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의 세례(교황 베네딕토 16세 지음 )

2015. 8. 27. 오후 7:51:06

글자

나자렛 예수 / 예수님의 세례                                                           

교황 베네딕토 16세 지음


예수의 공생활은 요르단 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면서부터 시작된다. 마태오는 이 사건을 정해진 형식에 따라 ‘그날들에’라는 말로 시기를 표현했다. 하지만 루카는 같은 사건을 당시의 세계사적인 맥락 안에 자리를 매겨 이 사건의 정확한 연대기적 자료를 제공한다. 그는 복음서 첫머리에서 예수의 족보를 소개한다. 이 족보는 아브라함과 다윗의 족보에 뿌리를 두고 있다. 그리하여 예수를 아브라함의 약속을 상속받은 분이며 동시에 하느님이 다윗에게 다짐하신 대로, 이스라엘의 모든 죄와 그에 대한 하느님의 징벌을 통해 약속하셨던 영원한 왕권을 상속받는 분이라고 소개한다.

이 족보에 나타나는 역사는 열네 세대가 세 번 되풀이되는 식으로 전개된다. 열넷이라는 숫자는 다윗이라는 이름을 숫자로 풀었을 때의 값이다. 이 열네 세대는 세 시대에 걸쳐 되풀이되는데, 첫 시대가 아브라함에서 다윗까지이고, 둘째 시대가 다윗에서 바빌론 귀양살이까지이며, 이어서 다시 한 번 열네 세대의 시대가 뒤잇는다. 그런데 열네 세대가 마지막으로 다시 한 번 지나게 된다는 사실은 이제 바야흐로 다윗이 올 시간, 다윗 왕조의 시기가 하느님이 당신의 왕국을 세우실 시기로서 다가왔음을 보여준다.


복음사가 마태오가 유다계 그리스도인이기에 이것은 또한 유다왕국 중심의 구원사를 보여주는 족보이기도 하다. 이런 역사관에서는 세계사 전반에 대해 조명한다고 해도 기껏해야 다윗의 결정적인 왕국을 하느님의 왕국으로 기대했다는 범위 안에서만 가능하다. 하느님 나라는 당연히 전 세계를 안중에 두기 때문이다. 따라서 구체적인 연대 계산도 막연할 수밖에 없다. 이 족보 이야기는 실제 역사대로 계산한 것이라기보다 구원의 약속이 세 단계로 진전되어 왔음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며 정확하게 연대를 따져서 그 시기를 확정지으려는 의도에서 작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여기서 우리는 루카가 예수의 족보를 복음서 첫머리에 소개하지 않고 예수의 세례 이야기를 마무리하는 부분에서 전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는 우리에게 이렇게 전한다. 예수는 세례를 받으시던 시점에 나이가 서른 살쯤 되셨다고 한다. 당시에는 이 나이가 되면 공적으로 그러니까 사회적으로 활동할 수 있는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다. 루카는 마태오와 달리 자기가 소개하는 예수의 족보에서 선조로부터 후손으로 내려오는 순서를 밟지 않고 예수로부터 그에 앞서 있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가는 순서를 따른다.

아브라함과 다윗도 별로 강조하지 않고 족보는 그대로 아담까지, 창조사업 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실제로 루카는 아담 이름 다음에 하느님 이름을 최종적으로 추가한다. 이렇게 예수의 사명이 보편적이라는 사실이 뚜렷하게 드러난다. 예수는 아담, 곧 사람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분이 사람이시기에 우리 모두는 그분께 속하고 그분은 우리에게 속하신다. 그분 안에서 인류는 새로 시작하고 또 최종 목적지에 도달한다.


세례 이야기로 다시 돌아오자. 루카는 예수의 유년기 설화에서 두 가지 중요한 연대 자료를 우리에게 제공한다. 그는 세례자 요한이 세상에 처음으로 태어났을 때 그 시기를“헤로데가 유다의 왕이었을 때”(1,5)라고 전한다. 이렇게 세례자 요한과 관련되는 시간 자료가 유다왕국의 국내 역사로 한정되어 있는 데 반해 예수의 유년기 설화는 이런 말로 시작한다.“그 무렵 아우구스투스 황제에게서 칙령이 내려….”(2,1) 곧 전 세계 역사가 로마제국의 이름을 빌려 이 이야기의 배경으로 등장한 것이다.


