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앙의 신비여!"

2015. 8. 17. 오전 8:40:20

글자


미사전례중에서

"신앙의 신비여!" 하고 사제께서 말씀하시면

신자들은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 주님의 죽음을 전하며,부활을 선포하나이다."  라고 응답합니다.


"신앙의 신비여!" '.주님께서 오실 때까지.주님의 죽음을 전하며 .부활을 선포하나이다'  의 자세한 풀이좀 부탁드립니다.



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16)

강신모 신부(선교사목국장)


 삼위일체는 사랑의 신비

1) 삼위일체는 신비입니다

지극히 거룩한 삼위일체의 신비는 바로 그리스도인의 믿음과 삶의 핵심적인 신비이다. 이는 하느님 자신의 내적 신비이므로, 다른 모든 신앙의 신비의 원천이며, 다른 신비를 비추는 빛이다. 이는 “신앙 진리들의 서열”에서 가장 근본적이고 본질적인 교리이다. “구원의 역사[救世史]는 바로 성부, 성자, 성령이신 참되고 유일한 하느님께서 당신을 알리시고, 죄에서 돌아서는 인간들과 화해하시고 그들을 당신과 결합시키시기 위한 길과 방법의 역사이지 그 밖에 다른 것이 아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34항).

삼위일체 교리는 그리스도교의 특징이고, 가장 중요한 교리입니다. 그러나 쉽게 이해될 수 없는 교리이기도 합니다. 왜 우리가 믿는 하느님은 이렇게 복잡한(모순적으로 보이는) 모습이실까요? 이슬람교처럼 “오직 한 분이신” 하느님을 믿고 살면 간단할텐데 말입니다. 우리로서는 알 수 없습니다. 그래서 신비입니다. 우리 자신의 내면도 잘 모르는데, 어떻게 하느님의 깊은 내면을 이해할 수 있겠습니까? 하느님은 삼위일체이시라고 우리는 다만 믿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알려 주셨고, 사도들이 그렇게 전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느님께서는 당신을 계시하시면서도 형언할 수 없는 신비로 머무르신다. “만일 여러분이 하느님을 이해한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닐 것입니다”(가톨릭교회교리서 230항).

2) 삼위일체는 사랑이시다

우리는 흔히 “하느님은 사랑이시다”(1요한 4,8)라고 말합니다. 그런데 사랑은 혼자 있으면 아무 의미가 없습니다. 사랑은 그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삼위일체이실 수밖에 없는 이유는 하느님께서 사랑이시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느님은 만물에 앞서 계시는 분입니다. 세상의 모든 피조물 중에서 하느님과 의논 상대가 되어 드릴 존재가 없습니다. 피조물과 하느님은 완전히 차원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홀로 계시는 분입니다. 나쁘게 말하면 외로운 분이지요. 상대가 없는 외로운 하느님, 이런 분이 사랑의 하느님이실 수는 없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통해 드러나는 하느님은 여타의 다른 종교들에서 말하는 외로운 독재자 같은 하느님의 모습이 아닙니다. 그분은 홀로 계시지만, 동시에 함께 계시는 분이십니다. 하느님 안에는 성부, 성자, 성령의 위격이 구별되어 있어서 그분들 안에서 서로 사랑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느님은 사랑이십니다!

가정에서 사랑을 제대로 체험하지 못한 사람은 사랑을 베풀기 어렵다고 합니다. 반대로 사랑을 체험한 사람은 세상에 사랑을 가져다 줄 수 있습니다. 사랑은 흘러 넘칩니다. 사랑은 기쁨이기에 저절로 노래가 나오고 세상에 소리치고 싶어집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나누시는 하느님의 사랑도 흘러 넘칩니다. 그 사랑은 흘러 넘쳐 세상을 창조합니다. 세상은 하느님 사랑의 노래입니다. 우리가 세상의 창조를 믿는다면 그것은 사랑의 하느님, 삼위일체의 하느님을 믿는다는 말과 같습니다.

3) 사랑의 구조 : 구별됨과 하나됨

“세 분이면서 하나, 구별되지만 하나”라는 삼위일체의 표현은 모순처럼 보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사랑의 구조입니다. 사랑은 앞서 말했듯이 대상이 있어야 합니다.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나르시스적인 사랑은 진정한 사랑이 아닙니다. 사랑은 나와는 다른 사람, 구별되는 사람을 필요로 합니다. 이것이 사랑의 첫 번째 전제 조건입니다. 그런데 이것만 가지고는 사랑이라고 불릴 수 없습니다. 이 구별되는 두 사람이 서로에게 끌리고, 관심을 갖고, 아껴주고, 궁극적으로는 하나가 되려는 방향으로 움직여야 합니다.

