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

2021. 6. 2. 오전 5:40: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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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극히 거룩하신 삼위일체 대축일 (청소년 주일)


모호해서 진실인

삼위일체 신비를 이해하기 위해 애쓰던 아우구스티노 성인에게 한 아이가 나타나,
삼위일체의 신비를 머리로 이해하려는 것은 마치 모든 바닷물을 해변의 모래
웅덩이에 담으려 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라고 말했다는 일화가 있습니다.
이처럼 삼위일체의 신비를 논리적으로 개념화하려는 것은 불가능한,
혹은 무의미한 일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모호한 이야기를 계속하는 이유는 결국 우리, 인류의 체험
때문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조금씩 조금씩 신적 체험을 이어가던 고대인들이 그 파편적인 경험들을 나름대로
맞추어 가다가 무수한 신들이 등장하는 신화가 만들어졌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신들의 세계를 뚫고 나온 예수 그리스도라는 계시를 통해, 우리는 그것이
'여러 신'에 대한 경험이 아니라 하나의 신으로부터 나오는 체험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여러 신이라 느껴졌었지만, 사실 한 분이신 하느님이라는 모호한 경험을 최대한
이론적으로 정리한 것이 삼위일체 신학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이를 통해 우리가 해야할 것은 하느님을 정의 내리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경험이 엉뚱한 방향으로 흘러갈 것을 경계하는 것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신비는 역설적으로 하느님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 우리가 가진 한계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여기서 말하는 '한계'란, 가능과 불가능 사이의 경계가 아닌, 처음부터 도저히
가능하지 않은 우리가 생긴 모습이나 조건입니다.
"내가 저 산 위의 나무가 어떤 나무인지는 보이는데, 그 가지에 앉은 새가
어떤 새인지는 안 보여" 하는 식이 아니라
 "우리는 앞과 뒤와 위에서 동시에 사물을 바라볼 수없어."
혹은 "우리는 어제의 남산과 지금의 남산과 내일의 남산을 동시에 오를 수 없어."
하는 식이지요.
그 한계를 자각하며 하느님 앞에 섰을 때 비로소 우리는, 하느님을 소유하거나
이용하는 것을 신앙이라 호도하지 않고, 나를 바라보는 하느님과 하느님을 바라보는
나 사이에 참 신앙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오늘 우리가 특별히 기억하는 청소년들도 그런 맥락 속에서 함께 합니다.
때로는 어른이, 때로는 어린이가, 때로는 질풍노도의 역동이 드러나는 모호함을
머릿속에서 정의 내리고 규정하려 하면 할수록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진실은
멀어져가고 실체는 길을 잃습니다.
진심으로 바라보고 만나고 더불어 함께 걸어갈 때 모든 불확실함들이 제 위치를
찾고, 가능성만 있던 것들이 실현되기 시작합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모호해서 진실입니다.


-이승주 대건안드레아 신부 | 서울대교구 청소년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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