루카는 세례자 요한의 이야기를 소개하면서 예수의 공생활의 시작을 알리는데, 이제 그 이야기의 실마리를 다시 거머쥐고 엄숙하고 정확하게 말한다.“티베리우스 황제의 치세 제십 오년, 본시오 빌라도가 유다 총독으로, 헤로데가 갈릴래아의 영주로, 그의 동생 필리포스가 이투래아와 트라코니티스 지방의 영주로, 리사니아스가 아빌레네의 영주로 있을 때, 또 한나스와 카야파가 대사제로 있을 때….”(3,1-2) 이와 같이 로마 제국의 황제 이름을 언급함으로써 예수의 시간적인 자리매김을 세계사의 맥락 안에 정확하게 제시한다.

예수의 활동을 신화처럼 그 어느 때인가 일어난 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신화에 등장하는 때는 언제든지 있을 수 있고 또한 한 번도 없었던 때일 수도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예수의 공생활은 정확하게 연대를 측정할 수 있는 역사적 사건이요, 실제로 있었던 인간 역사의 모든 진지함을 지니고 있는 사건이다. 물론 그 역사는 한 번뿐인 역사이면서 언제고 그때그때의 각 시대와 나누는 동시대성(同時代性)을 띠고 있다. 이것은 신화의 무시간성(無時間性)과는 전혀 다르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연대 측정만이 아니다. 황제와 예수가 대변하는 두 체제가 서로 다르다. 이 두 체제가 반드시 서로 배타적이어야 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인류와 인간존재에 관련되는 근본 문제를 놓고 서로 대치하다 보면 갈등을 빚을 수 있는 위험을 안게 된다. 뒷날 예수는 이렇게 말씀하신다.“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돌려주고,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드려라.”(마르 12,17) 이렇게 해서 그분은 이 두 영역이 원칙적으로 공존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표현하셨다.

그러나 아우구스투스가 자기를 세계평화를 가져다준 사람으로, 인류의 구원자로 자처하면서 시도했듯이, 황제권이 직접 스스로를 신격화하고 나선다면 그리스도인은“사람에게 순종하는 것보다 하느님께 순종”(사도 5.29)해야 한다. 그렇게 되면 그리스도인은‘증거자’가 되고 그리스도의 증인이 된다. 그리스도는 본시오 빌라도 통치 아래서 십자가에 달려‘진실한 증인’으로서 돌아가셨다.(묵시 1,5) 본시오 빌라도라는 이름과 함께 예수의 공생활에는 십자가의 그늘이 드리운다. 십자가는 또한 헤로데, 한나스, 카야파라는 이름에도 예고되어 있다.


당시 팔레스티나 땅을 나눠서 차지하고 있던 영주들을 이렇게 황제와 함께 나란히 늘어놓음으로써 또 다른 사실이 드러난다. 이 영주들은 모두 이민족인 로마제국에 예속되어 있었다. 다윗 왕국은 오래전에 붕괴되었고 그의‘초막’은 쓰러졌다.(아모 9,11-12) 예수의 양부 요셉은 다윗의 자손이었지만 이방인이 뒤섞여 살던 갈릴래아 지방의 한낱 장인(匠人)에 지나지 않았다. 이스라엘은 다시 한 번 하느님이 보이지 않는 어둠 속에서 살고 있었고 아브라함에게 주신 약속들은 하느님의 침묵 속에 가라앉은 듯했다. 그러니 이제 예언자도 하나 없으며 하느님은 당신 백성을 버리신 것만 같다고 또다시 탄식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었다. 바로 그 때문에 나라는 온통 불안과 소요 가운데 휩싸였다.

당시 종교적이며 정치적인 환경은 서로 좌충우돌하는 운동과 희망과 기대로 뒤끓고 있었다. 예수께서 탄생하실 무렵 갈릴래아 출신의 유다라는 사람이 봉기를 일으켰으나 이 반란은 로마인에게 무참히 진압되었다. 그를 지지하는 열혈당원들은 그 뒤에도 살아남아 이스라엘의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테러와 폭력도 마다하지 않았다. 예수의 열두 사도 중 한두 사람, 곧 열혈당원 시몬과 어쩌면 유다 이스카리옷이 이 계파 출신이었을지도 모른다.