이처럼 사랑은 그 구조상 “구별되지만 하나”를 지향합니다. 논리적으로는 무척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지만, 사랑을 하면 저절로 알게 되는 체험입니다. 그래서 사도 요한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서로 사랑합시다.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이는 모두 하느님에게서 태어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사랑하지 않는 사람은 하느님을 알지 못합니다.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입니다(1요한 4,7-8).

4) 삼위일체의 삶으로 초대받은 우리

삼위일체를 묵상하면서 우리는 인간관계의 기본 원칙을 발견하게 됩니다. 올바른 인간 관계, 즉 사랑의 관계는 “구별됨과 하나됨”의 긴장 관계에서 생겨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에게는 두 가지 유혹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하나됨”만 고집하려는 유혹입니다. 우리는 배우자나 자녀를 사랑한다는 미명하에 그들에게 정도 이상의 것을 요구합니다. 다시 말해 그들의 고유성을 무시하고, 그들이 나와 다르다는 점을 용납하지 않는 것입니다. “내식대로만 하나되는 것”은 타인의 자유를 짓밟는 폭력입니다. 그 결과는 비참합니다. 아버지가 폭력적으로 아내와 자녀들을 통제하는 데 성공했다고 하더라도, 그래서 그 가족 전체가 일사분란하게 움직인다고 해서 행복이 오는 것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쟁취한 하나됨은 허무합니다. 왜냐하면 사랑을 나눌 상대방들이 심리적으로나 영적으로 죽어 버렸기 때문입니다. 사랑하고 싶어서 하나되고자 했는데, 결과적으로는 자기 혼자 남게 됩니다.

반대 방향의 유혹도 있습니다. “구별됨”에만 집착하는 것입니다. “하나됨”을 추구하는 사랑은 필연적으로 다른 인격들간의 다툼을 수반합니다. 그것이 싫습니다. 그래서 너와 나는 다르니까 하나됨을 포기하고 그냥 이 자체로만 자유롭게 머물러 있고 싶은 유혹을 느낍니다. “나도 너를 안 건드릴테니, 너도 나를 건드리지 마라!” 이런 식으로 우리는 무관심의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은 사랑의 삶과 정반대의 방향입니다.

삼위일체의 사랑 안에서 우리는 창조되었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들의 탄생의 비밀이고, 우리들의 고향입니다. 또한 우리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향해 나아가도록 불리움을 받았습니다. 삼위일체의 신비는 우리 인생의 목적지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가나안 땅을 그리워하며 광야의 여행길을 걸어갔듯이, 우리는 삼위일체의 사랑을 향해서 길을 가는 순례자들입니다.

아버지, 아버지께서 제 안에 계시고 제가 아버지 안에 있듯이, 그들도 우리 안에 있게 해 주십시오. … 우리가 하나인 것처럼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 저는 그들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는 제 안에 계십니다. 이는 그들이 완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는 것입니다.(요한 17,21-23)




간추린 가톨릭 교회 교리서 (33)

강신모 신부(선교사목국장)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

1) “이미” 그러나 “아직”

예수님의 죽음은 세상의 죄와 악의 세력이 얼마나 강력한지 보여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세상은 예수님이 보여주신 하느님의 사랑을 거부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부활은 세상의 죄악보다 하느님의 사랑이 얼마나 더 강력한 것인지 보여주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로 말미암아 악의 세력은 결정적으로 패배했습니다. 또한 예수님께서 승천하심으로써 성부 하느님의 권능에 참여하시게 되었고, 세상의 모든 만물은 그분께 복종하게 되었습니다. 승천하신 예수님께서는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셔서 교회 안에 현존하십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구원은 현실 세계 안에서 아직 충분히 드러나지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 결정적으로 승리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죄악에 몰두해 있고, 교회는 세상 안에서 어려움을 겪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나라는 이미 당신의 교회 안에 현존하지만, 아직은 “권능과 큰 영광을 떨치며”(루카 21,27) 오시는 왕의 지상 내림으로 완성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파스카로 악의 세력의 뿌리는 정복되었지만, 그리스도의 나라는 그들의 공격을 받고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71항).

왜 예수님의 승리가 이 세상 안에서 완전하게 실현되지 않고 있을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세상의 악을 일거에 치워 버리실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되면 인간의 자유 의지는 무시되고 맙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람들이 하느님의 사랑을 스스로 깨닫고 당신께로 돌아오기 바라시는 마음에서 기다리고 계시는 것입니다.

