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형상(Imago Dei)론
개혁파 하나님의 형상견해(카톨릭, 루터파,개혁파) 대표적인 견해들
A. 로마 카톨릭의 견해
1)형상과 모양을 구별하여 설명함.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로마 카톨릭의 견해는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구별해서 이해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양과 형상을 따로 이해하려는 경향이다. 하나님이 인간에게 처음 창조했을 때, 하나님의 형상이라고 말한다. 인간의 형상은 도덕적인 인격체로서의 인간을 말하는 것이다. 자연인의 상태를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자연인의 상태로 지음을 받은 인간의 상태를 보면, 갈등을 일으키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고급한 감정과 저급한 감정이 갈등을 일으키면서 나아가는 것이라 말한다.
2)이것이 원시적 결함의 상태를 말한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처음으로 말하는 것을 말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것을 극복하도록 특별한 은사를 주었는데 그것을 원시적 의라고 한다. 적극적으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갈 수 있는 능력을 하나님의 모양이라고 보았다. 그러한 상태에서 아담의 타락이 일어나기 전의 상태에서 아담의 타락이 일어나게 되는데 그 결과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어떻게 되는가? 하나님의 모양은 부숴지지만 하나님의 형상을 그대로 남아 있다. 사람의 인격적인 부분은 그대로 남아 있다. 하나님의 형상은 여전히 상처 입지 않았기 때문에 자연인이 자연인의 이성으로 어느 정도 찾아 갈 수 있는 것이 토마스의 자연신학이다. 이것은 사람의 심각성을 약화시켰다. 아담이 전적으로 부패했다는 것이 로마 카톨릭에서 설명할 수 없다는 것이 여기에 있다.
비판:
1)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이 같은 의미로 성경에서 쓰여졌는데 여기서는 다르게 쓰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창1:26,7을 보면, 하나님이 창조하고 하는 의도가 들어 있다. ‘우리가’ 논의했다. 우리가 우리의 형상대로 창조하자는 하나님의 의도가 나타나 있다. 의도의 성취가 나타나 있다.
26절의 의도와 27절의 성취와의 관계를 보면, 하나님의 의도가 제한되어야 할 특별한 의도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의 모양을 따라 라고 하는 말은 형상 대로라는 말의 또 다른 의미이다. 히브리어 원문에 보면 접속사가 없고 콤마로 되어 있는 즉 동격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복적인 이야기이다.
성경의 여러 본문에서 두 가지 의미가 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창 1:26 -창5:6 (하나님의 모양 - 범죄한 이후에도 여전히 그렇게 쓰여지고 있다), 9:6에는 모양과 형상이 동시에 쓰여지고 있다.
2) 아담의 타락이 그의 후손들에게 미친 영향력의 심각성을 간과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인간의 전적 부패를 약화시키고 있다는 사실이다.
B. 루터파의 견해
1)제한된 개념을 가지고 있다. 영적인 요소들에 제한시키고 있다. 엡4: 24
영적인 요소로서 이해하니까 아담의 타락 이후에 하나님의 형상을 완전히 소실된 것으로 보게 된다. 자연인의 모습 가운데서 하나님의 흔적을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한다. 신정통주의자들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하나님의 내재성 부정//인간은 전적 타자-박은제 주) 로마 카톨릭의 견해를 강력히 반대하는 이유도 인간의 이성으로 하나님을 찾아가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보는 것이다. 칼바르트 같은 사람들도 강력히 반대한다.
2)하나님의 형상을 제한적으로 보다 보니까 타락하기 전의 인간의 상태는 천사들의 존재의 본질하고 구별하기 어려운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을 영적인 요소들이라고 하니까 타락하기 전의 인간의 본질로 보니까, 천사들과 어떻게 볼 것이냐? 인간의 본질과 동물의 본질과 구별하기가 어려워진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형상이 다 소실되어 버린 것으로 보니까.
비판
3)성경은 인간이 타락한 이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살인하지 말라는 금령을 말하면서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함을 받은 인간이므로 살인하지 말라고 하였다. 타락 후에도 성경은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소유한 것으로 보기 때문에 루터파에서는 그것을 간과했다고 할 수 있다.
C. 개혁주의의 견해
1)포괄적인 정의
협의의 하나님의 형상은 영적인 요소들, 영적인 형상을, 광의의 하나님의 형상은 다른 동물들을 능가하는 모든 인간의 특성을 말한다. 어떤 특정한 요소가 아니라 동물적 요소들을 능가하는 모든 부분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것이다. 인간의 사회적 성품, 인격, 도덕적 성품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개혁주의적 입장을 본다면, 인간 전체가 하나님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으셨다고 말함으로 인간 전체를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경향에서 타락은, 협의의 의미에서 하나님의 형상은 소실된 것으로 본다. 거룩하고 의로운 영적 부분의 형상은 소실된 것으로 본다. 그러나 광의의 영역에서는 타락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지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타락된 것이 아니라고 본다. 처음에 인간은 하나님을 지적으로 알게 되어 있었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도록 지음을 받았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이후에 그 기능이 원래의 의도대로 작동하는 것이 아니고 왜곡되게 작동하는 것이다.