우리가 복음서에서 자주 만나는 바리사이는 토라의 규정을 일상생활에서 가능한 한 정확하게 지킴으로써 로마의 획일주의적인 문화에 순응하지 않고 거기서 벗어나려 했다. 사실 이 획일주의 문화는 로마제국의 판도 안에서는 어디서나 거의 자동적으로 요구되는 것이었고 그래서 이민족 세계의 생활방식으로 이스라엘 고유의 동질성을 위협하고 있었다. 사두가이들은 대부분 귀족출신으로 사제가문에 속하는 사람들이었다. 이들은 사상적으로 계몽된 사람들로서 당대의 시대정신에 맞추어 개화된 유다교를 신봉하려 했고 따라서 로마제국의 지배와 타협하면서 살아가려고 했다. 이들은 기원 후 70년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된 다음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졌다. 반면에 바리사이의 생활방식은 미쉬나와 탈무드의 특색을 띠는 유다교에 그 모습을 지속적으로 고스란히 남길 수 있었다. 복음서에 보면 예수와 바리사이가 자주 신랄하게 대립하는 모습을 관찰할 수 있다. 그런가 하면 그분의 십자가 죽음은 열혈당의 정책노선과 정면으로 대립되는 것이었다. 여기서 우리가 잊어서는 안 될 것이 하나 있다. 곧 예수를 찾아온 사람들은 온갖 계파와 노선에 속한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초창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에는 사제들과 왕년의 바리사이가 꽤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몇 년 지나지 않아 우연한 발견이 계기가 되어 쿰란에서 대대적인 고고학적 발굴작업이 착수되었다. 그 결과 많은 문헌이 처음으로 공개되었다. 일부 학자들에 따르면 이 문헌들은 그전까지는 문헌자료로만 알려져 있던 에세네파 운동과 관련 있는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 집단은 헤로데가 지은 성전과 종교의식에 등을 돌리고 유다 사막으로 물러가 일종의 수도원과 같은 공동체를 창설했다. 이 공동체 회원들은 종교적 동기에서 한 가족처럼 공동생활을 했고, 몇 가지 전례적인 세정례와 공동기도를 포함한 의식서 같은 문헌들을 많이 만들어 냈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와 그의 가족은 어쩌면 이 공동체와 가까이 지냈을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쿰란의 문헌들에는 그리스도교의 메시지와 일치하는 내용이 많다. 세례자 요한이 한때 이 공동체에서 살면서 거기서 종교교육을 받았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하지만 세례자 요한의 출현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다. 그는 세례를 받으라고 외쳤다. 그러나 그의 세례는 당시에 흔히 있던 종교적 세정례와 다른 점이 있었다. 그의 세례는 반복해서 받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한번 받으면 일생을 새롭게 살겠다는 회심을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야 했다. 이 세례는 이제까지의 생각과 행동을 새롭게 바꾸라는 열화와 같은 외침과 아울러 무엇보다도 하느님의 심판이 임박했다는 통고와 세례자 요한보다 뒤에 오실 더 크신 분을 기다리라는 선포와 직결되어 있었다. 하긴 넷째 복음서인 요한복음서는 세례자가 자기보다 더 크신 이분을‘알지 못하였다'(1,30-33)고 전한다. 그러나 그는 자기가 이 신비스런 다른 분의 길을 예비하러 왔다는 것과 자신의 사명이 그분을 맞이하게 하는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네 복음서는 한결같이 그의 사명을 예언서에서 따온 한 구절을 가지고 기술한다. “한 소리가 외친다.‘너희는 광야에서 주님의 길을 닦아라. 우리 하느님을 위하여 사막에 길을 곧게 내어라.”(이사 40,3) 마르코는 여기에다 말라키서(3,1)와 탈출기(33,2)에서 따온 구절을 혼합해서 추가로 인용한다.

마태오복음서(11,10)와 루카복음서(1,76 ; 7,27)에서도 이 혼합 인용구절을 볼 수 있는데 다만 그 맥락이 다를 뿐이다. “보라, 내가 네 앞에 내 사자를 보내니 그가 너의 길을 닦아놓으리라.”(마르 1,2) 이 모든 구약성경 본문이 말하는 것은 하느님께서 심판하고 구원하시기 위해 마침내 숨어 계신 곳에서 나와 개입하시게 되었으니 그분께 문을 열어드리고 길을 닦아드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세례자 요한의 설교와 함께 이 모든 희망의 말씀들은 이제 하나의 현실이 된다. 과연 큰일이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전갈이다.

