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노 전 대통령은 박연차 전 태광실업 회장에게서 600만달러를 받은 혐의(포괄적 뇌물)로 지난달 30일 검찰의 소환 조사를 받았다. 검찰은 권양숙 여사를 추가로 소환해 조사한 뒤 다음주께 노 전 대통령의 신병 처리를 결정할 예정이었다.
이날 오후 2시께 노무현 전 대통령이 남긴 유서 전문이 공개됐다. 유서는 모두 13문장(3문단)의 간략한 내용으로, 노 전 대통령이 사용하던 경남 김해시 봉하마을 사저의 컴퓨터에 한글 파일로 저장돼 있었다.
노 전 대통령은 유서에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이 받은 고통이 너무 크다"며 "앞으로 받을 고통도 헤아릴 수가 없다. 여생도 남에게 짐이 될 일밖에 없다"고 썼다. 노 전 대통령은 이어 "건강이 좋지 않아서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는 또 "삶과 죽음이 모두 자연의 한 조각 아니겠는가?"라며 "미안해 하지 마라. 누구도 원망하지 마라"고 덧붙였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화장하라며 "집 가까운 곳에 아주 작은 비석 하나만 남겨라.오래된 생각"이라고 유서를 매듭 지었다.
노 전 대통령 유서의 컴퓨터 파일 제목은 "나로 말미암아 여러 사람의 고통이 너무 크다"였다고 유족 쪽은 전했다. 유서 문서는 컴퓨터가 켜진 상태에서 화면 위에 떠있었다고 경찰 쪽은 전했다.
유서 문서 파일의 최종 저장시간은 오늘 새벽 5시21분으로, 노 전 대통령은 5시45분 사저를 나섰고, 6시40분 봉하산 부엉이바위에서 떨어졌다.
앞서 문제인 전 청와대 비서실장은 이날 오전 언론 브리핑에서 "노 전 대통령은 가족 앞으로 짧은 유서를 남겼다"고 밝혔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장례가 국민장으로 치러진다.
정부는 24일 노 전 대통령 유가족과 국민장 형식에 합의하고, 한승수 국무총리 주재로 열린 임시 국무회의에서 '고 노무현 전 대통령 국민장 계획' 안건을 심의·의결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이를 최종 재가했다.
노 전 대통령 쪽의 천호선 전 청와대 홍보수석은 "내부적으로 여러 의견이 있었지만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갖추는 한편 가족장보다 더 많은 국민이 참여하고 참배할 수 있도록 국민장을 하기로 했다"고 합의 배경을 설명했다.
국민장 기간과 영결식 및 안장식 장소 등은 유족과 추가 협의를 거쳐 최종 확정된다. 장례기간으로는 서거일인 23일부터 29일까지 7일장을 치르는 방안이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다. 한명숙 전 총리는 이날, 정부가 서울 신문로 서울역사박물관에 분향소를 설치하기로 한 데 대해 시청앞 서울광장으로 장소를 바꿔달라고 정부에 요청했다고 민주당 김유정 대변인이 전했다.
이달곤 행정안전부 장관은 임시 국무회의 브리핑을 통해 "국민 모두가 함께 애도하고 추모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 분향소를 설치한다"며 "영결식 당일에는 국기를 조기로 게양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이 대통령은 봉하마을에 차려진 노무현 전 대통령 분향소를 직접 방문해 조문하기로 했다. 청와대 핵심 관계자는 "장례기간에 조문을 할지, 영결식에 참석하는 방안이 될지는 좀더 논의해서 결정할 것"이라고 말했다.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를 추모하기 위해 시민들이 만든 서울 덕수궁 대한문 앞 '시민 분향소'는 25일 아침에도 추모객의 방문이 끊이질 않았다. 반면, 정부는 이날 오전부터 서울역 광장과 서울역사박물관 앞 등에 공식 분향소를 열어놨다.
