시는 죄 짓지 말라고 하신다고 그것이 안 되는 줄 뻔히 아시면서 왜 그런 부탁을 하시냐고 심하게 저항했다. 거의 20년 가까이 이 말씀이 못마땅했다. 왜일까? 난 나약한 인간임을 잘 알기에 그랬다. 난 참으로 쉽게 유혹자의 유혹에 잘도 넘어가는 그런 존재임을 잘 알기에 그랬다. 그런데 이제는 그 말씀이 의미하는 바를 조금은 이해한다. 예수님은 내가 죄의 종노릇을 할 때에 참으로 아프셨다. 그러니 이제는 제발 그 죄의 종노릇을 하지 말라는 간절한 부탁이었다. 이제 너는 죄의 종이 아니고 당신의 사랑의 종이되어야 한다는 부탁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지금껏 죄의 종노릇 할 수 밖에 없는 나의 나약함만 보았다. 정작 내가 봐야 할 곳은 나의 나약함이 아니라 주님의 사랑인 것을... 나는 늘 그럴 수 밖에 없는 나의 나약한 현실과 한계만 바라보고 내가 죄의 종살이를 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했기에 예수님의 말씀에 저항했다. 그런데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고백하신다. 자신을 죽음에서 구해 주실 하느님께 먼저 감사드린다.
"나도 너를 단죄하지 않는다. 가거라. 그리고 이제부터 다시는 죄짓지 마라."(요한 8,11) 예수님께서 나를 단죄하지 않고 보내 주셨기에 나도 당신처럼 형제들과 이웃들을 단죄하지 않는다면 된다는 말씀이었다. 네가 간음했다고 너를 끌고 와서 이런 짓을 한 사람들을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듯이 너도 단죄하지 않는 것이 죄를 짓지 않는 길이라고 말씀하시는 것 같았다. 그 여인이 간음한 것이 사실일 수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공개적으로 그렇게 했다면 그 여인이 차후 어떻게 살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 여인에게 그렇다고 해도 내가 너를 단죄하지 않고 보내니 너도 저들에게 내가 너에게 한 것처럼 하라는 부탁이셨을지도 모른다...
인생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한계와 나약함으로 많은 실수와 허물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것을 모르실 주님이 아니시다. 그런데 이러한 실수와 허물이 그 자체로 되가 될까? 죄로 이끄는 계기는 될 수 있지만 ... 그럼 성경에서의 죄는 무엇일까? 하느님의 역활을 인간이 하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인가? 바로 단죄하는 것이라 생각한다.
살 수 있는 비결...
일단 성경을 많이 읽어야 합니다.
그러면 살아가면서 닥치는 순간 순간 그 상황에 맞는 성경 구절이
탁 나타나 나에게 말씀을 건네십니다.
이것이 신비입니다.
이때 떠오른 말씀을 내가 계속 되되이면 어느새 그 말씀에 의해
주님의 평화를 누리게 됩니다.
사도 바오로께서 로마서 12장에 그리스도인의 새로운 생활에 대해
아주 구체적으로 말씀해 주시고 계십니다.
이렇게 성경을 읽어가다보면 어느새 말씀이 혼돈으로 어지럽던
내 마음에 들어오시어 새로운 질서를 잡아 주심을 체험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주님께서 일하시는 방식이기도 합니다.
새로운 창조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일하심은 늘 새로운 창조이시기에 그렇습니다.
새로운 창조는 삶을 정돈해 주시는 것인데
모든 것이 각자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있어야 하는 자리에 있지 않으면 평화가 깨어집니다.
사랑이 있어야 하는 자리에 미움이 있어서 평화가 깨어졌다면,
그 미움을 제 자리로 보내주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렇게 기도합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명령한다.
사탄아 물러가라. 예수께로 가라."
저는 왜 사탄을 예수께로 가라고 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습니다.
지금은 이해합니다.
사탄을 감당하고 그를 묶을 분은 예수 그리스도이시기에 그분께로
보내야 하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