우리는 세례자 요한이라는 인물과 그 전갈이 당시 부글부글 뒤끓던 예루살렘의 역사적인 분위기에서 불러일으켰을 엄청난 인상을 충분히 상상할 수 있다. 마침내 예언자가 나타난 것이다. 그의 생활 자체가 예언자로서의 신원을 말해 주었다. 드디어 하느님이 다시 역사 안에 행동하러 나서신다는 소식이 알려진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요한보다 더 크신 분이 성령과 불로 세례를 주러 곧 오신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성 마르코가 전하는 보도를 터무니없는 과장이라고 할 수 없다. “온 유다 지방 사람들과 예루살렘 주민들이 모두 그에게 나아가, 자기 죄를 고백하며 요르단 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1,5) 요한의 세례에는 고해성사와 비슷하게 죄를 고백하는 절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그 시대의 유다교에도 죄의 고백이 있기는 했다. 그것은 대체로 일반적이고 틀에 박힌 고백이었지만 저지른 죄를 하나하나 털어놓는 매우 개인적인 죄 고백도 없지 않았다.(그날카Gnilka,「마태오복음Das Matthäusevangelium」Ⅰ,68쪽) 이제까지의 죄스런 생활을 청산하고 이제부터 새로 삶을 바꾸러 나선다는 뜻이다.


세례의 진행절차가 이를 잘 상징한다. 우선 물속에 잠기는 침례의식은 죽음을 상징한다. 모든 것을 쓸어버리고 파괴하는 큰물은 죽음을 상징했다. 옛 사람들에게 넓은 바다는 우주와 땅을 늘 위협하는 무서운 존재로 생각되었다. 그것은 모든 생명을 집어삼킬 수 있는 원초의 큰물이었다. 침례의식에서는 흐르는 강도 바로 이 상징을 수용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은 무엇보다도 흐르는 물로서 생명을 상징한다. 나일, 유프라테스, 티그리스 같은 강들은 생명을 베푸는 커다란 강이다. 요르단 강도 오늘에 이르기까지 주변에 생명을 주는 샘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일생의 짐이 되고 그 일생을 망가뜨리는 과거의 더러움을 씻어내고 그로부터 자유로워져 다시 시작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그것은 죽음과 부활이요, 앞으로 새 삶을 시작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결국 다시 태어난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나중에 그리스도교의 세례신학에서 명확하게 전개될 것이다. 그러나 그 단초는 요르단 강에 내려가 물속에 잠겼다가 다시 올라오는 침례의식에 이미 놓였다.


온 유다 지방과 예루살렘이 세례를 받으러 순례의 길을 떠나 몰려온다. 그러나 이제 무언가 새로운 일이 벌어진다. “그 무렵에 예수님께서 갈릴래아 나자렛에서 오시어 요르단에서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마르 1,9) 이제까지 갈릴래아에서 순례자들이 왔다는 말은 없었다. 모든 게 유다 지방에 국한된 일로 보였다. 그렇다고 예수께서 지리적으로 다른 지역에서, 그러니까 먼 데서 오셨다는 사실이 새로울 것은 없다.

진짜 새로운 사실은 예수 그분이 세례를 받으려 하신다는 것, 그분이 요르단 강가에서 기다리고 있던, 풀이 죽은 죄인들의 무리에 섞여 들어오셨다는 것이다. 앞에서 보았듯이 세례에는 죄의 고백이라는 절차가 포함되어 있었다. 세례 자체는 하나의 죄의 고백이고 묵은 생활, 빗나간 삶을 벗어버리고 새로운 삶을 받아들이겠다는 시도였다. 과연 예수께서 그러실 필요가 있는가? 어떻게 그분이 죄를 고백할 수 있는가? 어떻게 지금까지의 삶을 떠나 새로운 삶으로 방향을 바꿀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이런 의문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

세례자 요한과 예수께서 나누었던 대담이 마태오가 우리에게 전하는 대로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예수께 던지는 물음을 표현하는 것이기도 하다. “제가 당신에게 세례를 받아야 할 터인데 당신이 제게로 오시다니요?”(마태 3,14) 마태오는 이어서 이렇게 전한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이렇게 해서 우리는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하고 그에게 이르셨다. 그제야 요한은 그분 뜻대로 하였다.”(15절)