메시아의 영광스러운 재림은 역사의 어느 순간에든 이루어질 수 있지만, “믿지 않는”(로마 11,20) 일부 이스라엘 사람들의 완고함 때문에, “온 이스라엘”이 예수님을 인정할 때까지 보류되고 있다(가톨릭교회교리서 674항).

2) 지상에서 순례하는 교회

하느님의 구원은 “이미” 이루어졌지만, “아직” 완성되지 않았습니다. 이런 이유로 지상의 교회는 완성을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들의 교회입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부르심에 신앙으로 응답하며 시작되었지만 불완전하고 인간적인 약점을 지니고 있으며, 악의 세력과 투쟁하는 교회입니다. “교회는 세상의 박해와 하느님의 위안을 통하여 그 여정을 계속하여 주께서 오실 때까지 주의 십자가와 죽음을 전하면서 전진한다”(교회헌장 8항).

하느님을 바라보며 이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들이기에 “깨어 기다림”이 필요합니다. 우리들의 상황은 마치도 전쟁터에 나간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와도 같습니다. 남편이 오랫동안 소식이 없습니다. 사람들은 남편이 죽었을 것이라고 말합니다. 더 이상 남편을 기다리지 말고 좋은 사람 만나서 재혼을 하라고 부추깁니다. 기다림 속에서 하루하루 지내는 것이 너무 고통스럽기에 아내의 마음이 흔들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충실한 아내라면 기다림을 포기하지 않습니다. 이처럼 “이미”와 “아직” 사이에 사는 교회는 “기다림의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그런데 기다림이 너무나 고통스럽기 때문에 기다림을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끊임없이 받습니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지 않고 세상 사물에 관심을 기울입니다. 또 예수 그리스도가 빨리 오셨으면 좋겠다는 조급함 때문에 거짓 그리스도를 찾게 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는 충실한 믿음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오심을 기다려야 합니다. 그래서 교회는 매 순간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와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소서”라고 기도합니다. 그리고 매년 대림절을 지내면서 참된 기다림의 삶을 다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유로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재림을 재촉하기 위하여 특히 성찬 전례 중에 “오십시오, 주 예수님!”(묵시 22,20) 하고 기도하는 것이다(가톨릭교회교리서 671항).

3) 순례하는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느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는 교회의 삶이 남편을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과 비슷하다고 말씀드렸는데, 더 깊이 살펴보면 분명한 차이가 있습니다. 아내는 남편을 막연히 기다립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은총 속에서 그분을 기다립니다. 1994년에 노벨경제학상을 수상한 존 내쉬(J. Nash)는 천재였지만 정신분열증 환자였습니다. 내쉬 교수의 가능성(그의 천재성)과 목표(노벨상) 사이에는 현실적 난관(정신분열증)이 도사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에게는 헌신적인 아내가 있었습니다. 남편이 정신분열증이 악화되어 좌절할 때마다 그녀는 남편이 그 고통을 극복할 수 있도록 함께 해 주었습니다(영화 “뷰티풀 마인드”를 한 번 보세요).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여정에 늘 함께 하셨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에집트를 탈출하여 가나안 땅에 정착할 때까지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들이 “이제 다 틀렸다”라고 말하며 기다림을 포기할 때, 그들을 격려하시고 이끌어 주셨습니다. 이처럼 하느님께서는 오늘날 이 세상을 순례하는 우리 교회 안에도 함께 하십니다. 우리는 남편을 막연히 기다리는 아내가 아니라, 계속 남편과 편지를 주고 받으며 기다리는 아내와 같습니다.

4) 산 이와 죽은 이를 심판하러 오심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은 심판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심판이라는 말에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이비 종교들이 심판의 두려움을 강조함으로써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들에게 예수님의 심판은 오히려 기쁜 소식입니다. 순례하는 교회로서 고통스런 기다림을 살고 있는 우리들에게 그분의 재림과 심판은 그토록 고대하던 기다림이 보답을 얻는 순간이기에 그렇습니다.

그런데 아들은 심판하러 오신 것이 아니라 구원하러 오셨으며, 당신 안에 있는 생명을 주려고 오셨다. 이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은총을 거절한 사람은 저마다 이미 자기 자신을 심판하는 것이며, 각자가 한 일에 따라 받을 뿐 아니라, 사랑의 성령을 거부함으로써 스스로 영원한 저주를 자초하게 된다(가톨릭교회교리서 679항).

[2013년 6월 16일 연중 제11주일 의정부주보 5-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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