3)종말론적의 성격
하나님의 형상이 그리스도 안에서 회복되어 진다고 말한다. 그 회복을 말하는 부분에 있어서 중생한 사람에게 근본적으로 회복되었다고 말한다. 그것을 우리가 골 3장을 보면 알 수 있는데, 새사람의 옷을 입은 것으로 말한다. 구원을 말할 때 종말론적인 성격으로 말하는 것처럼, 이미 구원을 받았고 구원을 향하여 나아가는 것이다. 종말론적 긴장관계(already- not yet) 속에서 표현되고 있다.
II. 역사상에 나타난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론들
A. 이레니우스
로마 카톨릭과 유사하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된 인간을 말하고 있다. 타락 후에 인간의 모습은 상실되고 그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회복된다. 하나님의 형상의 주된 내용은 인간의 결정하는 능력, 합리성 등이다.
평가.
1)하나님의 형상의 상실된 부분이 그리스도로 회복될 것을 지적한 것은 옳다.
2)그러나 형상과 모습의 개념을 구별하려는 것은 문제가 된다.
B. 토마스 아퀴나스 (신학대전에서)
1. 인간의 지성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보고 있다. 3단계로 이해하는데......
1) 하나님을 이해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성향이 본능적으로 모든 사람에게 다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모든 사람에게 다 있다고 하는 것이다. 아담의 타락 후에도 하나님의 형상이 있기 때문에 하나님을 사랑하려는 경향이 모든 사람에게 다 있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한 본능적 성향이 있다는 것이다.
2) 실제로 하나님을 사랑하려고 시도하는 단계를 말한다. 그러나 그 단계에서는 성공적으로 그 단계를 실천하지는 못한다. 그래서 의로운 사람에게만 제한시킨다.
3)축복 받은 자들 - 하나님을 이해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인데 완전하게 이루는 상태이다. 하나님의 모양을 받은 사람들이다. 결국, 토마스 아퀴나스는 하나님을 알아 가는데 지식의 측면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2. 타락한 후에도 남아 있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려는 성향이 인간에게 여전히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고차원적 축복의 상태에까지 나아가는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그것을 잘 사용하기만 하면 잘 알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고차원적 지식은 하나님의 은총에 의해서만 알 수 있다.(이층 구조)
3. 타락 전의 인간의 상태 : 원시적 결함의 상태 --- 초자연적 은총
평 가
1. 하나님의 창조 결과에 대한 부당한 평가
2. 타락의 심각성 간과
3. 이원론적 인간 이해가 문제가 된다.
C. 죤 칼빈의 하나님의 형상에 대한 이해 .
1. 아담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끼쳐진 심각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인간은 무능력하기 때문에 성령의 중생이 없으면 파괴된 인격으로 하나님께로 나아갈 수 없다. 인간은 전적으로 무능력하다.
평가>
1. 하나님의 첫 창조에 대하여 온전한 창조라고 하는 것을 정당하게 평가하고 있다.
2. 하나님의 형상이 카톨릭과 비교해 볼 때, 하나님의 형상이 심각하게 치명상을 입은 것으로 이야기하고 있다.
3. 타락 후에도 보유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지고 있다.
4. 형상과 모습의 근거 없는 구별을 거부한다.
(부정적인 면)
1. 타락 후의 하나님의 형상 유무에 대한 일관성 없는 진술
D. 칼바르트
a. 하나님 안에서 하나님의 형상을 설명하면서 ‘관계의 유비’를 주장한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을 얻을 때, 하나님이 이해하는 만큼 우리가 그대로 지식을 다 소유하는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지식과 다른 차원에서 이해하는가? 만약 똑 같은 차원에서 이해한다면 그것을 일의적 관계(Univocal relation) 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지식만큼 우리가 안다고 하면 하나님의 초월성이 무너져 버린다. 하나님에 대한 지식은 완벽한 지식은 아니지만 참된 지식이라고 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알 수는 있지만 완전히 아는 것은 아니다. 차이를 두고 있는 것이다. 차별성이 없게 되면 불가지론에 떨어지게 된다. 우리가 하나님에 대한 지식인지 아닌지 알 수 없게 된다. 이것을 equivocal relation이라 한다. 하나님과 인간의 접촉점이 없기 때문에 불가지론에 떨어지게 된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전자는 초월성을 후자는 독특성을 무너뜨리게 된다고 말했다. 하나님께서 이해하는 만큼 선의 소유를 할 수 없다. 하나님의 선하심을 어느 정도 유추적으로 이해하게 되는 것으로 본다.
칼바르트가 유비적인 관계(Analogical relation) 를 설명함에 있어서, 창 1:17을 해석할 때 평행구로 해석하고 있다.
하나님이 자기의 형상대로 사람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그를 창조하였다.
남자와 여자로 창조하였다.
1.남자와 여자의 형상으로 창조한 것은 관계성을 의미한다. 이 관계성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형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2.언약적 관계성 -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응답하는 상대자.
하나님의 창조주의 심판주의 초월성을 극대화,
실제로 타락의 상태에서 은혜의 상태로 옮겨가는 것의 실제를 반대하고 은총의 승리를 강조한다.
c) 하나님의 형상의 회복을 말할 때, 그것을 단순히 관계성의 차원에서만 말하게 된다면, 그 변화는 형식적인 차원의 것으로만 전락될 수 있다.
평 가
존재론적 차원과 존재의 역동적 관계성을 양극화시킬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형상의 이해에 있어서 역동적인 것을 약화시킨다. 구원은 존재론적 관점이 아니고 역동적 관계성에 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를 받을 수 있으나 , 단순히 관계론 뿐만 아니라 실제론이 복합적으로 포함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