이 수수께끼 같은 예수의 대답을 풀어내기란 쉽지 않다. 어쨌든 ‘지금은(그리스어로 아르티)’이라는 말에는 일종의 유보의 뜻이 숨어 있다. 곧 잠정직인 상황에서는 거기에 상응하는 일정한 행동방식이 타당하다는 뜻이다. 예수의 대답을 해석하는 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의로움’이라는 낱말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달렸다. 예수께서 사시던 당대에서 의로움이란 토라(곧 모세의 율법)에 대한 인간의 응답, 하느님의 모든 뜻을 받들어 모심, 누군가의 표현대로 ‘하느님 나라의 멍에’를 지는 일을 의미했다. 요한의 세례는 토라에 따로 규정된 것이없다. 그러나 예수는 이 응답의 말씀으로, 요한의 세례를 하느님의 뜻에 무조건 “예.”하고 드리는 응답의 표현으로, 그분의 멍에를 순종하여 받아들인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보고 그 세례를 인정하셨다.

세례의 물속으로 잠겨 내려가는 동작에는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빌면서 새로 시작하겠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으므로, 죄에 물든 세상에서 하느님의 모든 뜻을 따르겠다고 “예.”하고 응답하는 것은 죄의 허물을 지니고 있는 인간들과 연대를 이룬다는 표현이기도 하다. 이 절차의 모든 의미는 십자가와 부활에서 비로소 알아볼 수 있다. 세례 지원자는 물속에 잠겨 내려가면서 자기 죄를 고백함으로써 자신이 죄의 상태에서 지고 있는 짐을 덜어내려 했다. 그렇다면 예수는 그 순간 무엇을 하셨을까? 루카는 그의 복음서 전편에 걸쳐 예수의 기도에 각별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분을 늘 하느님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면서 기도하는 분으로 묘사하는데, 그는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신 다음 기도하셨다고 한다.(3,21) 그리스도교는 십자가와 부활을 통해 예수의 세례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분명하게 깨닫게 되었다. 예수는 온 인류의 죄를 당신의 두 어깨에 짊어지고 그 짐을 날라 요르단 강 속으로 가라앉히셨다. 그분의 첫 공생활은 바로 죄인들과 자리를 함께하시는 일로 시작되었다. 그것은 십자가를 미리 짊어지는 일이었다. 그분은 말하자면 참된 의미의 요나다. 요나는 같은 배에 타고 있던 사람들에게 말했다.“나를 들어 바다에 내던지시오.”(요나 1,12) 예수의 세례가 갖는 모든 의미, 곧‘모든 의로움’을 지고 가신다는 의미는 십자가에서 비로소 밝혀진다. 세례는 인류의 죄를 위해 죽음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리고 세례 때 들려온 소리,‘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하는 소리는 부활을 미리 알려주는 소리다. 그리하여 예수 자신의 말씀에서 세례라는 말은 곧 그분의 죽음을 표현한다는 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마르 10,38 ;루카 12,50)


그리스도교의 세례도 여기서부터 비로소 이해할 수 있다. 예수의 세례에서 십자가 죽음이 미리 앞당겨 이루어지고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가 그분의 부활을 예고하는데 이것이 이제 정말 현실이 된 것이다. 그리하여 요한의 물의 세례도 예수의 삶과 죽음이라는 세례로 그 충만한 의미를 얻게 되었다. 세례를 받으라는 초대에 응하는 것은 이제 예수의 세례 장소로 옮겨가서 우리와 같이 되신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과 같아지는 것을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한다. 죽음이 미리 이루어지는 그 지점이 그분과 함께하는 우리의 부활이 미리 이루어지는 지점이다. 바오로는 그의 세례신학을 전개하여(로마 6장)이 내면적인 연관성을 잘 보여주었다. 비록 예수께서 요르단 강에서 받으신 세례를 명확하게 언급하지는 않았어도 말이다.