임기 내내 보수신문과 ‘긴장’…되돌아본 ‘노무현의 길’
집권말기 모든 언론 대립각 권력누수 부채질
노무현 전 대통령을 다른 정치인과 구별 짓는 가장 도드라진 특징은 언론과의 관계설정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정치인들이 밟아온 언론과의 '안전한 밀월관계'를 거부하고 정치적 자살행위가 될 수도 있는 '위험한 긴장관계'를 택했다. 특히 그가 정치 역정 내내 보여준 보수언론과의 치열한 공방은 그를 가장 '노무현답게' 만든 동력인 동시에, 그의 정치 행보에 걸림돌로 작용하기도 했다.
노 전 대통령과 < 조선일보 > 와의 악연은 정치 입문시기부터 줄곧 계속됐다. 그는 '요트를 소유한 자산가'로 자신을 묘사한 1991년 10월 < 주간조선 > 기사를 왜곡보도라 반발하며 법정 소송 끝에 재판에서 승소했다. 하지만 이 기사는 이듬해 3월 국회의원 선거와 1995년 지방선거에서 경쟁후보들의 공격 자료로 활용되며 그에게 패배의 고배를 안겼다. 2001년 11월 조선일보의 대선주자 릴레이 인터뷰를 거부한 그는 불매운동까지 선언하며 조선에 맞서는 '대담한' 정치행보를 이어갔다.
< 동아일보 > 와의 관계도 순탄치 못했다. 2002년 2월 인천지역 경선 합동연설에서 "동아일보가 내게 '언론사 소유 지분 제한 소신을 포기하라'고 강요했지만 나는 결코 굽히지 않았다"고 말해 동아와 대립했다. 보수언론의 집중포화를 맞으면서도 김대중 정부 시절 언론사 세무조사를 가장 적극적으로 지지한 정치인도 노 전 대통령이었다.
노 전 대통령과 보수언론과의 싸움은 역설적으로 보수언론에 염증을 느끼던 지지세력을 결집시키는 결과를 낳았고,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는 데 중요한 정치적 자산이 됐다. 김유진 민주언론시민연합 사무처장은 "노 전 대통령의 당선은 막강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보수언론과 타협하지 않고 대통령이 된 첫 번째 사례란 점에서 의의가 크지만, 그 때문에 혹독한 대가를 치렀다"고 평가했다.
당선 후 노 전 대통령은 법·제도 개선을 통해 보수언론 중심의 공고한 언론구도에 균열을 시도했다. 2005년 1월 신문법을 국회에서 통과시켜 신문시장의 불공정거래 관행을 제어하는 기틀을 놓았고, 신문유통원과 신문발전기금·지역신문발전기금을 만들어 작은 언론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만들기도 했다.
그러나 집권 후반기로 가면서 정책 혼선 등과 맞물려 그에게는 '언론개혁의 전도사'보다는 '언론과 무차별적으로 싸우는 대통령'이라는 이미지가 덧씌어졌다. 2007년 '취재지원시스템 선진화 방안'은 애초 의도와 달리 '참여정부 대 보수언론'의 전선을 모든 언론으로 확대하는 결과를 낳았다. 2004년 홍석현 < 중앙일보 > 회장을 주미대사로 임명했을 땐 원칙을 저버렸다는 비판을 받았다.
하종원 선문대 교수는 "노 전 대통령은 권력화된 언론은 견제하고 약한 언론을 키우며 새 언론질서를 구축하고자 했으나, '기자실 통폐합'에서처럼 기술적인 문제에서 신중하지 못해 '소탐대실'하고 말았다"고 지적했다.
서거 직후 나온 '노 전 대통령 언론관'을 평가하는 목소리는 극단적으로 갈렸다. 민언련은 서거 당일인 23일 성명을 내어 "수구족벌신문과 싸운 최초의 대통령"이라 표현하며 그를 애도했다. 반면 < 조선일보 > 24일치 사설은 "노 전 대통령 시절부터 홍위병에 가까운 세력들이 시민단체를 가장해 대통령에 비판적인 목소리를 내는 언론에 전방위 공격을 퍼부었다"며 참여정부 시절을 가시 돋친 언어로 회고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