동방교회는 전례와 성화신학에서 예수의 세례에 대한 이와 같은 이해를 더욱 확장하고 깊였다. 동방교회는 주님 공현대축일(하늘에서 들려온 소리가 예수께서 아드님임을 공포한 것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동방교회에서는 이날 세례성사를 집전하는 관습이 있다.)의 내용과 예수 부활 대축일이 깊이 연관된다고 보았고,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에게“지금은 이대로 하십시오. 우리는 이렇게 해서 마땅히 모든 의로움을 이루어야 합니다.”(마태 3,15) 하신 말씀은 겟세마니에서 아버지 하느님께 기도를 드리면서“아버지, …제가 원하는 대로 하지 마시고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하십시오.”(26,39)라고 하신 말씀을 미리 앞당겨 하신 것으로 보았다. 1월 3일에 부르는 동방교회의 전례 성가는 성주간 수요일 성가에, 1월 4일에 부르는 성가는 성주간 목요일 성가에, 1월 5일에 부르는 성가는 성 금요일과 성토요일 성가에 맞물려 어우러진다.

동방교회의 성화도 예수의 세례와 부활이 서로 맞물려 어우러지게 한다. 예수 세례 장면을 그린 성화는 물을 물 무덤처럼 그린다. 그 모양은 마치 어두운 동굴 같다. 이 동굴은 하데스, 그러니까 하계, 즉 성화 특유의 지옥을 상징한다. 예수께서는 이 물 무덤 속, 명부로 내려가 그 물에 완전히 둘러싸였다는 것은 저승에 미리 내려가셨다는 뜻이 된다. 예루살렘의 치릴로는 이것을 “물속으로 내려가셔서 힘센 자를 결박하셨다.”고 표현한다.(루카 11,22 참조) 그리고 요한 크리소스토모는 이렇게 표현한다. “물속에 잠기셨다가 거기서 다시 솟아오르셨다는 것은 저승에 내려가셨다가 부활하셨다는 상징이다.” 비잔틴 전례의 트로파리아는 이와 관련되는 상징적 내용들을 더 보탰다.“요르단 강이 엘리사의 겉옷에 닿자 잠시 멎으며 뒤로 물러서고, 강물이 둘로 갈라지면서 마른 땅을 밟고 지나가게 길을 내주었다는 것은 세례의 참된 상징이다. 세례를 통해 우리는 생명의 길을 걸어서 건너가게 된 것이다.”(에브도키모프의 책, 275-276쪽)


이렇게 예수의 세례는 그분의 생에 전체를 집약하는 것으로 이해되었다. 이는 지나간 과거를 다시 거머쥐고 미래를 앞당기는 하나의 반복이다. 다른 사람들의 죄 속으로 들어서신다는 것.‘명부’로 내려가심이다. 단테의 신곡에서처럼 그곳에 구경만 하러 가신 게 아니다. 함께 고난을 겪고 대신 고난을 겪으면서 깊은 구렁 속의 문을 짓부수고 그 문을 열어젖힌 것이다. 그것은‘그 악한 자’의 집에 돌입하는 것이고 인간을 옥에 가두고 있는‘그 힘센 자’와의 싸움이다.(사실 우리는 얼마나 많은 이름 없는 권세에 얽매여 조종당하고 있는가!) 이 ‘힘센 자들’, 세계의 모든 역사는 이들을 이기려 했어도 자체적 힘만으로는 도저히 이길 수 없었다. 이‘강자들’ 보다 더 힘센‘그분이’이들의 힘을 꺾고 묶어놓으신 것이다.

그분은 하느님과 동등한 분이시기에 세상의 모든 죄와 허물을 떠맡으실 수 있었으며 낮은 데로 내려가 그것을 남김없이 겪으시며 그 바닥에 넘어져 있는 사람들과 완전히 하나가 되셨다. 이 투쟁은 존재의‘방향 전환’이다. 그러기에 이 투쟁은 존재를 새로 만들어 새 하늘과 새 땅을 준비한다. 이렇게 볼 때, 세례성사는 우리가 삶을 전환함으로써 세상을 바꾸기 위해 벌이시는 예수의 투쟁에 한몫 이바지하게 하는 선물이다. 이 전환은 바로 그분의 내려가심과 올라오심에서 이미 이루어진다.


지금까지 예수의 세례사건에 대한 교회의 전통적인 해석과 그 현실적인 적용을 살펴보느라 혹시 성경에서 너무 멀리 떨어져 나온 것은 아닐까? 이런 경우에는 넷째 복음서를 읽어보는 것이 도움이 된다. 넷째 복음서에 따르면 세례자 요한은 자기 쪽으로 오시는 예수를 보고 이렇게 말했다.“보라, 세상의 죄를 없애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시다.”(요한 1,29) 로마의 라틴식 미사전례에서는 성체분배 직전에 이 말을 낭송한다. 사람들은 수수께끼 같은 이 말의 뜻을 풀어보려고 머리를 짜내고 이리저리 궁리해 보았다. 과연‘하느님의 어린양’이란 무슨 뜻인가? 예수는 어떻게‘어린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는가? 그리고‘어린양’이 세상의 죄를 없애다니 대체 그게 무슨 뜻인가? 이 어린양이 어떻게 세상의 죄를 내다버려 죄의 존재와 현실을 무위(無爲)로 만들어 이길 수 있는가?

요아킴 예레미아스 덕분에 우리는 이 말을 재대로 이해하고 역사적으로 보더라도 틀림없는 세례자 요한의 말로 간주할 수 있게 되었다. 우선 이 말은 두 가지 구약성경 구절을 암시한다. 이사야서 53장 7절이 전하는 주님의 종의 노래는 고통당하는 주님의 종을 사람들이 끌어다가 희생제물로 바치던 어린양에 비교한다.“도살장에 끌려가는 어린양처럼 털 깎는 사람 앞에 잠자코 서 있는 어미 양처럼 그는 자기 입을 열지 않았다.”예수께서 파스카 축제일에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셨다는 사실, 그래서 이제 그분이 진짜 파스카의 어린양으로 나타나셔야 했다는 사실은 매우 중요하다. 이 어린양을 통해 그 옛날 이집트에서 탈출할 때 그 파스카의 어린양의 의미가 이제 현실로 이루어진 것이다. 그 의미란 이집트의 죽음의 지배에서 놓여나왔다는 것, 자유롭게 해방되어 그곳에서 탈출하게 되었다는 것, 그리하여 약속된 곳을 향해 자유롭게 순례의 길을 떠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다. 예수의 부활 이후부터는 어린양의 상징성이 그리스도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기본이 되었다. 이 상징성은 바오로(1 코린 5,7), 요한(19,36), 베드로 1서(1,19) 그리고 요한묵시록(5,6 참조) 등에서 발견된다.

예레미아스는 여기서 한걸음 더 나아가 다음 사실에 유의하라고 알려준다.‘탈리아’라는 아람어 낱말에는‘어린양’이라는 뜻도 있지만‘사내아이, 종’이라는 뜻도 있다.(GLNT, Ⅰ,919쪽) 그래서 세례자 요한이 말하는‘어린양’은 일차적으로 주님의 종을 암시할 수 있다. 주님의 종은 세상의 죄를 짊어지고 대신 속죄한다. 동시에 그의 말에서 이 어린양이 파스카의 어린양이라는 것도 알 수 있다.“희생제사에 도살되는 어린양처럼 참을성 있게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구세주께서는 대신 속죄를 하시는 뜻으로 죽음으로 걸어 들어가셨다. 그분은 무죄하셨지만 대신 속죄를 하시면서 그 힘으로… 전 인류의 죄를 지워 없앤다.”(같은 책, 921쪽) 이집트의 압제에서 고생할 때 파스카의 어린양의 피는 이스라엘의 해방에 결정적 구실을 했다. 이처럼 종이 되신 아드님, 어린양이 되신 목자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세상’의 해방, 인류 전체의 해방을 보증하신다.

이제 우리는 예수의 사명이 전 세계적인 보편성을 띤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스라엘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의 선택은 하느님이 모든 사람에게 다가가기 위해 걸으시는 길이다. 우리가 거듭 만나게 될 이 보편성이라는 주제는 본래부터 예수의 사명에 속하는 핵심이다. 넷째 복음서에서는 이 주제가 하느님의 어린양, 세상의 죄를 지고가서 내다버리시는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과 함께 예수께서 걸어가시는 길의 벽도부터 등장한다.

하느님의 어린양이라는 말은 예수의 세례가 띠고 있는 십자가신학의 특징, 곧 그분이 죽음 속에 깊이 내려가셨다는 말의 의미를 십자가신학의 일부로 해석한다. 네 복음서는 제각기 방식은 다르지만 한결같이, 예수님께서 물에서 올라오셨을 때 하늘이‘찢어졌다’고도 하고(마르코),‘하늘이 열렸다’고도 한다(마태오와 루카), 또 영이‘비둘기처럼’그분 위에 내려왔다고 하며 그때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는데 마르코와 루카에 따르면 이 소리가 예수를 가리켜‘너’라고 부르고, 마태오에 따르면“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3,17)이라고 한다. 비둘기라는 상징은 창세기 첫머리에“그 물 위를 감돌고 있었다.”(1,2)라고 전하는 그 영을 떠올리게 한다. 이 영은 마치 비둘기 같은 모양으로 나타났다고 한다. 여기서‘…같이, …처럼’이라는 말마디는‘일종의 비유로서 결국 어떻다고 묘사할 수 없는 것을’가리킨다.(그닐카, Ⅰ,129쪽) 여기서 들려왔다고 하는 하늘의 소리는 예수의 변모 이야기에서 다시 만나게 될 것이다. 다만 거기서는“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하는 명령이 덧붙어 나온다. 이 말씀의 의미는 거기서 자세히 살펴보겠다.

여기서는 다음의 세 가지 측면만을 강조한다. 우선 하늘이 찢어졌다는 표현이다. 예수 위로 하늘이 열려 있었다. 아버지와 함께 나누시는 그분의 친교, 그분이 이루시는 그‘모든 의로움’이 하늘을 열었다. 하늘은 하느님 뜻이 완전히 이루어지는 곳이다. 이어서 하느님 아버지로부터 예수의 사명을 선언하는 말씀이 내린다. 그러나 이 선언은 예수의 사명을 행위로 설명하지 않고 존재로 해석한다. 그분은 아버지께 사랑받는 아드님이고 그분 마음에 드는 아드님이다.

끝으로 예수의 세례장면에서 아버지 하느님께서는 그분의 아드님과 함께 성령과도 우리를 만나게 하신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싶다. 삼위일체이신 하느님의 신비는 예수께서 걸어가신 길 전체를 통해 비로소 그 깊이를 드러내는 것이 사실이다. 그런 의미에서 보면 예수께서 가신 길의 첫 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예수의 세례와 그 길의 마지막에 부활하신 분으로서 제자들을 세상에 파견하시면서 주신 말씀 사이에 하나의 다리가 놓인다.“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들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마태 28,19) 이때부터 예수의 제자들이 베푸는 세례는 예수의 세례로 들어서는 것이 되고 그분이 당신의 세례와 함께 앞당겨 사셨던 현실 속으로 들어가게 한다. 이렇게 우리는 그리스도인이 된다.


한때 자유주의 신학의 성경주석에서는 예수의 세례를 그분의 소명체험으로 해석하는 흐름이 널리 퍼져 있었다. 예수는 그때까지 갈릴래아의 시골에서 지극히 평범한 생활을 했는데 세례를 통해 그의 인생이 근본부터 뒤바뀌는 체험을 했고 이 자리에서 그는 자기가 하느님과 특별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자신의 종교적인 사명이 무엇인지를 깨닫기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세례자 요한은 당대 이스라엘을 지배하던 대망사상(待望思想) 새로운 형태를 갖춰주었다. 예수의 소명의식은 이런 대망사상과 자신이 세례 과정에서 겪은 개인적인 충격적 감동이 바탕이 되어 생겨난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본문에서는 이런 이야기를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다. 이런 이론이 아무리 학술적으로 그럴듯해 보일지라도 그것은 예수의 소설이라는 문학유형으로 분류하는 게 옳지, 본문에 대한 진정한 해석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이 본문들은 예수의 속을 들여다보게 해주지 못한다. 예수는 우리의 심리적 이해 너머에 계시다.(로마노 과르디니) 그렇지만 이 본문들은 예수께서 어떻게‘모세와 예언자들’과 연계되는지 알려준다.

그리고 그분 생애의 첫 순간부터 십자가와 부활에 이르기까지 일관되는 내적 동일성을 알게 해준다. 예수는 충격적인 감동과 실패와 성공을 모두 거친 천재적인 인간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그분이 그런 사람이라면 예수는 이미 지나간 과거의 한 개인으로서 우리와는 닿을 수 없는 거리를 두고 있는 분으로 남아 있을 것이다. 우리 앞에 서 계신 그분은 아버지께‘사랑받는 아드님’이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우리와 완전히 다른 분이다. 하지만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 모두에게 동시적일 수 있고 우리 자신보다도 우리 각자와 내면적으로 더 가까우신 분이시다.(아우구스티노,「고백록」Ⅲ, 6,11 참조)


- 나자렛 예수 / 교황 베네딕토 16세 지음 / 바오로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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